임용진 스포츠칼럼

제목스포츠인물열전 28 - 첫 에베레스트 등정자 고상돈 (스포츠코리아, 2016년 2월호)2018-04-12 19:3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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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인물열전 28 - 첫 에베레스트 등정자 고상돈 (스포츠코리아, 2016년 2월호)

 

  요즘 영화 ‘히말라야’(감독 이석훈)가 화제다. 지난 2004년 초모랑마(=에베레스트) 등정시 조난 실종된 박무택, 장민, 백준호의 시신을 되찾기 위해 2005년 다시 산을 오르는 ‘초모랑마 휴먼원정대’ 실화를 그렸다. 실제 주인공인 산악인 엄홍길과 그들 이야기가 보는 이 맘을 적셔 영화는 연일 ‘최단기’, ‘최다’ 등 기록을 경신 중이다. 

  최근 한국등산의 약진은 눈부시다. 히말라야 8000m 이상급 고봉 ‘14좌’를 완등한 이가 엄홍길, 박영석, 한왕룡, 김재수, 김창호, 오은선 등 여섯이나 된다. 이중 오은선은 여성으로선 세계 처음이다. 고산에 남이 안 간 길을 개발한 몇몇 ‘코리안 루트’도 성공시켜 고질적인 ‘등로(登路) 컴프렉스’에서도 벗어나고 있다. 수 백 명 씩 포터와 셀파가 따라붙는 캐라반 식을 지양한 알파인 스타일, 단독, 무산소, 동계 등반까지 퀄리티가 높아졌고 등반 목적 자체를 쓰레기 처치, 시신 수습에 두는 여유가 생겼다. 하지만 이런 약진의 계기, 첫 영웅은 한 사람이다. 바로 세계 최고봉인 에베레스트를 한국등반 사상 처음 등정한 고상돈(1948~1979)이다.   

 

● “짧고 굵게 살겠다”
  1977년 9월15일 12시50분(한국시간 오후 4시30분). 8,848m 높이 에베레스트 꼭대기에서 고상돈이 “여기는 정상, 여기는 정상”이라고 무전기를 통해 등정 성공을 알리자 전국이 환호했다. 대통령 박정희와 유신 테크노크라트들은 이 소식에서 ‘하면 된다’ 실례를 봤고 대한산악연맹·한국산악회 등 단체와 산악인들은 수십년 간 수많은 실패로 응어리졌던 고산(高山) 한풀이를 했다. 동네 뒷산만 오르고 에베레스트를 먼 천국처럼 여겼던 보통 사람들은 그 믿기지 않는 승천에 환호했다. 국산 자동차 포니가 첫 선 보이고 양정모가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광복 후 첫 금메달을 딴(이상 1976년) 직후였으며 고상돈이 등정한 9월은 미국 의회로비스트 박동선 게이트로 워싱턴과 서울 정가가 벌집 쑤신 듯 뒤숭숭할 때였다. 그해 연말 한국은 수출 1백억달러를 달성해 태극기를 매단 고상돈 피켈처럼 ‘무역입국’을 들어올렸다.

  1953년 5월29일 에드먼드 힐러리(뉴질랜드)와 텐징 노르가이(네팔) 초등 이래 한국은 고상돈 등정으로 세계에서 8번째로 에베레스트 정상을 밟은 나라가 됐다. 고상돈과 같이 오른 셀파 펨바 노르부는 각각 사상 56, 57번째 에베레스트 등정자로 기록됐다.  

