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용진 스포츠칼럼

제목스포츠인물 열전 ⑪ – 영원한 ‘왕초’, 장기영2018-04-12 20:0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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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인물 열전 ⑪ – 영원한 ‘왕초’, 장기영


백상(百想) 장기영(1916~1977).

아호처럼 그는 순간 순간 백 가지(=百) 생각(=想)이 샘솟는 인물이었다. 뿐만 아니라 1초라도 잠을 아껴 그 모든 생각을 실현하려 애쓴 놀라운 노력가였다. 100kg 넘는 거구라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민첩히 뛰어다니며 시시때때 부지런히 메모했고 사무실 칠판은 휘갈긴 아이디어로 빼곡했다. 여행 중일지라도 호텔 방에 임시전화 서 너 대를 가설해 양 손으로 쉴 새 없이 통화하면서 업무를 처리했다. 통화 시간도 가리지 않아 그 주변 사람 치고 새벽 서 너 시에 업무 전화를 받지 않은 이가 드물 정도였다. 메모와 전화 통화로 두 손이 바빠 책상 아래 초인종을 달고 연신 발로 눌러 비서를 호출하기도 했다.

그는 어려운 가정에서 자랐고 학력도 고졸이다. 그러나 연줄 돈줄 없이 맨 주먹 붉은 피로 일어나 오로지 능력과 정열로 경제기획원 부총리, 한국일보사 사주, 국회의원, 대한축구협회 회장 · IOC(국제올림픽위원회) 위원 · AGF(아시아경기연맹) 종신회장 등을 지내며 체육과 언론, 정·재계에서 두루 조국의 개발시대를 지휘했다.

백상은 평소 “나의 뼈는 금융인이요, 몸은 체육인, 피는 언론인이다. 정치인은 내 얼굴이다”고 말했다. 그러나 체육인 입장에서 보면 이 다양한 경륜의 구심처는 체육이다. 체육을 위해 돈을 썼고 체육을 위해 신문을 창간했고 세상 둘째 가라면 서러울 탁월한 친화성과 외교력을 한국 체육에 투입했다.


한국일보와 일간스포츠를 비롯해 서울경제신문, 코리아타임스 등 7개 신문 잡지의 사주로서 백상 생전 그의 신문사가 직접 주최한 스포츠 행사는 220개에 이른다. 봉황대기전국고교야구대회와 국내 첫 에베레스트 등정(1977), 부산-서울 대역전(大驛傳)경기대회 등이 그 대표적 작품이다.  무엇보다 백상이 남긴 가장 큰 작품은 바로 그 자신일 것이다. 백상은 험구가였다. “‘월급 도둑놈’이 그나마 가장 가벼운 욕이고 좀 더 화가 나면 ‘공산당 같은 놈’, 가장 중범자에게 내뱉는 욕이 ‘일제 순경 앞잡이 같은 놈!’ ”(한국일보사, ‘백인백상’ 중 이영희의 회고)이었다. 더구나 새벽 댓바람에 전화로 날아든 욕이라니! 하지만 그를 결정적으로 싫어한 친구, 동료, 후배는 거의 없었다. 오히려 수많은 체육인과 잘난 기자들이 그를 ‘왕초’라 부르며 진심으로 따랐다. 백상 특유의 솔직함과 인간미, 미워할 수 없는 제스처 등이 그들의 귀가 아닌 가슴을 감전시켰다. 국제 스포츠 무대 역시 그런 백상을 오래 기억했다.


● “코리안 타이거의 우정에 답하겠다.”

백상 타계 4년 후인 1981년 9월 바덴바덴에서 서울은 일본 나고야를 누르고 88 서울올림픽을 유치했다. 하지만 뚜껑이 열리기 전만 해도 ‘서울’은 불가능해 보였다. 심지어 당시 IOC 위원인 김택수조차 “서울 찬성은 나와 미국 단 두 표에 그칠 것”이라고 비관했다. 다음은 당시 현지 유치위원이던 조중훈의 증언.

