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용진 스포츠칼럼

제목스포츠인물 열전 ⑥ – '스테이트 아마추어'의 사령관 김택수2018-04-12 20:1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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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인물 열전 ⑥ – '스테이트 아마추어'의 사령관 김택수


1970년대 체육계는 ‘스테이트 아마추어’의 전성기였다. ‘체력은 국력’이며 손기정 이후 40년의 금메달 가뭄이 올림픽 선수단복마저 황금색(1972 제20회 뮌헨올림픽)으로 칠하던 시절, 호랑이 김택수가 맨 앞에서 그것을 이끌었다.

김택수(1926~1983)는 제24대 대한체육회장(1971.11.~1979.2.)이며 한국인으로는 네번째 IOC위원(1977~1983)이다. 동시에 그는 박정희 정권 2인자인 김종필의 최측근이자 집권 공화당 원내총무로 정계에서 실력을 과시했다. 그는 평생 두 개의 작품을 남겼다. 하나는 광복 후 첫 올림픽 금메달(1976 몬트리올올림픽, 레슬링 양정모)이고 다른 하나는 3선개헌(1969.10.)이다. 둘 다 유례 없던 것이고 그의 밀어붙이기 진두 지휘가 돋보였다. 체육과 정치는 김택수에게 동전 양면처럼 손쉽게 뒤집혔다. 그런데 과연 어떤 게 앞면이었을까? 김택수를 살피다 보면 이런 질문이 나온다. 이는 지난 세대 한국체육의 존재조건에 관한 물음이기도 할 것이다.

그는 1976년 1월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스포츠는 정직합니다. 잘하는 사람이 반드시 이기니까요. 정치는 달라요. 힘만 가지고 승패가 나는 것은 아니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정치는 괴물이랄 수 있습니다.” 김택수는 사실 평생 이 ‘괴물’에 끌려다녔다.


● 남북대결, 우열승패 전설의 시작

억눌린 자들의 독립 염원을 누설하던 식민지 시절 ‘운동’ 에너지는 60, 70년대 냉전시기에 들어 공식적으로 폭발한다. 국가가 나서서 선수훈련시설, 과학적 시스템, 체육복지 등을 경쟁적으로 장려 지원했다. 총칼 없는 전장에서 스포츠가 무기를 대신한 것은 소련, 미국, 북한, 한국이 다 마찬가지였다. 동독 등은 ‘스테이트 아마추어’ 이름 아래 대규모 스테로이드 군단을 양산했으며 1972년 뮌헨올림픽 사격 금메달리스트 이호준(북한)은 수상소감에서 “원수의 가슴에 총알을 날리는 심정으로 쐈다”고 말해 파문을 일으켰다. 주적 ‘북괴’를 이겨야 하는 절박함은 한국도 못지 않았다. 당시 일간지 체육면을 보자.

“제8회 「방콕」 아주경기대회에서 당초의 목표대로 남북대결에서 승리하고 종합순위 3위를 획득한 한국 선수단이 21일 개선했다. 「스포츠」의 남북대결은 74년 제7회 「테헤란」 아주대회 이래 지적돼 그때는 금「메달」 16개를 획득한 한국이 금「메달」 15개인 북괴를 1개 차이로 눌렀으나 이번에는 금 18개를 차지해 금 15개인 북괴를 3개 차로 제압했다.”(중앙일보, 1978. 12. 23.)

‘북괴’ 등의 표현은 당시의 대결적 분위기를 그대로 전한다. 금메달은 전과로 여겨져 숫자로 승패를 따졌다. 스포츠는 전쟁이다, 지면 죽는다! 대한체육회장, 아니 남북 체육전쟁 사령탑으로서 김택수는 이같은 스트레스의 정점에 있었다. 적에게 지느니 아예 싸움을 피했다. 한국 축구는 1974년 테헤란아시안게임 예선전에서 우세한 전력에도 불구하고 쿠웨이트에 0-4로 크게 졌다. 여기서 이겼을 경우 4강전에서 만날 북한이 두려워 당시 김택수 체육회장 지시로 고의 패배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군사작전에서처럼, 큰 승리(=정치)를 위한 부수적 피해(=체육)는 당연했다. 사기가 꺾인 축구 국가대표는 테헤란에서 결국 적당히 지지도 못 하고 대패했다.