  왜 산에 오르는가는 사실 영원한 질문행위다. 왜 먹는가, 왜 믿는가 등처럼. 이에 대한 수많은 정답 가운데 하나는 이렇다. “등산은 스포츠요 정열이며 탈출이고 때로는 하나의 종교다”. 1954년 마칼루를 초등한 프랑스 등반대장 장 프랑코의 말이다. 고상돈은 이 여러 면모를 일신에 갖췄다. 그는 보기 드문 걸출한 스포츠 맨, 정열의 사나이, 구도적 산악인으로 서른 두 해 일생을 불살랐다. 1965년 수류탄에 몸을 던져 부하들을 구하고 스물 아홉에 죽은 영웅 강재구 소령은 육사 재학시 “짧고 굵게 살자”를 책상 앞에 써붙였다고 한다. 당시 그런 좌우명이 유행했던 것인지 고상돈도 이미 열 네 살 때(1962년) 그랬다. 양경완은 고상돈의 사촌형이다. 그가 당시 청주중학교 3학년에 재학중이던 고상돈에게 물었다. “네 장래 희망이 뭐냐?”. “짧고 굵게 살고 싶습니다”.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됐냐?”. “멋있게 살다가 가고 싶습니다”. 고상돈은 에베레스트 등정 20개월 뒤 북미 최고봉인 알래스카 매킨리(6,194m) 등정을 성공시킨 후 하산길에 사망한다. 위대한 산악인 우에무라 나오미가 실종된 바로 그 매킨리다. 같이 오른 후배 이일교는 사망, 박훈규는 중상을 입어 왼속 일부를 절단한다. 1979년 5월29일. 이때 고상돈의 나이 불과 31년 6개월이었다.

 

● 승부, 생과 사
  히말라야 8,000m 이상 고봉 14좌를 사상 처음으로 완등한 ‘전설’ 라인홀트 메스너(72·이탈리아)는 지난 1988년 제15회 캘거리동계올림픽 조직위원회가 수여한 공로 메달을 거부하며 이렇게 말했다. “등반에선 싸우는 상대도 없고, 심판도 없다. 단지 나 자신과의 싸움이 있을 뿐이다.”

  하지만 이는 절대고수 수준이고 실제 등반의 상식적 특징은 모든 면에서 스포츠다. 상대가 자연이고 심판이 자신이란 점만 특별할 뿐 체력, 성패, 피땀 어린 노력, 인내, 환호, 슬픔, 휴먼 드라마 등을 모조리 압축한 스포츠 결정판이다. 바둑도 “목숨 걸고 둔다”(조치훈)지만 실제 경기 결과를 뜻하진 않는다.  자동차 경주도 위험하지만 등산처럼 수많은 산악인이 꽃잎같이 목숨을 뿌리진 않는다. 대체 어떤 경기가 등산처럼 목숨을 거는가.

  산악인에겐 모든 산이 경기장이다. 평생 수많은 등산, 수많은 경기를 치르지만 고상돈에게 가장 큰 경기는 두 차례였다. 하나는 1977년 9월 히말라야 에베레스트, 다른 하나는 1979년 5월 알래스카 매킨리. 히말라야에선 이겼고 알래스카에선 졌다. 이긴 곳에서 그는 살았고 진 곳에선 스러졌다.  


● 에베레스트, 1977년 9월 15일

  고상돈을 세계 최고봉에 올린 원정대 정식 이름은 ‘1977 대한산악연맹-한국일보 에베레스트 원정대’이다. 당시 한국일보 체육부 차장으로 베이스 캠프까지 동행취재한 원로 체육언론인 이태영에 따르면 고상돈은 ‘준비된 영웅’이다.

 

  “고상돈 씨는 자기관리가 철저해요. 식습관, 말투, 심지어 걸음걸이까지 모든 게 치밀하고 오버 페이스가 없어요. 그 고소에서도 항상 뭔가 가지고 운동하고, 뛰었어요. 스마트하고, 말보다 행동이 앞서는 스타일입니다. 당시 한국 원정대는 최강 정예멤버고  대장 김용도 씨도 철학과 출신답게 매사 치밀했어요. 혹자는 1차 공격조가 실패해 운좋게 고상돈 팀에게 행운이 왔다, 누구라도 고상돈 만큼 했을거다 하지만, 그건 아니지요. 고상돈은 이미 자격을 갖춘 사람이었어요.”(이태영 전화인터뷰)
 

