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용진 스포츠칼럼

제목스포츠인물 열전 ⓮ – 프로농구의 아버지 김영기2018-04-12 19:56:28
작성자

스포츠인물 열전 ⓮ – 프로농구의 아버지 김영기


내 장모는 올해 82세고 스포츠 문외한이다. 내가 김영기에 관해 쓴다고 하자, “누구?”하고 물었다. “옛날 농구선수 김영기요” 하자 “아 그 키 작은 선수? 무척 잘 했어. 그래서 알아”라고 했다.

 

7월1일부터 집무 개시한 KBL(한국프로농구연맹) 제7대 김영기(78) 총재는 현역 시절 키 작고 뛰어난 선수로 통했다. 신동파(65) 직전 그는 한국 최초의 아시아 톱 플레이어였다. 1965년1월 국내 종합농구선수권대회서 기업은행 소속으로 연세대를 상대로 35점 개인득점을 올리며 31세로 은퇴하기까지 그는 ABC(아시아남자농구선수권) 사상 경기당 최다평균득점(28.8점)과 최고야투성공률(58%)을 기록했다. 현역 은퇴 후 그가 지휘봉을 잡은 국가대표는 한국 농구 사상 처음으로 ABC대회(1969년 방콕)와 아시안게임(1970년 방콕)에서 우승해 명실공히 아시아 정상에 올랐다. 선수와 지도자로서 김영기는 한국농구 전성기의 정점이다. 그러나 천하의 김영기도 시작은 황당했다.

 

“코트에 서니 모두가 나만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았다.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 어느 순간 갑자기 내게 공이 날아왔다. … 노마크 찬스! 나는 멋진 폼을 상상하면서 골밑을 박차고 오르며 레이업 슛을 했다. 하지만 공은 림도 맞지 않은 채 빗나갔다. 함성과 폭소가 터졌다. ‘임마, 정신 차려. 우리 골대에 슛을 하면 어떡해!’ 동료의 고함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김영기,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중앙일보 2004. 6. 22.)

 

하도 재밌어 인용하다가도 웃음이 난다. 축구선수가 단독 드리블 끝에 자신의 골에 슈팅한다거나 1위로 달리던 마라토너가 피니시 직전에서 갑자기 뒤돌아 달린 경우도 있어 이해가 가며 안쓰럽다. 바로 서울시춘계고교농구리그전에 첫 선 보인 배재고 2학년(1953년·18세) 풋내기 선수 김영기의 데뷔담이다. 그러나 그 후 몇 년 만에 그는 아시아 톱스타가 되고 40여년 후 프로농구 KBL을 창설(1997년·62세)해 두 차례(3대, 7대) 총재가 된다. 김영기와 동년배인 농구원로 이해병(77)은 이렇게 말한다. “그는 선수, 지도자, 농구행정인, 사회인으로서 모두 최고에 올랐다. 어려서부터 뭘 해도 주관이 뚜렷했다. 집념과 끈기, 인덕(人德), 리더십에서 독보적이다.”

 

  • 한 밤에 한강 검은 물을 보고 울다.

농구 선수 김영기는 지난날 ‘원조 오빠’였다. 도쿄 올림픽 출전시엔 600통이나 되는 팬레터 속에서 약혼녀의 편지를 고르느라 애쓸 정도로 톡톡히 인기 맛을 봤다. 아시아 최고의 스타 플레이어로 올림픽에 두 차례(1956년 멜버른, 1964년 도쿄 올림픽) 나갔으며 지도자로서도 아시아 정상이었다. 요즘도 한국 농구는 아시아 최강인 중국을 만나면 전의를 불태운다. 중국만 꺾으면 지난날 방콕 아시안 게임에서 감격적으로 초등(初登)했던 그 고지가 바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한국 농구는 아직도 아시아 무대에서 김영기의 음영에 있다.

그는 또 종합 스포츠맨으로서도 행운아였다. 국가대표선수단 총감독으로 참가한 1984년 LA올림픽에서 한국 올림픽 출전사상 첫 10강(금6, 은6, 동7개)을 지휘했다. 특히 그의 고대 후배이자 제자 격인 조승연 감독이 이끄는 국가대표 여자농구는 LA에서 난적 중국을 격파하며 결승까지 올라 은메달을 선사했다. 이밖에 그는 대한체육회 이사, KOC(대한올림픽위원회) 부위원장, 대학스포츠위원회 위원장, 대한체육회 부회장(1983~1989) 등을 지냈다.