이같은 북한 울렁증은 직접적으로는 2년전인 1972년 뮌헨올림픽에서 기인한다. 김택수는 매사에 열정적인 사나이다. 대한체육회장에 취임한 지 몇 달도 안 됐으나 뮌헨에서 ‘광복 후 첫 금’을 캐기 위해 개막식에 입장할 한국 선수단 단복을 금색으로 하라고 지시할 정도였다. 전문가들이 기술적 문제로 난색을 표하자 그는 형인 김한수가 설립한 한일합섬에 특별 부탁, 마침내 한국선수단 46명이 황금색 재킷에 붉은 스카프(넥타이)를 번쩍이며 뮌헨 올림픽 스타디움에 입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정작 금빛 기선은 앞서 북한의 이호준(사격 소구경 복사)이 제압했다. 광복 후 올림픽에 처음 참가한 북한은 ‘첫 금’ 뿐 아니라 단숨에 은메달(1), 동메달(3)을 추가해 기세를 올렸다. 한국의 메달박스는 반면 감감 무소식, 국내에선 ‘노 메달’이면 김포국제공항이 아닌 김해공항으로 귀국시켜라는 여론까지 비등했다. 다행히 대회 막판 유도 오승립의 은메달이 터져 ‘도둑귀국’은 면했다. 그러나 금도, 동도 없는 달랑 은메달 하나여서 한국은 북한에 크게 밀렸다. 그나마 은메달 하나도 소중했다. “(김 회장이) 감격에 겨운 나머지 숙소까지 찾아와 몇 번씩이나 메달을 매만지며 ‘이 메달이 우리를 살렸다’고 울먹일 정도”(김성집의 회고)였다.


● 몬트리올에 목숨을 걸다.

김택수는 속전속결의 사나이다. 3선개헌도 야당이 방심한 틈을 타 번개처럼 총회장을 옮겨 기습처리했다. 몬트리올에서 권토중래하겠다는 구상도 아마 김포공항 도착 전 귀국 비행기 안에서 다 끝냈을 것이다. 뮌헨 올림픽 직후 김택수는 기자회견을 연다.

“김택수 대한체육회장은 「올림픽」의 금「메달」은 가능하다고 전제, 「메달」종목, 특히 투기 경기에 대한 4년간의 상비군 설치를 강조했다. … 김 회장은 우리 「스포츠」가 먼저 체력을 양성한 후 기술을 습득해야만 한다고 못 박고 「올림픽」 기간에 맞추어 4년 동안의 상비군 제도를 두어야한다고 앞으로의 설계를 피력했다. 공산권의 「스테이트·아마」가 「메달」고지에 유리한 입장이라고 거듭 강조한 김 회장은… ”(중앙일보, 1972. 10. 5.)

그리고 마침내 4년후. 제21회 몬트리올 올림픽 마지막 날인 1976년 8월1일 오전 9시45분(한국시각), 투기종목 레슬링에서 양정모(자유형 페더급)의 드라마가 펼져친다. 올림픽 폐막을 불과 네 시간 앞두고 터진 광복 후 ‘첫 금’에 전국민이 환호하고 목 메인다. 양정모가 매트에서 펄쩍펄쩍 뛰었으며 김택수는 눈물을 흘린다. 상비군 설치, 투기 집중공략, ‘선체력 후 기술’ 등. 모든 것이 사령관의 프로젝트대로 진행됐다. 그의 최정예 군사 한 명이 지치지 않는 체력과 투지로 이미 4년전 예정된 고지를 점령했다. 주연은 양정모지만 감독은 김택수였다. 몬트리올에서 한국은 ‘금1, 은1, 동4’를 거뒀다. 북한은 ‘금1, 은1, 동0’으로 뒤졌고 이후 경제 파탄으로 국가체육에서도 내리막을 걸었다.

김택수는 무조건 ‘금’을 다그치지 않았다. 무엇이 사람을 움직이는가 정확히 파악했다. 체육회장 취임초부터 체육인 연금(우수경기력 연금)을 공약해 이를 몬트리올올림픽 1년전인 1975년에 제도화했다. 당시 금메달리스트는 이사관급 월봉인 10만원, 은메달리스트는 서기관급인 7만원, 동메달은 사무관급인 5만원을 받았다. 물론 최초의 금메달리스트 연금 수혜자는 양정모며 이후 2012 런던올림픽까지 수백명의 메달리스트들이 이 혜택을 받고 있다. 현재는 금메달 매월 100만원, 은메달 75만원, 동메달 52만5천원씩이 지급되고 있다.

그는 사재도 털었다. ‘첫 금’ 주인공에게 “내가 1억원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당시(1975년) 체육회 1년 예산이 7억900만원이던 시절이다. 단순비교는 불가하지만, 현재 체육회 예산이 1,300억원임을 감안하면 당시 체육회 예산 1/8인 1억원은 배고픈 체육인들에겐 상상할 수 없는 거액이었다. 야담 하나. 김택수는 ‘첫 금’ 상여금이 정부에서 나오길 은근히 기대했다. 그러나 박정희 대통령이 “서민들과 너무 차이 난다”며 단숨에 거절하자, 결국 자기 주머니에서 냈다. 정확한 액수는 엇갈리지만, 5천만원 이상으로 ‘약속’을 지켰다 한다.