  원정은 군대를 방불케 했다. 대원16명, 셀파 65명, 포터 770명, 야크 93마리에 3m짜리 사다리 수십개를 비롯한 장비 등. 비용은 당시 돈 1억3천만원 거금을 들였고 사세 전성기던 한국일보 지원을 받았으니 당시 한국일보 사주 장기영 말마따나 ‘국가적 사업’이었다. 원정대 선발대가 1977년 6월12일, 본대는 7월2일 출국해 8월9일 쿰부 빙하를 횡단해 5,400m에 베이스캠프를 설치한다. 이어 캠프1(6,100m), 캠프2(6,450m), 캠프3(7,500m), 캠프4(7,986m)를 설치한다. 마침내 9월5일 원정을 시작한 지 약 세 달만에 캠프4에서 김영도 대장은 ‘국가적 사업’을 성공시키기 위한 마지막 정상 공격팀을 발표한다. 그는 고심 끝에 더듬더듬 그러나 확연히 말했다.

 

  “그간 모두 고생했다. 누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각자 자기를 위해서 고생하며 여기까지 왔다. 우린 누구나 세계 최고봉에 오르고 싶다. 그러나 그렇게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이제 남은 일은 우리가 여기가지 온 뜻을 끝내 이루는 일인데 그걸 위해 정한 것이니 모두 이해하고 따라주기 바란다. 1차 공격조는 9월9일 박상열과 셀파 알 푸르바, 2차 공격조는 1차 결과와 날씨를 봐서 고상돈과 한정수 대원으로 정했다”(고상돈기념사업회, ‘정상의 사나이 고상돈’에서)

 

  눈물을 닦는 대원도 있었다. 대장도 목이 멨으나 그들이 왜 우는가 묻지 않았다. 고상돈은 이 발표를 대원 맨 앞에서 두 손 앞에 모은 채 부동자세로 들었다. 고상돈보다 네 살 연장인 박상열은 등반 부대장이자 자타가 공인하는 최강 클라이머다. 남들 해발 3,500m부터 느끼기 시작하는 고소증을 5,500m에서도 태연히 견디는 체질이었다. 전형적인 경상도 사나이로 고집 세고 정력적 돌진형, 격식을 모르는 자유인이었다. 하지만 그 강한 체질과 자신감이 화근이었던지 박상열 조는 실패했다. 9월10일 8,500m 고지 캠프5까지 전진했으나 산소를 마시지 않고 잔 이튿날 공격에서 그들은 기진맥진했다. 정상을 불과 80m 앞 둔 ‘힐러리 스탭’에서 산소부족, 의식불명에 빠져 12일 돌아왔다. 죽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정 많은 고상돈은 ‘상열이 형!’을 부르며 울다 냉철한 대장 김영도에게 “사람 죽은 줄 알았다”고 핀잔을 들었다.

  고상돈도 고소엔 자신 있는 체질이다. 5,000m에서도 산소통 없이 견뎠고 남들 운신조차 힘든 곳에서 매일 운동했다.

 

  “나는 페리체(4,200m)에서도 적당한 돌을 골라 아령에 대신 했고, 남보다 일찍 일어나 해발 4,500m 지점까지 러닝을 했다. 처음엔 5분도 견디기 어려웠으나, 나중엔 20분까지 뛸 수 있었다 … 뜀박질하기 마땅치 않을 땐 제자리에서 뜀뛰기를 했다. 고소 캠프에서는 텐트 안에서 팔굽혀펴기 운동을 했다. 산소 부족으로 가만히 앉아있어도 숨이 가쁘고 가슴이 헐떡거렸지만 운동은 꾸준히 계속했다”(고상돈, ‘에베레스트의 사나이’, 조선일보 1977년10월10일) 

 

  박상열이 황소처럼 밀고나간다면 고상돈은 두뇌파다. 타고난 강체에 항상 컨디션을 최상으로 대기시키는 절제력, 깔끔함을 갖췄다. 등정 확률을 높이기 위해 김영도 대장은 공격 파트너를 평소 고상돈과 손발이 잘 맞았던 셀파 펨바 노르부로 교체했다. 12일 전진기지(ABC)인 캠프2를 떠난 그들은 13일 캠프3을 거쳐 14일 캠프5(8,500)까지 진출했다. 마침내 운명의 15일. 새벽 5시30분에 출발해 1분에 2L씩 산소를 호흡하며 4시간만에 남봉(8,750m)에 도달했다. 여기서부터 마지막 시련이다. 칼날처럼 좁고 비죽비죽한 나이프 릿지(=칼날능선), 직벽에 가까운 힐러리 스텝은 한국 등반이 처음 경험하는 공포다. 수많은 등반대가 여기서 좌절했다. 
 

