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용진 스포츠칼럼

제목스포츠인물열전 ⓭ – 첫 동계 올림피언 김정연2018-04-12 19:58:23
작성자

스포츠인물열전 ⓭ – 첫 동계 올림피언 김정연


스포츠에도 영토가 있다. 농구는 미국이 잘 하고 양궁은 한국이 잘 한다. 그러나 제21회 2010년 뱅쿠버(캐나다) 동계올림픽에선 이런 통념이 송두리째 흔들렸다. 빙상 변방 한국이 피겨와 스피드 스케이팅에서 금메달 넷을 땄다. 세계가 놀랐다. 구미 종주국들은 힘없이 본토를 내줘 놀랐고 한국은 불가능이 눈앞에서 이뤄져 더 놀랐다.

피겨 스케이팅 김연아가 뱅쿠버 이전부터 월드 스타로 기대를 모은 반면 스피드 스케이팅의 이상화, 모태범, 이승훈 등은 사실 올림픽 이전까지 국내 일반들에게도 잘 알려지지 않았다. 이상화, 모태범이 빙속 500m에서 여, 남 동반우승한 것은 동계올림픽이 생긴 제1회 1924년 샤모니(프랑스) 대회 이래 처음 있는 일이다. 빙속 1만m 이승훈의 우승은 1936년 제4회 카르미쉬-파르텐키르헨(독일) 동계올림픽에서 한국인 김정연이 13위 한 이래 74년만의 선물이어서 의미가 각별했다. 아마 당사자인 고(故) 김정연(金正淵·1910~1992) 전 한국빙상연맹회장이 봤더라면 너무 놀라 춤 출 것도 잊은 채 눈물만 흘렸을 것이다. 또는 손등을 세게 꼬집었을지 모른다. 그만큼 동계올림픽 스케이팅 우승은 믿을 수 없는 경사였다.

 

  • 아시아 샛별’, 세계의 주목을 받다.

김정연은 두 살 연하인 손기정과 같은 세대다. 조국을 빼앗긴 직후 태어난 김정연과 손기정은 한창 부글대는 피식민지 청년의 울분을 스케이트화로, 마라톤화로 달랬다. 빙속이나 마라톤 모두 당시 한국이 일본보다 우세했다. 두 종목에서 일본인을 제치고 대표선수에 선발된 그들은 각각 한국인 최초의 동계(=김정연), 하계(=손기정) 올림픽 출전자로 기록된다. 둘 다 남의 나라 국기를 달고, 남의 나라 발음인 긴세이엔(=김정연)과 기테이 손(=손기정)으로 올림픽에 출전했다. 손기정이 1936년 여름 베를린에서 우승했고 김정연은 그보다 6개월 전 같은 해 겨울 카르미쉬에서 최선을 다 했다. 37명이 출전한 1500m에서 김정연은 15위(2분25초F), 39명이 출전한 5000m에서 21위(8분55초9), 30명 출전한 1만m에서는 13위(18분2초8) 했다. 이중 1500m와 1만m는 일본신기록이었으며 1만m는 특히 올림픽신기록이었다. 각 종목 모두 중위권이었으나 당시로서 동양인 김정연의 선전은 획기적이었다. 그의 1만m 13위는 당시까지 아시아 선수가 빙속 장거리에서 올린 최고 성적이며 올림픽신기록 수립도 동양인으로선 그가 처음이다.


김정연은 그 전부터 이미 아시아 스타였다. 1500, 5000, 1만m 전일본(全日本=한국+일본+만주) 신기록 보유자였으며 올림픽 참가 직전 현지 적응훈련 격으로 참가한 스위스 다보스 세계빙상선수권대회(1936.2.)에서도 11위를 했다. 당시 세계선수권은 현재의 쇼트트랙 종합순위 산정과 비슷하게 각 종목 합산으로 순위를 매겼다. 먼저 500, 1500, 5000m 경기를 치른 후 성적을 합쳐 종합순위 16위 이내에게만 1만m 출전 자격을 줬는데 그는 동행한 일본대표 7명 중 유일하게 여기 통과, 최종 종합11위를 기록했다. 이것 역시 당시까지 세계선수권서 거둔 동양 선수 최고 성적으로 그는 일찌기 아시아의 샛별이었다.

 

  • 응답하라, 1934” – 빙속 전성시대

빙속은 한 때 동·하계를 불문하고 한국 스포츠의 총아였다. 뱅쿠버 올림픽 이전엔 1934년이 클라이맥스였다.

