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용진 스포츠칼럼

제목스포츠인물 열전 <17> – 스포츠공화국의 두 ‘父子’, 민관식과 장창선2018-04-12 19:5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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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인물 열전 <17> – 스포츠공화국의 두 ‘父子’, 민관식과 장창선

대한체육회는 2014년 스포츠영웅에 민관식, 장창선을 선정했다.

민관식(1918~2006)은 ‘한국 근대스포츠의 대부’고 장창선(72세)은 광복 이후 세계 대회 최초의 금메달리스트이다. 장창선은 손기정의 ‘일장기 금메달’(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1936년 8월)이 남긴 한을 30년후 미국 톨레도 세계레슬링선수권 금메달(자유형 52kg 플라이급, 1966년 6월)로 풀었다. 올림픽과 세계선수권을 통틀어 광복 후 태극기를 달고 딴 첫 금메달이었다. 장창선의 금메달은 이후 터지기 시작한 한국체육 전성기의 신호탄이었다. 민관식은 ‘대부’로서 그 전성기를 설계하고 추진했으며 장창선은 믿음직한 ‘장남’으로 수많은 아우에게 길을 열었다.

민관식이 달성한 것은 체육입국이었으며 장창선이 이룬 것은 체육입신이었다. 두 사람은 체육의 국가적, 사회적 지향을 필생의 과업으로 완벽히 구현했다. 민관식과 장창선은 부자처럼 손발이 맞고 서로를 신뢰했다. 두 영웅이 함께 선정된 것은 당연하고 의미 깊다. 민관식부터 보자.


◾‘낙제생’ 민관식, 태릉선수촌을 만들다.

고등학생 때 당시 민관식 문교부 장관(현 교육부 장관)을 처음 봤다. 내가 다니던 지방의 한 고교를 방문한 민 장관은 교문에서 영접차 기다리던 교장을 뒤로 한 채 검정색 전용차량 속에서 교내 테니스코트로 직행, 학생 대표선수와 게임을 가졌다. 현역 장관이 아들뻘 고등학생을 상대로 전력을 다해 스매싱 하는 새 교장은 장관이 경기 후 닦을 수건을 챙기고 있었다. 한 사람은 제 할 일만 하고, 다른 이는 남의 일을 대신하려는 게 대조적이었다.

두 번째는 일간지 체육부 테니스 담당 기자 시절 편집국에서였다. 실내 흡연이 당연시 되던 때므로 어느 날 맛나게 한 대 빨고 있던 차 누가 옆 자리에 털썩 앉았다. 쳐다보니 인생 대선배, 체육 대선배 민관식이다. 그가 말했다. “물 한 잔 가져 와요”. 시키는 대로 했더니 그는 다짜고짜 내 담배 한 갑을 통째로 컵 속에 잠수시켜 버렸다. “오늘부터 끊어. 담에 내게 고마워 할 날이 올 거야”. 나는 내 악습이 익사하는 것을 보고 있었다. 그 몇 년 후 담배를 완전히 끊었다.

민관식은 평생 상쾌하고 놀라운 사람이다. 자신이 옳다 하면 일단 하고 봤다. 말보다 행동이 앞서는 사람이었다. 대통령 박정희의 한글 전용 지시에 현역 문교부 장관 민관식이 반대했다든지, 1970년대 초반 서슬 퍼런 박종규 대통령경호실장 등 실세하고도 언쟁을 벌였다든지(김운용 회고록, ‘김운용이 만난 거인들) 하는 등 그의 강단을 증명하는 일화가 많다.

민관식은 작고 다부지며 눈매 형형하고 목소리는 맑았다. 인상은 윈스턴 처칠을 연상시켰다. 키 작고, 유머 있고, 굽히지 않고, 장소와 상대 가리지 않고 마구 발산하고, 가끔 심술궂은데다 일을 처리할 땐 저돌적이었다. 처칠이 이튼에서 낙제한 것처럼 민관식도 경성제1고보(현 경기고등학교)에서 낙제했다. “바질바질한 장난꾼이던 나는 … 개구쟁이가 되어 선생 골리기와 싸움질에 영일이 없어 노상 시말서 쓰기와 정학 맞기에 바빴다”(민관식 자서전 ‘낙제생’ 서문)고 했지만 이후 교토 제대에 입학해 수석 졸업(농학부 농림화학과)한다. 그는 한국인 최초의 교토대 법학박사(1963)이기도 하다.

