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용진 스포츠칼럼

제목스포츠인물열전 <15> – 동양의 ‘자전거 대장’ 엄복동(‘스포츠코리아’, 2012. 8.)2018-04-12 19:54:42
작성자

스포츠인물열전 <15> – 동양의 ‘자전거 대장’ 엄복동(‘스포츠코리아’, 2012. 8.)

1896년 제1회 아테네올림픽 남자마라톤 우승자 스피로스 루이스는 그리스 초원을 달리던 양치기이었다. 그는 별다른 훈련 없이 올림픽에 출전, 일약 우승한 후 다시 본업으로 돌아갔다. 국민적 영웅이 된 그에게 왕이 소원을 묻자 “당나귀가 끄는 수레나 한 대 있었으면…” 하고 답했다. 일설엔 그가 우편배달부였다고도 한다.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 이야기다.

1920~30년대 한국은 자전거 국가였다. 서울 인구가 30만명이던 시절 장충단 공원 등에서 열린 자전거 대회에 5만~10만명이 모여 환호했다. 그 시절 영웅이 바로 엄복동(1892~1951)이다. 그는 한 자전거 상점의 새파란 직원 신분으로 출전한 첫 대회(1913 전조선자전차경기대회)서 우승해 버렸고 이후 몇 년 간 동양의 ‘자전거 대장’으로 군림했다. 마라톤으로 조국을 감전시킨 루이스처럼 엄복동도 1920년대 초·중반 한국과 만주, 러시아의 사이클 대회를 50여개나 휩쓸며 피식민지 동포들의 열등감을 달래줬다. 루이스는 올림픽조직위가 제공한 물 대신 포도주를 마시며 달렸다. 엄복동은 번쩍번쩍 최신식 자전거 자랑하던 일본 선수 틈에서 중고 자전거를 끌고나와 번번이 우승했다. 약소민족의 열망과 좌절을 대리한 서민 스포츠 영웅은 언제나 단순하고 꾸밈없고 감동적이다. 세월이 바뀌어도 변치 않는 그 패턴의 첫 머리가 한국에선 엄복동이다.

엄복동은 서울 오장동 태생이다. 어릴 때부터 형편이 어려워 남의 집 허드레 일로 끼니를 잇고 두부공장 직공 등 닥치는 대로 일했다 한다. 그는 10대 때 경기도 평택에 있는 자전거 수입상사 일미상회에 취직한다. 회사 행상단(=영업사원)이 된 그는 매일 회사에서 서울까지 자전거를 타고 제품을 팔러 다니며 실력과 근력을 키웠다.



“엄복동은 심폐기능이 뛰어난 선수였다. 165cm 정도 키에 어깨 폭이 넓고 가슴이 유달리 컸다. 술과 담배를 하지 않아 폐활량이 매우 좋았다. 무엇보다 집념이 강해 코너를 돌다 넘어지거나 상대선수와 부딪치는 경우에도 포기하는 법이 없었다.”



1930년대 자전거선수로 활약한 엄복동 후배 박성렬의 증언이다. 평택에서 서울까지 70km. 타고난 신체조건과 근성에 더해 매일 이 거리를 오가는 직업적 훈련이 엄복동을 단련시켰을 것이다. 애초 그는 생계보다 자전거에 반해 일미상회에 취직했다 한다(‘바퀴로 세상을 돌린 소년’, 도서출판 청어람), 당시 자전거는 요즘 자동차 이상으로 문물의 표상이며 그 한 대 값이 조선인 순사(=한국인 경찰) 월급의 네 배나 됐다니 일미상회 같은 자전거 수입 판매점은 엄복동이 제 돈 안 들이고 맘껏 페달을 밞을 수 있는 매력적인 직장이었다. 구한말 미국 공사 알렌은 ‘(1896년) 조선에는 자전거 14대가 운행되고 있다’고 했다. 이것이 1910년대초 1,000대가 되며 1938년 4월엔 4만6,000대로 불어난다. 이 같은 산업 성장에 따른 마케팅 필요성과 민족 열패감 힐링이란 사회적 측면이 맞아 떨어져 엄복동은 아시아 최고의 스프린터로 우뚝 선다. 다음은 엄복동 전성기의 국내 일간지 기사.