  “되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굴뚝 같았다. 앞장 선 펨바 노르부의 눈빛도 거의 애원하듯 되돌아갈 것을 호소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올라가야 했다. 나는 올라가자는 손짓과 함께 이때부터 앞장서기 시작했다. 내게 힘을 주소서... 나는 간절히 기도했다… 그때 어디선가 들려오는 소리가 있었다. ‘사나이가 그만한 의지력도 없어서야 되겠느냐.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그것은 분명 돌아가신 아버지 목소리였다”(조선일보, 위 날짜)

 

  나이프 릿지 빙벽이 칼날같아 그들은 스텝도 만들지 못하고 팔로 커니스(=눈처마)를 힘껏 껴안은 채 한발 한발 전진했다. 강풍이 사람을 날릴 듯 세찼다. 크러스트(=눈이 얼어붙은 상태) 설층이 갑자기 꺼져 피켈을 꽂기도 서너번. 그때마다 눈사태가 능선 아래로 우레처럼 쏟아져 내려갔다. 불과 8m 힐러리 스텝 직벽을 1시간에 걸쳐, 남봉부터 정상까지 100m를 3시간여에 걸쳐 그들은 마침내 정상에 올랐다. 그곳에 한 시간 머무르며 고상돈은 태극기를 꽂고, 동계훈련 중 설악산 희생된 세 동지(최수남, 송준종, 전재운)의 사진을 묻었다. 1972년 마나슬루(8,163)에서 15명을 눈사태로 한꺼번에 잃는 등 한국등산이 수 십 년간 치른 수많은 희생과 비원도 거기서 깨끗이 묻혔다. 에베레스트 정상은 고작 한 평 너비. 그 지붕이 지구 꼭대기를 덮고 있었다.

 

● 매킨리, 1979년 5월 29일

  “그들은 언제나 정상에 서면 그 즉시 다음에 찾아 나설 지평선을 찾는다”(크리스 보닝턴).

  고상돈도 그랬을 것이다. 대통령부터 촌로까지 손을 잡자는 바람에 귀국 직후부터 영일 없었으나 고상돈은 이미 에베레스트에서 하산하며 다음 목표를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당시 한국일보 사진부장으로 동행 취재했던 김운영의 증언에 따르면 매킨리 꿈은 에베레스트에서 자라고 있었다.

 

  “(1977년 당시) 캐라반 도중에 에베레스트 등정이 성공하면 다음은 북미 최고봉 매킨리를 가보도록 하자는 말을 몇 대원이 주고받은 일이 있었는데 이것이 어떻게 발설이 되었는지 … 김영도 대장이 매킨리 등반 이야기는 무슨 소리냐고 물어보아 화제가 된 일이 있었다”(김운영, ‘매킨리의 추억’. “한라산” 통권 10호, 1984년 제주산악회 창립 20주년 특집호) 