민관식의 별명은 ‘마당발’이다. 제12차 UN총회 한국대표(1957), 대한약사회 회장(1966~80), 대한체육회장(1964~71), 국회의원(5선-3,4,5,6,10대), 문교부 장관(1971~74), 한국과학기술단체 총연합회장(1978~84), 남북조절위원회 부위원장(1977~92)등을 지냈다. 하지만 정치인, 관료, 직업인으로서 다양한 경력을 한 군데 집약시킨 곳은 체육이다. 대한체육회장 말고도 그는 대한탁구협회 이사장(1954), 대한테니스협회 회장(1960), 대한축구협회 회장(1964), 대한육상경기연맹 회장(1967) 등으로 각 종목을 직접 키웠다. 그리고 무엇보다 필생의 역작, 태릉선수촌을 만들었다.


◾“영원한 ‘대한체육회 명예회장’으로 남고 싶다”

태릉선수촌은 민관식이 대한체육회장에 취임한 이듬해(1965) 착공했다. 1964년 국가대표선수단장으로 토쿄 올림픽에 다녀온 직후부터 그는 ‘선체력 후기술’을 절감했다. 국가 건설 초기라 ‘예산 낭비’ 등 반론이 거셌으나 “군대에 병영이 있는 것처럼 국가대표선수엔 전용 합숙훈련장이 필요하다”고 군인 출신 대통령 박정희를 설득, 당시 문화재관리국 소유인 태릉 부지 9천7백여평에 3천3백만원 예산으로 선수촌 건립허가를 얻었다. 이후 1년만인 1966년 6월말 선수촌이 개소했고 10년후인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에선 마침내 한국의 첫 올림픽 금메달(양정모, 레슬링 자유형 페더급)이 터진다.

민관식은 평소 태릉선수촌을 가장 자랑스러워 했다. 궁핍한 시절, 젊은 경기인들에게 체력과 영양과 기술을 주고 애국과 자부심을 흐르게 했다는 점에서 민관식은 박정희와 닮은 꼴이었다. 박정희와 다른 점이 있다면 독재를 하되 크게 미움 받지 않았다는 점이다. 민관식은 선수촌 내에서 뿐 아니라 거의 전 체육인에게 경외의 대상이었다. 그는 끊임없이 박정희 주변을 도는 행성이면서도 권력의 블랙홀에 빨려 들지 않고 자신을 지킨 ‘특별한 인물’(허진석, ‘스포츠공화국의 탄생’)이었다. 물론 정치 현실에서 누구나 ‘한 수 접어주는’ 스포츠가 그 결정적 완충 역을 했을 것이다.

민관식은 개성 출신이다. 호는 소강, 여흥 민씨며 한국 음식 요리가로 유명한 부인 김영호와 사이에 3남을 뒀다. 스포츠 사령탑일 뿐 아니라 그 자신 소문난 운동광으로 테니스, 수영, 걷기 등을 평생 실천했다. 장관 시절 ‘테니스 미니스터’로 불렸으며 88세로 타계 하루 전까지 서울 압구정동 실내코트에서 테니스를 쳤다. 수십 년 간 신라호텔 헬스클럽에서 매일 70m 트랙을 60바퀴씩을 돌았다. 외국 출장시 넥타이 정장 차림으로 60바퀴 돌고 비행장으로 갔고, 귀국후 공항에서 호텔로 직행 또 60바퀴를 돌고 집에 갈 정도였다.

민관식의 지론은 ‘건강을 잃으면 다 잃는다’, ‘평생학습 평생현역’이었다. 그의 아호를 딴 ‘소강배 전국남녀중고등학교대항 테니스대회’가 33회째 개최되고 있으며 모교인 경기고에선 ‘소강 민관식배 마라톤대회’가 열리고 체육인·언론인을 대상으로 한 ‘소강 체육대상’이 6회째 시상되고 있다. ‘마당발’답게 수많은 직함이 있었으나 그가 가장 좋아한 것은 ‘대한체육회 명예회장’이었다. 그는 2006년 1월 16일 영면, 대한체육회 장으로 대전 국립묘지에 안장됐다.


◾장창선, 첫 ‘태극기 금’을 따다.

민관식이 타계 한 달 전까지 구술한 회고록 마지막 부분은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각별한 애정을 담아 그의 이름을 불러 본다. 스포츠 한국을 빛낸 사나이 장창선. 나의 대한체육회장 시절에 가장 잊을 수 없는 이름으로 남는다. 이 연재를 시작하면서 마지막 회상의 주인공으로 장창선 선수를 점찍어 두었었다.”(중앙일보, ‘남기고 싶은 이야기-으랏차차 88세 청년’. 2005. 12. 29.)



