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용진 스포츠칼럼

제목스포츠인물 열전 12회 – 해사(海史) 이원순(李元淳)2018-04-12 20:0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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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인물 열전 12회 – 해사(海史) 이원순(李元淳)


해사 이원순(海史 李元淳・1890~1993)은 한국 스포츠의 큰 은인이다. 그는 두 가지 신화를 썼다. 하나는 100세에 자서전을 쓸 만큼 완벽한 인생관리를 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위기상황에서 전광석화로 일을 처리해 한국이 광복 후 불과 3년만에 올림픽에 출전할 수 있도록 길을 텄다는 것이다.

그의 삶은 갑신정변 직후부터 서울올림픽 이후까지 격변의 한국사를 관통한다. 삼일 운동(1919) 때 그는 이미 서른 살 청년으로 재미 독립운동의 중추였다. 1914년 보성전문학교 재학도중 피식민지를 탈출해 미국에서 이승만과 독립운동을 했으며 1953년 귀국 후엔 주로 경제인으로 살면서 후배 이병철・정주영 등 재계 전체로부터 존경을 한 몸에 받았다. 체육인으로서 활발했던 기간은 1947년부터 불과 몇 년에 불과하다. 그것도 체육이 좋아서라기보다 동시대 대부분 지도자들처럼 애국적 열정 때문에 삽시간에 스포츠에 휩싸였다. 그러나 그 열정과 책임감은 한국체육사에 결정적인 행운이었다.

한국이 독립정부도 아니고 일개 미군정하 신탁통치 대상이던 1947년 6월15일 이원순은 단신으로 스톡홀름의 IOC(국제올림픽위원회) 총회장에 날아가 ‘코리아’ 이름으로 한국 을 IOC 정회원에 가입시킨다. 그 덕에 한국은 제14회 하계 런던올림픽에 태극기를 들고 참가할 수 있었다. 런던올림픽은 1948년 7월29일 시작해 8월14일 끝난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것은 그 하루 뒤인 8월15일이다. 정부가 서기도 전에 런던올림픽에서 공인된 조국을 접한 국민들의 감격이 어떠 했을까. 바로 이원순의 공이다.



● “해사, 당신이 가야겠소.”

스톡홀름 IOC 총회 3개월 후인 1947년 9월 이원순이 귀국하자 여의도 비행장에 조선체육회 명의로 환영플래카드가 걸리고 며칠 후 비원에선 성대한 환영잔치가 열린다. 이 자리엔 김구, 김규식, 신익희 등 내외인사가 참석하며 이승만은 부득히 참석 못한다는 전갈을 보내온다. 가히 국민적 경사요 환영이었다. 해외에서 33년간 독립운동가, 사업가로 활동하던 이원순이 하루 아침에 국내에서 체육 애국인사로 각광받은 사정은 이렇다.

“조선올림픽준비위원회는 전경무 씨가 조난당하였으므로 뉴욕의 한미무역상사의 사장이며 조선상공회의소 미주 파견원인 이원순 씨에게 전 씨 대신 스톡홀름에서 개최되는 국제올림픽회의에 참석할 것을 요청한 바 있는데 이에 대하여 이 씨는 이 요청을 수락하고 곧 스톡홀름으로 출발할 예정이라고 언명했다.”(‘AP 통신’, 1947.6.10.)

전경무는 재미 사업가 겸 독립운동가로 광복 공간의 촉망받는 일꾼이었으나 1947년 5월 29일 일본 후지산 근방에서 비행기가 산에 충돌하는 바람에 사망한다. 한국 체육계로선 청천벽력이었다. 그가 조선올림픽대책위원회 부위원장으로서 불과 보름 뒤 스톡홀름에서 열릴 제40차 IOC 총회에 한국을 대표해 참석하기 위해 떠났기 때문이다.

