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용진 스포츠칼럼

제목스포츠인물 열전 ⑯ – 호무랑! ‘조선의 베-브 루-스’ 이영민2018-04-12 19:5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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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인물 열전 ⑯ – 호무랑! ‘조선의 베-브 루-스’ 이영민

이영민(李榮敏, 1905~1954)은 운동 천재다. 1920~30년대 야구, 축구, 육상을 종횡무진했다. 그의 이력을 셋만 대자면 한국인 최초의 동대문운동장 홈런 타자(1928년), 런던 올림픽 축구대표팀 감독(1948년), 육상 400m 한국신기록 수립(1928년, 54초 6)이다. 이것만 가지고도 그는 가히 전설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급’ 재능을 가진 경기인으로 일세를 풍미했다.
1920년대면 이미 스포츠 전용 경성구장(= 전 동대문운동장)이 있었고 여기서 경기가 열리면 승부에 맛 들린 관중들이 입추 여지 없이 몰릴 때다. 이 시기 이영민은 아시아 최고의 스포츠 스타였다. 베이브 루드 등과 경기했으며 갓 조직 단계에 있던 일본 프로야구가 1934년 ‘수입 1호’로 그를 지목했지만 본인이 고사했다. 그가 잠시 야구 배트를 놓고 축구화 끈을 매면 또 야생마처럼 상대를 주눅들게 했다. 1931년 12월 잡지 ‘동광’은 전문가 대상 설문조사 결과 ‘한국이 낳은 10대 운동가’ 중 1위로 이영민을 뽑았다.
하지만 없는 게 없는 듯하던 천재 이영민에게도 장수 복은 없었다. 그는 한국전쟁 직후 불과 49세 나이로 집에 든 절도범에게 권총으로 피격돼 세상을 뜬다. 충격적인 참변이었으나 그것조차 풍운아답게 세간의 관심을 모았다. 먼저 그 인생 하이라이트, 홈런부터 보자.

◾‘호무랑’ 타자 이영민, ‘책월 대본루타’를 날리다.
1928년 6월8일. 개장(1925년 10월) 3년째를 맞은 경성구장에서 연희전문(=연세대 전신)과 경성의전(=서울의대 전신)의 제2회 야구 정기전이 열렸다. 대학 간 정기전이지만 사실 요즘 한일전과 마찬가지로 열기 넘친 대회. 연전 선수가 모두 한국인인 반면 경성의전은 모두 일본인이었기 때문이다. 1회말 연전의 공격. 2사 후 3번 타자로 나온 주장 이영민이 역사를 새로 썼다. 투수의 제2구 인코너 직구를 통타, 스코어보드를 넘겨버렸다. 이전까진 그라운드 홈런, 이른바 빠른 발 ‘러닝 홈런’으로 홈을 밟은 게 전부였고 경성구장에서 펜스를 넘긴 진짜 홈런은 없었다. 호무랑!(=홈런의 일본식 발음). 이후 이는 이영민의 별명이 됐다. 동아일보 6월10일자는 “경성구장 개설 이래 초유의 대본루타(大本壘打=빅 홈런)”라고 썼다. 같은 날 중외일보는 “경성구장 생긴 후 최신기록의 홈으런 힛(=홈런 히트), 담장을 훨씬 넘기었다”며 “조선 운동계의 희한한 사건”이라고 보도했다. 조선팀이 일본팀을, 조선이 일본을 넘긴 듯한 홈런이어서 전국이 흥분했다.
베이브 루드는 당시 20년대 미국 대공황을, 이영민은 민족적 울분을 훌쩍 넘겨 대중의 사랑을 받았다. 사실 경성구장 1호 홈런은 이영민보다 1년여 전인 1927년 5월20일 미국 네그로 리그(흑인 프로야구) 소속 선수 케디가 기록했다. 하지만 방한 경기에서 한국 식산은행(=산업은행 전신)을 22-4로 대파한 미국 프로의 홈런이 당연시됐던 것과 달리 이영민의 홈런은 놀라움이고 민족적 자부심이었다. 그의 경성구장 1호 ‘호무랑 ’은 중월 2루 방향 375척(=113m) 짜리였다.
이영민은 1929년 당시 최고 직장인 식산은행에 입단해 거침없는 행진을 계속한다. 한 일간지는 내한한 게이오 대학과의 친선 경기에서 이영민의 활약을 이렇게 전한다.