장창선은 대한민국 최초 세계선수권대회 금메달리스트일 뿐 아니라 대한민국 최초 국비 체육특기생 연수자이기도 하다. 1962년 자카르타 아시안게임에서 그가 은메달을 따자 당시 국회의원인 민관식이 그를 불러 물었다. “잘 했다. 결승서 진 이유는 뭔가?” “일본과 기술 격차가 너무 큽니다. 본바닥 테크닉만 익히면 남에게 지지 않습니다.” “좋아, 제대로 한 번 하지.” 이듬해 장창선은 민관식 등의 도움으로 국비 지원을 받아 레슬링 명문인 일본 메이지 대학으로 연수를 떠난다.

장창선은 일본서 모질게 뒹굴었다. 명색 대한민국 국가대표인데도 세계 톱 랭커들이 몰린 메이지대 레슬링 팀에서 그의 랭킹은 총 21명 중 19위에 불과했다. 매트도 아닌 다다미 바닥에서 훈련하느라 손가락이 부러지고 오른쪽 다리 인대가 파열돼도 아픈 줄 몰랐다. ‘레슬링 하면 다 그렇거니’ 하며 다잡은 결과 귀국 시 그의 랭킹은 팀내 3위까지 올랐다.

일본 연수에 힘입어 장창선은 아시아권에서 세계의 강자로 일약 자신을 업그레이드 한다. 1964년 토쿄 올림픽에서 은메달을 땄다. 이어 2년 뒤인 1966년 6월16일, 미국 톨레도 세계레슬링선수권에서 그는 마침내 광복 이후 첫 국제대회 ‘태극기 금메달’을 조국에 신고한다. KBS 아나운서 이광재가 예의 하이톤으로 “고국에 계신 동포 여러분, 기뻐해주십쇼” 하며 현지에서 울먹였다. 결승전 상대는 일본의 가쓰무라 야스오. 지난 4년 새 아시안 게임과 올림픽 결승에서 일본에 진 빛을 깨끗이 갚아 더 후련했다. 카퍼레이드를 하고 빌딩에서 꽃비를 뿌리고 온 나라가 들끓은 가운데 대한체육회장인 민관식의 기쁨은 누구보다 컸다. 회장 취임 1년만에 장창선이 안긴 낭보로 그의 입지가 크게 강화됐다. 태릉선수촌 개소식이 마침 장창선의 ‘금’ 낭보 보름 후인 6월30일에 있었다. 이로써 1960 ~ 70년대 스포츠 공화국은 개막부터 화려했다. 설계·연출자 민관식, 주연 장창선이 완벽히 호흡한 결과였다.


◾“레슬링요? 그거 팬티만 있으면 되는 거 아닙니까?”

운동을 해서 가난을 벗는 것은 전형적인 국가주의, 자본주의의 신화다. 장창선은 민관식이 주도한 스포츠 입국(立國)의 향도였을 뿐더러 개인적으로는 스포츠 입신(立身) 스토리를 쓴 첫 주인공이기도 하다. 당시 아직 ‘재건’ 단계의 빈약한 자본 토양에서 장창선을 스폰서 한 것이 기업이 아니라 국가였던 점만 요즘과 다를 뿐 ‘스타 탄생’의 전형은 어디서나 같다.

장창선은 찢어지게 가난했다. 그의 아버지는 한국전쟁 와중에서 증발했으며 어머니 김복순이 인천 신포시장에서 콩나물 장사를 하며 장창선 등 3녀1남을 키웠다. 그들 일가족 식사는 매끼 밥 대신 콩나물 일색이었으며 밥알이 가끔, 그나마 3대 독자인 장창선의 그릇에만 묻어있었다 한다. 생계를 위해 그는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생활전선에 나섰다.



“새벽에는 신문을 돌리고 낮에는 아이스크림을 팔았습니다. 지금도 어깨뼈가 툭 튀어나온 것은 그 어린 시절에 십 수 킬로그램이 되는 아이스 케키(=아이스 바) 통을 매고 인천 변두리를 헤맸기 때문입니다. 겨울에는 약식과 찹쌀떡을 팔았지요. 구멍가게가 없는 변두리만을 골라 매일 10킬로가 넘게 걸었어요. 덕분에 체력은 엄청 강해졌지요.”

