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용진 스포츠칼럼

제목스포츠인물 열전 ⑩ – '족패천하' 마라톤 영웅 서윤복2018-04-12 20:03:24
작성자

스포츠인물 열전 ⑩ – '족패천하' 마라톤 영웅 서윤복


“한국의 완전독립을 염원하는 동포들에게 승리를 선물로 바친다. 나의 우승은 1910년 이래 일본의 지배를 받아왔고, 4천 년의 역사에 빛나는 한국의 완전독립을 염원하는 삼천만 민족에게 커다란 의미를 갖는다.”

1947년 4월19일 제51회 보스톤마라톤에서 우승 직후 기자들에게 토한 서윤복(90)의 일성이다. 그는 혼자 달리지 않았다. 조국과 민족을 안고 달렸다. 스승이자 선배인 손기정(1912~2002)처럼.

지암(志巖) 서윤복이 2013년스포츠 영웅에 선정됐다. 대한체육회는 구랍 20일 서윤복을 2013년 스포츠 영웅으로 선정했다. 지금까지 손기정, 김성집에 이어 한국체육사상 세 번째 영예이다. 1913년 생. 그는 이미 90세다. 노인성 인지장애(=알츠하이머)로 인해 10여년 전부터 기억이 불완전하고 거동도 자유롭지 못하다. 하지만 운명이랄까. 그는 마라톤에 관해선 기억이 생생하다. 딸 이름도 잊었으나 우승 순간, 훈련과정, 동료들에 관한 기억은 지워지지 않는 필름처럼 그에게서 재생되고 있다. “한국이란 나라를 그땐 아무도 기억하지 못했어. 보스턴 가기에도 어려움이 많았지. 막 우승했을 땐. 정말 굉장했지, 굉장했어….” 발음이 분명치 않아 측근의 통역을 통해서나 겨우 내용을 알 수 있다. 눈을 몇 번 지그시 감았다 떴다 반복하며 한 두 마디 내뱉기에도 시간이 걸린다. 그러나 지난한 인생완주 노정에서 그는 남 모르는 노래를 부르고 있을지도 모른다.

“장장히 펼쳐진 거리를 달리노라면 숨도 차고, 피곤도 하고, 뛰기도 싫고, 포기하고 싶은 생각이 한 두 번 드는 것이 아니다. … 허나 이런 생각이 들 때면 즐거운, 아주 경쾌한 노래를 부르며 달린다. 저 앞쪽에 보이는 전봇대를 나보다 앞서가는, 아니 세계적인 그 선수로 생각하고 기어이 따르고야 말겠다는 일념으로 달리고 또 달린다.”(서윤복 수기 ‘나의 마라톤’, 신아일보 1975.6.2.)


●나의 인생목표, ‘마라톤 왕자가 되자!’

서윤복과 손기정이 있다는 것은 한국체육의 행복이다. 둘 중 하나만 없었어도 허전한 것은 그들이 사제로서, 선후배로서 한국체육의 감격시대를 완벽히 합작했기 때문이다. 그로써 마라톤 우승과 기록 향상은 역사적 정의로까지 격상했다. 식민지 시절 남의 나라 국기를 단 손기정(1936년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금메달)의 울먹임을 서윤복은 그보다 11년후 미국 보스톤마라톤에서 태극기를 달고 완성시켰다. 그것도 세계적인 느낌표로! 서윤복은 아현화광소학교(현 한서초등학교) 5학년 때인 1936년(13세) 손기정과 운명적으로 만난다.

“손기정 선수 승리의 호외가 교정에 떨어졌다. …담임 선생님(송창섭)이 … ‘윤복아. 너도 우리 학교에서 가장 빠른 어린이다. 너도 열심히 달리면 손기정 선수와같이 세계 마라톤 왕자가 될 수 있을 것!’ 권유의 말씀이었다. 귀에 찡하고 가슴에 와 닿았다.”(서윤복 수기 ‘나의 마라톤’)

두 번째 만남은 경성상업실천학교(현 숭문중고등학교)에 진학, 야간 육상부원이 된 서윤복이 한 대회에서 우승한 직후 이뤄졌다.

“테이프를 끊으려는데 저 앞에 그 양반(손기정)이 보이는 거야. 정신이 없었지만 자세히 다시 보니 손 선생님이 맞았어. 내가 1등으로 들어오니까 그 양반이 내게로 와서 악수를 청하는 거야. 손 잡아준 것만으로도 큰 힘이 나더라고. 그러면서 ‘너, 나 누군지 알지? 너도 1등 했지만 나도 1등한 사람이야, 잘해봐!’라고 하셨어. 난 ‘알겠습니다’라고 말하면서 꼭 손기정 선생님처럼 돼야겠다고 다짐했지.”(오마이 뉴스, 2002.11.28.)

