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용진 스포츠칼럼

제목스포츠인물 열전 ⑧ – 한국프로골퍼 1호 연덕춘2018-04-12 20: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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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인물 열전 ⑧ – 한국프로골퍼 1호 연덕춘


72년전 일본의 한 일간지 기사를 본다.

“제 14회 일본오픈골프선수권 최종전은 10일 오전 8시부터 호소가와 코스에서 거행, 이날 오전 중 강우로 애를 먹었으나 오후부터는 날씨도 코스도 좋아졌다.

기대를 모았던 미야모토는 전에 없는 난조로 일찍이 우승권 밖으로 벗어난 반면 노부하라는 나카무라의 추격을 아예 염두에 두지 않는 듯 17번 홀 티샷이 벙커에 들어갔으나 제2타를 쉽게 그린 앞에 갖다 놓은 후 핀에 붙였다. 이 샷은 기술적이자 동시에 우승을 쟁취하는 귀중한 샷이었다. 노부하라가 골프에 혜택을 받지 못한 외지에서 우승을 획득했다는 것은 끊임없는 연습에 의한 선물인 바, 영예의 우승배는 처음으로 현해탄을 넘어갔다.”(東京日日新聞, 1941.5.11.)

노부하라는 바로 한국인 연덕춘(1916~2004)이다. 태평양전쟁 직전 압박 속에서 그도 창씨개명을 했다. 스물 다섯 살 노부하라는 ‘골프에 혜택을 받지 못한’ 피식민지 출신으로 아시아 골프 정상에 올랐다. 첫 한국인 프로골퍼의 첫 국제무대 제패다. 더구나 무대가 일본의 메이저인 일본오픈이고 도쿄 한 복판이다. 5년 전 손기정의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우승(1936)과 동렬일 순 없으나 젊은 동포가 밉살 맞은 지배자를 그들 본거지에서 이겼다는 낭보는 순식간에 한반도를 고무시켰다.

총독부도 손기정 때와 달리 챔피언을 환영했다. 서울역에서 광화문까지 대대적인 환영 카 퍼레이드를 허용할 정도였다. 한국 근대사에서 운동선수가 카 퍼레이드 주인공이 된 건 이 때가 처음이다. 골프가 ‘불순치 않은’ 자들의 운동인 건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여서 그들이 허락했을 것이다. 얌전하기만 하면 조선인에게도 기회가 있다는 내선일체 ‘드림’을 선전하기에도 알맞았나보다. 아무튼 연덕춘은 이겼다.

연덕춘은 열 여섯 살(1934년) 어린 나이로 일본 골프유학을 떠난 지 7년만에,  일본오픈 도전 여섯 번만에 우승컵을 안았다. 첫날 2위로 나서 이틀과 사흘째 연속 선두를 지킨 다음 최종일 같은 골프장(후지사와CC) 소속 동료이자 라이벌인 나카무라 도라키치의 맹추격을 3타차로 뿌리쳤다. 참가자 70여명, 우승 스코어는 합계 2오버파 290타. 나흘 합계 10언더파 정도는 돼야 우승을 바라는 요즘과는 격세지감이지만 당시로선 준수한 성적이었다. 메이저대회인 US오픈서도 언더파 우승은 1933년에사 처음 나왔다. 연덕춘과 비슷한 연배인 바이런 넬슨(미국·1912~2006)이 1939년 US오픈서 우승할 때 기록 역시 6오버파 294타에 불과했다. 프로 골퍼 핸디캡이 입문 직후엔 5 오버파에서 1 오버파 사이, 공식 대회 우승 후에야 겨우 0으로 인정받던 시대였다.

우승상금은 6백50원. 당시 서울시내 대지 80평에 건평 20평짜리 단독 양옥 1채 값과 맞먹는 큰 돈이었다. 카 퍼레이드 뿐아니라 각계 축의금도 답지했다. 대한제국 마지막 황태자이자 초창기 골프 후원자인 영친왕 이은도 금일봉을 냈다. 이 돈으로 연덕춘은 고양군 자양동(현재 서울 성동구 자양동) 부근에 옥답 3천3백여평을 샀다. 또 경성(=서울)의 명사(名士) 명부에 실릴 정도로 그는 단번에 청년 스타가 됐다.


● 군자리 촌놈, 한국 프로골프 첫 장을 쓰다.

연덕춘의 고향은 서울 성동구이다. 14살(1930년) 때 집과 가까운 경성골프구락부 군자리 코스(현재 서울 성동구 능동 438번지) 캐디 보조로 필드와 연을 맺은 후 고객들 클럽을 매는 사이사이 어깨 너머로 골프를 배웠다. 이 때 골프는 어떻게 쳤을까. 다음은 군자리 코스로 옮기기 직전 경성골프구락부 청량리 코스에 관한 연덕춘의 회상.

