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용진 스포츠칼럼

제목스포츠인물 열전 ⑤ – ‘한국의 쿠베르탱’ 이상백2018-04-12 20:1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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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인물 열전 ⑤ – ‘한국의 쿠베르탱’ 이상백


대학 때 이상백이란 이름을 처음 봤다. 학과 연구실 서가에 꽂힌 ‘상백 이상백 박사 회갑기념 논총’에서 였다. 속으로 “음, 유명한 연구자인 모양이군. 사회학자인가, 사학자인가?” 정도로 생각했다. 후에 신문기자가 돼 체육현장을 다니다 또 이상백을 만났다. ‘이상백 배 한일 대학선발농구대회’에서 였다. 또 속으로 “동명이인인가? 농구계에 공이 많은 원로인가 보군” 하고 여겼다. 이 둘이 같은 사람임을 안 것은 한참 후였다.

 

● 전인 이상백

상백 이상백(想白 李相伯·1903~1966)은 보기 드문 전인적(全人的) 인물이다. 인문학자로 한국 사회학의 기초를 닦았으며 체육인이자 체육행정가로서 한국 근대 체육을 한 단계 도약시켰다. 일본 와세다대 농구부 주장, 일본체육협회 전무이사, 국제농구연맹(FIBA) 제1호 심판, 한국올림픽위원회(KOC) 위원장,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이 그의 주된 체육이력이다. 또 학자로서 서울대 교수며 진단학회 위원장, 한국사회학회 초대회장이었다. 특히 체육인으로서 그는 1936년 베를린올림픽에서 농구가 올림픽 정식종목으로 채택되도록 주도했으며 광복 직후 혼란기 속에서 한국을 신속히 국제올림픽무대의 일원으로 올리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한 사람이 평생 집중해도 이루기 힘든 일가(一家)를 그는 두 분야에 걸쳐 해냈다. 그것도 남보다 짧은 예순 넷 생애에서, 외견상 쉽사리 이뤘다. 전 IOC위원장 에이버리 브런디지는 1960년대 한 연설에서 “나는 학문과 스포츠가 앙상블 된 이(상백)박사를 존경한다”고 했다. 브런디지는 또 “이상백이 미국에서 태어났다면 IOC위원장은 내가 아니라 그였을 것”이라고도 했다. 이상백은 사회학자면서 국사편찬위원이었고 골동품 감정 전문가여서 국보 등의 지정에도 관여했다. 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 걸 할 수 있는가의 예로 레오나르도 다빈치 등을 들지만 그렇게 멀리 갈 것도 없다. 이상백은 완전한 인간의 전형이었다. 그들은 모든 일을 매끄럽고 완벽하게, 다방면에 걸쳐 동시에 진행한다. 이상백의 지인들에 따르면 그는 가위 ‘무소불능’, ‘종횡무진’이었다. “1백년에 한 두 분 날까말까 한 희대의 인물”(김채윤, ‘종횡무진의 일생’)로 평가된다.



● 거인 이상백

이상백은 귀밑머리 새파란 30대 초반에 이미 일본체육계를 좌우 했다. 운 좋거나 누구에게 잘 봬 그리 된 게 아니다. 일본농구협회 창립 상무이사, 일본체육협회 이사와 상무이사 등 실력으로 단계를 밟아 일본체육협회 전무이사(1935~37)까지 올랐다. 요즘으로 치면 대한체육회 전무이사 쯤 되겠지만 그가 피식민지 출신이란 점을 감안하면 이상백에 대한 신망은 양국간 적대감이나 비하를 훨씬 넘어선 것이었다. 무대가 정치가 아니라 체육 분야여서 가능한 일이었겠으나 적어도 영향력 면에서 이상백은 당시 조선인(한국인)에게 그들이 허용한 최상의 수준이었다. 1966년 그가 비교적 일찍 타계했을 때 한·일 양국이 크게 아쉬워했다. 두 정부에서 모두 훈장을 추서했으며 한국은 물론, 내로라 하는 일본 체육인들이 이상백의 제자 후배를 자처했다. 60년대면 한국과 일본간에 아직 적대적 유감이 짙던 때다. 하지만 ‘농구의 아버지’를 잃은 아픔은 서로 같았다.