그가 헤맨 인천 변두리는 인천 남구 숭의동 일대 속칭 ‘옐로 하우스’로 알려진 사창가 부근이다. 보통 50 개 정도 들어가는 아이스 케키 통에 빨리 돈 벌 욕심에 100 개씩 담다 보니 가죽 끈이 닿는 어깨 부근이 부풀어 올랐고 나중엔 뼈까지 튀어 올랐다. 어머니와 함께 소년 가장으로 생계를 동업하느라 못 먹고 못 자라 그는 왜소하다. 키 159cm에 불과하다. 레슬링은 왜 했을까.



“운동은 하고 싶은데 작고 가난한 사람이 뭘 하겠어요. 농구, 축구는 못 하고. 레슬링요? 그건 ‘빤쓰’만 있으면 되는 거 아닙니까?”



콩나물 집 아들 장창선은 금메달 한 개로 인생역전을 맞는다. 여기서도 연출 역은 민관식이다.



“장 선수가 귀국했을 때, 나는 누구보다도 크게 환영 잔치를 벌여 주고 싶었다. 그래서 카퍼레이드를 기획하고 참가자들에게 회비를 받는 ‘유료 환영파티’도 열었다. 박정희 대통령도 참석한 이 파티에서 92만5000원이 걷혔다. 장 선수는 이 돈으로 인천에 조그만 한옥 한 채를 마련했다. ”(민관식, 중앙일보 ‘남기고 싶은 이야기’. 2005.12.29.)



‘92만5000원’은 요즘 약 1억7천만원(쌀값 기준 환산)에 해당한다. 이 돈으로 ‘70만원’ 짜리 한옥을 샀다고 한다. 민관식은 장창선의 사람됨과 가정형편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평소 안쓰럽게 여기던 젊은이에게 실질적 도움을 주기 위해 ‘유료 파티’를 기획한 아이디어가 민관식답다. 게다가 대통령까지 참석했으니 온 나라 체육 파티를 벌인 민관식의 어깨가 한껏 으쓱했을 것이다. 장창선으로선 평생 짓누를 것 같던 가난에서 탈출한 순간이었다. 장창선이 1967년 전국체전 우승을 마지막으로 현역 은퇴, 9년간의 대표선수 생활을 끝내자 대통령은 또 다시 거액 ‘100만원’을 보낸다. 체육인에게 거의 전무후무한 청와대의 ‘현역 전별금’으로 장창선은 택시를 구입, 운수사업을 시작한다. 이후 전자제품 대리점, 스테인레스 스틸 그릇 공장과 식당 등으로 자산을 불리며 그는 한 번 붙잡은 인생역전에 역전을 허용치 않는다.

모든 것이 변한 가운데 장창선의 모친 김복순만 여전했다. 그녀는 콩나물을 파느라 아들 우승 소식도 남에게서 들었다. 언론 인터뷰 등으로 아들 덕에 유명인사가 됐음에도 그녀는 묵묵히 자기 할 일만 했다. 남의 처마 밑을 전전하던 신세에서 신포시장 내 자신의 좌판 하나가 생긴 것으로 일이 안정됐을 뿐 그녀는 아들 사업이 번창할 때도 콩나물 장수를 계속했다. 집념, 소탈, 성실은 장창선의 트레이드 마크다. 레슬링이 그렇게 만들었고, 어머니가 그렇게 만들었을 것이다. “지고 나서 핑계 대지 마라”. 위대한 챔피언을 키운 어머니 김복순의 유명한 한 마디이다.

장창선은 현역 은퇴 후 국가대표 레슬링 감독, 삼성생명 이사 겸 총감독, 대한레슬링협회 전무와 부회장을 거쳐 경기인 출신으로 최고 영광이라 할 태릉선수촌장(2000.1. ~ 2002.12.)까지 지냈다. 민관식은 “내 필생의 역작인 태릉선수촌의 관리자가 된 장 촌장을 생각할 때마다 나의 가슴은 기쁨으로 가득하다”(중앙일보, 2005.12.29.)고 썼다.

민관식은 태릉선수촌을 만들었고 장창선은 그것을 관리했다. 민관식은 한국체육을 지휘했고 장창선은 그의 아들처럼 제자처럼 선두에 섰다. 민관식이 2006년 부산아시안게임 조직위원장을 한 것처럼 장창선도 2014년 인천아시안게임 집행위원으로 대회 유치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1960년대 이후 한국스포츠가 그 전보다 왁자지껄 행복해졌다면 민관식, 장창선의 공이 결정적이다. 그들은 대한민국 스포츠 공화국을 발흥시켰다. 임용진(전 중앙일보 체육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