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용진 스포츠칼럼

제목스포츠인물열전 < 20 > - 당구천재 이상천(‘스포츠코리아’2015년 3월호)2018-04-12 19:45:42
작성자

스포츠인물열전 < 20 > - 당구천재 이상천(‘스포츠코리아’2015년 3월호)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할까. 사랑이 얼마나 위대해질 수 있다는 것을”
  영화 ‘러브 스토리’는 이렇게 시작한다. 이상천 스토리도 그렇게 시작해야겠다.
  당구천재 이상천(李商天·1954~2004). 그는 당구를 사랑했고 당구 때문에 짧은 오십세 생을 마쳤다. 지난 2004년 10월 18일 오후 9시, 일산 국립암센터 10층 어두컴컴한 일인 중환자실에서 그는 내 손목을 꽉 쥐고 띄엄띄엄 말했다. “내가 죽을 수 없어. 저놈들 안쓰러워서. 나 안 죽어. 이거 꼭 약속해. 대한체육회에 정가맹 단체로 가입시켜, 당신이. 약속해. 할 거야 안 할거야.”병자의 악력은 생각보다 강했다. 그 왼손으로 불과 얼마 전까지도 큐 한 자루 들고 천하를 종횡했다. “이회장, 걱정 마시요. 꼭 가입시킬테니 빨리 병 나으세요.”“알았어.” 힘에 부친 듯 나를 잡은 그의 속박이 풀렸다. 부인 권경숙(59)이 나직히 흐느끼듯 안 흐느끼듯 남편을 물끄러미 다독이고 있었다. 그가 죽었단 소리는 다음날 들었다. 그렇게 폭풍같이 살다, 그리도 허무하게 스러졌다. 불세출의 당구천재로 수 십 년 간 지구촌을 풍미한 이상천은 대한당구연맹 제4대 회장에 취임한 지 불과 4개월 만에 암세포가 전신에 퍼져 손도 쓰지 못하고 타계했다. 그가 돌아가기 전날까지도 못 잊던 ‘저놈들’, 당구 후배들이 장례식장에서 오열했다.


● 한국당구 100년 - ‘작대기’에서 경기인으로
  이상천 타계 후 11년이 지났다. 그간 당구계는 실로 상전벽해가 됐다. 이전까지 임의단체와 문체부 산하 법인을 전전하던 대한당구연맹이 대한체육회 산하 정가맹 단체가 됐고 당구는 전국체육대회 정식 종목이 됐다. 한때 당구장 출입만 해도 정학 등 징계를 하던 중·고등학교에 당구부 창단 붐이 일었다. 이상천이 그들 때문에 안쓰러워 눈에 밟혀 죽지도 못하겠다던 후배들은 국민 여동생, 스포츠 스타로 각광 받는다. 최성원(39)이 지난해 11월  제67회세계당구선수권 결승에서 토브욘 블롬달(54·스웨덴)을 제압하고 국내 경기인으로는 처음 우승하는 등 수 많은 ‘이상천 키즈’가 폭풍 성장했다. 말쑥한 넥타이 차림의 어린 꿈나무들이 당구 쳐서 대학에 진학하고 당구전문 유선TV에서 하루 종일 당구가 방영된다. 이상천이 이런 걸 봤으면 뭐라 했을까. 

  당구는 지나치게 오래 뒷골목을 맴돌았다. 애초 구한말 황실 스포츠로 시작됐지만 한국전쟁 등을 거치면서 반세기 이상 도박과 폭력 이미지에 얼룩졌다. 그래서 당구를 아무리 잘 쳐도 선수, 경기인 소리는 못 들었다. 잘해야 ‘작대기’였다. 당구 큐를 의미하는 이 자조적 은어엔 수 십 년 간 당구인들을 옥죄던 콤플렉스가 진하게 묻어있다. 그 중 가장 큰 건 플레이어 콤플렉스다. 당구계 최고수라도 결코 스포츠 선수로 공인받지 못했다. 어떤 이가 도 닦듯 하루 몇 시간씩 혼자 연습해 고수 반열에 오른다 할지라도 그에겐 끝내 음지의 내기 당구꾼, 허슬러란 딱지가 따라 다녔다. 학력 콤플렉스, 주변부 콤플렉스도 크다. 당구를 잘 칠수록 정상적인 학생, 건실한 사회인과는 거리가 멀었다. 1960년대엔 4구 당구지수가 300점이 넘으면 ‘집 한 채 바쳤다’고 했다. 사회인식이 그랬을 뿐 아니라 당구인 자신이 그렇게 달리고 있었다. 낮엔 노름 당구, 밤엔 포커, 주말엔 경마. 자유롭지만 방탕한 이‘종합 타짜’들은 내기에 청춘을 걸었다. 이상천도 처음엔 그렇게 컸다.