이상백은 키가 후리후리 했고 거인의 풍모를 지니고 있었다.  “이질적인 것을 자기 속에 담을 수 있는 능력”(한완상, ‘나의 스승 이상백 선생’)으로 그 주변에 음악인, 미술가, 정치가, 군인, 체육인, 언론인 등이 끊이지 않았다. 교유범위도 국경을 초월했다. “아시안게임 등 국제대회에 가면 항상 일본임원들이 먼저 이박사님을 예방해”(한양순, ‘국제 스포츠사회의 거목 이상백 박사’) 가난했던 시절 후배 체육인들을 으쓱하게 만들었다. 브런디지 전 IOC 위원장과는 1932년 LA올림픽 이후 평생 지기로 지냈다.


광복 직후 열악한 환경에서 한국이 1946년 런던올림픽에 선수단을 60명이나 파견한 것도 이상백이 브런디지에게 부탁 → 브런디지가 태평양주둔연합군 사령관인 더글라스 맥아더 원수에게 부탁 → 맥아더가 미 군정청 장관 하지 중장에게 지시 → 미 군정청 재무부 고문의 ‘파견’ 발표 순으로 역순을 밟아 성사된 일이다. 광복 이후 최초의 올림픽에서 규모를 잃지 않은 신생 한국은 이후 국제 스포츠 무대에 신속하게 적응했다.



● 아마추어주리즘, 원칙주의자

거인에게도 원칙은 있다. 이상백은 스포츠에 관한 한 철저하게 아마추어리즘을 고수했다. 특히 스포츠에 정치 물이 드는 것을 질색했다.

1950년대 한때 이상백은 자유당 정권 2인자이자 IOC 위원인 이기붕과 ‘2인3각’이라 할 만큼 스포츠 행정에서 긴밀한 사이였다. 그러나 50년대 말 이기붕이 대한체육회에 자유당 정권 지지를 노골적으로 요구하자 둘 사이는 급속히 냉각, 이상백은 이후 자유당 정권 몰락까지 일시적으로 국내 체육 행정을 돌아보지도 않게 된다.

1932년 LA올림픽에서 이탈리아 수상 무솔리니가 남자 1,500m 우승자인 벳카리(이탈리아)에게 훈장을 수여하자, 일본선수협회는 이를 “개인의 심신 건강을 위해 노력한 결과 얻는 우승에 국가가 국위를 선양했다고 훈장을 수여한다는 것은 아마추어리즘에 위배될 뿐더러 이 풍조를 용인했다가는 스포츠가 부패하고 멸망한다”며 대놓고 반대했다. 이는 당시 LA올림픽 일본선수단 본부임원인 이상백이 주도한 것이었고 결의문 역시 그의 손으로 직접 작성됐다.

이상백은 대학생 선수들이 최소한의 학교수업마저 포기하는 현상을 늘 안타까와 했다. “지금은 운동이 중요하겠지. 그러나 공부를 안 하면 어떻게 지도자가 될 것인가”라고 개탄했다 한다(이태영, ‘스포츠와 학문의 앙상블’). 아마추어리즘과 대학스포츠, 페어 플레이는 이상백이 평생 추구하던 이념이자 자부심이었다.


식민지하 조선청년에게 가해진 사회적 한계를 한 걸출한 개인이 탈출하는 데는 스포츠 이상의 분야가 없었을 것이다. 그것을 극단으로 표백시킨 것이 국경도 없고 이념도 사라진 상태의 스포츠 아마추어리즘이다. 그런 점에서 이상백은 조선 땅에서 스포츠에 한과 울분을 담던 손기정, 이길용 등 토종 체육인과는 분명 다르다. 그러나 이상백이 공허한 것만은 아니다. 그는 거인답게, 큰 옷자락으로 세계와 트고 지내며 조국 스포츠에 균형추를 제시했다. 각자 제 위치에서 할 일을 한 것 뿐이다.



● 기린아 이상백, ‘용·봉·인·학’

이상백에게서 가장 부러운 것이 그의 타고난 능력과 교양, 용모, 가계 등이다.

이상백은 월성 이씨 4형제 중 셋째로 1903년 경북 대구에서 출생했다. 아버지 이시우가 일찍이 작고해 어머니가 4형제를 키웠다. 그녀가 바로 그 유명한 김신자 여사다. 김 여사는 1909년 ‘교육부인회’를 조직해 여성 계몽운동을 벌였으며 ‘부인야학교’ 설립을 주도했다. 그녀는 항상 “네가 혼자 있을 때도 네 자신을 속이지 말라”고 자식들을 훈도했다. 성철은 시봉들에게 경상도말로 “네 자신을 쏙이지 말그래이”라고 일렀다. 김여사나 성철 모두 평범하고 어려운 실천을 강조했다. 그게 교육이다.

