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용진 스포츠칼럼

제목스포츠인물 열전 <18> - 손가락 없는 레슬러 이상균2018-04-12 19:4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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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인물 열전 18 - 손가락 없는 레슬러 이상균

전 대한당구연맹 고(故) 김영재 회장은 오른손 엄지가 없었다. 철도공무원이던 지난 1950년대 중반 철로를 수리하다 다쳤다. 이 때문에 걸출한 경기인은 되지 못했으나 스포츠 당구계 리더로서 평생 존경을 받았다. 가끔 그가 엄지 손가락 없는 거친 손으로 먼저 악수를 청해줬을 때 마주 잡힌 그 서늘하고 커다란 느낌은 오랫동안 잊지 못할 떨림이었다. () 이상균(1931 ~ 2010)도 그랬다.

지난 1998년 여름 어느 날 방콕아시안게임 1백일 전 취재차 태릉선수촌을 찾았다. 김성집 후임으로 1994년부터 선수촌장을 하던 이상균이 반갑게 맞았다. 그는 국제대회를 코앞에 둔 바쁜 일정이었음에도 수십년 연하 아들뻘인 내게 손수 선수촌 곳곳을 안내하며 자상히 대화했다. 눈이 다정했고 이마엔 반듯한 예의가 흘렀다. 당시 내 담당 종목이 골프, 배구, 핸드볼 등이었기 때문에 레슬링엔 무심했으나 그가 나를 전송하며 두 손으로 내 오른손을 잡았을 때야 상대가 누군지 알았다. 왼쪽 손가락 셋이 없는 위대한 레슬러. 자신을 이긴 상대에게 존경을 받은 멜버른올핌릭 밴텀급 4. ‘그 이상균이 바로 그였다. 선수촌장 전력도 모르고 찾아간 내 무식을 탓하지 않는다는 듯 그의 허전한 왼손이 부드럽게 날 감쌌다. 아직도 이상균 하면 그 때 기억을 지울 수 없다. 이후 체육회 간담회 등에서도 그는 언제나 두 손으로 악수했고 언제나 따스했다. 김영재와 이상균과 조막손 투수 에보트까지. 왜 뭔가를 잃은 결함이 사람을 완성시키는가. 이상균에 관한 가장 유명한 회고부터 보자.

 

위대한 경기인들의 존경법, “그를 방해하지 말자

경기가 끝났다. 그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위엄 있는 자세로, 매트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미소를 지으며 다가와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운동복에다 허겁지겁 두 손을 닦기 시작했다. 그에게 젖은 손을 내민다는 건 무지막지한 결례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우리 코치들이 나를 에워쌌다. 마지막 결승전이 남아 있으니 절대로 긴장을 풀지 말라는 신호. 그렇지만 나는 꼭 들러야 할 곳이 있었다. 그를 만나야 했다. 상황판에선 그의 최종 성적이 4위라고 적혀 있었다. 그가 천천히 걸어간 어두컴컴한 복도를 지나서 마침내 대기실 문 앞에 이르렀다. 안에서는 한 남자의 나지막한 흐느낌 소리가 흘러나왔다. 나는 내 양 손을 다시 한 번 바라보고 그대로 몸을 돌렸다. 그를 방해하지 말자. 내가 아는 위대한 레슬러에게 나는 그렇게 경의를 표했다.”

- 무스타파 다기스타니의 회고 (장원재, “올림픽의 숨은 이야기)

 

무스타파 다기스타니(83)는 생존하는 터키의 레슬링 영웅이다. 레슬링 자유형에서 1956년 멜버른 올림픽(밴텀급)1960년 로마 올림픽(페더급)2연패한 뒤 은퇴, 고향에서 국회의원을 지냈다. 멜버른 올림픽 출전 당시 그는 세계선수권자며 우승후보 ‘1순위였다. 이상균은 이때 1차전에서 필리핀의 라멜에게 폴 승을 거뒀고 2차전에서 파키스탄 자후르에게 판정승, 3차전을 부전승으로 통과해 4차전 준결승(1956121)에서 무스타파 다기스타니와 만났다. 레슬링은 손가락 싸움이다. 그걸로 상대를 잡고 조이고 물고 늘어지는데 왼손 엄지와 검지, 장지가 없는 이상균을 만났을 때 다기스타니는 기가 막혔을 것이다. 엄지가 없는 상태에서 뭘 꽉 쥘 수 있을지 상상해보라. 왼손 넷째, 다섯째 손가락 두 개만으로 강하게 저항 압박하는 이상균에게 판정승을 거둔 뒤 다기스타니는 어두운 복도를 지나 이상균의 선수대기실로 찾아간다. 다시 인사하러. 그곳에서 상대의 나직한 울음을 듣고, 자신의 온전한 손가락을 보고, 다기스타니는 말 없이 돌아선다. 금메달리스트와 4, 챔피언과 위대한 경기인은 이렇게 서로 존경하고 헤어졌다. 진짜 레슬러들이었다. 그런데 이상균은 왜 울었나?