“이영민이 6회초 미야다케의 제1구를 쳐 중월 대비구(大飛球)로 통쾌한 책월(柵越) 대본루타를 치고 유유히 본루(本壘=홈)에 돌입하는 모습에 만장 군중은 박수를 아끼지 않아 그 환호성은 구장을 진동시켰다.”(조선일보, 1930년 7월 17일)

‘중월 대비구, 책월 대본루타’는 ‘가운데 크게 날아가 담장 넘기는 대 홈런’이다. 이날 이영민의 타구는 ‘대’(大) 자가 두 번이나 들어갈 만큼 통쾌하게 경성구장 한 가운데를 질러 뒷 담 포풀러 나무를 넘겼다. 식산은행의 나인은 이영민만 빼고 모두 일본인이었다. 하지만 관중은 두 팀 승부보다 스타 플레이어 이영민의 장쾌한 홈런에 환호했다. 조선체육회장을 지냈고 일제 강점기하 야구 대회의 단골 대회장이던 윤치호도 경기 관람 후 이영민이 “펜스를 넘기는 완벽한 홈런을 쳤다(made a clean homerun). 일본인 관중이 그에게 환호를 보내는 것을 보니 흐뭇했다”(윤치호 영어일기, 7월 15일)고 썼다. 이날 홈런을 허용한 선수는 에가와 이전 괴물투수로 이름 높던 초창기 일본 야구 영웅 미야다케 사부로(宮武三郞)다. 이영민도 “미야다케와의 대결에서 친 장외홈런이 선수생활 중 가장 기억에 남는다”(잡지 ‘중앙’, 1936년 1월호)고 기뻐했다.

◾‘조선의 베-브 루-스’, 요미우리 자이언츠 대신 한국을 택하다.
이영민은 1937년(33세) 3월1일 15년간 520경기를 치르며 타격상, 최우수선수상 등을 휩쓴 뒤 정점에서 현역 은퇴한다. 대구 계성중학에서 야구를 시작, 배재고등학교, 연희전문, 식산은행을 거치며 아시아 최고로 인정받았다. 투수, 포수, 2루수, 외야수 등 만능 포지션을 소화했다.
1934년(30세) 미국 메이저 리그 올스타 팀이 요미우리 신문사 초청으로 일본 순회경기를 펼치고자 왔다. 최전성기 베이브 루드와 루 게릭, 찰리 게링거, 지미 팍스 등이 망라된 진짜 ‘올 스타’ 팀. 상대가 상대인지라 아무리 텃세 심한 일본 야구일지라도 아시아 스타를 배제할 수 없었던지 저들은 이영민을 ‘전(全)일본’ 팀에 합류시킨다. 8번 외야수 ‘에이빈 리’(=영민 리)가 그의 엔트리였다. 그러나 이영민의 대회 개인 성적은 6타석 5타수 1안타 삼진 2개, 볼 넷 1개. 그의 명성에 비해 미흡하지만 11경기를 치르는 동안 5게임에, 그것도 대타로만 내보냈으니 제 실력을 발휘할 겨를이 없었다. 이에 대해선 민족 차별 또는 일본 프로야구합류를 거부한 이영민에 대한 주최측 응징이란 설이 있다. 둘 다 맞을 것이다. 비슷한 시기 이영민이 일본 프로야구 창단(= 현 요미우리 자이언츠) 스카웃을 거절한 것에 관해서도 그가 끔찍이 일본을 싫어했다, 또는 안정된 직장인 식산은행을 택했다는 두 가지 설이 있다. 이 역시 둘 다 맞을 것이다. 대회 기간 동안 베이브 루드와 이영민 단 둘이 어깨동무를 한 사진이 현재 일본 야구명예의 전당에 보관돼있다. 박찬호가 LA 다저스 옷을 입기(1994년) 60년 전 이영민은 메이저 리거와 어깨를 나란히 단 한 명의 한국인이었다. 다음은 그의 은퇴를 전한 신문 기사.

“조선이 낳은 야구계 기린아로서 훈련원두의 인기를 독차지하고 있는 이영민 군이 시즌을 앞두고 돌연 야구계로부터 은퇴할 것을 언명하여 야구팬들로 하여금 아쉬운 감을 느끼게 한다. 연부년(=나날이) 쇠퇴해 가는 우리 야구계에 있어 오직 독보적 진경을 보이며 멀리 동경의 활(=넓은) 무대에 진출하여 일약 도시대항야구의 시선을 집중케 한 바 있었고 … 그의 비범한 활약은 조선의 ‘베-브 루-스’란 별명을 듣고 있었다. 군의 … 지금까지 홈런 수는 경성운동장과 기타 공인된 기록으로 본다면 십 여 개에 달하지만 연희전문학교 시대의 것을 합하면 실로 40여개의 찬연한 기록을 남기었다.”(동아일보, 1937년 3월6일자)

‘원두’(原頭)는 ‘넓은 벌판’, 즉 운동장이다. 경성운동장을 ‘훈련원두’라 한 것은 조선시대 훈련원이 동대문 근처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후 1960~70년대 ‘성동원두’로도 불린 이 경성운동장, 동대문운동장은 야구 뿐 아니라 축구, 육상 등 초창기 한국 종합스포츠의 산실이었다. 앞서 기사는 이영민의 은퇴를 계속 안타까와하고 있다.

