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용진 스포츠칼럼

제목스포츠인물 열전 <19> - 세계 정상 득점기계, 신사수(神射手) 신동파('스포츠코리아' 2015년 2월호)2018-04-12 19:4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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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포츠코리아에 글을 싣게 돼 다행이다. 다른 지면이었다면, 신동파를 이야기 하며 그가 누구인지 구구절절 설명하면서 도입부를 시작해야 했을 것이다. 생각해보라. 젊은이들에게 신동파를 한국의 마이클 조던이라 비유하면 정말? 그게 누군데?’ 하는 답이 돌아온다. 이게 얼마나 팍팍한 일인지! NBA(미국프로농구) 계보를 줄줄 꿰는 농구 광팬이라 할지라도 정작 신동파하면 고개를 갸우뚱하는 게 요즘 한국농구 관중석 현실이다. 허재는 그들에게 신이고, 이충희는 전설이지만 김영기·신동파는 인터넷 검색을 해야 하는 기억 너머 이름이다. 하지만 적어도 체육인이 주독자인 이 잡지에선 신동파에 관한 한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를 부르지 않아도 될 듯하다.

 

깔끔한 열정, “두 곳 다 욕심낼 수 있나?”

   신동파(72)1974년 현역은퇴(31) 후 기업은행 감독으로 있다가 이듬해 창단 여자실업농구팀인 태평양화학 감독으로 옮긴다. 이를 말리기 위해 당시 기업은행은 임원 합의사항으로 그에게 파격적인 특별 제안을 했다. ‘태평양화학은 여성 팀, 기은은 남성 팀이니 양쪽에서 농구를 가르치는 걸 허락한다. 기은 감독직은 유지해도 좋다는 것이었다. 기은 전임 감독이자 평생 선배인 김영기(80·KBL 총재)가 이 제안을 전했다. 신동파는 그것을 거절했다. 이유는 이렇다.

 

   “기업은행은 국내 최고 팀이고 거기서 저를 알아주는 게 영광이지요. 하지만 그렇게 되면 제가 두 군데서 월급 받잖아요. 제 성격 상 두 곳에 열성을 분산시킬 수 없어요. 운동선수로서 욕심을 최대화하되 그걸 하나에만 꾸준히 집중시켜야 성과가 나와요.”(2014118, 전화인터뷰)

 

   신동파는 스케일이 크기보다 깔끔한 이미지다. 하지만 집중력을 분산시키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각고(刻苦)한 깔끔함이지 거기 투여된 노력, 열성, 욕망까지 소심한 것은 아니다. 신동파가 맡았던(1975~1991) 태평양화학은 박찬숙, 홍혜란 등을 배출하며 오랫 동안 국내 여자농구 무적함대로 군림했다.

 

입지(立志), 절차탁마, ‘내 세상을 열다.

   신동파는 이후 남자실업 SBS농구팀 창단감독(1991·48)으로 자리를 옮긴다. 평생 두 차례 이직을 모두 신생 팀으로 했다. 꺽다리(190cm)에 말라깽이, 미남, 동료가 만든 찬스를 백발백중 성공시키는 책임감, 코트의 모범생, 엘리트, 스캔들 없는 슈퍼스타, 신사 등. 그러나 신동파의 이런 인상 뒤엔 미완(未完)에 대한 도전을 좇는 일가(一家)의식, 자신이 시도한 것을 결정(結晶)시키는 단단함이 있다. 운이 좋은 것은 소분지 일이고 제 영역에 대한 열망과 이루려는 노력은 대부분이다. 신동파를 신동파로 만든 것은 천부적 슈팅감각 뿐 아니라 그같은 독자 의식의 결과다.

