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용진 스포츠칼럼

제목스포츠인물 열전 ⑦ – 한국농구의 아버지 이성구2018-04-12 20:0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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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인물 열전 ⑦ – 한국농구의 아버지 이성구


모든 경기가 같진 않다. 매일 코트에서 벌어지는 것일지라도 중요한 승부가 있게 마련이다. 어떤 경기는 일생을 걸기도 한다. 한국 농구의 아버지 고(故) 이성구(李性求)는 평생 최소한 두 개의 큰 경기를 치른 듯하다. 그것부터 보자.


● 2002년 10월24일, 서울

이날 오후 3시 91세의 이성구는 세검정 장남 집에서 TV를 켰다. 2002 부산아시안게임 남자농구 한국과 중국의 결승전을 시청하기 위해서다. 객관적 전력이나 신장 면에서 중국이 월등했다. 한국은 1982년 뉴델리 아시안게임 결승에서 중국을 이긴 이래 20년간 연패를 당한 처지다. 중국은 더구나 당대 최고의 NBA 센터 야오밍(2m29cm)까지 가세해 승리를 낙관하고 있었다. 경기는 예상대로 중국의 우세. 한국은 4쿼터 종료 2분 40초를 앞두고 73-86까지 끌려갔다. 그간 전적을 감안하면 13점 정도 패배라도 받아들일 만한 상황. 그러나 여기서부터 기적이 시작됐다. 끈질긴 압박수비로 한국은 2분여 동안 7점까지 따라붙었다. 전광판에 남은 시간은 불과 32.5초. 젊은 피 김승현의 잇단 스틸 두 개가 경기장을 감전시키더니 급기야 4쿼터 종료 직전 현주엽이 환상적인 스핀 무브에 이은 골밑슛으로 장내를 터뜨려 버렸다. 90-90, 동점. 이성구는 여기까지 보고 화장실에 갔다. 평생 경기장에서 살며 누구보다 경기흐름을 잘 아는 그다. 한국이 큰 일 낼 것을 직감, 열을 식히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화장실에서 나오지 못했다. 이때가 오후 5시. 몇 분 후 후배들은 연장전에 이은 역전승으로 대선배의 혼신을 바친 응원에 답했다. 102-100로 한국이 이겼다.

이성구는 평생 코트 내 선수거나 지휘관이었다. 타계 직전까지도 일주일에 서 너 차례 연세대 체육관에 나와 모교 농구부의 연습을 참관했다. 귀가 좀 어두웠을 뿐 아흔 초반 나이에도 특별한 환후는 없었다. 그러나 평생을 바쳐 만든 작품의 가치를 확인한 안도감은 일순 행복한 종말로 이어지기도 하는가 보다. 공교롭게 3년 후, 한국농구의 어머니 윤덕주(1921~2005) 역시 여자프로농구개막전을 관람한 바로 다음날 타계했다. 부산아시안게임 우승 직후 대표팀은 서울 세브란스 병원에 안치된 이성구의 빈소를 찾았다. 천재 슈터 신동파는 기적이 스승의 ‘열정’ 덕이라고 했다.

“선생님! 선생님의 그 열정은 운명하시던 그 순간, 부산에서 남자 농구의 기적 같은 우승을 일구어 내셨습니다. 남아있는 우리들에게 가시면서 주신 마지막 열정의 선물은 영원히 잊지 못할 것입니다. … 90여 성상을 농구인으로, 체육인으로 살아오신 그 인생 자체가 한국 체육의 역사이니 후학들로서는 어찌 귀감으로 삼지 않겠습니까?”(신동파, 추도사)


● 1936년 1월8일, 도쿄

이 날은 또 일본 농구계가 발칵 뒤집혔다. 창단 6년째인 식민지 조선의 풋내기 전문대 팀이 일본 강호들을 연파하며 제11회 베를린 올림픽 선발전 겸 전일본농구종합선수권에서 우승해버린 것이다. 주역은 이성구였다. 이성구는 연희전문 재학시절 전조선선수권대회와 조선신궁경기대회를 우승(1932년)으로 이끄는 등 아시아 정상으로 인정받았으나 그건 이미 3~4년 전 일. 이때는 진명여고 사회과 교사겸 농구코치로 재직 중이었다. 공을 놓은 지 오래라 이 대회에도 선수 아닌 관계자로 따라갔다. 그러나 연전의 현역 주전 한 사람이 갑작스런 사정으로 빠지게 되자 당시 연전 체육부장 노동규가 다급히 이성구를 호출했다.

“자네가 뛰어!”

“선생님 전 졸업 후 2년간 뜀박질 한 번 안 했습니다. 지더라도 그냥 가시죠.”