제4회 카르미쉬-파르텐키르헨 동계 올림픽 출전 선수를 뽑는 최종 선발전은 1935년 1월 열렸다. 그런데 이미 두 달 전인 1934년 말 조선일보는 한국인이 동계올림픽 무대를 밟을 것이라고 단언한다.

 

“우리의 빙상계는 년년히 약진에 약진을 거듭하야, 오늘에는 전동양적 패권을 모조리 그것도 제 1,2,3위까지 마음대로 차지하야, 빙상 조선의 숨은 역량을 발휘 … 명년(1936년) 2월 독일에서 열리는 동계올림픽 스피드 스케이팅(氷速) 부문에 조선 선수가 출전할 날을 맞이하게 되였다.”(고봉오 기자, 조선일보 1934.12.14.)

 

스피드 스케이팅은 기록경기다. 그 자신 1930년대 초 압록강 링크에서 날리던 빙속 선수 출신 기자로서 고봉오는 기록 분석에 입각해 이처럼 자신 있게 내다봤다.

당시 대회 입상 명단 중 일본선수 이름은 가뭄에 콩나듯 했다. 1933년 1월 제9회 ‘전조선남녀빙상경기대회’(한강)에선 이성덕이 스피드 스케이팅 전종목(500, 1500, 5,000, 1만m)을 석권했다. 1934년 1월초 열린 ‘전일본학생빙상대회’(한강)에선 최용진이 500, 1500m를, 김정연이 5000과 1만m를 각각 우승해 한국 독무대를 이뤘다. 이는 바로 한 달 뒤 올림픽 대표팀 선발 1차전을 겸해 열린 ‘제5회 전일본빙상선수권’(1934년 2월·압록강)에서도 반복된다. 이성덕이 1500m, 김정연이 5000m에서 우승하고 1만m에선 김정연, 이성덕, 최용진이 각각 1, 2, 3위에 오른다.

고봉오의 예단대로 올림픽 선발 최종 2차전(1935년 2월·일본 릿코) 역시 한국 독주로 끝났다. ‘제6회 전일본빙상선수권’을 겸해 열린 이 2차 선발전에서 김정연은 5000m와 1만m 우승으로 올림픽 티켓을 선취한다. 이성덕이 1500m 2위, 장우식도 5000m 4위와 1만m 2위에 올라 대표선수에 합세한다. 이로써 ‘긴 세이엔’, ‘리 세이도쿠’(=이성덕), ‘조 유소쿠’(=장우식) 3인은 어색한 엔트리 명(名)에도 불구하고 동·하계를 통틀어 첫 한국인 올림피언이 됐다.

엘리트의 분전은 생활체육 빙속으로도 이어졌다. ‘조선녀자빙상경기대회’가 1934, 35년 이태 연속 한강에서 열려 빙상 열기를 후끈 달궜다. ‘박래품’(=수입품) 일색이던 스케이트 화도 품질 좋은 국산으로 대체되기 시작했다(‘박래품을 능가하는 조선산 스케이트’, 1933.12.12.). 모더니즘 시인 김기림은 “기-다란 흰 날로 태양의 광선을 선듯선듯 끊는 그 표연한 롱 스케-트의 모양을 매우 사랑했다”(‘어느 오후의 스-케트 철학’, 1935.2.12.)고 썼다. 1936년 겨울 시즌엔 창경원 스케이트장 입장자가 3만8천명을 돌파, 그 전해의 두 배 반에 달할 정도로 인기 급상승했다(1936.2.19. ※이상 조선일보).

1930년대 빙속 열기는 이런 것들을 합친, 모더니즘과 박래품·새것 취향·유행·민족적 울분 등의 에너지가 넘치고 섞인 복합체였다. 김정연은 그 전성기 최고점이었다.

 

  • 연습은 꼭 좋은 링크에서 할 필요가 없다

김정연은 평양과 진남포 중간에 위치한 평안남도 강서에서 태어났다. 비교적 유족한 집안이어서 평양에 유학, 평양보통학교와 평양고등보통학교를 거치는 동안 과히 어려움 없이 스케이팅에 열중할 수 있었다고 한다. 스케이팅 입문도 자연스러웠을 것이다.

 

“평양은 비교적 추운 날씨가 오래 계속 되었다. 각 학교의 체육시간에 스케이팅을 정규과목으로 채택하여 대동강에는 각 학교의 전용 링크를 마련해서 제각기 스케이팅에 열중했다.”(김정연, ‘빙상생활 20년의 회상’. 월간중앙 1972.4.)

 

빙질 탄탄한 대동강 자연 링크를 구획 나눠 각 학교가 스케이팅 교육하며 서로 경쟁도 했을 유쾌한 풍경이 그려진다. 평양과 서울은 축구 뿐 아니라 스케이팅에서도 라이벌이었다.