“프랑스 IOC위원 보몽 백작은 ‘조 회장, 걱정 마시오. 한국이 승리할 것이오. 우리의 아프리카 대륙은 나의 친우 미스터 장을 위해 투표할 것이오.’ 그리고 그는 바덴바덴 IOC 총회장으로 들어갔고, 이어 사마란치 위원장의 표결 결과 발표… 바덴바덴에서 돌아온 즉시 나는 백상 유택을 찾아 머리 숙여 그분의 선지자적 역할에 경의를 표했다.”(‘백인백상’, 조중훈의 회고)

장기영은 해외에서 ‘코리안 타이거’로 통했다. 보몽 백작은 아프리카에 영향력이 큰 프랑스 귀족출신으로 이미 1972년 장기영 초청으로 한국에 왔다(동아일보, 1972.2.19.). 이 ‘타이거’가 자신보다 열 살 연상인 ‘백작’과 어찌 절친이 됐는지 연유는 자세치 않으나 위 회고로 미뤄 보몽이 서울 손을 들어 준 결정적 이유가 이미 고인이 된 백상 때문이었으리란 것은 확실하다. 더구나 보몽은 아프리카 위원들까지 우정 출연시켜 ‘백상 추모’ 역전승에 못을 박았다. 어떤 이는 때로 그의 부재에서도 강하게 존재감을 드리운다. 나고야로선 ‘죽은 제갈공명’에 진 셈이 됐으니 백상의 유덕(遺德)이 그만큼 컸다.

후안 안토니오 사마란치 전 IOC위원장 역시 백상과 오랫동안 극진했다. 이들은 1967년 같이 IOC위원 뱃지를 달고 스포츠 외교에 입문한 사이다. 위원 ‘동기’답게 사마란치는 1988년 서울올림픽 직후 한국일보사와 백상 묘소를 직접 찾았다. IOC 본부엔 지금도 백상의 흉상이 전시돼 있다.

조동표에 따르면 대한체육회장으로 올림픽 유치에 결정적 역할을 한 정주영 역시 88올림픽 유치 비화로 세계 체육지도자들과 교분이 두터웠던 백상의 덕을 언급하곤 했다. 그는 “위대한 언론체육인 장기영은 타계 후에도 민족의 대사인 88올림픽 서울개최에 기여한 셈”이라고 평했다(조동표, 백상 서거 30주년 추모심포지움).


● 한국 스포츠, 언론과 동업을 시작하다.

백상은 창조와 ‘1호’의 대명사다.

한국일보(1954)와 서울경제신문(1960)을 창간해 체육면, 문화면에 비중을 두더니 아예 국내 첫 스포츠 전문지인 일간스포츠(1969)를 만들었다. 백상 자신의 말대로 ‘검은 게 연탄, 흰 게 쌀’로만 보이던 시절, 스포츠 신문 창간은 사치, 모험, 시기상조로 비쳤다. “처음 일간스포츠라는 낯선 이름의 일일 레저신문이 창간됐을 때 과연 팔릴 수 있을까 의심스러웠다”(‘백인백상’, 최인호의 회고)는 건 누구 한 사람만의 의구심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일간스포츠는 한국체육의 위상과 규모를 통째로 바꿨다. 심지어 한국체육의 존재 방식이 일간스포츠 전과 후로 나뉜다 할 만큼 획기적이었다. 기자 입장에선 스포츠가 ‘써도 그만, 안 써도 그만’에서 ‘반드시 써야 하는’ 분야로, 독자 입장에선 ‘봐도 안 봐도 그만’인 지면에서 ‘필요하면 돈 내고 사 봐야 하는’ 다른 신문으로 바뀌었다. 사업성 논란도 머지 않아 일간스포츠가 판매수입에서 효자 노릇함으로써 곧 잦아들었다.