광복 후 한국이 염원인 런던올림픽에 출전하기 위해선 국내에 올림픽 기구를 구성해 IOC의 승인을 얻어야 했다. 이를 위해 한국체육계는 광복 직후 조선체육회 발족, 역도・사이클・육상 연맹 등 산하단체별로 국제 경기연맹 가입, 조선올림픽위원회(KOC) 및 올림픽대책위원회 결성 등 준비를 착실히 했다. 1946년 12월엔 전경무를 뉴욕에 파견해 이원순・정월터의 도움으로 당시 IOC 부위원장이던 에버리 브런디지와 만나 ‘전적인 협조’를 약속받기도 했다. 내실과 외교적 노력을 다진 터여서 한국의 IOC 가입은 절차만 남긴 듯 보였다. 그러나 총회 직전 주역 전경무의 갑작스런 부재로 모든 게 엉클어져버렸다. 상황이 급히 돌아갔다. 이원순이 유일한 대안으로 떠올랐다.



● “보면 모르오? 내 개인여권이요.”

이원순은 전경무의 비보를 사고 이틀 후인 1947년 6월1일 접했다. 그 며칠 후인 6월4일과 5일 고국으로부터 두 통의 급한 연락을 받는다. 미군정청 하지중장과 조선체육회 회장 여운형에게 온 것으로 모두 ‘올림픽대책위원회 대표로 전 씨를 대신해 IOC 총회에 참석해달라’는 부탁이었다. 특히 청년시절 절친이던 여운형은 ‘당신 말고 누가 있겠냐’며 간곡히 부탁했다. 9일엔 미군 항공기 편으로 각종 공문서와 전경무가 사망 당시 휴대했던 서류들이 도착했다. 이원순으로선 싫다 좋다 할 입장이 아니었다. 그는 이미 몇 개월 전부터 조선체육회와 전경무를 도와 미국체육회와 접촉했으며 브런디지와도 안면을 튼 사이였다. 인맥이나 국제감각, 언어능력에서 그 자신을 대체할 사람이 없다는 것을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당시의 화급한 상황에서 이원순은 사실 최선이자 유일의 카드였다.

그러나 스톡홀름까지 가는 게 문제였다. 정상적으로는 불가능해 보였다. 15일 열릴 IOC 총회까진 닷새 밖에 남지 않았다. 여권은 물론 비행기 표 구하기도 하늘의 별따기였다. 미 국무성까지 줄을 대 비행기 좌석을 구하려 했으나 ‘난감하다’는 답만 돌아왔다. 미국 체류 33년째지만 이원순은 이때까지도 한국인이었다. 미국 시민권자도 아니고 정부 없는 피신탁통치 국민이 닷새 안에 어떻게 여권을 만들고 어떻게 상대국의 비자를 얻나. 정상 절차를 밟아 미군정청에 신청하면 한달이 걸릴지 두 달이 걸릴지 모를 판이었다. 여기 두 가지가 따랐다. 하나는 행운이고 하나는 독립운동가 특유의 ‘궁즉통’ 식 돌파력이다.

“뭐! 있다고요?” 동분서주하던 그에게 한 여행사가 반가운 소식을 전했다. 마침 1947년 6월13일이 금요일. 서양인들의 액일(厄日)인 ‘검은 금요일’이 된 바람에 예약 취소가 나와 다행히 비행기표는 구했다. 문제는 여권이었다. 궁리 끝에 그는 공문서 용지를 꺼내 영문 타자기에 걸었다. 자신의 나이, 본적, 주소를 기재한 뒤 이렇게 썼다.

“나는 금번 조선체육회와 조선 올림픽대책위원회의 요청을 받아 IOC 총회에 참석할 예정이며 런던에 들러 영국 올림픽위원회(BOC)와 1948년 런던올림픽 참가를 교섭하고자 한다.”

이어 자신의 인상착의와 부모 성명, 당시 미국 후생성에 관여하던 부인 신매리의 경력까지 삽입하고 사진을 붙인 뒤 공증인을 찾아 공증을 끝냈다. 이원순이 이원순 자신에게 발급한 이 희한한 사제(私製) 여권을 들고 그는 영국 총영사관을 찾아 비자 요청을 했다. 다음은 당시 상황.