“자전거 대장 노릇하는 엄복동 군이 이미 보도한 바와 같이 지나간 이십일 대련시 봉판정 운동장에서 열린 자전거 대경주회에 원정차로 떠났는데 개최일이 되는 이십일 아침부터 모여드는 관람자들이 무려 오만여 명에 달한 중에 특히 조선인 관람자가 많아서 엄군의 우승을 열광적으로 바라며 열심히 응원했다. 맨 나중 일류 선수의 70주 경주가 시작되매 장내는 더욱이 긴장하여지며 엄 선수는 튼튼한 기상과 용맹한 자세로 출장하여 경기는 시작되었다. 일본서는 ‘자전거 대왕’이라는 일류 선수 일본인과 또한 중국인, 조선인 연합의 경주이므로 조선인은 더욱 뛰놀았다. 이에 엄선수는 줄곧 다섯 바탕으로 앞서 놓고 돌매 일본인들은 하품을 하며 혀를 내두른 모양은 장관이었는 바 최후의 70주에 이르러 엄 선수가 일등 선착이 되고 일본인은 이착이 되고 중국인이 삼착으로 마치어…”(동아일보, 1923년 5월31일)



중국 다롄에서 1923년 5월 20일 열린 국제 자전거 대회 정경이다. 엄복동이 출전한다고 하자 한국 동포들이 격려금을 모아 그를 환영했다. 한국과 일본, 중국 등 아시아 각국 스타들 출전으로 열전이 예상됐으나 경기는 싱겁게 끝났다. 운동장을 일흔 바퀴 도는 긴 경기를 엄복동은 초장부터 제압, 시종 선두를 뺏기지 않고 우승했다. 경기 후 한국인들은 엄복동과 함께 카 퍼레이드를 벌이며 우승을 자축했다. 당시 2등한 일본인 ‘자전거 대왕’은 모리시타 마사이치(森下正一)다. 모리시타와 엄복동은 이미 구원이 짙은 사이. 민족적 앙숙이자 스포츠 라이벌로 그들은 3~4년째 아시아 패권을 다투고 있었다. 1921년 장충단 공원서 열린 자전차경주대회 때도 치열했다.

1만 명 관중이 모인 가운데 장충단 공원을 40 바퀴 도는 1류 선수경주엔 일본과 한국선수 8명이 출전했다. 엄복동은 30바퀴째까지 8등, 꼴찌였다. 한국 관중석엔 탄식이, 일본 관중석엔 미소가 번졌다. 바로 그 순간, 엄복동의 유명한 일어서기가 시작됐다. 엄복동은 뒷심이 강한 추입형 스프린터다. 마지막 몇 바퀴를 남기고 엉덩이를 뒤로 빼며 그의 등이 쑥 올라가면 한국 관중들은 ‘일어선다, 일어선다’를 합창했다. 떠나갈 듯한 추임새에 힘입어 그가 터보 엔진을 점화시키면 승부는 대개 거기서 끝났다. 이날도 같은 형국. 마지막 40 바퀴를 돌았을 때 우승 엄복동, 2위 모리시타, 3위 텐키치(天吉)이었다.

바로 전 해인 1920년엔 저 유명한 경성시민운동대회 난투극이 벌어진다. 10만 인파가 몰렸다니 흥행은 대성공. 하지만 진행이 공정치 못했다. 엄복동의 독주 우승을 막기 위해 일본인 심판이 경기중단을 선언하자 흥분한 관중들이 패싸움을 벌였다.



“여덟 사람이 용기를 다 하여 주위를 돌 새, 다른 선수들은 불행히 중도에서 다 넘어져 뒤로 떨어지고, 오직 선수 엄복동 군과 다른 일본 선수(=모리시타) 한 사람만 그나마 승부를 겨루게 되었는데, 그것도 엄복동 군은 삼심여 회를 돌고, 다른 일본 사람은 엄군보다 댓 회를 뒤떨어져, 명예의 일등은 의심 없이 엄군의 어깨에 떨어지게 되었는데 어찌 된 일인지 심판석에서 별안간 중지를 명령함에 엄군은 분함을 이기지 못하야,

“이것은 꼭 협잡으로 나를 일등을 안 주려고 하는 교활한 수단이라!” 부르짖으며 우승기 있는 곳으로 달려들어

“이깟 우승기를 두었다 무엇 하느냐”고 우승기를 잡아 꺾으니,

옆에 있던 일본 사람들이 일시에 몰려 들어 엄군을 구타하여 엄군은 마침내 목에 상처를 내고 피까지 흐르게 되매, 일반 군중들은 소리를 치며 엄복동이가 맞아 죽는다고 운동장 안으로 물결같이 달려들어 욕하는 자, 돌 던지는 자, 꾸짖는 자 등 분개한 행동은 자못 위험한 지경에 이르렀으나 다행히 경관의 진력으로 군중은 흩어지고 대회는 마침내 중지가 되고 말았는데, 자세한 전말은 추후 보도하겠으나 우선 이것만 보도하노라.”(동아일보, 1920년 5월3일)



일본 심판은 무척 다급했던 모양이다. 어이 없게도 대낮에 “일몰!”을 사유로 경기를 중단시켰으니 싸움이 나게도 생겼다. 그 와중에 엄복동은 얼굴 등 전신에 부상을 입었으나 이후에도 일본인들은 엄복동에 계속 당한다. 당시 일간지가 이렇게 비웃었다.