 

“그 당시에는 빙상인 연맹으로 경성에 백구(白狗)구락부가 있었고 평양에 연광(練光)구락부가 있었다. 내가 평양고보 4학년 때 제2회 동계 경·평전(京平戰)이 열렸다. 경·평전이란 실질적으로 양교 구락부의 대결이었다.”(‘회상’)

 

연광구락부원이던 김정연은 제2회 동계 경·평전에 출전해 각 종목 3위 정도의 성적으로 자신감을 얻는다. 재미있는 사실은 베를린올림픽에 출전했던 한국 축구의 아버지 김용식(1910~1985)이 당시엔 서울 백구구락부의 맹장이었다는 점이다. 김용식은 지나친 강화 훈련 끝에 허리를 다쳐 스케이팅을 그만 두고 축구로 전환한다.

대동강 세찬 풍설을 뚫고 자연빙에서 하루 5~6km씩 연습하던 김정연은 1932년(22세) 일본 메이지대 법학과에 진학, 빙상부에 들면서부터 본격적인 훈련을 받는다. 당시 메이지대는 빙속 라이벌 와세다 대에 수년간 눌러 왔던 터, 김정연의 진학엔 대학측 스카우트 손짓도 있었을 것이다. 동시대 유망주인 이성덕이 와세다대로, 최용진과 강우식은 메이지대로 1~2년 새 엇갈려 진학한 점도 그같은 정황을 뒷받침한다.

메이지대 빙상부 규율은 엄했다. 1800m 고지인 군마(群馬) 현 아카기(赤成) 산 정상의 천연호수 400m 링크를 100바퀴 씩 돌기도 했으며 평시에도 다방, 댄스홀 출입을 금했다. 두 시간 정도 산에 올라 정상 호수에 쌓인 눈을 치우고 링크를 만들어 운동하는데 산꼭대기라 추위가 살을 에일 듯했다. 악천후 강풍 속에서 근육 감각도 잃은 채 달리기 일쑤였다. 그러나 그는 이런 경험이 ‘약’이라고 충고한다. “악조건에서 피나는 연습을 하면 그 효과는 반드시 놀랍게 나타난다. 트레이닝은 반드시 좋은 링크에서 할 필요가 없다”(‘회상’). 뱅쿠버와 소치동계올림픽의 빙속 ‘여제’ 이상화는 일부러 모태범, 이승훈 등 남자 동료와 함께 훈련했다. 남자선수가 80% 힘들면 여성인 자신은 150% 힘들 수 있다는 게 그 이유다. 김정연의 아카기 산은 이상화의 남자선수였다. 약 80년차 선후배지만, 둘은 견디고, 이기고, 나중에 웃는다는 점에서 공통된다.

선수영입과 강훈으로 메이지대는 1930년대 중반 일본 빙상계 최강이 됐다. 김정연은 1933년(23세) 메이지대 빙상부를 주축으로 결성된 펭귄구락부 주장을 맡는다. 회원 20명, 고문엔 당시 일본체육회 전무이사던 실력자 이상백을 추대했다. 펭귄구락부는 베를린올림픽 파견 마라톤대표 선발대회 참가차 도쿄에 온 손기정의 숙식을 돌봤으며 승용차를 전세 내 그의 풀코스 역주를 격려하기도 했다.

  • 힘껏, 맘껏, 가슴이 아프도록 뛰었습니다.”

제4회 동계올림픽 개최지 이름이 긴 것은 두 고을이 합쳤기 때문이다. 오스트리아와 인접한 독일 남부 바바리아 지방 고산지대로 카르미쉬에선 빙상경기가, 파르텐키르헨에선 설상경기가 열렸다.


사상 첫 올림픽 참가차 이역만리로 떠나는 김정연, 이성덕, 강우식 3인은 가는 곳마다 열렬한 환송을 받았다. 1935년 12월1일 오후 일본 토쿄에서 출발해 부산, 대구(이상 2일), 서울(3일), 평양(4일)을 거쳐 중국 봉천에서 합숙훈련(5일 ~ 1936년1월2일)한 뒤 시베리아 횡단열차로 러시아를 관통해 독일 베를린에 도착한 것이 1936년 1월4일. 이어 노르웨이 오슬로전(全)유럽빙상선수권(1월25~26일)과 스위스 다보스세계빙상선수권(2월1~2일)에 참가해 실전 기량을 쌓은 뒤 본 게임인 제4회 카르미쉬-파르텐기르헨 동계올림픽(2월6~16일)에 출전했으니 여기까지 2개월 이상이 걸린 실로 장도(長途)였다.