● 이상천, ‘꼬마 무림(武林)’에 들다.   
  1960, 70년대 한국당구는 춘추전국이다. 전국에 수많은 ‘꼬마’들이 각축했으며 테이블은 아직 4구용 국내식 중대(1,224mm×2,448mm) 일색이었지만 점차 3구용 국제식 대대(1,422mm×2,844mm)의 중요성이 인식되고 있었다. “‘꼬마’란 키가 작은 게 아니라, 나이가 어려 그렇게 불렀어. 당구는 어릴 때 잘 치잖아?”(박병문). 큐는 대개 질풍노도의 사춘기에 처음 잡는다. 대부분 다시 교실로 돌아와 연필을 잡지만 게중 일부는 훈육교사의 눈을 피해 호크를 풀어헤치고 큐질에 정진해 골목을 장악한다. 골목 다음엔 동네로, 동네 다음 시 단위로 영역확장한 당구계의 앙팡 테리블이 ‘꼬마’다. 그들 중 대표가 ‘이리 꼬마’(=전광웅), ‘신촌 꼬마’(=신항균), ‘아현동 꼬마’, ‘중대 꼬마’(=김성웅) 등이다. 이들은 4구가 아니라 3구, 즉 3쿠션을 쳤으며 그중에서도 득점 할 때마다 돈이 오가는 이른바‘직석’내기를 했다. 4구 300점까지가 수련기라면, 3쿠션 ‘직석’으로 업그레이드 되는 그 이후는 살벌한 진검 승부다.
  이상천은 1974년(21세) 처음 큐를 잡아 불과 3개월만에 300점을 쳤다. 이어 사실상 지수 계산이 무의미한 2000점도 쉽사리 달성하며 입문 3~4년만에 국내 3쿠션 강자로 군림한다. 당시 선수들이 대개 그렇듯 이상천에게도 뚜렷한 스승이 없다. 실전 내기당구에서 얻어 터지고 잃으면서 고수에게 한 수 한 수 얻어 갔다. 이상천은 초기에 인천에서 당구장을 경영하던 박병문(75)에게 자주 들렀다. 박병문은 한국 프로당구 ‘1호’며 당대 3쿠션 최고수 중 한 명이다. 1980년대 세계 프로당구 기구인 BWA(당구월드컵협회) 본선 시드를 받은 첫 한국인으로 1985년 BWA의 벨기에 스파오픈 16강에 오르기도 했다. 이는 당시까지 한국 선수가 국제대회서 거둔 최고성적이다. 이상천은 자신보다 13살 연장이며 실력으로도 몇 수 위인 박병문과 1대1로 붙어 넉다운 되길 반복하며 금세 동급으로 올라선다.