“그린은 샌드 그린이었다. 볼이 온 그린이 되면 그린 바닥에 모래가 있기 때문에 볼이 푹 파묻혀 볼을 집어내 고무래로 볼 자국을 긁어 평편하게 고른 다음 퍼팅을 했다. 그리고 그린 주위에 볼 자국을 지우는 고무래가 준비돼 있었다. 코스 주변에서 버섯이 많이 났고 그린은 16개였으며 티잉 그라운드는 18곳이었는데 1번 홀 그린은 두 번 사용했다. 우드는 대개 3개였고 1, 2, 3, 4, 5, 6번까지 6개의 아이언을 사용했다. 특히 1번 아이언은 드라이빙 아이언이라 불렀고 이것으로 티샷하기도 했다. 그리고 지금처럼 7, 8, 9번 아이언이 나오지 않았을 때라 6번 아이언(니블릭)을 가지고 어프로치샷을 하거나 벙커샷을 했다. 물론 샌드웨지나 피칭웨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사막도 아닌데 모래 그린이라니? 요즘에야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로 들리겠지만 당시엔 실제 사정이 그랬다. 프로가 되기 위해 연습은 어떻게 했을까? 연덕춘의 제자인 한장상(75)은 이렇게 돌이킨다.

“잔디도 없었고 볼 배급하는 자동 티업기는 더더욱 상상할 수 없던 시절, 해 뜨기 무섭게 공 치기 시작해 어두워질 때까지 3,620알까지 쳐봤다. 손바닥에 물집이 터지도록 정말이지 맨 땅에서 피눈물 나게 연습했다. 별다른 레슨도 없이 나 혼자 궁리하고 치는 연속이었다.”

연덕춘은 한장상보다 22년 연장이다. 한장상은 롤 모델(=연덕춘)이라도 있었으나 연덕춘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의 ‘맨 땅 헤딩’ 식 독학은 더 외로웠을 것이다. 앞서 ‘동경일일신문’(東京日日新聞) 기사대로 ‘끊임 없는 연습에 의한 선물’로 연덕춘은 골프채를 잡은 지 4년만에 이미 스크래치 플레이어(파 플레이어)가 돼 있었다. 이를 눈여겨본 경성골프구락부 경영진은 1934년 겨울 그를 일본에 골프 유학 보낸다. 매월 보조금 30원을 주고 귀국후 5년간 경성골프GC에서 근무하는 조건이었다. 당시 18세. 그는 후지사와 골프장의 나카무라 가네키치의 문하생으로 들어간다. 나카무라 문하엔 연덕춘 외에도 나카무라 도라키치, 이가와 에초, 사사키 요시 등이 있었다. 이들은 후일 모두 아시아의 강자가 된다. 연덕춘은 골프 수업을 시작한 지 3개월만인 1935년 2월 일본 관동프로골프협회에서 프로자격증을 획득한다. 한국인 최초의 프로골퍼.

하지만 그는 데뷔 첫 경기인 관동프로월례경기(도쿄, 1935년 2월)에서 호되게 당한다. 한 홀에서만 무려 16오버파를 기록한다. 파3(140야드) 짧은 홀에서 앞바람이 거세 아이언 2번으로 공략하다 두 차례 물속에 넣고 다시 스푼(우드 3번)을 잡는다. 그래도 실패, 이번에는 브러시(우드 2번)로도 허사. 결국 드라이버로 물을 넘겼지만 또 모래 벙커에 쳐박는 등 숏 홀에서 무려 14온 2퍼트라는 진기록을 남긴다. 이후에도 몇 년 간 쉽지 않았다. 연덕춘은 지면서 컸다. 그의 패배일지는 이렇다.

- 1935년 일본오픈 첫 출전 예선 탈락. 70명 출전 공동 36위. 24오버파 168타(85-83).

- 1935년 전일본프로골프선수권 첫 출전 예선 탈락. 공동 23위. 14오버파 158타(81-77).

- 1937년 일본오픈 공동 8위. 17오버파 305타(78-78-76-73).

- 1937년 전일본프로골프선수권 예선 탈락.

- 1938년 일본오픈 공동 5위.

- 1938년 전일본프로골프선수권 3위.

- 1939년 일본오픈 공동 28위. 31오버파 319타(80-74-83-82)

- 1939년 전일본프로골프선수권 3위.


지기만 하던 연덕춘은 결국 1941년 일본오픈 우승컵을 안았다. 같은 해 전일본프로골프선수권에서도 준우승 했다. 하지만 안타깝게 여기가 거의 끝이었다. 일본은 1941년 12월 8일 하와이를 기습했다. 전시 징발로 한국과 일본의 모든 골프장이 폐장됐으니 대회도 없고 연습도 불가능했다. 광복을 맞고 1950년 4월 군자리GC가 복원됐으나 불과 두 달 후 6·25가 터졌다. 이후 전쟁 상흔이 아물기 시작하는 1950년대 중반까지 연덕춘은 기나긴 방학을 맞는다. 1941년부터 무려 15년이상 쉬었다. 기량과 체력이 절정에 오른 20~30대 황금기를 공백으로 보냈다는 점에서 그는 가장 불운한 챔프이기도 하다.