 

   “(영기) 선배와는 대표팀에서 3년 동안 같이 뛰었다. 1965년 제3회 아시아농구선수권대회를 끝으로 김 선배는 농구코트를 떠났다. 김 선배가 은퇴하고 나니 왜 그리도 시원한지. 이젠 내 세상이다 싶었다.”(‘살아있는 농구교본 김영기다’, 조선일보 1997919일자, 신동파 기고)  

   “외곽슛을 장점으로 삼아야겠다는 생각이 중학교 2학년 때 들었다. 그래서 팀 훈련이 끝난 뒤 꼭 개인 운동을 했다. 처음에는 하루 400~500개씩 매일 슛을 던졌다. 고등학교 때까지 그렇게 계속했다.”(‘SPORTS 2.0’ 60, 2007716일자, 류한준 기자 인터뷰)

 

  신동파는 지금 선수로도 장신이지만 1960~70년대 농구팀에선 거의 최장신이었다. 골밑 센터를 포함 모든 포지션을 소화할 수 있었겠으나 그는 농구 입문 2년째인 휘문중 2학년(1958·15) 때 이미 외곽 슈터로 자신을 설정한다. 슈팅은 패스와 드리블, 리바운드, 경기조율 등 모든 과정을 응축시킨 농구 의 마침표다. 일찌감치 이 결정적인 역할을 자임한 당돌한 휘문 중학교 농구부원은 매일 수백개의 공을 던지면서 7년 후 선배 김영기 은퇴를 계기로 그와 공유하던 ‘1인자자리를 홀로 접수한다. 이른 입지(立志), 긴 기다림 후 마침내 내 세상을 구획한 그의 소감은 시원하다 였다. 그는 외아들이다. 코트에서도, 인생에서도 독자적인 스폿 라이트에 익숙한 이로서 조역보다 주인공, 그 중에서도 1인자를 달성하지 않으면 성에 차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죄송합니다소년, ‘신사수’(神射手)가 되다.

   신동파는 휘문고 3학년(1962·19)년 때 고교 농구대회 한 경기 최다득점(57) 기록을 세우고 국가대표로 선발된다. 고등학생이 농구 국가대표로 뽑힌 건 이때가 처음이다. 1970년 유고 세계농구선수권에선 8경기 총 261득점, 대회 득점왕과 함께 경기당 평균 32.6(슛 성공률 80.4%)으로 세계선수권 사상 FIBA(국제농구연맹) 역대 2위를 기록한다. 농구가 생긴 이래 미국인을 포함, 전 세계 수많은 슛장이 중 신동파가 두 번째로 잘 던진다는 공인이다. 당연히 그는 아시아 농구의 신이기도 하다. 그가 1969년 제5회 방콕 ABC(아시아농구선수권) 필리핀과의 결승에서 혼자 50득점, 한국 우승을 이끌자 필리핀 신문은 신동파를 멈출 수 있는가? 기도하는 수밖에 없다.’고 썼다. 대만에선 그를 신사수’(神射手=슈팅의 신)라고 불렀다. 그가 어떻게 이런 경지에 올랐나.

   신동파의 농구 멘토는 셋이다. ·4년 선배 최영식(전 대한농구협회 사무국장)은 휘문중학교 1년 신입 농구부원 신동파에게 체력·패싱·드리블 등 기초를 가르쳤으며 휘문중 코치 신봉호(전 기업은행 감독)는 중3짜리 꿈나무 신동파를 후일 그의 평생 자랑이 된 원 핸드 슈팅의 길로 이끌었다. 그리고 김영기. 그는 선수, 지도자, 인간 신동파를 만들었다. 신동파는 중 2학년때 휘문중에 연습경기차 온 스타 플레이어 김영기(당시 공군 농구팀)의 경기를 보고 단박에 매료된다. ‘김영기 같은 선수가 되겠다는 강한 동기부여는 이후 그 같은 지도자’, ‘그 같은 인간으로 변하면서 평생을 간다. 1964년 도쿄 올림픽 남자 농구에서 한국이 16개국 중 꼴찌(99)를 하자 하필 일본에서라며 울던 주장 김영기 곁에서 막내 신동파도 함께 울었다. 둘은 지도자와 선수로 기업은행, 국가대표에서 같이 뛰었으며 한국농구 사상 처음으로 아시아 정상에 오른 1969년 방콕 ABC 우승과 1970년 아시안게임 우승 감격을 합작했다.