● ‘서울대 꼬마’→‘칙픽폭폭’→ ‘한·일전’ 국가대표
  초기 이상천의 별명은 ‘서울대 꼬마’다. 서울대학교 교련복 차림으로 당구장에 출입했기 때문이다. 당구인들의 ‘가방끈’이 길지 않았을 때 이 ‘서울대 꼬마’는 휘황찬란한 교련복과 뛰어난 공 감각으로 금세 장안의 기린아로 떠오른다. 그의 또 다른 별명은 ‘칙칙폭폭’이다. 3쿠션을 7개, 8개 씩 교대로 쳐 상대를 공황에 빠뜨리곤 했다. 일찌감치 전국의 주요 ‘꼬마’군을 접수한 그는 1970년 후반 박병문, 정상철과 나란히 한국당구 ‘3강’을 구축한다. 이들은 1978년 열린 한일친선당구대회 파견 선발전에서도 ‘톱 3’를 이뤄 그들끼리 최종 리그를 갖고 거기서 1위한 이상천이  다음해 일본서 열린 제1회 한일친선당구대회 한국대표로 출전한다. 이것이 스포츠 당구선수로서 이상천이 양지로 나온 첫 기록이다. 이후 그는 1987년까지 3쿠션에서 한국당구선수권을 10연패한다.
  이상천 스타일은 당구 무림에서 정파(正派)보다 사파(邪派)에 가깝다. 지구촌 당구 황제이자 후일 이상천을 자식처럼 아낀 레이몽 크루망(79·프랑스)은 정파 대표 격이다. 공격과 수비 균형이 맞고 당구 시스템을 중시한다. 그는 모든 당구 배치에 최상의 ‘초식’(=시스템)과 최상의 타격(=스트로크)이 있다고 믿는 절대주의자다. 반면 이상천에게 당구는 ‘초식’이 아닌 ‘득점’이다. 모양보다 맞히는 게 최선이다. 방어보다 공격을 중시하고 길이 없으면 만들어 친다. 때로 쉬운 공을 어렵게, 어려운 공을 쉽사리 쳐버리기 때문에 예측불허 창조당구가 된다. 이상천은 자세도 파격이다. 남들처럼 엎드리지 않고 반쯤 일어서 테이블을 위에서 조망하는 듯 친다. 그립도 독특했다. 왼손 엄지, 검지, 중지 세 손가락으로 큐를 잡고 손목 스냅을 이용해 회전을 극대화하는 그의 큐 동작은 사실 그것만으로 구경거리였다.
  당시 국내 삼인방 중 박병문이 수비형, 이상천이 공격형이라면 정상철은 공수겸비형이었다. 모범생이라고 할까, 정상철이 머리 박박 깎고 몇 달 동안 국제식 대대에서 시스템 공부를 하는데 비해 이상천은 건들건들형이었다. 포커도 하고 내기당구도 하다가 정작 대회 땐 도깨비처럼 우승해버리니  패배한 이들로선 속이 뒤집힐 노릇이었다. 정상급 선수들은 모두 노력의 대가다. 하지만 이상천에겐 결정적으로 필요한 0.1%가 있었다. 바로 천재성이다. 그래서 최정상에서의 승부는 가끔 ‘타고난’자를 이기기 힘든 불공평한 게임이 된다. 공명과 주유, 모짜르트와 살리에리, 김연아와 아사다 마오의 관계처럼 이상천도 라이벌들에겐 무척 불공평한 상대였다.


●‘상 리’,  미국에 3쿠션을 가르치다.
  이상천은 1980년대 초반 한국 당구 무림의 유일 군주였다. 아무도 그의 ‘사파’ 내공을 견디지 못했다. 그는 내기당구 상대가 원 뱅크샷 한 개를 치면 네 개로 계산해주는 등 상식 밖의 핸디캡을 주면서도 거의 승리를 챙겼다. “맞대결 하면 누가 그 사람과 치려 하겠어. 게임은 하고 싶은데 상대는 없으니  접바둑처럼 자꾸 좋은 조건을 준 거지”(박병문의 증언). 둘이 치건, 여러 명 다자 대결이건 간에 마지막 승자는 거의 이상천이었다. 1984년 무교동에서 스타 당구장을 경영하던 박태호(64)는 말한다. “내 집에서 당대 고수 8명이 붙었어. 이상천이 처음엔 밀리더니 화장실 들락거리며 자꾸 세수를 하더라고. 정신을 바짝 차리려는 거지. 결국 그 이가 싹쓸이 했어.”
  더 이상 적수를 못 찾아서였을까. 정상을 구가하던 이상천은 1987년 갑자기 해외 진출을 결심한다.‘탱크’ 최경주가 12년 뒤인 1999년 KPGA(한국프로골프협회) 무적의 1위 상황에서 PGA(미국프로골프협회) 진출을 결행했던 것의 선례라고나 할까. 어느 경우나 그들은 모든 게 불확실한 대양(大洋)으로 나아갔다. 혹자는 이상천의 출국이 장기간 ‘작대기’ 생활로 쌓인 빚 때문에 도피한 것이었다 한다. 하지만 그를 잘 아는 이들은 달리 생각한다. “(이상천은) 빚이 있다 해도 그것 때문에 피할 사람이 아닙니다. 그가 1990년대 중반 미국에서 뉴욕 마피아 두목에게 노름빚 10만 달러를 빌렸다 못 갚은 적이 있어요. 하지만 그들의 소름 끼치는 빚 독촉에도 (이상천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어요. 오히려 옆에 있던 제가 사시나무처럼 떨었죠. 배짱과 언변이 천재적이었어요”(허문범의 증언). 어려운 공을 두려워 않는 평소 경기 스타일대로 이상천의 외국행도  인생 승부수였을 것이다.  
  이상천은 1987년 생애 첫 출전한 본격 국제무대인 벨기에 스파 당구월드컵(BWA)에서 32강에 오른 뒤 귀국하지 않고 곧바로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미국 시카고를 거쳐 1988년 뉴욕에 정착한다. 당시 무일푼인 그를 박병문 등이 도와 미국행 비행기 표를 사줬을 정도로 적수공권이었다. 그야말로 ‘맨주먹 붉은 피’였지만 큐 하나로 곧 뉴욕에서 센세이션을 일으킨다. 그의 미국 이름은 ‘상 리’(Sang Lee)다. ‘상 리’는 미국에서 3쿠션 50점을 단 4이닝에 끝내기도 했으며 단 2이닝에 29득점을 하기도 했다. 공식대회에서 한 이닝에 3쿠션 28점을 치는 하이런(= HR·최장타)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3쿠션이 침체한 미국에서 그는 경이의 대상이었다. 일약 미국 당구의 챔피언이자 스승이 된다. BCA(미국당구협회) 선수권을 12년 연속(1) 제패했고 뉴욕타임즈는 1999년 그를‘당구계의 마이클 조던’에 비유했다. 미국 시민권자인 권경숙과 결혼해 히스패닉이 밀집한 퀸즈 잭슨하이츠에서 대형 당구장 ‘캐롬 카페’를 경영하는 등 경제적, 가정적으로 안정되자 이상천의 기량은 전성기에 달한다.