“일본 상인들은 목전 자전차 경주에서 조선인(=엄복동)에게 일등을 빼앗겨서 분하다 하야, 일본에 있는 선수들을 전부 초치(招致)하야 자전차경주회를 연다고. 또 지면 분사(憤死)나 할는지.”(동아일보, 1925년 6월 9일)



엄복동은 화끈한 스포츠맨이지 의사나 열사가 아니다. 하지만 다른 이들과 달리 창씨개명도 하지 않았고 일본과 관련된 대회는 모두 보이콧 했다. 일본에서 열리는 대회, 일본인이 주최한 국내 대회 또는 일왕에 대한 충성서약을 전제로 하는 조선신궁체육대회 등에 엄복동은 일체 이름을 올리지 않았다. 혹자는 삼일운동(1919) 직후 일본의 문화정치에 자전거 열기가 이용됐다고 지적한다. 신군부가 집권한 1980년대 초 프로야구 · 컬러 TV 방영 등으로 정치 불만을 운동장에 가둬놓은 것처럼 문화정치는 훨씬 전에 그걸 가뒀다. 하지만 관중이 수만명 씩 몰린 사이클 대회장은 자연스레 한국 대 일본 민족 대결 양상을 띄었고 엄복동은 그 정점에서 민족 선수로서 자부심을 버리지 않은 것 또한 사실이다. 엄복동이 우승깃대를 꺾으며 내뱉은 ‘협잡’과 ‘교활’이란 말은 당시로선 무척 통쾌한 정치적 언사였을 것이다. 엄복동 출전 경기가 열린 경복궁, 장충단 공원 등엔 일본경관 1백여명 씩이 동원됐다. 당시 서울 경찰관 숫자가 총 1,500명이던 시절이다. 운동선수 엄복동의 파괴력은 그만큼 일제 강점기 하 요주의 대상이었다. 경기장 소요 주도자라고 일경은 여러 차례 엄복동을 체포했으나 한인들이 강력 반발해 곧 풀어주곤 했다.

엄복동은 1926년 서울 장충단 대회를 끝으로 은퇴(34세)했다. 6년후 조선인이 개최한 ‘전조선 남녀 자전거 대회’(1932년, 40세) 1만m에서 다시 우승, 건재를 과시했으나 무단통치와 태평양전쟁 암흑기 속에서 그의 종적은 곧 퇴색한다. 선수 시절 적잖은 상금과 상품을 타기도 했지만 이미 흘러간 스타였다. 광복 후엔 피압박 민족의 아이콘도 아니었다. 자신의 전성기 시절 경기 모습이 담긴 사진을 팔아야 할 정도로 생계가 어려웠다 한다. 동두천과 연천 일대에서 사실상 방랑 생활을 하던 그는 6·25 전쟁 중 동두천 근처 야산에서 폭격 당해 세상을 뜬다. 1951년 1·4후퇴 때(60세)라고만 알려졌을 뿐 정확한 사망일자도 모른다. 역사가 그에게 의미를 부여할 겨를도 없이 엄복동은 전쟁 와중에서 스러져버렸다. 하지만 아무 것도 없진 않다.

그가 말년을 보낸 의정부시 사이클 벨로드롬 경기장 입구에 1987년 ‘사이클 영웅 엄복동 선수 상’이 섰다. 관중을 향해 손 흔드는 모습의 좌대 높이 2.8m, 동상 높이 3m짜리 청동입상(조각 이일영)이다. 그가 전성기 시절 타던 ‘엄복동 자전거’(1910~14년 영국 러지사 제작)는 근대문화유산으로 등록됐다. 엄복동의 아버지는 엄선양, 어머니는 김씨다. 엄복동은 당시로선 늦은 서른살에 서울 출신 열아홉 살 규수 최순이와 결혼해 1남2녀를 뒀다. 그러나 이들 또한 허망해 부인 최씨와 두 딸은 전쟁 중에 종적이 불명하고 아들 엄만길만 남았다. 손자 엄재룡이 할아버지 피를 이어받아 한때 고교 사이클 유망주로 신문에 오르내렸다. 대한사이클연맹 주최 엄복동배 전국사이클경기대회(1977~1999년)가 열렸으나 지금은 중단됐다.

전성 시절 엄복동은 중요한 경기에서 항상 타이거 우즈나 붉은 악마처럼 빨간 셔츠를 입었다. 그 붉은 자신감이 동시대 후배인 조수만, 한공식, 엄귀석, 이윤백 등을 거쳐 최근 조호성까지 이어진다. 그 단초는 노래였다. “떴다 보아라 안창남 비행기, 내려다 보니 엄복동 자전거”. 1920년대 ‘이팔청춘가’의 가사를 바꾼 이 노래가 겨레에 구전됐음은 한국 사이클의 행운이다. 비록 마라토너 손기정 등과 달리 좋은 학교 못 나오고 엘리트 선수 대접도 못 받아 행적까지 묘연하나 어떤 스포츠맨도 엄복동처럼 남의 가슴을 울리진 못했다. 그는 한바탕 노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