“안 돼. 지더라도 자네야! 그 수밖에 없어”

“…”

현지에서 갑작스레 선수 유니폼을 입혔으니 그야말로 졸속이었다. 참가 단체명도 애초 ‘연전’ 농구팀에서 ‘전(全)연전’ 농구팀으로 급히 바뀌었다. 재학생이 아닌 OB(졸업자) 이성구까지 포함시키기 위한 개명이었다. 무엇보다 당사자의 저질 체력이 문제였다. 연전 5년 후배이자 당시 동료 장이진의 회고에 따르면 “불쌍해 못 볼 정도”였다. 이성구는 얼굴이 하얗게 돼 숨을 고르느라 일부러 백코트에서 천천히 드리블 하기 일쑤였다. 그러나 이런 궁여지책이 뜻밖에 지연전술로 나타나 상대들을 괴롭혔다. 결과적으로 준결승에서 당시 일본 최강이던 도쿄제대를 8점차로, 결승에서 쿄토제대를 20점차로 제압했다. 무엇보다 일본팀 우승을 당연시 해 올림픽 선발전까지 겸했던 일본농구협회의 처지를 궁하게 만들었다. 당시 일본체육회 전무이사던 이상백이 기회를 놓칠세라 거들었다. “조선 농구가 우수하니 원칙대로 뽑아야 한다.” 실력자 이상백의 입김으로 올림픽 일본 농구대표팀에 한국선수가 셋(이성구, 염은현, 장이진)이나 포함됐다. 남의 국기를 달긴 했으나 이성구 등은 남자 농구 참가국 21개국 중 8위의 호성적으로 현역을 마감한다.

이성구의 연전 팀은 그보다 3년 전인 1933년 이미 연전 일본원정에서 8전6승을 하며 열도를 놀라게 했다. “연전이 큰 발전을 했다”는 기록이 일본체육사에도 남아 있다. 이상백의 든든한 ‘백’과 이성구의 활약으로 식민지 한국농구는 깊은 인상을 남겼다.

충남 천안 태생인 그는 어릴 때부터 힘이 셌고 운동을 좋아했다. 야구를 꿈꿨으나 몸이 작다고 퇴짜 맞자 1926년(15세) 휘문고 농구부에 들었으며 1930년(19세) 연희전문 농구부 창단멤버가 된다. 포지션은 요즘으로 치면 포인트 가드였다. 다부진 체격으로 공 다툼에 능하고 점프가 높았다. 키 170cm도 안 되지만 한 번 뜨면 백보드를 양손으로 여러 번 치고 내려왔다 한다. “내가 한 번 점프하면 차고 올라 갔다가 차고 내려 오는데 한참 걸려”. 이성구는 가끔 주위에 이렇게 자랑했다.


● ‘삼이’(三李)

한국 근대농구 중심에 이씨 세 명이 있다. 이상백-이성구-이해병. 서로 스승과 제자이기도 한 이 ‘쓰리 이’는 한국농구를 초석하고 발전시켰다. 이상백(1904~1966)은 일본농구의 아버지다. 와세다대 농구부 출신인 그는 마구 에너지를 뿜던 초창기 한국농구에 방향성과 시야를 줬다. 이성구(1911~2002)는 한국농구의 아버지다. 그는 이상백이 해외서 구상한 것을 국내에서 실현했다. 이해병(77)은 한국농구의 맏형 뻘 쯤 된다. 그는 농구협회 심판위원장 등을 지내며 농구규칙 등 각론을 구체적으로 파고들었다. 이들로 인해 한국 농구는 일단 외연부터 확장한 뒤 내실을 다지는 식으로 급속히 성장했다. 그 한 가운데 이성구가 있다. 이상백은 평소 “이성구 같은 이는 다시 나오기 힘들거야”라고 말했다. 논쟁적인 순간에 그는 항상 제자의 의견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상백은 일제 강점기 시절 일본체육회 전무를 지냈다. 이성구 역시 일본농구 국가대표 코치(1940년 동아경기대회)를 지냈다. 사제가 모두 체육에서나마 피식민지의 열등감을 풀었다는 점에서 공통된다. 일본과 중국에 전념하던 1930~40년대에도 이상백은 농구는 물론 정치 등 국내 사정을 훤히 꿰뚫고 있었다. 이는 모두 이성구가 수시로 편지로 보고한 결과였다.

이해병은 이성구의 연대 후배이다. 이성구는 자신보다 스물 다섯 살 아래인 이 후배 손을 잡고 자신이 근무했던 진명여고로 가 코치를 시킬 만큼 그를 신임했다. 이해병은 “(이성구) 선생의 면모는 네 가지다. 선수, 체육행정가, 체육외교관, 농구이론가며 교육자였다.”고 말한다.


● “당신네 천황가의 우승컵이 걱정이야”

경기인 이성구에 관해선 이미 말했다.