김택수는 몬트리올 금메달에 자신의 정치생명도 걸었다. 올림픽 개막 한달 전인 1976년 7월 기자회견에서 “이번 대회에서 금「메달」을 획득하지 못하면 김포공항에 도착하는 즉시 회장직을 사임하겠다”(조선일보, 1976.7.17..)고 발표한 것이다. 제8대 국회의원 총선에서 공천을 받지 못해 대한체육회장 직에 더 전념할 수 밖에 없던 그로서 이는 자칫 모든 걸 잃을 수도 있는 비장한 출사표였다. 이같은 각오 탓인지 올림픽을 관전하며 그는 자주 “십 년 감수했다”고 말했다 한다(김성집의 회고). 그가 가장 좋아했고 또 큰 기대를 걸었던 복싱이 메달권에 들지 못하자 극심한 스트레스로 병원에 입원하기 했다. 그는 제 것도 아닌 금메달 한 개에 돈과, 정치생명, 건강까지 모든 것을 걸었다. 김택수는 그런 사나이다.


● “체육이 만만하단 말인가?”

김택수는 경남고등학교 시절의 축구선수였고 1961년 경남체육회 회장(35세)을 맡아 체육행정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1966년부터 1973년까지 대한복싱연맹 회장을 역임했으며 1966년 아시아 아마복싱연맹회장 겸 국제아마복싱연맹 부회장(각 대륙별로 2명씩)에 선출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체육경력에도 불구하고 체육 쪽에선 그를 정치인으로, 정치 쪽에선 그를 체육인으로 봤다. 김운용은 “김택수 회장은 정치권력을 휘두르던 정치 거물이라 그런지 체육회장 자리가 마땅치 않았던 것 같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그러나 김택수 자신은 “정치인들이 체육을 너무 만만히 보고있다”며 자주 화를 냈다.

그는 1978년 12월 제8회 테헤란아시안게임 선수단 해단식에서 대한체육회장 사임을 발표한다. 당시 언론들은 10대 총선에서 공화당소속 국회의원으로 당선됨으로써 정치활동에 전념키 위한 것이라 보도했다. 결국 그의 고향은 정치였을 것이다. 올림픽 금메달로써 커다란 숙제를 풀었기 때문에 체육계를 떠나는 부담도 많이 덜었다고 볼 수 있다. 애초 대한체육회장이란 명함 자체가 실은 정치인 김택수가 정치공백기에 선택할 수 밖에 없던 대안이란 분석도 있다. 3선개헌을 성공시키고도 제8대 총선에서 그는 공천을 받지 못했다. 그의 신당동 집이 지나치게 크다는 보고를 받고 청와대 눈 밖에 났다고 알려졌지만 실은 김종필의 측근이어서 탈락됐을 것이다.

김택수는 경남 김해군 명지면(현 부산시 강서구 명지동)에서 태어나 경남고등학교, 서울대 법대를 졸업했다. 친형 김한수와 함께 기업활동을 하다 1961년 이후 군사혁명 실세들과 교유하며 정치에 입문, 민주공화당 소속으로 제6대, 7, 10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1979년 짧은 정계 복귀는 신군부 등장으로 마감되고 다시 IOC위원으로 남았지만 서울 올림픽 유치시 소극적 활동과 타계시까지 칩거 등으로 인해 그의 말년 체육활동은 별로 주목받지 못했다. 신군부가 주도한 올림픽 유치에 반발했기 때문일까? 그는 88올림픽 유치활동 막바지까지도 가까운 이들에게 “IOC 위원 중 찬성은 미국, 대만과 나의 단 세표에 불과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1983년 7월17일 지병인 간암으로 타계했다. 불과 57세, 부인 최숙희 씨와 사이에 4남2녀를 두었다. 메달 지상주의자 등의 비난도 받았으나 그의 지도력이 없었다면 한국체육의 전성기도 늦춰졌을 것이다. 국가체육은 어차피 넘어야할 산이었다. 그 이후에 김연아, 박태환, 손연재가 오는 순서를 한국은 밟고 있을 뿐이다.

한국 체육은 스포츠행정에 온몸을 던진 김택수란 사나이에게 큰 덕을 봤다. 그의 고향이 정치인지 어디인지를 지금 와서 따지는 것이 오히려 공정치 못하다. 김택수와 오랫동안 고락을 같이 한 김성집은 추모사에서 이렇게 애도했다.

“70년대 한국 스포츠계의 거목이요, 대부와도 같던 인물이 가셨다. … 지금 이 순간에도 태릉선수촌의 잔디언덕에 앉아 훈련 중인 선수들의 모습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는 그분의 환상이 마치 현실같이 느껴진다. 그만큼 그분의 개성과 체취는 강렬했다. 나는 정치인으로서의 그분에 관해선 잘 모른다. … 그러나 그분이 뿌린 노심초사한 땀방울과 질풍같은 추진력이 오늘의 한국스포츠를 키워냈음을 아무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중앙일보, 1983. 7. 21.)

김택수의 호는 국산(菊山)이다. 들국화처럼 강인했으며 얼굴도 카리스마 넘친 호상(虎相)이었다. 그의 영결식은 대한체육회장으로 서울장충동 중앙국립극장에서 엄수됐다.                               



임용진(전 중앙일보 기자)

※ 스포츠코리아(2013. 10.)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