“영사관 직원의 표정은 가관이었다. 어리둥절한 듯 한참 읽어 내려가더니 도무지 무엇인지 모르겠다는 투로 물었다. “이게 대체 뭡니까?” 난 긴 설명을 하지 않았다. “보시면 모르시겠습니까? 내 개인여권 아닙니까?” 그는 다시 손에 든 문서를 읽고 또 읽으며 만지작거렸다. … 방에 들어가 잠시 영사와 의논을 하고 나온 그는 두 말 없이 도장을 찍어주었다. 조금 전과 달리 그는 웃는 얼굴이었다.”(‘해사 이원순 자전 – 세기를 넘어서’)

 

같은 식으로 그는 스웨덴, 덴마크 총영사관에서도 입국 사증을 받아 6월13일 뉴욕을 출발, 무사히 스톡홀름에 도착해 15일 총회에 참석하게 된다. 총회장에서 그는 “KOC는 아마추어 정신 아래 조직됐고 IOC 헌장을 충실히 지킬 것을 서약한다”는 요지의 연설을 했다. 이어 이렇게 덧붙였다. “내년 런던에서 개최되는 올림픽에 한국이 참가하는 것이 우리 2,500만 한민족의 염원이다. 부디 이뤄질 수 있도록 도와주시길 거듭 부탁드린다.”

IOC는 사흘 후 총회장에서 이원순에게 가입 승인서를 전달한다. 그는 “이 때 내 가슴은 터질 것처럼 기뻤다. 내 생애 중 가장 기쁜 날이 아니었던가 싶다”(‘세기를 넘어서’)고 돌이켰다. 총회장을 나와 곧바로 여운형과 하지 에게 전문을 보냈다. 전국이 환호했다. 한 사람(=전경무)은 목숨을 바쳐, 또 한 사람은 혼신의 노력을 한 결과였다.

이원순은 이듬해인 1948년 6월 런던올림픽 두 달여를 앞두고 현지에 도착, 선수단 고문(59세) 자격으로 대회준비에 만전을 기한다. 올림픽조직위와 연락, 숙소 마련 등이 주 임무였다. 그 덕에 한국 선수단은 참가국 최초로 영국공군사관학교 기숙사에 입촌식을 하고 휘날리는 태극기에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이원순은 이후 KOC 부위원장(1953~59·64~70세), 제8회 미국 스쿼우밸리 동계올림픽 한국선수단장(1960·71세) 등으로 체육계를 돌본다. 마라토너 손기정, 서윤복, 함기용과 농구인 정상윤, 광복 후 첫 올림픽 메달리스트인 김성집(제14회 런던올림픽 역도 동메달) 등이 그와 자주 어울렸다. 1947년 보스톤마라톤 우승자인 서윤복이 대회 전 뉴욕의 이원순 집에 머물며 부인 신매리가 담근 김치, 고추장으로 입맛을 찾았다는 일화도 있다. 한인2세로 미국 뉴욕 동포사회에서 신망 높던 일꾼 정월터를 불러들이기도 했다. 이원순보다 15세 연하인 정월터는 그의 부름에 미국 시민권을 포기하고 귀국, 1960~80년대까지 KOC위원, 부위원장으로 한국 스포츠외교에 디딤돌 역할을 한다.

여담 하나. 이원순은 영문 타자를 배우기 위해 20대 초반인 1911년(22세) 황성기독교청년회(현재 YMCA)를 찾았다. 3개월만에 1분에 1백타 실력을 갖췄으며 이를 밑천으로 경신중학교 교장 비서로 고임금(월급 20원. ※중견교사 월급이 15원) 월급장이 노릇을 하기도 했다. 그는 자신이 ‘한국인 최초의 영문타자 인력’이었으리라 회고한다. 생계를 위해 배운 영타 실력이 후에 ‘사제 여권’ 제작으로 국가를 위해 크게 활용됐다.

한국을 총회장에 입성시킨 그 역사적인 ‘사제 여권’은 지금 정부의 공식적인 문화재(문화재청 등록 제 491-1호)로 한국체육박물관에 보관 전시되고 있다.



● 장수 원칙, ‘3불(不)’ 하라!