체육행정가며 외교가로서 이성구의 수완은 정평 났다. 식민지하 조선농구협회 이사(1933년)를 시작으로 대한농구협회 재건 주도 회장직무대행 겸 이사장(1945년), 아시아농구연맹 창립 부회장(1958년), 한국농구코치협회 창립 회장(1984년), 한국여자농구연맹(WKBL) 총재(1998년) 등을 지냈다. 단순한 감투가 아니라 꼭 필요한 상황에서 그가 직접 동분서주하며 만든 단체들이다. 광복 직후 농구협회 재건을 위해 정치인 안재홍을 1년간 설득해 초대협회장에 취임시켰다. 가장 큰 업적은 1958년 말 아시아농구연맹(ABC) 창립이다. 그해 5월 도쿄아시안게임에서 필리핀을 ‘농구는 너희가 최고’라고 구워삶았고, 이후 각국 실력자인 우에다(일본), 칼보(필리핀), 존스(FIBA)를 각개격파해 만장일치로 ABC를 결성했다. 3년 뒤인 1963년엔 “남자선수권도 있는데 여자선수권도 만들자”고 제의해 결국 한국을 1965년 제1회 아시아여자농구선수권(서울 ․ 장충체육관) 우승자로 만들었다. 물론 박신자 등의 활약으로 전성기에 오른 한국여자농구를 국제화시키기 위한 이성구의 계산된 결과였다. 이같은  프로젝트엔 스승 이상백의 조언을 구했을 것이다. 이상백이 큰 틀에 씨앗을 뿌리면, 이성구는 세심한 부분까지 그것을 착상시켰다.

수완가 이성구는 독특한 기지와 배짱, 행동력으로 소문 났다. 다음은 이해병이 회고하는 에피소드.

 

#1. 1936년 전일본농구종합선수권에서 우승, 파란을 일으키긴 했으나 막상 귀국하려니 도쿄에서 시모노세키 가는 열차편이 동나 며칠을 기다려야 할 판. 이성구는 자신만만하게 도쿄역 역장실을 찾았다. 손엔 우승컵을 들었다. “역장, 이건 천황의 동생(=다까마쓰노 미야)이 내린 트로피요. 우리야 어찌 되도 상관없으나 객지에서 트로피 상할까 걱정되오.” 역장은 오동나무로 된 우승컵 케이스에 연신 90도로 절을 했다. 금새 기차표가 나온 건 물론이다.

#2. 태평양 전쟁이 막바지에 접어들자 한국농구 산실인 종로 YMCA체육관도 위기에 처했다. 일제는 이를 군복생산 공장으로 징발할 방침이었다. 이를 들은 이성구가 부랴부랴 일본해군 예비역 대위 시미즈를 찾았다. 그는 당시 해군체조 보급에 열성이었다. “시미즈 씨. YMCA체육관을 거져 빌려줄테니 체조 보급장으로 활용하시오.” 반색한 시미즈는 즉각 뛰어다니며 징발을 해제시켰다. 이후 농구연습은 해군체조 시간 이후로 밀렸으나 여하튼 YMCA체육관은 살아났다.


● “비열한 승리보다 당당한 패배를…”

이성구는 행동가이자 이론가였다. 특히 선진농구 이론과 기량 습득에 열성이었다. 미국 워싱턴대학 농구팀 센터출신인 한국인 2세 전봉운 초청(1931년), 미국 스프링필드대 코치 존 번 초청, 미국 세미프로출신 네트 홀맨 영입(이상 1950년대), 찰스 마콘 국가대표 코치 영입(1965) 등이 수 십 년에 걸쳐 일관한 그의 노력 결과이다. 이로 인해 수비의 기본 풋 워크, 훅 슛, 원 핸드 슛, 선진 코칭 시스템 등이 국내 소개됐다. 1976년 제21회 몬트리올 올림픽 땐 한국 농구 국가대표가 참가하지 않았음에도 혼자 현지에서 관전, 미국 대표팀 수비형태를 한국에 전하기도 했다.

그는 한국농구 전반의 교사였다. 사랑과 열정 뿐 아니라 체육을 대하는 철학적 입장에서도 그랬다. 스승 이상백과 마찬가지로 이성구 역시 아마추어리즘을 신봉했다. “공부하지 않고 돈만 번다면 스포츠에 재앙이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연세대 체육부장 시절엔 “졸더라도 꼭 수업에 들어가야 한다”(전 연대 농구부 감독 김남기 회고)고 후배들을 가르쳤다. “고연전은 고려대학교와 연세대학교만의 것이 되어서는 안된다”(고대신문, ‘고연전을 앞두고’, 1968년 8월 26일)고 승부지상주의를 경계하기도 했다.


그는 방렬, 신동파, 김인건 등 한국농구의 별들을 길렀다. 지금도 연대에선 우수지도자에게 ‘이성구 상’을 수여하고 있다. 그러나 이성구에 걸맞는 단 한 단어를 고르라면 역시 페어 플레이일 것이다. 그는 3남 3녀를 뒀다. 3남인 영복 씨가 묘비명을 썼다. “비열한 승리보다 당당한 패배를…” 세상 어떤 선수가 묘지까지 이처럼 멋진 말을 가져가나.

한국프로농구연맹은 그를 기리는 의미에서 매년 모범선수상을 시상한다. 그 이름 역시 ‘이성구 페어플레이 상’이다.          


 임용진(전 중앙일보 기자)

※‘스포츠코리아’(2013.11.)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