  당시 환영 열기는 상상 이상이었다. 1977년 10월6일 귀국 직후 국립묘지 참배 뒤 카퍼레이드, 청와대 방문, 미8군사령관 초청행사, 충북과 제주시 환영식, 모교 방문 등 짜인 일정 때문에 제주도 부친 묘소를 10월20일 새벽에사 잠시 짬을 내 찾을 정도였다. 11월1일 서울 명동 미도파백화점서 열린 등정 기념 사진전은 17일만에 70만명이 방문, 기한을 연장했으며 대구전시, 제주전시, 미주전시(LA, 샌프란시프코, 댈라스, 워싱턴DC)도 마찬가지였다. 그야말로 인산인해. 그는 그해 12월말 “지난 3개월간 수 만 명에게 사인을 했다. 사람에 시달리다보면 산 오르는 것보다 더 힘들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이같은 와중에서 1979년초부터 매킨리 원정이 본격 추진된다. 고상돈은 3월 대학후배 이일교와 매킨리 현지정찰 직후 대원(고상돈 대장, 박훈규 부대장, 이일교, 김운영 대원)을 선발해 5월4일 현지로 출발한다. 2년 전 에베레스트 등정이 6년여 준비기간 끝에 이뤄졌음을 감안하면 준비부터 등정까지 불과 5개월이 걸린 초고속 진행이었다. 이어 5월29일 저녁 7시15분 그는 등정 성공을 무전기로 전한다. “여기는 정상이다. 바람이 너무 세고 추워서 말이 잘 안 나온다. 사진 찍고 하산하겠다. 지원해준 여러분께 감사한다” 하지만 그게 마지막 육성이었다.  

  한 자일로 서로를 연결한 안자일렌 상태로 하산 중이던 고상돈, 박훈규, 이일교는 정상 바로 아래부터 800m 이상 굴러 떨어져 해발 5,000m 부근 설벽에서 발견된다. 알래스카의 5월은 밤에도 훤한 백야다. 베이스 캠프에서 망원경으로 정상을 관찰하다 이들의 추락을 발견한 매킨리 직업 가이드 다이언 게이는 “3개의 점이 일직선을 그으며 800m 빙벽 아래로 떨어졌다. 순간 바위인지, 배낭인지 의심했다. 설마 사람은 아니려니 생각했다”(한국일보, 1979년6월2일)고 말했다. 현지 산악인들이 구조차 자정께 현지 도착했을 때 그들이 입은 옷은 갈가리 찢어졌고 우모복이 폭발해 오리털이 바깥으로 쏟아져 나온 상태였다. 배낭, 아이젠 등 장비일체도 추락과정서 사라졌고 고대장은 이미 절명, 이일교 대원은 구호조치 중 사망했다. 박훈규만 중상을 입고 살아나 귀국 후 지금까지 고상돈기념사업을 벌이고 있다. 제주 사람인 그는 “천 길 낭떠러지에서 고향 후배 하나만 살려 보낸 고인의 뜻이 뭔지” 자주 묻는다.

 
● “보다 깊게, 보다 넓게 살고 싶다”

  고상돈 등의 유해는 6월2일 철제관에 실려 국내 운구됐고 이틀 뒤인 4일 범산악인장으로 치러진다. 돌다리도 두드리던 신중한 고상돈이 매킨리에서 왜 그리 허망하게 떨어졌는지, 당일 강풍에도 불구하고 등정을 서둘렀는지 등에 관해선 아직도 추측이 많다. 한 산악인은 매킨리 비극에 이렇게 유감을 표시했다.

 

  “첫째, 다른 한국원정대를 의식한 무리한 속공 정상공략이다. … 둘째, 전국에서 뽑힌 대원으로 치밀한 계획을 세웠던 에베레스트 원정대와 달리 이번엔 고씨가 아는 동지 6명으로 급조된 팀이었다. 셋째, 초행치고는 가장 난코스인 ‘카힐트나 웨스턴 립’ 코스를 택했다는 점. 넷째, (혹한 강풍에 대비한) 특수 빙벽훈련을 소홀히 한 점. 다섯째, … 노련한 세르파나 포터가 없었던 점도 문제점이다.”(김창현, ‘고상돈 죽음…몇 가지 회한’. 경향신문, 1979년6월2일)

 

  이태영 역시 “에베레스트에서 경험한 고상돈과는 다른 스타일이다. 왜 매킨리를 서둘렀는지 모르겠다. 대장이 직접 공격에 참가한 것도 뜻밖이다”고 말한다. 77년 에베레스트 원정대장 김영도 역시 “매킨리 원정은 까맣게 몰랐다. 출국 사흘 전에사 고대원이 사무실로 찾아와 내게 알려줬다”고 말했다.