백상은 선린상고 재학시절 농구선수였다. 이후에도 테니스, 골프는 물론 심지어 당시 유행이던 트위스트 춤까지 옷이 흠뻑 젖도록 운동으로 즐긴 스포츠맨이었다. 스포츠맨 사주(社主)의 관심 아래 한국일보는 50년대 초반부터 야구, 농구, 마라톤 및 활쏘기 등 민속경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대회를 주최했다. 대부분 전후 폐허에서 만든 ‘1회’거나 언론의 관심 없이는 명맥이 끊길 위기에 처한 것이어서 백상의 역할이 더욱 돋보였다. 다음은 1970년 이전 백상 소유 신문사가 주최한 국내 대회다. ※‘백상 장기영이 한국체육발전에 미친 영향’(곽성연)에서 발췌.

 

   - 야구 : 육·공군 야구전(1954), 전국 도시 대항 야구선수권대회(1954~1958), 미국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초청 친선경기(1958), 재일교포 학생야구단 모국

     방문 친선경기(1960~1970), 봉황대기쟁탈 전국고교야구대회(1971~현재).

   - 농구  :  한국대표팀 선발 농구전(1954), 미국 오리건대학 팀 초청경기(1954), 일본 여자실업농구팀 리카미 싱 초청경기(1960), 미국 브리검 영 대학 초청

     경기(1967) 및 여자실업농구대회, 서울시 중고농구연맹전, 이상백 배 한일대학농구대회 등 다수.

   - 마라톤  :  부산-서울대역전경기대회(1955~현재), 인천-서울국제마라톤대회(1959~1969).

   -기  타  :  홀리데이 온 아이스 쑈(1959, 1963), 한국신인체육상(1964), 에베레스트 등정(1977, 고상돈), 전국남녀활쏘기대회(1958), 전국장사씨름대회

    (1959), 스키, 거북이 마라톤, 미스코리아 선발대회, 바둑 ‘명인’ 전 등 다수.


1960년대 재일교포 학생야구단의 모국방문 경기는 인기 TV 중계물이었으며 연일 신문 톱을 장식했다. 백인천, 김성근, 장훈 등이 이 대회가 낳은 스포츠 아이돌이다. 같은 시기 미국 프로야구와 대학농구 초청은 신생 신문사의 마케팅이자 한국스포츠의 눈을 한 단계 높인 계기가 됐다. 백상은 여러 스포츠 중 특히 마라톤 중흥에 열성이었다. 제3회 인천-서울 마라톤 대회(1966)엔 당시 현역 최강이던 ‘맨발 왕자’ 비킬라 아베베(에티오피아 · 1960, 64 올림픽 2연패)가 참가해 세계정상의 기량을 선보였다. 일반의 관심이 덜한 가운데서도 부산-서울 간 역전마라톤은 지난 59년간 지속해온 가장 의미 있는 대회가 됐다. 백상은 1955년 6월20일 제1회 대회 시상식에서 “뜀박질의 받침인 그 발바닥 힘으로 북진통일을 이룩해야 할 것”(‘한국일보 40년사’)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 활수(滑水)의 명인

신문사가 수익을 내긴 예나 지금이나 쉽지 않다. 큰 신문사 사장으로서 백상은 항상 운영에 쪼달렸다. 그러나 그는 열악한 처지의 체육인들에겐 도움을 망설이지 않았다.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우승자인 손기정은 한때 사업을 하다 거액의 부도를 냈다. 국가 체육에 대한 공로로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는 식장에까지 채권자가 몰려 손기정의 인생이 망가질 지경이 되자 보다 못한 백상이 나섰다. 1954년 크리스마스 전 날 그는 채권자들을 한국일보사 13층에 불러들였다. 신문사 고문변호사를 옆에 앉히고 손기정을 대신해 한 명씩 담판지어 결국 누구도 손대기 어려운 채권 회오리를 잠재웠다. 손기정은 “삶의 쓰라린 고난에서 좌절의 쓴 잔을 마셔야 했던 나에게 재생의 문을 열어주신 백상 선생”이라고 말한다.(‘백인백상’, 손기정의 회고)