오래 된 기억 하나. 1981년 9월30일 저녁 독일 바덴바덴에서 후안 안토니오 사마란치 IOC(국제올림픽위원회) 위원장이 1988년 올림픽 개최지로 ‘세울 꼬레아’를 외칠 때 국내 KBS 방송 생중계 해설자가 바로 김영기였다. 나고야를 누르고 올림픽 유치를 따낸 그 믿기 힘든 그 역전극에 해설자 김영기도 순간 당황하던 모습이 아직까지 생생하다. 그는 금세 정상을 찾더니 새벽 늦게까지 특별 방송을 진행했다.

하지만 김영기 최대의 작품은 누가 뭐래도 KBL 창설이다. 스타 플레이어, 스포츠행정가, 성공한 금융인(신보창업투자 사장 등)으로서 그의 전 캐리어가 바로 단 하나, 프로농구를 위한 것이었다는 듯 그는 혼신을 다했다.

프로농구 추진은 1992년부터였다. 김영기가 당시 김상하 농구협회장에게 건의해 이듬해 스터디 그룹 격인 프로농구 소위원회를 만들었으나 처음부터 반대가 심했다. 대기업 구단들로서는 프로리그보다 훨씬 적은 투자로 쉽사리 우승할 수 있는 기존 농구대잔치 제도를 굳이 포기할 필요가 없었으며 대학은 대학대로 실업팀에 대한 선수공급원 역할이 약화될 게 뻔해 거세게 반발했다. 그의 모교인 고대 등이 앞장 서 김영기를 성토하는 바람에 KBL 창립(1996년 10월) 이후에도 문화체육부 내에선 리그 시행을 늦춰야한다는 의견이 비등했다. “한국 농구 망치는 ××” 등 야밤에 수시로 전화선을 타는 욕설 탓에 김영기는 신경쇠약에 시달렸다.

우여곡절 끝에 8개 구단 연고지를 확정하고 인감도장을 1,000번 이상 찍으면서 사단법인 KBL 인가를 받는 등 동분서주해 마침내 1997년 2월1일. 서울올림픽 공원 제2체육관(펜싱경기장) 프로농구 개막식 입장권이 동나고 가수 신효범이 무반주로 애국가를 열창하고 이수성 국무총리가 개막전(대우-SBS) 시구를 하던 날, 김영기는 밤늦게 귀가 중 차를 일부러 한강 잠실 선착장에 댔다. 검은 물이 눈에 들어왔다. 카에자르와 우에무라 나오미, 또는 지난날 장군들이 그랬을 것이다. 원정 성공 직후의 고독인지 안도감인지 지난 5년의 세월인지 눈물인지 모를 것이 한꺼번에 왈칵 쏟아졌다. “기어코 해냈구나. …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이루었다는 감격에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도 잊고 마냥 서 있었다”(김영기,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에피소드 하나. 개막식 점프볼 시구자인 당시 국무총리 이수성은 이례적으로 자유투까지 던져 성공시켰다. 이를 위해 그는 KBL에 특별 부탁한 농구화를 코트에 신고 나왔으며 며칠 전부터 농구 특별과외를 받을 만큼 열성이었음이 후일 알려졌다. 프로농구는 개막식은 국민적 관심사였다.

 

  • 무사(無私)와 포용의 리더십, ‘당신도 농구인이야

김영기는 아버지 김귀봉, 어머니 함성희의 외아들로 1936년 서울 중구 초동에서 태어났다. 외동아들답게 혼자 뭐든 잘 하는데다 원래 잘 난 사람이다. 배재고 2학년 때 농구부에 들었으나 3학년 땐 농구를 못했다. 축구부 폭력 사태로 학교 당국이 1년간 전 운동부 대회출전을 금지시켰기 때문이다. 대회 참가를 못하고 연습할 필요도 없어서 남들처럼 시험을 쳐 고려대 법대에 합격했다. 면접날 교수가 시험성적을 보더니 물었다. “운동선수 맞나?”면접관 앞에서 문제를 풀고나서야 그는 커닝 혐의를 벗었다.