세 번째는 광복 이후 본격적인 수업기로 둘은 평생 뗄 수 없는 동지적 사제 관계로 발전한다. 체육과목이 교련으로 대체되고 경기대회가 모두 폐지되는 태평양전쟁의 체육암흑기를 거쳐 마침내 광복. 가장 먼저 기지개를 켠 종목이 축구, 마라톤 등이었다. 서윤복은 이 시기 주요대회를 모두 석권한다. 제1회 마라손대회(1946.5.26. 기록 2시간39분30초), 제1회 전국육상경기선수권대회(1946.9.21. 기록 2시간43분25초), 제27회 전국체육대회(1946.10.17. 기록 2시간39분40초). 1946년 한 해 세 개 대회를 휩쓸어버린다. 이 시기 손기정의 단골발언은 “돈 생겼다. 합숙하자.”였다. 당시 은행에 다니던 손기정은 독지가를 찾아가 약간이라도 돈이 모이면 곧 서윤복 등 유망주를 소집해 돈암동 자신의 집에 합숙시키며 맹훈련을 했다. “밥걱정 없이 흰쌀밥과 두부, 콩나물 국 등으로 배불리 먹을 수 있었지. 그땐 친근한 아버지였는데 훈련 땐 많이 맞았어. 우선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집 앞에 태극기를 놓고 큰 소리롤 애국가를 제창했어.”(오마이 뉴스, 2002.11.28.)


● ‘족패천하’, 조국을 위해 달리다.

마침내 그날. 보스톤마라톤은 그들 합숙의 결정판이었다. 손기정 감독, 남승룡·서윤복 선수. 8개국 선수 156명이 출전했다. 서윤복은 ‘나는 뛰다가 쓰러질지언정 결코 기권하지 않겠다’는 출사표를 스스로에게 쓰고 나갔다. ‘첫 3km에서 결정난다’는 생각으로 그는 스타트 라인인 홉킹턴 광장부터 치고 나갔다. 1시간 쯤 지나자 당시 세계기록보유자인 미코 히타넨(핀란드)과 서윤복이 나란히 앞서 선두군을 이끄는 형국이 됐다. “어디 쯤 선생님이 계실텐데…” 28km 지점에서 멀리 손흔드는 손기정과 마주쳤다. 하프를 넘어서까지 우승 후보 미코 히타넨과 나란히 달리는 제자를 보자 손기정은 가슴에 불덩어리가 복받쳤다. 앞만 보고 달리는 서윤복의 귓가에 “조국을 위해서! 우승해서 돌아가자!”는 스승의 울먹이는 고함이 들렸다. 한국은 언덕을 만나면 강해진다.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우승자인 황영조는 몬주익 언덕에서, 서윤복은 30km를 넘자마자 만나는 보스톤의 악령 ‘상심의 언덕’에서 승부를 결정지었다. 마라톤 풀코스 42.195km는 ‘두 개의 대회’이다. 첫 32km와 인체 글리코겐이 바닥 나 근육이 아우성을 치는 마지막 10여km. 보스톤 코스는 더구나 30km와 33km 사이에 표고가 400m나 높아지는 뉴톤 힐(= ‘상심의 언덕’)이 버티고 있어 선수들을 괴롭힌다. 서윤복 역시 체력이 고갈됐으나 계속 귀에서 울먹이는 소리가 떠나지 않았다. “조국을 위해 달려!”

2시간25분39초. 마침내 서윤복이 우승했다. 세계최고기록이었다. 보스톤 백 베이의 결승 테입을 1위로 끊고 들어오는 제자를 안고 손기정은 펑펑 울었다. 36세의 남승룡도 12위로 역주했다.  “승리가 눈앞에 있었다. 가슴에 빛나는 태극마크. … 나는 서 군이 부러웠다. 태극기를 달고 뛸 수 있는 그는 얼마나 자랑스러운 존재인가.”(손기정 자서전, ‘나의 조국 나의 마라톤’).

서윤복 이전까지 세계기록 보유자는 손기정(2시간26분42초)이다. 스승은 1935년11월3일 도코에서 일본의 야스오 이케나카가 갖고있던 2시간26분44초의 세계기록을 2초 단축했고 제자는 그것을 12년만에 63초 앞당겼다. 이 기록은 1952년 6월14일 영국의 제임스 피터스가 2시간20분43초를 기록할 때까지 5년간 유지된다. 손기정부터 기산하면 17년간 한국이 마라톤 세계 최고기록 보유국가였다. 더구나 1950년 4월20일 제54회 보스톤마라톤은 한국 축제였다. 함기용, 송길윤, 최윤칠이 1,2,3위를 휩쓸었다. 오죽하면 1952년 미국육상연맹이 한국전쟁을 이유로 한국선수의 보스톤마라톤 출전을 반대했을까. 당시 한국은 ‘1950년대 케냐’였다. 달리면 세계신이고 달리면 우승이던 감격시대. 그 한 가운데 서윤복이 있었다.