 

이 올림픽이 마지막 경기라고 생각하니 눈물이 솟는 것이었다. 그러나 관중들 앞에서 눈물을 보일 수는 없었다. 세계인들은 그때까지도 대한민국을 전쟁의 상흔이 가시지 않은 나라라고 생각하며 가는 곳마다 동정어린 눈길을 보내주었다. 나는 한 나라를 대표하는 운동선수로서 내 조국의 품격을 높이고 싶었다.” (장원재, “올림픽의 숨은 이야기”)

 

조국의 품격을 높이지 못해, 한 인간의 의지를 증명하지 못해 이상균은 남 모르는 곳에서 나직히 흐느꼈다. 다기스타니와 이상균의 품격은 요즘 경기인처럼 요란한 액션을 스스로에게 용납치 않았다. 순수(純粹)의 시대였다.

 

불구의 레슬러, 불가능에 도전하다.

이상균은 전주 이씨, 서울서 3대를 살았다. 레슬링이 좋아 1947(17) 한국체육관 전신인 조선체육관(서울 중구 초동)에 들었고 2년 후인 1949(19) 31회 전국체육대회 레슬링 주니어플라이급에서 우승, 일약 국내 레슬링 경량급 최강자로 부상한다. 그러나 625전쟁 초기 육군 특무부대 문관으로 복무하던 중 불의의 사고가 터진다. 수류탄 폭발로 왼쪽 손가락 3개를 절단했다. 레슬링은 손가락 하나만 없어도 경기력이 제로에 가까워지는 경기다. 하물며 세 개를 잃다니! 하지만 이때 조선체육관 은사 황병관이 그를 격려했다. “아직 안 죽었어. 레슬링 하고 싶으면 해. 손가락 없다고 못 할 게 없어. 맘 먹기 달린거지”. 일본 메이지대 레슬링 부 출신으로 1948년 런던 올림픽 레슬링 자유형 5(웰터급)에 오른 황병관은 이렇게 북돋웠다. 하늘이 무너지는 절망감을 딛고 이상균은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손목을 쓰는 뤼스트 록, 상대의 팔을 끼는 암 훅 등의 변칙기술을 연마하여 불가능을 뛰어 넘었다. 결국 그는 재기했다. 사고 1년여 후인 1951(21) 32회 전국체전에서 레슬링 라이트플라이급 우승으로 재기하고 선수 생활을 계속한다. 1954(24) 신흥대학(현 경희대학교)에 진학하고 마침내 경기인의 꿈인 올림픽 출전을 끝으로 1956(26) 현역 은퇴했다. 이후 그는 지도자의 길을 걸었다. 1960년 로마올림픽 레슬링 코치였으며 1964년 도쿄올림픽과 1968년 멕시코올림픽엔 국제심판으로 나섰다.

 

영원한 사범, 영원한 멘토로 남다.

이상균은 은퇴 후 레슬링 계 조야(朝野)를 넘나들며 후배를 조련했다. 제도권에서 대한레슬링협회 부회장 두 차례(1971, 1993)와 태릉선수촌장(1994~1998)을 지냈으며 재야에선 1970, 80년대 20년간이나 한국체육관 사범, 총괄 관장으로 레슬링 코리아를 관리했다.

레슬링은 격투기 중에서도 가장 원색적인 운동이다. 유도, 레슬링, 복싱 선수들이 드나든 한국체육관(전 조선체육관)은 국내 격투기 일인자들의 경연장이나 마찬가지였다. 한국체육관 레슬링부를 창설해 이상균을 지도했고 김두한과도 한 판 뜬 적 있다는 전설적 레슬러 황병관이 1952년 부산에서 깡패 고영목에게 권총 피살되는 등 스포츠맨과 건달의 경계가 아슬아슬했던 시대. 레슬링 명문 서울사대부고 출신 이정기는 당시 사대부고 코치던 이상균에게 레슬링을 배웠고 멜버른 올림픽에도 사제 동반 출전한 원로다. 다음은 이정기의 회고.

 

나는 세상물정 모르는 머리가 빈 어린 나이에 큰 벼슬이나 한 것 같은 꼴불견이었다. 레슬링 때문에 보기 싫게 된 삐뜰어진 귀에 (수술후에 정상이 됨) 영화배우 험프리 보가트도 입은 것을 본 적 없는 이태리제 초콜렛 색 더블 브레스트 버버리코트를 입고 아무리 구겨도 금방 펴지는 볼사리노 새털 중절모를 쓰고 캬바레 황금마차모감보그리고 영화관들을 무상 출입하였다. 때로는 계급장 없는 해병대 장교복을 입고 차표도 없이 전차 중간문으로 드나들었다.”