  고상돈은 5촌조카 친구인 규수 이희수와 매킨리 비극 일 년여 전인 1978년4월 결혼했다. 등산을 말리는 가족과 신부에게 그는 “이번이 마지막이다. 경험 없는 후배들을 그냥 보낼 수 없다”고 말하며 매킨리로 떠났다. 고상돈 사망 후 유복녀 고현정(37)이 태어났다. 고상돈은 출국시 이를 몰랐으나 곧 부인 이희수는 이런 사정을 편지했기 때문에 현지에서 알았을 가능성이 높다. 영하 50도, 벼랑에서 매달려 매킨리 강풍에 저항하던 고상돈의 심정이 어땠을까.

 

  “새로운 마음으로 우리 산을 돌고 싶다. 내 인생도 새 출발하고 싶다. 무거운 짐 훌훌 털어버리고 분에 넘친 갈채에서 벗어나 소박한 자연인으로 돌아가고 싶다. 보다 넓게, 보다 깊게 살고 싶다”(고상돈, ‘새해소망’. 제주신문, 1978년1월1일)

 

  고상돈은 신혼초임에도 가정에 충실치 못한 걸 맘 아파했다. 1978년 9월 한 신문과 등정 1주년 기념 인터뷰에서 “지난 1년을 되돌아볼 때 가장 기쁜 일은 결혼을 한 것이다. 그것을 빼놓고는 모든 것을 에베레스트가 빼앗아간 한 해였다. … 결혼 6개월간 신부와 함께 지낸 시간은 15일에 불과하다. 그게 미안할 뿐이다”(고상돈기념사업회 편, ‘정상의 사나이 고상돈’)고 말했다. 그는 ‘분에 넘친 갈채’에서 벗기 위한 마지막 증명으로 매킨리를 생각했던 것일까. 귀국 후 ‘보다 넓고, 보다 깊은’ 삶을 앞당기고자 등정을 서둘렀던 것인가. 오직 고상돈만이 알 것이다.

 

● “저기 올라 가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고상돈은 제주도 제주시 칠성통에서 아버지 고용종과 어머니 박지수 사이 5남매 중 외아들로 1948년12월28일 태어났다. 제주에서 열 살까지 살고 이후엔 고모댁이 있는 청주로 전학 가 거기서 대학 마치고 취직(연초제조창)까지 하며 충청도 사람이 된다. 그가 충북산악회 이사면서 제주산악회 명예회원인 이유가 그렇다.

 


  그는 제주 출신이지만 물을 싫어하는 어머니가 바다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잔등과 팔에 용을 그려놔 어릴 때부터 물과 친하진 못했다고 한다. 대신 초등학교 어느 시절 또래들과 싸움 끝에 정신없이 치고받다 도망간 곳이 한라산 자락이어서 “고개 들고 보니 주위에 아무도 없고 한라산 정상이 보였다. 저기 올라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산은 고상돈 유년에 이미 탈출의 끝이었다.

  고상돈이 산 맛을 본 건 청주 주성초등학교 5학년(1959년·12세) 때 보이스카웃 단원으로 캠핑을 하면서부터다. 청주중, 청주상고에서도 보이스카웃 활동으로 초보산꾼 노릇을 했다. 고교 졸업과 함께 1967년(20세) 은사 이원근의 권유로 충북산악회에 가입, 본격적으로 산을 배운다.

  속리산, 회양산, 조령산 암장이 암벽등반 수련장이고 충북산악회 이사이자 청주대 선배인 김수원, 남기문이 그의 스승이었다. 그들은 교통, 숙식까지 지원하며 훈련시킨다. 1967년 봄 어느날 고상돈은 암벽등반 중 자일에 매달려 담배 피우다 김수원에게 따귀를 맞고 쫓겨 내려간다. “클라이머에겐 자일이 생명인데 담뱃불에 닿아 끊어지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러냐!”.  이 사건 이후 고상돈은 술, 담배를 끊었다.