출국 직전 서울에 들른 김정연에게 동아일보 사장이던 고하 송진우가 부탁했다. “독일엔 상주특파원이 없으니 올림픽에 출전하게 된 감상과 현지 표정, 경기 진행경과 등을 기사로 써 보내주게.” 고하가 송료로 건넨 돈 5원을 받고 김정연은 이후 17차례나 기사를 작성해 본국 독자에게 전했다. 요즘으로 치면 스트레이트 경기 기사와 가십, 기자칼럼, 스케치 기사 등을 몽땅 보내라는 주문이니 고참 기자나 소화할 일을 김정연은 직접 경기에 참가하며 매일 한 차례 이상 해냈다. 4월초 기나긴 항해를 끝내고 귀국한 그에게 당시 동아일보 운동기자던 이길용이 신문에 실린 기사를 스크랩해 전해줬다. “수고했소‘. 물론 원고료는 한 푼도 없었다. 다음은 김정연이 송고한 2월12일 5000m 경기 기사.

 

“오전 열시 개시(開始). 이날 기온은 영하 10도, 미풍, 빙질은 전날과 같엇습니다.

참가 16개국에 선수는 35명입니다. … 저는 미국의 일인자 슈로더와 병주(幷走)하야 6초8의 차로 그만 패하였습니다. 저는 힘껏, 맘껏, 가슴이 아프도록 뛰었습니다.

뻬스트를 다 하였습니다. 조금도 후회가 없습니다. …그저 좀 더 노력하여야 외국선수들과 어깨를 겨룰 수 있겠다는 것을 자각하엿습니다.”(동아일보, 1936.3.11.)

 

김정연은 이 기사에 이어 외국선수와 한국선수 전적까지 정확히 기록해 스포츠 보도 요건을 120% 충족시켰다. 그러면서도 보통 기사문에서 볼 수 없는 행간의 감동이 짙은 것은 그가 ‘힘껏, 맘껏, 가슴이 아프도록’ 뛰고 썼기 때문일 것이다. 메이지대 법학부의 지력과 아시아 최고의 스프린터를 한 몸에 구현한 김정연의 이 기사는 오늘날에도 귀감이다. 누가 이렇게 쓰겠는가?

 

  • 내 맘은 언제나 싸늘하면서도 아름다운 빙면에서 뛰놀고 있다

김정연은 광복 후 대한체육회 상무이사, 대한올림픽위원회 상임위원, 대한빙상경기연맹 회장을 역임 했으며, 1956년 제7회 코티나담페초(이탈리아) 동계 올림픽 한국선수단 총감독으로 참가했다. 1963년에는 스위스 로잔에서 열린 토쿄올림픽 남북 단일팀 구성 회담에 한국측 대표로도 참석했다. 대한민국 문화포장을 받았고 대한빙상연맹 명예회장을 역임했다.

키 173cm, 호리호리하면서도 건장한 체구며 목소리는 나직했고 천천히 얘기해 상대를 설득하는 타입이었다. 일장기 말소 의거기자 이길용의 아들이며 역시 체육기자인 이태영은 그를 “신사며 수련이 되신 분이다. 한 번도 화내는 걸 못 봤다. 존경할 만한 스포츠맨”이라고 회상했다.

북한 출신인 김정연은 평생 통일조국과 남북 단일팀을 소원했다. 1972년 제11회 삿포로(일본) 동계올림픽을 관전한 뒤 ‘군함같다’고 서구 빙속 파워를 부러워하면서도 그는 “남북이 통일되어 막강한 단일 팀으로 출전하였던들 얼마나 통쾌했을까”(‘회상’)라고 안타까와 했다. 실향의 슬픔까지 겹쳐 만년엔 술로 시름을 달래기도 했다.

스피드 스케이팅이 뭔가. 김정연은 한낱 운동인 빙속을 이렇게 승화시킨다.


“지금도 내 마음은 언제나 싸늘하면서도 아름다운 빙면에서 뛰놀고 있다. 스피드 스케이팅은 스포츠이면서 예술이며 어떤 면에서는 빙판의 서정시이기도 하다. …강인한 고투(苦鬪)와 의지를 요구하는 스포츠가 이렇게 아름다운 몸의 선을 보여주는 예술도 드물다.”(‘회상’)

한국 빙상은 김정연 이후 이영하, 배기태, 김윤만, 제갈성렬, 이규혁, 이강석이 승계하다 마침내 뱅쿠버의 기적으로 꽃피운다. 지금은 한국 스케이팅이 ‘군함’이며 ‘예술’이다. 김정연이 그 단초다.

임용진(전 중앙일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