고대 → 농업은행(현재 농협 전신) → 기업은행을 거치는 동안 득점기계로 이름을 날렸으나 동료 선후배 사이에선 개인 플레이를 한다는 질시도 받았다. 트위스트 슛, 비하인드 백 패스, 원 핸드 슈팅 등을 그는 미국 서적을 통해 거의 혼자 배웠다. 당시만 해도 한 손으로 슈팅하면 자세가 불안하다며 코치들이 말리던 때였다. 일부 선배들은 그의 농구 스타일을 ‘건방지다’고 나무랐다. 하지만 이해병의 말대로 그는 워낙 ‘주관이 뚜렷한’ 사람이다. 더 나은 것, 옳은 것을 쳐다보는 비전과 남이 뭐라건 그것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의지는 리더십의 기본이다. ‘시기상조’ 등 각종 태클에도 불구하고 프로농구로 일로매진한 김영기의 단초는 국내 첫 ‘원 핸드 슈터’로 ‘건방지게’ 농구 하던 대학시절 이미 노출됐다.

그러나 아무리 출중한 플레이어도 혼자 이길 순 없다. 김영기 주변엔 항상 후배들이 몰렸다. 그는 고대 출신이지만 이인표(건대), 김인건(연대), 방열(연대), 신동파(연대) 등 범(汎) 아우 군단, 제자 군단이 그를 따랐다. “그 분은 한 마디로 사(私)가 없어요. 어떻게 보면 연대를 더 선호하는 것 아닌가 오해 받을 정도로 공평해요”라고 고대 후배 조승연은 말한다. KBL 총재를 지낸 한 인사는 기자나 KBL 직원들에게 “당신은 농구인이 아니다”란 말을 예사로 하곤 했다. 김영기는 그 반대다. 전무이사와 총재시절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당신도 농구인”이라며 직원은 물론 기자들을 설득했고 KBL 내부를 다독였다. 무사(無私)와 포용은 김영기 리더십의 기본이다. ‘나를 따르라’가 아니라 다른 이로 하여금 스스로 따르게 만든다.

 

  • 누군가 책임을 져야지

김영기는 대부분 뛰어난 운동선수처럼 연습의 화신이다. 그의 소문난 드리블 재간은 고교시절 아버지로부터 선물받은 농구공을 튀기면서 남산 비탈길을 달린 덕에 얻은 것이다. 이때 남산 동료는 후에 다 날렸다. “재밌는 것은 … 세계복싱협회(WBA) 주니어미들급 챔피언을 딴 권투선수 김기수, 남자 국가대표팀 감독을 지낸 농구선수 김영기씨가 당시 다 남산에서 연습을 하는 거야. 김영기씨가 장충단 공원부터 드리블하며 산을 오르는 걸 내가 목격했다니까.”(야구감독 김응룡의 회고)

그는 영어도 운동처럼 여긴다. 국가대표 코치 시절 국제경기에서 룰 미팅이나 항의 때문에 영어 필요성을 절감한 이래 40년 이상 수련 중이다. 수천 개의 문장을 머리 속에 입력하고 습관적으로 영어 추리소설을 읽고 있다. 한 때 태릉선수촌에서 그의 별명은 ‘진도’였다. 무료한 선수촌 생활을 달래느라 영어 에로소설을 동료 감독들에게 번역해 읽어줬는데 그들이 자주 “진도 나가자”고 졸랐기 때문이다.

자신을 수련시킨 이들의 특징 중 하나가 자부심과 원칙주의다. 다음은 그 일화.

 

#1. 오일쇼크가 한창이던 1973년 농구팀은 예정에 없는 이란 원정경기를 했다. 친선이 명분이지만 실은 체육을 통한 오일외교의 일환이었다. 이란 대표팀과 경기 직전 당시 청와대 경호실 차장이자 선수단장이던 신동관이 은근히 져주길 청했다. ‘국익 패배’가 받아들여지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김영기 코치는 단호히 거절했다. “스포츠 정신에 어긋나는 일은 할 수 없습니다.” 대표팀은 세 차례 경기 중 두 번을 이겼다.

#2. 제3공화국 시절 당시 TV해설자던 김영기를 찍어 여자 농구 창단감독 섭외가 들어왔다. 영부인 뜻이고 전달자는 박종규 경호실장. 그러나 김영기는 “여자농구는 자신없다”고 거절했다. 특별한 목적으로 팀을 운영하는 것은 종목을 퇴보시킬 수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얼마 후 청와대서 만난 안주인 육영수가 “농구를 하면 정말 키가 크나요?” 하며 아들 박지만의 농구지도를 부탁했다. 김영기는 이마져 거절했다. 권력자 아들 개인지도는 그의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기 때문이다. 후에 다른 이가 가르쳤고 청와대 한쪽에 농구코트가 세워졌다.