“군은 비단 야구뿐만이 아니라 축구계에 있어서도 연전(延專)축구 황금시대의 제일인자로서, 현해탄을 건너서나 또는 멀리 상해까지도 수차 원정하야 그의 용명은 대외적으로 널리 떨친 바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륙상경기에 있어서도 일찌기 사백메돌(= 400m)의 조선 최고 기록을 작성하야 만능선수의 칭호를받고 있었다.” (동아일보, 1937년 3월6일자)

◾‘만능’ 이영민, 스포츠 제네랄리스트 정점에 서다.
한국축구 대부 김용식은 애초 빙상선수 출신이다. 1934년 1월 열린 ‘제10회 전조선 남녀빙상대회’ 1,500 · 5,000 · 10,000m 3관왕을 휩쓸었다. 당시 축구 골키퍼로 철벽 방어를 자랑하던 이혜봉도 농구와 체조선수로 여러차례 입상했다. 이같은 종합스포츠맨 전성 시대에 이영민은 축구면 축구, 야구면 야구 어디서나 ‘최고’ 소리를 들으며 정점을 찍었다. ‘훈련원두’ 경성구장에서 벌어지는 야구, 축구, 육상이 모두 그의 본업이다시피 그는 운동화 바꿔 신기에 바빴다. 연전 재학시 숭실대와의 경기에서는 농구선수 유니폼을 입은 적도 있었다. 다음은 한국인 ‘1호 호무랑’ 직후 이영민의 일정. 그가 얼마나 바빴을지 짐작할 수 있다.

- 1928. 6. 8. : 연전 vs 경성의전 정기전 출전 . ※경성구장 ‘1호 홈런’.
- 1928. 6. 23. : 제3회 전조선육상경기대회 결승 5관왕(200, 400m, 400, 800, 1600m 릴레이 우승). ※400m 한국신기록 수립.
- 1928. 9. : 구락부야구 연맹전 출전.
- 1928. 10. 16. : 연전 vs 평양 숭실전문 축구 정기전 출전.

5개월 동안 야구대회 두 번, 축구대회와 육상대회 각 한 차례씩 출전했다. 같은 기간 중등부 야구경기 심판을 보기도 했다. 이영민의 종목 넘나들기는 이미 배재고 재학시부터 정평났다. 이영민을 포함해 백기주, 함용화가 배재고의 스포츠 ‘삼총사’다. 그들은 1924년 5월17일 ‘제5회 전조선 야구대회’ 중등부 결승에서 투타에 걸친 활약(투수 백기주, 포수 함용화, 3루수 이영민)으로 전년도 우승팀 휘문고를 22대 2로 대파한다. 몇 달 뒤 그들은 ‘제4회 전조선 축구대회’ 결승(1924년 11월1일)에서 평양고보를 3대 0으로 누르고 우승(골키퍼 백기주, 센터 포워드 함용화, 라이트 윙 이영민)한다. 이어 일주일 뒤 열린 ‘제2회 전조선 중등학교 육상경기’에 출전해 이영민이 400m 2위, 백기주는 8마일 마라톤 5위에 입상한다. 가히 신나는 스포츠 제네럴리스트들이었다.

◾‘축구인’ 이영민, 한국축구 올림픽 첫승을 이끌다.
연전 졸업 뒤 1929년 식산은행 야구단에 입단한 이영민은 마침내 야구를 본업으로 삼은 듯 보였다. 그해 전국적 관심을 모은 조선일보 주최 ‘제1회 경평 축구전’(2승1무 평양 승리)에 출전하지 않았다. 그러나 서울이 평양에 진 뒤 이듬해 열린 제2회 대회(1930년 12월)에선 마침내 분기탱천 이영민의 활약으로 서울이 종합우승(2승1패)한다. 이영민은 서울이 이긴 1, 3차전에 출전해 모두 득점했으며 더욱이 1차전에서 결승점(3대2 서울 승리)을 올렸다. 그는 이 시기 이미 아시아의 ‘야신’(野神)이었다. 패배한 평양 축구 입장에선 야구쟁이 이영민의 활약이 황당했을 것이다.
이영민은 1935년 5월 베를린 올림픽 축구 선수 평가를 겸한 한국 예선에서 경성축구단 센터포드로 뛰어 경성의 승리를 이끈다. 이어 경성축구단 주장에 선발되나 비슷한 시기 국내 실업야구 리그가 개막되는 바람에 본선인 전(全)일본축구선수권에 출전 못하고 결국 베를린 올림픽 티켓을 김용식 등에게 넘기게 된다. 그러나 이영민은 이보다 13년 뒤 광복 공간에서 뜻하지 않게 올림픽 축구와 연을 다시 맺는다.
1948년 런던올림픽. 태극기를 앞세운 첫 올림픽에 이영민은 한국야구협회 시찰단 자격으로 참가 중이었다. 당시 축구 대표팀 감독은 박정휘. 그러나 선수선발 과정에서 잘못을 문제 삼아 축구협회가 감독 이하 임원진을 전원 경질하는 초강수를 뒀다. 이미 축구 대표팀이 런던에 도착한 상황. 협회는 결국 ‘반은 축구인’인 이영민에게 사상 첫 올림픽 국가대표 감독을 현지에서 맡긴다. 이영민은 5년 후배인 김용식 등과 이미 오래 전부터 그라운드에서 손발을 맞춘 사이다. 현지에서 뭉친 그들은 첫 상대인 멕시코를 5대 3으로 제압, 올림픽 축구 첫승과 함께 감격적인 8강 진출 쾌거를 이룬다. 이영민이 선두에서 이를 이끌었다.
이영민이 주장을 맡았던 경성축구단은 단순한 서울 연고팀이 아닌 실질적인 남한 대표팀이었다. 경성축구단 원정엔 항상 이영민 이름 석자가 뒤따랐으며 1933년 조선축구협회 창립에도 그는 중추적 역할을 했다. 이어 런던올림픽 축구 국가대표 감독까지. 이쯤 되면 ‘축구인 이영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너무 늦기 전에 이에 대한 재조명도 필요할 것이다.