이원순은 1953년 미국생활을 청산하고 조국을 떠난 지 40년만에 영구 귀국한다. 이후 한국증권주식회사 설립 회장(1953~67·64~78세), 필리핀 국제 상공회의 대한상공회의소 한국대표(1958년·69세), 전국경제인연합회 창설 주도(1960년·71세), 한미협회 설립 회장(1963~77·64~88세) 등 주로 국내외 경제계에서 역할을 맡았다. 정치는 의도적으로 멀리 했다. 대신 명예로운 직위에서 한국사회에 실질적인 도움을 주며 그는 두루 존경을 받았다. 위트와 유머에도 능해 이해가 치닫기 일쑤인 경제계 회의 등도 그의 사회봉을 쥐면 곧 풀어지곤 했다. 어느 석상이건 그는 최연장자면서 가장 큰 형님이었다.

 

1890년 10월8일 서울 출생. 본관 연안 이씨, 아버지는 이명선이며 어머니는 백씨이다. 배재학당, 관립외국어학교를 졸업하고 보성전문학교를 다녔다. 이원순의 손위 누이 딸이 바로 이희호 전 영부인이다. 해사는 조카 이희호와 김대중 전 대통령의 1962년 결혼식을 자신의 체부동 집에서 직접 주재할 만큼 DJ 내외를 아꼈다.


부인 신매리는 박정희 정부 아래 유정회 국회의원을 지냈지만 이원순은 그것도 가족의 권리로 여겼다. 정치적으로 담백하고 맺고 끊음이 분명한 것은 이승만과의 관계에서도 그랬다. 독립운동 시절 30년 이상 이승만을 돌봤으나 종국에 이승만은 그를 불편히 여겨 멀리 했다. 이원순이 직언과 ‘노’를 주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광복 후 그가 즉시 귀국하지 않은 것도 이승만과의 관계를 고려해서 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승만의 하야와 작고 후 ‘인간 이승만’을 써 한 인간을 추모한 것도 바로 이원순이다. 이 책은 독재자와 애국지사 사이에서 이승만을 조명한 가장 솔직한 책으로 꼽힌다.

해사는 말년에 서울 워커힐 아파트에 살면서 독립기념관에 거액을 쾌척했고 1982년에는 미국으로 유출됐던 통일신라시대 금동보살삼존상 등 소장 문화재 40여점을 국가에 헌납했다. 그는 104세를 일기로 지난 1993년 4월 19일 타계, 국립묘지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됐다. 장례는 사회장으로 치렀다.

누구나 인간적으로 가장 궁금한 건 해사의 장수비결일 것이다. 더구나 그냥 오래 살지 않고 총명한 정신으로 100세에 자서전을 출간했으니. 어떻게 그게 가능했을까.

“남다른 비결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나는 3불원칙(三不原則)을 지키고있을 뿐이다. 즉, 과음(過飮), 과식(過食), 과욕(過慾)을 금하는 원칙을 철저히 지킨 것이 건강을 유지할 수 있었던 비결이다. 그리고 하루 7시간의 숙면을 취하는 것이 습관화돼 있다”(‘세기를 넘어서’)

해사는 수도자처럼 살지 않았다. 항상 지키며 밝게 살았다. 꽃도 동양란보다 화려한 양란을 좋아했다. 눕고 앉기보다는 항상 집안에서도 서성이며 걷고 움직였다. 채식을 곁들이지만 육식도 많이 했다. 항시 규칙적으로 식사 했다. 저녁식사를 평생 딱 두 번, 런던올림픽 기간 중 동분서주 하다가 걸렀다. 담배는 초년에 하루 30개비를 피였으나 도미 후 하와이 파인애플 농장 막노동자 시절(26세) 돈이 아까와 끊었다. 당시 시간당 급여가 10센트, 담배 한 갑 역시 10센트였다고 한다.

그러나 해사는 ‘몸 건강보다 중요한 것이 마음의 건강’이라고 했다. ‘정도’(正道)를 강조하기도 했다. ‘3불’ 원칙 중 과욕을 금하는 것도 여기 닿는다. 체육계 거목 중 과욕으로 일신을 상한 이가 어디 한 둘인가. 이 점에서 해사 이원순은 한국체육의 은인일 뿐 아니라 교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