 

●‘상 리’,  겐트의 영웅이 되다.
  ‘상리’의 인생 하이라이트는 미국 정착 7년째인 1994년 1월10일 벨기에 겐트 월드컵이다. 미국 당구협회 회장의 부탁으로 미국 국기를 달고 출전한 겐트에서 그는 극적으로 1993~1994시즌 BWA(당구월드컵협회) 세계 종합 챔피언에 오른다. 이상천은 겐트 월드컵 직전까지 암스테르담 월드컵(1993년 7월)과 이스탄불 월드컵(1993년 11월)에서 우승해  라이벌 토브욘 블롬달에 뒤진 시즌 종합2위를 달리고 있었다. 시즌 최종전인 겐트에서 블롬달이 1회전 탈락하고 이상천이 우승해야 종합 1위가 확정되는 어려운 상황. 그러나 기적이 일어났다. 블롬달이 당시 27세 신예던 프레드릭 쿠드롱(48·벨기에)에게 충격적인 패배를 해 주저앉고 이상천이 결승에서 쿠드롱을 3-1로 이겨버렸다. 당구는 벨기에의 국기(國技)다. 왕실을 비롯한 귀족, 상류층들이 이상천의 우승에 기립박수로 환호했다. 지난날 한국의‘작대기’, ‘서울대 꼬마’는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새 월드 스타의 탄생이었다. 



  미국이 유럽 상대로 당구챔피언을 배출하긴 40년만이었다. 스포츠 천국 미국은 이에 합당한 대접을 한다. 뉴욕 타임즈가 스포츠 섹션 톱기사(1994년 1월19일자)로 ‘상 리’를 다뤘다. “챔피언 소리 없이 개선하다”(The  Unsung  Champ)가 제목, 부제는 “뉴욕 시장은 왜 공항에서 ‘상 리’를 맞지 않았나”였다. 이상천은 삽시간에 유명인사가 됐다. 그전까지 뉴욕 타임즈 1면에 난 건 김대중 전 대통령 뿐이었다. “외국에서 사람 대접 받네. 비행기 이코노미 석에 앉아 있어도 스튜어디스가 어찌 날 알아보고 좌석을 비즈니스로 업그레이드해 줘. 어리둥절할 정도야.”지난 1994년 2월 ‘이상천 스토리’ 연재를 위해 한 일간지 편집국에서 국제전화한 내게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이상천은 한국보다 미국에서, 미국보다 유럽에서 더 유명한 스포츠 스타가 됐다. 브라질에선 그의 이름을 딴 ‘상 리’ 큐가 인기리에 팔렸다. 이상천은 유명 뉴스 쇼인 ‘데이빗 레더맨 쇼’에 출연했고 뉴욕에서 성공한 100대 한국인 명단에 올랐다.    


● 이상천, 복수하고 스러지다.
  이상천은 2003년 가을 뉴욕생활을 16년을 끝내고 영구 귀국한다. 돌아오자마자 당구 전문지 ‘월간당구’에 피를 토하는 듯한‘당구인에게 고함’을 발표하고,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 당구 3쿠션 금메달리스트인 후배 황득희(48)와 함께 전국 당구투어를 하고, 대한당구연맹 회장에 출마하는 등 동분서주한다. 스타란 일신에 찬반이 극심하게 교차하는 사람이다. 이상천 역시 팬 만큼이나 안티가 많았다. 회장 출마 선언 후 전국을 주유하며 반대파를 만나 설득하고 소주 잔 나누느라 몸이 상했다. 그가 돌아오자  ‘미국에서 망했다’, ‘한국에 나타나 갑자기 설친다’. ‘작대기가 컸다’ 등 말이 많았다. 그러나 그가 진짜 온 이유는 이렇다.