   에피소드 하나. 신봉호 코치의 충고로 중3 말부터 원 핸드 슈팅 연습을 시작했으나 워낙 3년이나 두 손으로 하던 걸 한 손으로 던지다보니 힘도 각도도 삐뚤삐뚤 공은 아예 림에 못 미칠 때가 많았다. 그러던 어느 날 밤 겨울합숙소에서 피곤에 떨어져 자던 신동파가 죄송합니다를 연발하더니 갑자기 나이스 샷!’ 외치며 벌떡 깨어나 동료들을 놀래켰다. 꿈에서 공 수 백 개가 계속 빗나가 골밑에 선 신 코치에게 미안해 하던 차에 결국 한 차례 넣었던 것이다. 이후 동료들은 그를 죄송합니다로 불렀다. (일간스포츠, 1974110일자)

 

여기 90개 이상 들어가는 선수가 누구야?”

   외곽 슈터로 뜻을 세운 이래 신동파는 중, 고등학교 때 매일 하루 400~500개 씩 개인 슛 훈련을 했다. 대학 때는 200~300개로, 실업 때 100개로 줄였는데 이처럼 줄인 것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감각 유지만으로 슛 정확도가 보장됐기 때문이다.

 

   -실업 시절 개인 연습은 어떻게 했나.

   “골대 앞 6~7m(=요즘 3점 슛 라인) 선상에서 반원형을 그리며 움직여 하루 100개 씩 던졌다. 평균 93개 이상 넣었고 87개 연속 성공시킨 날도 있다. 88번째 실패하고 다시 골인시켜 그날 100개 중 99개를 성공시켰다. 99%. 그게 연습 최고기록이다.”

   -자유투는 어땠나?

   “마찬가지지

   -성공 비결은?

   “감각과 기술이 안정된 다음엔 마음을 비워야 한다. 부담도 자신감도 벗은 상태라 할까. 하지만 무척 어렵지.”

   -1969ABC 결승에서 혼자 50점 잡았는데 3점 슛이 인정되는 요즘 같으면 몇 점이나 올랐을까?

   “글쎄, 80점 가까이? 그날 야투 실패는 5개였던 걸로 기억된다.”

  -요즘 한국 농구 득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다 알 잖나. 프로경기조차 점수가 안 난다. 야투 성공률 낮고 프리드로 안 들어가고, 관중 줄고, 그래서 우린 더 안타깝고. 농구인으로서 정말 안타깝다.”(2014118, 전화인터뷰 경어 생략)

   

  대표팀 격려차 지난 2013년 진천 선수촌을 찾은 신동파가 유재학(53) 감독에게 물었다. “여기 12명 중 슛 훈련할 때 90개 이상 들어가는 선수가 누구야?” “없습니다. 제일 잘 넣은 조성민이 80, 나머진 60~70개 정도입니다.” 다행히 대표팀은 2014년 인천아시안 게임에서 우승했다. 하지만 그 2주전 스페인에서 벌어진 농구월드컵(전 세계선수권)에선 23(55) 했다. 16년만에 아시아 예선을 통과해 본선을 밟았다지만 그래도 저조한 건 사실이다. 신동파가 출전했던 1970년 유고 세계선수권에선 11위 했다. 역대최고 성적이다. 11위와 23. 그 간극엔 슛 연습 성공 ‘93vs 80의 차이가 없을까. 비전문가의 단순 비교 오류이길 바란다.

 

신동파!’, '동파 룸', '신동 파(PAR)!'