  고상돈은 천성 못 말리는 깔끔이다. 중고시절 내내 탁구, 태권도(3단)를 즐겼지만 야구는 배운 지 일주일만에 그만 둔다. 포지션이 가끔 공을 만지는 외야수인데다 지급받은 운동복이 지저분했기 때문이다. 청주 주성초등학교에 전학 간 처음에도 한 동안 친구들과 어울리지 않고 외톨이를 자초하는데 이유는 “그들 옷이 깨끗치 않아서”였다. “어머니는 내게 ‘옷을 깔끔하게 입어라. 입은 거지는 얻어 먹어도, 벗은 거지는 굶는다’고 말씀하시곤 했다”(고상돈, ‘에베레스트의 사나이’, 조선일보 1977년10월10일) 

 

  이런 깔끔함은 사실 내면적 성실함, 부단한 자기수련 성향의 표출이다. 그는 원정 단체사진에서도 언제나 남보다 머리 하나 쯤 크고(키 178cm, 몸무게 70kg) 날씬 단정한 차림으로 돋보인다. 하지만 별명은 촌놈. 말 없고 외톨이처럼 보여 서울내기 산꾼들이 그렇게 붙여준 거다. 겸손, 외유내강, 배려는 고상돈의 트레이드 마크다. 다음은 그에 대한 동료 산악인의 평.  


  “1차 히말라야 현지정찰(1975년) 때 아일랜드 봉(6,189m)을 같이 갔는데 그가 나보고 먼저 오르라는 거야. 초등을 내게 양보하겠다는 거지”(김병준)

  “술 담배 멀리하는 건 물론 매일 영양제까지 챙겨먹었다. 체력관리가 외모만큼 깔끔했다”(양학선)

  “수많은 포터 등을 통솔하려고 그가 격파, 돌려차기 등 시범을 보인 적 있다. 짐꾼들 눈빛이 금세 순해졌다. 그러기 전까지 그가 태권도 3단인 걸 아무도 몰랐다”(김영도)

  “고상돈은 키 크고 덩치 있어 금새 눈에 띈다. 말이 없고 보기에 외톨이같더군. 서울 산악대들과 달리 어딘가 시골 촌뜨기 같고” (김명수)   

 

  등로(登路)냐, 등정(登頂)이냐. 어찌 오를 것인가, 어딜 오를 것인가. 산악인이라면 애티튜드(Attitude=자세, 태도)와 얼티튜드(Altitude=고도)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는 게 당연하다. 두 등산문화 사이 우월을 따지는 건 사실 별 의미가 없다. 익으면 다 초극하는 법이니까. 만약 고상돈이 살았더라면 한국 등산계가 그런 절대 경지를 일찍 체험할 수 있었을 것을, 한국의 첫 등산영웅으로 그는 너무 단명했다. 불꽃이 너무 밝고 짧았다. 다음은 스포츠맨 고상돈이 후배들에게 주는 진심어린 충고다. 

 

  “나는 한 사람의 평범한 산 사람이다. 우리 대원 누구나가 그만한 팀워크와 협조가 주어졌다면 능히 해낼 수 있는 일이었다. 다만 내가 남보다 뒤지지 않는 면이 있다면, 끊임없이 훈련에 훈련을 거듭하며 노력했다는 사실 뿐이다. 산악인들이여. 열심히 훈련하고 열심히 훈련하고, 또 열심히 훈련하다. 그밖에 달리 방법이 없다.”(‘산. 77인의 에세이’, 1977, 평화출판사)

 

  고상돈 등정을 기념해 고향인 한라산 중턱 1,100m 고지에 고상돈 기념비와 묘역이 조성돼있다. 대한산악연맹은 그의 등정일인 9월15일을 산악일의 날로 정하고 매년 ‘고상돈 산악인상’을 수상하고 있다. 최근 제주도에선 고상돈기념관 설립논의가 구체화되고 있다. 고상돈이 사망한 5월29일은 공교롭게 그보다 26년 전 힐러리가 에베레스트를 세계 초등한 날이기도 하다. 산은 그렇게 무심하다. /임용진(전 중앙일보 체육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