● 프로골퍼 출신 협회장 ‘1호’, 코스 설계자 ‘1호’

상황이 우울했으나 연덕춘은 하릴 없이 지내진 않았다. 광복 직후 그는 이승만 대통령 지시에 따라 폐허로 변한 군자리골프코스 복구에 앞장섰으며 이 골프장이 6·25로 파괴되자 1954년 다시 재건에 나선다. 선수로선 1956년 필리핀오픈 6위, 같은 해 영국 골프월드컵 개인전 24위, 1958년 제1회 한국오픈 2위, 역시 같은 해 제1회 한국프로골프선수권 우승을 끝으로 현역 은퇴한다. 국내 양대 메이저를 석권 못해 아쉬었으나 그는 이미 42세였다.

이후 연덕춘은 협회 행정가, 후배 양성 및 코스 설계자로 인생 2라운드를 펼친다. 1968년 후배 12명과 함께 한국프로골프협회(KPGA)를 결성, 경제인인 초대 허정구 회장 아래 상무이사를 맡다 2대 회장에 취임해 후배양성에 주력한다. 한장상, 홍덕산, 이일안, 강영일, 조태운 등 쟁쟁한 프로들이 배출됐다. 특히 한장상은 1972년 일본골프 영웅인 점보 오자키(66)를 1타차로 제압하고 일본오픈서 우승, 연덕춘 이후 31년만에 다시 매운 맛을 보인다.

코스 설계에서도 연덕춘은 프론티어다. 1960년대 고양시 원당의 구릉 지대에 한양CC 구코스 18홀을 처음 설계한 이래 동래, 인천국제, 제주, 수원, 태광, 여주, 양주CC 등 10여개 골프장을 탄생시켰다.


● “세 번도 못 참아서야 되나”

방송계 출신 골프인 김동건(74)은 1960년대 중계를 위해 골프를 배우다 연덕춘을 만났다. 다음은 그의 평.

“한국 골프는 연덕춘 선생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선생은 정통파 골퍼였다. 스윙이 동시대 인물인 벤 호간과 흡사했다. 인품이 훌륭했고 교양있는 사람이었다. 서울 사투리를 써가면서 골프를 처음 배우는 사람들에게 칭찬을 참 많이 했다. 무척 겸손해 이분을 욕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연덕춘은 조용한 영웅이다. 그의 지인에게 생전 에피소드를 물으면 대개 ‘글쎄’란 답이 돌아온다. 에피소드가 없어서가 아니라 모두 조용한 일화이기 때문일 것이다. 게 중 하나. 한장상은 소싯적 권투를 했고 팔씨름에서 진 적이 없을 만큼 완력이 뛰어났다. 하지만 격한 성격 때문에 한 동안 슬럼프에 빠져 골프를 그만둘 지경이었다. 연덕춘이 제자에게 나직히 타일렀다. “이 사람. 몇 번 참았나. 세 번만 더 참게.” 한장상은 다시 가다듬어 이후 1970~80년대 한국골프 원맨쇼(국내외 투어 22승) 시대를 구가한다.

연덕춘은 1936년 일본서 귀국해 한 살 연하인 이난순과 결혼, 5남매를 뒀다. 그러나 실제 부양은 7명이다. 맏형 덕문 내외가 유명을 달리해 조카 둘까지 자식처럼 키웠다. 이들이 자립해 연덕춘의 말년은 비교적 유복했다. 그는 2004년 5월 11일 오전 9시께 서울 대치동 자택에서 노환으로 타계했다. 향년 88세. 장례는 한국프로골프협회 상조회장으로 치렀다.

혹자는 말한다. 민족 암흑기 ‘노부하라’로 딴 일본오픈골프 우승컵, 더구나 최상류층의 유한 스포츠가 무슨 의미가 있냐고. 하지만 당시 연덕춘을 따르던 갤러리는 대부분 한국인이었다. 그들의 성원을 읽지 못한다면 연덕춘보다 57년 후인 1998년 LPGA(미국여자프로골프협회) US오픈서 우승한 박세리의 감격도 메마를 뿐이다. 어려운 시기 연덕춘이나 박세리 모두 개인이 아니었다. 골프라이터 최영정(80)은 일찍이 제안했다.

“(연덕춘)에게 문화관광부가 훈장으로라도 서훈하여 그의 공적을 치하하고 널리 알렸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그리고 서울CC도 그에게 공적을 기려 명예회원증이라도 증여할 일이다. 연덕춘 옹에게 서훈과 서울CC 명예회원증을!”  (최영정, 골프매거진 2004.3.)

물론 서훈도 증여도 안됐다. 하지만 문화관광부는 지난해 연덕춘이 1930년대에 사용한 골프클럽 4점(영국 ‘잭 화이트’ 제작 아이언 2개, 퍼터, 드라이버)을 문화재로 등록했다. 한국 첫  프로골퍼가 사용했다는 의미도 공식 인정했다. 골프선수 최고의 명예는 상금왕이 아니라 매년 KPGA가 평균최저타를 기록한 프로에게 수여하는 ‘(연)덕춘’상이다. 72년 전 일본오픈우승에 감격하던 한국 프로골프는 지난해 일본투어에서만 남녀 각각 6승(JGTO), 16승(JLPGA)씩을 거뒀다.


임용진(전 인천일보 편집인)

‘스포츠코리아’(2013. 12.)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