 

1950년대 서울은 종로 김두한과 동대문 이정재, 명동 이화룡 파 등 조폭 전성시대였다. 1952년 한국체육관에서 운동을 시작해 뒷골목 주먹들의 스카웃 ‘1순위로 하늘 높은 줄 모르고 활보하던 젊은 레슬러 이정기의 기세가 느껴진다. 바로 그 때 이상균이 이정기를 불렀다.

 

앞날 창창한 사람이! 정신 차리고 공부해. 더 크고 더 건강한 세상으로 가게

선생님, 알겠습니다

 

이정기는 즉시 미국 리치몬드 대학에 유학, 미시간 대학서 박사학위를 받고 그 대학 임상심리학 교수가 된다. 그는 후일 스승에게 이렇게 고마워했다. “내가 만약 그 당시 한국 생활을 계속하였다면 대학은커녕 어두운 길속에서 지금도 헤매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상균 선생께 한없이 감사한다.”(미주 한국일보, 20081221일자)

 

이상균은 타고난 스승이었다. 1984LA올핌픽 금메달리스트 김원기는 이상균 선생님은 암울한 시기에 손가락이 없이 불굴의 정신력으로 대한민국 체육의 역사를 바꿔오신 진정한 레슬러라고 말했다. 한국토지공사 레슬링 감독 배창근(59)이 촌장님은 단순한 경기인이 아니다. 한국 레슬링의 영원한 멘토라고 말한다. 1964년 도쿄올림픽 은메달리스트이자 1966년 토론토 세계선수권 우승자 장창선을 발굴한 것도 이상균이었다. 그는 찢어지게 가난한 인천 출신 소년 장창선의 재능을 일찌감치 간파하고 서울 인창고에 진학토록 길을 놓았다.

한국체육관은 한국 격투기 그 자체였다. 이상균, 장창선, 양정모(레슬링), 송순천, 김기수(복싱), 김해남, 유인호(역도), 안효상, 온신(유도) 등 쟁쟁한 스타가 여기 매트에서 땀 흘렸다. 1947년 개관, 1996년 매각되기까지 한국체육관은 반세기에 걸쳐 수련생 10만명, 국가대표 100여명을 배출했다. 이상균은 자신이 입문한 한국체육관의 사범, 관장으로 1975년부터 20년 간 후배를 길렀다. 이상균이 주관한 한국체육관은 한때 복싱, 태권도 수련생만 600~700명에 달할 정도로 전성기를 구가했다.

 

장창선, 양정모를 조련하다.

재야 지도자를 끝낸 이상균은 1990년대 중반 대한레슬링협회 부회장(1993), 13대 태릉 선수촌장(1994) 등으로 제도권에 컴백한다. 1994(64) 히로시마아시안게임 총감독, 1996(66)엔 애틀란타올림픽 부단장을 맡으며 한국체육계 전체 지도자로 업그레이드된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이상균의 본령은 레슬링이다. 그가 한국체육관서 조련한 두 걸물이 한국 체육사를 새로 썼다. 장창선(74)이 세계선수권 첫 금을, 양정모(62)가 대한민국 올림픽 출전사상 첫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을 각각 신고했다. 이후 2012 런던올림픽까지 역대 하계 올림픽에서 레슬링이 수확한 금메달 수는 모두 10개이다. 심권호(46) 역시 이상균의 손길 아래 세계 레슬링 사상 최고 전설이 됐다. 그는 레슬링 그랜드 슬램인 올림픽, 세계선수권, 아시안게임, 아시아선수권을 두 체급(그레코로만형 48kg, 54kg)에 걸쳐 석권했다.

이상균은 지난 2010115일 타계(향년 80)해 이천 호국원에 묻혔다. 부인 권성이 씨와 사이에 31녀를 뒀다. 경희대학교 문화상(체육부문), 체육부장관 표창, 37회 서울시 문화상(체육부문), 미연방 스포츠아카데미(공로상)을 받았다.

앞서 1998년 여름 방콕아시안 게임을 앞두고 그를 만났을 때 한국은 IMF(국제통화기금) 외환위기로 온 나라가 백척간두였다. 이상균은 한계 상황을 극복하는 것이 스포츠 정신이라고 말했다. 그의 말대로 한국은 외환위기를 넘겼고 체육에서도 4년 전 히로시마 아시안게임 3위를 딛고 방콕에서 2위를 달성했다.

이상균을 생각할 때 난 이런 질문을 한다. 난 누구에게 멘토가 될 수 있을까. 따뜻한 손과 눈인사로 누구를 위로할 것인가. 그의 허전하고 따뜻한 왼손이 그립다. 임용진(전 중앙일보 체육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