  “흔히 당구선수들을 '작대기'라고 표현합니다. 이것이 무슨 뜻이겠습니까? 당구에 대한 진지한 의식 없이 그저 당구만 잘 쳐서 그것으로 생활수단을 삼는다는 말 아니겠습니까? … (과연 내가 진정한 의미에서 당구 선수인가를 자문해볼 때) 아마도 좋은 답을 내리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우리가 과거에 해온 것처럼 학교 안가고 할 일 없이 당구장 출입을 많이 하다 보니 당구를 잘 치게 되었고 고수가 되어 선수 복장을 하고 시합장에 나오게 된 것이 선수라는 호칭을 받게 된 동기였습니다.”(이상천, ‘당구인에게 고함’)


  통렬한 자기반성부터 시작해 이상천은 “우리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선수라는 프로의식을 갖고 각자가 나도 최고가 될 수 있다는 생각으로, 내가 한국 당구사를 바꾼다는 철저한 사명감으로 당구를 대합시다”(‘당구인에게 고함’)라고 촉구한다. 자신은 ‘작대기’란 말이 듣기 싫어 ‘직석’ 내기를 끊었노라고도 했다. 이어 외친다.

 

  “여러분 우리 같이 외칩시다.
  ‘나는 정말 당구를 사랑한다’
  ‘나는 정말 진정한 당구인이다’
  ‘내가 대한민국 당구역사를 바꾸겠다’
  대한민국 당구선수 파이팅! ”(‘당구인에게 고함’)


  이상천은 대한민국 당구역사를 바꾸기 위해 왔다. 당구 쳐서 존경 받은 자신의 경험을 후배에게 알리는 것이 그의 새로운 꿈이 됐다. 
  그러나 2004년 6월27일 경기도 산본 궁전웨딩홀에서 열린 제4대 대한당구연맹 회장 취임식에서 이상천은 이미 배를 쥐고 절룩거리고 있었다. 위에서 시작한 암세포가 스트레스와 과로 탓에 불과 반년 만에 보행이 어려울 만큼 전신에 퍼졌다. 취임사 도중 한 용품회사 사장을 가리키며 “내가 저분 모시기 위해 대전에 네 번 갔다. 여러분 때문에 이렇게 됐으니 앞으로 책임지고 도와야 한다”고 조크하기도 했다.
  백남준은 ‘예술은 사기’라고 했다. 예술당구, 창조당구를 친 이상천 역시 위대한 체육 사기꾼이다. 그는 손쉬운 제각 돌리기 3쿠션 대신 가끔 난이도 높은 횡단 샷을 치고 나선 남이 ‘왜 그랬나’ 물으면 ‘그냥 해 봤다’고 했다. ‘경기고 졸업 - 서울대 중퇴’로 알려진 학력도 진위 불명이지만 아무도 그걸 문제 삼지 않았다. 그의 고학력은 오히려 수많은 ‘작대기’들에게 꿈이고 위안이었다.
 

 

 

  당구 고수답게 이상천은 일생을 무협지처럼 살았다. 수많은 적을 무찔렀고 사해 종횡했으며 키 178cm, 인물 헌출했고 언변 출중해 주인공으로 부족함이 없었다. 여기저기 빚도 지고 신세도 졌으나 주위에서 그를 원망한 사람은 별로 없다. 무엇보다 무협지처럼 그는 통쾌하게 한 판 복수극을 벌였다. 당구를 노름으로 여기고 당구선수를 낮게 본 사회 통념에 대한 복수. 결국 혈전 끝에 스러졌으나 그의 사후 4개월 만에 대한당구연맹이 오랜 숙원이던 대한체육회 정가맹 단체가 됐다(2015년 2월23일). 당구는 도입 1백년 만에 비로소 ‘스포츠!’ 공인증을 얻은 셈이다. 이를 성사시킨 대한당구연맹 제5대 회장 민영길(73)은 “난관이 많았지만 이(상천) 회장의 타계가 역설적으로 체육계를 움직였다. 이 회장 음덕이 결정적”이라고 말했다.
  2006년부터 3년간 개최된 ‘상리 인터내셔널 오픈’엔 레이몽 클루망을 비롯해 토브욘 블롬달, 딕 야스퍼스, 마르코 자네티, 세미 세이기너, 프레더릭 쿠드롱 등 지구촌 톱 프로들이 참가해 이상천을 기렸다. 그는 2007년 BCA(미국당구협회)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다.  임용진(전 중앙일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