서윤복의 쾌거는 세계 신기록인데다 동양인 최초의 우승이어서 미국이 떠들썩했다. 마침 미 군정하(美 軍政下) 신생 독립국 과정에 있던 조국을 알리기 위해 그들은 미국 각지를 돌며 43일간 체류하고 동남아, 일본을 거쳐 6월초 화물선을 타고 인천항에 돌아온다. 애초 귀국날짜보다 하루가 늦었으나 인천항에는 그들을 환영하는 인파가 하루 밤을 더 새고 기다렸다. 서울시민들은 30원씩 가가호호 걷어 시민환영대회를 열었으며 김구는 ‘족패천하’(足覇天下, 발로 세계를 제패하다) 휘호를 쓰며 기뻐했다. 이승만도 “내가 수십년 독립운동한 것보다도 자네 두 시간 남짓 마라톤이 더 매스컴을 많이 탄다”고 환영사에서 조크했다.

● “그만 둘 때를 알아야 한다.”

서윤복은 1948년 제14회 런던올림픽 마라톤에서 페이스 난조로 27(2시간59분36초)위에 그쳐 선수생활을 접는다. 이후 그는 서울운동장장, 제3회 아시아경기대회(1958년) 육상부 감독, 토쿄 올림픽(1964년) 육상부 감독, 서울 올림픽 경기대회 남자 감독, 대한체육회 전국체전위원장 등 체육행정과 지도자 길을 걷는다. 그는 초년 이래 근면성실을 평생 신조로 삼았다. 그의 성격을 말해주는 일화 두 가지.

 

#1. 서울운동장장 재임시 일화. 그는 같이 근무하는 직원들로부터 “어디 쥐구멍 있는 지도 알 것”이란 평을 들을 정도로 철두철미했다. 한번은 국내 모 축구대회를 앞두고 잔디관리를 하고 있는데 3군사관학교 체육대회를 먼저 하겠다는 강청이 들어왔다. 그는 시청까지 들어가 따졌다. 결국 3군사관학교 체육대회가 일정을 바꿔 양보했다.

 

#2. 서울운동장 퇴임 후 서윤복은 1978년 이후 20년간 기업과 학교, 관공서, 사회단체 대상 명강사로 인기를 끈다. 강의 주제는 그의 마라톤과 인생역정을 섞은 ‘목표와 집념’. 한해 평균 80회나 강의가 쇄도할 만큼 인기였으나 그는 한창 전성기던 1997년 돌연 강연활동을 중단한다. 강연 도중 했던 얘기를 자꾸 반복하는 듯한다는 이유였다. 가족은 기미를 전혀 감지하지 못하고 중단할 필요 없다 했으나 그는 단호했다. “그만 둘 때가 됐어.” 4년 후인 2001년 그는 발병했다.

 

서윤복의 고향은 경기도 고양군 은평면 녹번리이다. 지금은 은평구 녹번동이지만 그땐 농지 산야였고 바위투성이 인왕산과 안산이 그의 놀이터였다. 몸이 작았으나 타고난 심폐기능, 지구력, 의지력으로 소싯적부터 달리기 1등을 놓치지 않았다. 집이 가난해 야간중학을 다니며 인쇄소, 철공소, 급사 등 주경야독으로 고학했다. 전철비 절약 겸 연습을 위해 은평구 집까지 전차 뒤를 쫓아 달린 독특한 연습법은 유명하다. 혈액형 AB형. 선수시절 체구는 165cm, 55kg. 보스턴마라톤 우승시 28km 지점에서 1위로 달리다 한 응원관중의 애견 끈이 풀려 개가 도로로 들어오는 바람에 넘어진 일화도 있다. 그는 곧 일어나 역주, ‘상심의 언덕’에서 히타넨에게 상심을 안겼다. 마지막 4km는 운동화 끈이 풀리는 바람에 그대로 달리기도 했다. 우승 당시 고려대 재학으로 소개됐으나 사실은 이철승이 학교 명예를 위해 먼저 스카웃하고 나중에 고대 입학(1948년 상학과)한 케이스다.

영웅은 남에게 꿈을 준다. 그 댓가를 생전에 받으면 행운이고 아니어도 별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손기정이나 서윤복 모두 다행한 경우다. 손기정 우승엔 황영조(19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 마라톤 우승)가, 서윤복에겐 이봉주(2001년 제105회 보스톤마라톤 우승)가 각각 화답했다.    서윤복이 주는 꿈엔 요즘에도 매년 보스톤 마라톤 출전 자격을 따기 위해 노력하는 수많은 국내 마라토너들의 땀도 있다. 노영웅의 ‘노래’는 그래서 수십년 후에도 많은 이들을 감동시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