 

김영기가 제3대 총재(2002년 11월∼2004년 4월)로 재직하던 2003년 12월20일 KBL 최대 사건이 일어났다. 원주 KCC와 안양 SBS 경기 도중 SBS가 심판판정에 불만을 품고 코트를 나와 버리자 심판이 SBS에 몰수경기 패배를 선언해버렸다. 관중 앞에서 프로들이 경기를 포기한 초유의 사태를 두고 그는 밤새 고민 끝에 이튿날 총재직 사직을 발표한다. 기자회견에서 한 기자가 총재가 책임지는 것은 너무 하지 않냐고 물었다. 그의 답은 이렇다. “순간 나는 ‘우리 사회가 참 관대하구나’하고 생각했다. 구단, 심판, 선수, 지도자가 서로 싸우다가 생긴 일이기 때문에 당연히 KBL 수장이 책임져 이같은 일이 되풀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 내 결론이다”(김영기,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스타 플레이어는 스스로 강해지고 스스로 통제한다. 김영기가 책임진 것은 자신이 만든 KBL의 무책임성이었다. 사직은 그다운 처신이었다.

 

  • 초심(初心)이 왕도(王道).

지난 5월22일 김영기는 다시 KBL에 돌아왔다. ‘내가 농구를 잊고 어찌 살 수 있을까’ 속으로 되물으며 사직서를 낸 지 11년만에 제7대 총재로 컴백 했다. 그간 김영수, 전육, 한선교 세 명의 총재가 지나갔다. 그간 프로농구는 경기당 득점 수가 줄고 관중 수는 곤두박질 쳤으며 경기 스피드는 느려졌다. 급기야 감독이 개입한 승부조작까지 터져 몰릴대로 몰렸다. 애초 한선교 전임이 이같은 총체적 난국을 수습할 적임으로 그를 천거했을 때 김영기는 휴대전화를 끄는 것으로 대응했다. ‘내 나이가 몇인데…’ 아무리 강권해도 안 나갈 생각이었다. 그러자 친구들이 떠밀었다. “야, 우리 나이에 누가 불러주나. 자네가 필요하다는데 가야지. 부럽네.” 이용만(전 재무장관), 박수길(전 유엔대사), 박종석(전 한화부회장) 등 고대법대 55년 입학동기들이 그를 격려했다. 10개 구단주들의 전적인 협조를 약속 받고 터미네이터처럼 그는 다시 왔다. 왕의 귀환. 이번이 농구인, 자연인 김영기의 마지막 책임일 것이다.

그는 지난 6월18일 한양CC 구코스에서 아마추어 골퍼들의 꿈인 에이지 슈트(자신의 나이와 같거나 아래 타수를 치는 것)를 했다. 앞서의 대학동창들을 동반자로 5오버파 77타(39-38)를 쳤다. 버디를 세 개나 잡았으며 드라이버도 장타여서 게 중 몇 개는 230m나 날았다. 친구들이 시니어용 레드 티에서 칠 때 그는 일반 화이트 티에서 쳤다. 35년 구력에 베스트 스코어는 이븐파 72타(2005년 휘닉스파크GC). 첫 홀부터 성적에 상관없이 동반자들끼리 ‘올 파’를 합의하는 풍토를 그는 아주 싫어한다. 그린에서도 기브는 퍼트 반 토막 이내에 한정한다. 70대 후반 나이지만 골프장에서 보여주는 김영기의 매너와 체력, 집중력은 KBL 총재직 수행에 아무 문제가 없음을 증명한다.

지난 1965년 결혼한 부인 이진숙과 사이에 2남1녀. 차남 김상식(서울 삼성 썬더스 코치)은 고려대, 기업은행 선수 등 아버지 길을 그대로 따랐다. 한창 때 소주 8병도 했으나 지금은 한 병 이하, 2차는 사절이다.

“초심으로 돌아가 재밌고 빠른 농구를 해야지요. 우리가 변하면 팬들은 반드시 다시 돌아옵니다.” 프로농구를 만든 프로농구의 아버지 김영기는 확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