이상백의 장형은 이상정(1897~1947) 장군이다. 한국 독립군 출신으로 중국 장개석 군 고위 막료가 돼 후에 중국 대표로 패전 일본군을 무장 해제시켜 식민지의 한을 상징적으로 풀었다. 둘째 형은 바로 그 가슴 저릿한 시인 상화 이상화(尙火 李相和, 1902~1943)이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백조 동인이며 한국 시단의 개척자인 이상화는 왜경의 숱한 고문과 옥고 여독 끝에 광복 2년전 타계했다. 이상정이 총을 든 자리에, 상화는 붓을 들었다. 이상백의 동생, 월성 이씨 4형제 중 막내는 이상오(1905~1969)다. 그는 형들이 중국, 일본에서 풍운을 몰고 다니는 동안 고향에 남아 사업으로 그들을 뒷바라지 했다. 수렵가, 저술가며 대한사격협회 회장을 역임했다.

월성 이씨 4형제는 각자 ‘용’(龍=상정), ‘봉’(鳳=상화), ‘인’(麟=상백), ‘학’(鶴=상오)으로 불리며 세간의 부러움을 샀다. 한 사람도 그럴진대, ‘엄친아’가 넷이나 됐으니 그럴 만도 하다. 이것 역시 먼 나라 케네디 가문까지 갈 것도 없다. 어머니 김신자와 ‘용, 봉, 인, 학’ 4형제가 바로 명문이다.

이상백은 ‘기린’답게 용모 수려하고 키가 컸다. 6척 장신이라 하는데 실제로는 175cm(5척7촌8푼)란 기록도 있다. 이 정도만으로도 당시엔 장신이어서 그는 현역시절 명 센터로 이름을 날렸다. 그가 방학 때 귀국하면 기생들이 이 미남 대학생을 마중하기 위해 대구역에서 인력거를 타고 기다렸다는 소리도 있다.

이상백은 1966년 4월14일 심근경색증으로 타계했다. IOC 위원으로 피선된지 채 2년도 안 된 시점이었다. 더 큰 일을 할 겨를조차 없었다는 것이 그 개인으로나, 한국체육계로서는 안타까운 일이다.

김필동은 이상백의 생애를 이렇게 축약한다. “상백의 삶은 매우 이중적이고 복합적인 것이었다. 그는 항상 두 가지 일을 동시에 수행했고, 거의 모든 점에서 양면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는) 일본을 위해 열심히 일하면서도, 동시에 한국(인)을 위해서 자신의 위치를 이용할 줄도 알았다. 그는 일본인들과 매우 밀착된 삶을 살면서도, 이른바 ‘창씨개명’을 하지 않고 일제시대를 넘겼다. 그리고 종국에는 한국의 독립을 달성하기 위한 비밀결사인 ‘건국동맹’에 참여하여, 정치적인 활동을 했다. … 이러한 그의 이중적인, 아니 다면적인 모습을 포괄적으로 이해하지 않는 한, 그에 대한 이해는 매우 불충분할 수 밖에 없다.”

고인이 된 이상백을 기려 아시안게임 최우수선수(MVP)에겐 상백배가 수여됐다(1974~94). 또 한일 양국은 1978년부터 이상백배 한일 대학선발농구대회를 36년째 매년 공동개최하고 있다. 특정인의 이름을 딴 대회는 그에 대한 최고의 찬사다. 그런데 지난 5월 후쿠오카에서 열린 올해 대회에선 뜻밖에 일본 관중석에 대형 욱일승천기가 걸렸다. 스포츠의 정치화를 경계했던 이상백이 봤다면 얼굴을 돌렸을 것이다. 하기야 요즘엔 이상백배 농구대회를 해도 일간지에 경기결과 한 줄 나지 않는다. 아시안게임 MVP 명칭도 바뀐지 오래다. 아마추어리즘은 그만큼 퇴색했다.

이상백은 평소 붓을 잡고 ‘원여달인유’(願與達人遊=달인과 함께 노닐고 싶다)란 구절을 자주 썼다. 스포츠의 거목들이 하나 둘 떠나버린 지금 한국체육계는 어떤 달인과 함께 노니는가.               


임용진(전 인천일보 편집인)

‘스포츠코리아’(2013. 9.)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