   ‘신동파하면 필리핀을 빼 놓을 수 없다. 필리핀에게 농구는 브라질 축구나 마찬가지다. 1950~60년대 아시아 최강이고 요즘도 깡촌 어디서나 맨발 맨땅에서 농구공 튀기는 소리가 상쾌한 나라다. 아나운서 이광재가 라디오통에서 고성 흥분하던 한국과 달리 필리핀은 1969년 방콕 ABC 대회를 TV 생중계했다. 신동파 등 한국이 사상 처음으로 자국을 꺾자 필리핀 국영방송은 이 대회를 6개월간 수시로 녹화 방송했다. 이후 신동파는 필리핀의 신이 됐다. 빵집도, 자동차(=‘지프니’)도 신동파 이름을 달았고 한 유명배우는 별장 제일 좋은 방을 동파 룸이라 이름 지었다. 행운, 복을 기원하는 의미에서 필리핀 사람은 요즘도 신동파!’를 주문(呪文)한다. 허진석은 알래스카 바다 위 77천톤 짜리 크루즈 배에서 필리핀 승객들과 농구하다 그들이 슛을 성공시킬 때마다 신동파!’ 외쳤음을 적고 있다(허진석, ‘득점기계 신동파’). 나도 마닐라 인근 골프장에서 한 필리핀 동반자가 7m짜리 장거리 퍼팅 성공 후 신동파!’ 하는 것을 들었다. 그게 신동 파(par)'로도 들렸다. 한국과 달리 필리핀에선 20~30대 신세대도 신동파를 안다. 그들 조부에게 귀가 닳도록 들었기 때문이다. 신동파도 자신을 사랑하는 필리핀을 사랑한다. 거의 매년 필리핀에 가며 현지 농구대회 시투도 한다. 한 번은 필리핀 기자가 물었다. “다시 태어 나면 어느 나라에서 농구하고 싶은가?” 신동파가 재치있게 답했다. “대한민국 국가대표로 필리핀에서 농구하고 싶다.”

 

프로라도 태극기 달고 울어봐야 한다

   신동파는 4년 전 작고한 아버지 신려철과 어머니 이덕선(93)의 외동아들, 1944년 함경남도 안변 생이지만 두 살 때 일가족 서울로 와 휘문중-휘문고-연세대를 다녔다. 자신은 1971년 결혼한 부인 이연일(70)과 사이에 21남을 뒀다. SK그룹 계열사 과장인 막내아들 신주용(38·186cm)과 딸들도 전부 장신이지만 농구를 시키지 않았다. “제가 너무 힘들었어요. 아들의 초등학교 농구코치가 강력히 권유했지만 제가 그 분 찾아가 농구 못 시킨다말렸어요. , 어찌어찌 하면 선수 되고 운 좋으면 국가대표 되겠죠. 하지만 거기서부터가 문제에요. ‘톱 오브 더 톱은 힘들어요. 정상을 달릴 수 없으면 안 하느니만 못해요.” 퍽 신동파다운 이유다.

   그는 선수, 지도자 외에도 대한농구협회 이사, 부회장, 국가대표운영위원장 등 두루 행정을 거쳤다. 지금은 아이들이 예뻐서초등학교농구연맹 회장만 맡고 있다. 선수 시절 어깨를 혹사한 탓에 요즘 팔이 잘 올라가지 않지만 그것만 빼곤 건강하다. 일주일에 한 차례 매주 화요일 등산한다. 진짜 취미는 바둑(아마추어 4)이다. 기력이 비슷한 김정남(73·전 축구대표팀 감독)과 국가대표 태릉 합숙 시절부터 밤 새워 바둑을 뒀다. 최근 둘은 유선 바둑TV에서도 맞수로 겨뤘다. 신동파가 불계승 했다. 마지막으로 물었다.

 

   -요즘 한국 농구 어때요?

   -“프로화 이후 국제 아마추어 경기에서 감동이 사라졌어요. 아무리 몸이 연봉이라지만 프로들도 일생 몇 번 쯤은 태극기 달고 울어봐야 해요. 대표 선발 기피하고 아시아권서도 간신히 3위 턱걸이 하는 걸 보면 화가 막 나요.”

 

   한국 농구에서 신동파 위치는 청년아니면 무명이다. 신세대들이 그를 모르는 반면 장년들은 고희 넘긴 신동파를 아직도 청년으로 기억한다. 이 두 점 사이에서 오랫 동안 한국농구가 일진일퇴 하는 듯한 지금, 한국농구 도약을 위해 또 한명의 신동파!’가 무척 절실하다.

임용진(전 중앙일보 체육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