봉황대기 참가차 고국에 온 재일동포 팀은 항상 경비부족으로 쩔쩔 맸다. 그럴 때마다 가장 먼저 찾아와 보살피고 호텔로 데려가 따뜻한 음식을 제공한 것도 백상이었다. 20년 이상 재일동포 팀을 이끈 한재우는 “그 양반이 지금도 하늘나라에서 야구를 지원하고 있을지 몰라. 나중에 내 따라 올라가면 술 한 잔 대접해야겠어”라고 그리워 했다.


● 안양골프장 벙커가 깊어진 이유

백상은 골프를 좋아했다. 1950년대부터 서울컨트리클럽 건설에 관여했으며 후에 이 골프장 이사장을 지내기도 했다. 1970년대엔 삼성 회장 이병철, 쌍룡 회장 김성곤, 안희경과 주로 플레이 했으며 특히 이병철과는 맞수였다. 백상은 드라이버나 숏 게임 모두 나무랄 데 없었으나 유독 벙커에 약했다. 그래서 이병철 소유의 안양골프장 벙커는 백상의 티샷과 세컨샷 낙하지점에 맞춰져 있으며 어느 날부터 탈출이 어렵게 더 깊어졌더란 이야기다. 믿거나 말거나. 하지만 골퍼들 사이에 구전되는 유명한 일화이다.

백상은 1977년 4월10일 역시 이병철 등과 함께 골프 약속을 했다. 몸에 이상을 느껴 후반 나인에만 참가한 뒤 저녁식사 자리에선 특유의 입담으로 좌중을 즐겁게 했으나 이튿날인 11일 오전 자신의 집무실에서 심근경색으로 쓰러져 타계했다. 이병철은 “정녕 귀한 존재였다. (백상은) 그늘진 곳과 불우한 사람들을 찾아 보살피는 인정과 인재를 키우는 예지를 가졌다”고 아쉬워 했다.

장기영은 1916년 5월2일 서울에서 아버지 장동후와 어머니 이성녀 사이 외동아들로 태어났다. 선린상고 졸업과 함께 당시 ‘신의 직장’인 조선은행에 입사, 광복 후 한국은행 부총재(1950)와 조선일보 사장(1952)을 지내기도 했다.

어떤 이는 백상을 종잡기 어려운 인물로 기억한다. 사실 그는 욕설을 달고 살면서도 놀랍게 시적(詩的)이었으며 울퉁불퉁한 외관과 달리 속정이 깊었다. 종잡기 어렵다 함은 열려있는 인간 특유의 다기(多岐)함이 그의 본색이기 때문일 것이다. 가슴으로 말하기, 툭 트고 대하기, 나부터 열어 보이기는 백상 특유의 만국 공통어였다. 그런 점이 고졸 이상이면 누구나 신문사 시험을 볼 수 있게 한다든지, 지역예선 없이 바로 봉황기야구대회 본선토너먼트를 치른다든지 하는 장기영 식 페어 플레이로 나타났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도 백상은 진정한 스포츠 맨이었다.

백상은 지난 1960년대 중반 제6회 아시안게임을 한국에 유치했다가 정부 명령으로 다시 반납하는 난처한 일을 매끄럽게 처리하는 수완을 보이기도 했다. 지난 1964년 제정된 ‘한국신인체육상’이 백상 사후인 1984년 ‘백상체육대상’으로 확대개편 돼 매년 시상하고 있다. 불도저, 25시의 사나이 등이 그의 또 다른 별명이다. 요즘 그가 살았다면 어떨까. 워크 홀릭 또는 전제군주형 상사로 심하게 왕따 당하지나 않을까. 부질 없이 생각하는 것은 오히려 ‘왕초’가 그리운 까닭이다.                                        임용진(전 인천일보 편집인)

※‘스포츠코리아’(2014. 4.)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