◾사나이 이영민, 바람처럼 지다.
이영민은 경북 칠곡 태생이다. 대구 계성 중에서 배재고로 스카웃 될 때 ‘중학생 최초’로 전국 뉴스가 됐고 연전 입학시 또 뉴스가 되는 등 관심을 몰고다녔다. 결혼 역시 빅 뉴스였다. 이화여전 재학의 신여성인 신보배와의 결혼을 한 신문은 “조선 야구계의 빛나는 별 이영민은 피아노를 치고, 조선 여자 정구계의 패권을 잡고 있어 ‘여인으로 스포츠 걸로 명성을 드날리는’ 조선의 딸 이보배와 결혼, 장안의 화제를 불러일으켰다”고 보도했다(동아일보, 1932년 1월3일자).
그러나 최고의 스포츠 커플인 이들의 결혼은 순탄치 못했다. 원인은 인물 좋고 잘 난 이영민의 여성편력 때문이었다 한다. 이영민은 1941년 이혼하고 김모씨와 재혼한다. 전처 소생 자식들은 거의 돌보지 않았다 한다. 이것이 원인이 돼 그는 죽음에 이른다. 1954년 8월 12일 새벽 이영민은 서울 중구 필동 자택에서 괴한의 총탄 3발을 맞고 즉사한다. 며칠 뒤 검거된 범인 셋 가운데 그의 셋째 아들 이인섭(당시 20세)이 포함돼 있었다. 이인섭은 총을 소지하지 않았으며 이를 발사한 주범은 다른 이였다. 경찰조사 결과 이혼 당시 7살이던 셋째 아들은 아버지에 대한 원망이 컸으며 배재고교 재학 중 밴드부 악기를 훔치다 퇴학 당한 것으로 나타났다. 아들은 단기 5년 장기 7년 형을 받았다. 1960년 출소한 아들은 아버지 묘를 찾아 통한의 눈물을 흘렸다. 이후 그는 이영민 기념사업 등을 벌였다(‘주간야구’, 2006년 3월 특별인터뷰).
이영민은 1931년(27세) 4구락부 야구대회에서 6할1푼9리의 타율로 타격상을 받았다. 대한야구협회는 사후 그를 기려 1958년부터 ‘이영민 타격상’을 시상하고 있다. 매년 전국 규모 야구대회 출전자 중 가장 높은 타율을 기록한 고교선수가 대상이다. 백인천, 최관수, 이광환, 정현발, 김일권, 이만수, 김건우, 김경기 등이 이를 받았다.
지금도 우울할 땐 2008년 8월 베이징올림픽 일본과의 야구 준결승을 떠올린다. 8회말 2대 2 동점, 1사1루에서 그간 부진하던 이승엽이 역전 2점 홈런을 치고 들어올 때 절로 목이 멨다. 86년 전 이영민의 동대문구장 1호 홈런도 그만했을까?
이영민의 호는 송운(松雲). 망우리 공원묘지에 묘터와 묘석이 남아있다. 일세를 풍미하다 바람처럼 사라졌기 때문에 아무 말도 필요 없다는 것인지. 묘석 앞엔 생몰연도조차 없이 ‘이영민의 묘’만 새겨 있다. 뒤 역시 ‘단기 4288년 10월12일, 대한야구협회’만 있다. 하긴 천하의 이영민. 그 이상 뭐가 필요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