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용진 스포츠칼럼

제목스포츠인물 열전 ④ – 의거기자 이길용, 일장기를 말살하다.2018-04-12 20:1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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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인물 열전 ④ – 의거기자 이길용, 일장기를 말살하다.


8월9일이 곧 온다. 기막히게도 한국마라톤은 이날 세계를 두 번 제패했다. 1936년 8월9일 베를린 올림픽(손기정)과 1992년 8월9일 바르셀로나 올림픽(황영조)에서. 그러고 보면 역사는 우연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수십년 전 일장기 때문에 겪었던 설움을 하필 같은 날 태극기로 씻게 하다니.

여기 사진 한 장이 있다. 한 사나이가 머리에 월계관 쓰고 두 손엔 월계수화분을 들었으나 입술을 굳게 다문 채 무척 우울한 표정이다. 슬픔이 그것을 지워버렸음인지 그의 가슴에선 승자의 국기를 찾을 수 없다. 1936년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우승자 손기정의 가슴에서 히노마루(=일장기)가 사라진 이 사진은, 그 단 한 컷으로 한국근대사의 가장 중요한 순간을 웅변한다. 손기정의 슬픔이 없었던들, 일장기를 지운 조선 기자들의 용기가 없었던들 고단한 식민치하 당대의 자부심과 의미를 어디서 증거할 것인가. 손기정의 금메달은 그 고뇌로 인해 한 개인에서 집단으로 의미가 승격됐다. 게다가 히노마루를 지우고 보도한 기자들과의 합작은, 그것을 개별사인 체육사에서 한국근대사 일반으로 승격시켰다.

손기정은 그의 일장기 삭제 사건을 보도 한참 후 귀국선 상에서 알았다고 한다. 당시 국내에선 언론인 수십명이 고문, 투옥되고 일간지인  동아일보, 조선중앙일보와 잡지 ‘신가정’, ‘신동아’가 무기정간 또는 폐간되는 등 정치적으로 사안이 비등했다. 동아일보 일장기 말소일자가 1936년 8월25일자 석간이다. 때마침 8월초 조선에 새 총독 미나미(南次郞)가 부임했으니 그로서는 부임 스무날도 안 돼 큰 선물을 받은 셈이다. 미나미는 “3·1 시위(삼일 만세운동)보다 더한 반역”이라고 흥분했다 한다.

한국 언론은 사실 그 전에도 일장기를 지웠다. 베를린올림픽 4년 전인 1932년 LA올림픽 때도 동아일보 등이 한국인 마라톤 출전선수의 가슴에서 일장기를 지운 채 보도했다. 이같은 과정에서 응축된 에너지가 그 60년 후 황영조의 태극기 금메달로 일거에 분출돼 노옹 손기정을 바르셀로나에서 덩실덩실 춤추게 하거니와, 1930년대 한국 기자들의 ‘말소’의거는 결코 일회적 충동적 사안이 아니었다. 시점에서 마침표까지 시기적으로 수 십 년에 걸쳤고 등장인물도 여럿인 도도한 대사건의 물결이었다. 물론 여기에도 주역은 있다. 당대의 체육기자 이길용이 바로 그다. 5척 단구의 이 에너제틱한 사나이는 피식민지 한국 체육 현장을 지휘하다시피 하다 6·25 전쟁 와중에서 홀연 사라져버렸다.



● 운동부 기자, 체육인 멘토

우리는 이길용(李吉用·1899~?)을 우선 체육기자로 기억한다. 일제 때 용어론 운동기자라고 했다. 당시 신문사 편집국엔 체육부가 따로 없어 사회부 기자가 체육 분야를 담당했다. 운동기자 이길용은 초년병인 26세(1924년) 때 이미 조선체육회 상무위원에 선출됐다. 23세(1921년) 신문사에 입사해 일장기 ‘말살’ 의거로 38세(1936년) 때 강제로 편집국에서 쫓겨나기까지 15년간 기자 신분으로 다양한 종목에서 한국체육을 초석하고 이끌었다. 초창기 여성체육행사로 뜨거운 관심을 모은 제1회 전국여자정구대회 실무 겸 심판(1923년·25세)을 시작으로 조선 운동기자단 조직(1927년·29세), 조선스키구락부 창설(1930년·32세), 조선농구협회 창립이사, 조선수상경기회 창립 상무이사, 조선체육연구회 발기인(이상 1931년·33세) 등 체육인 이길용의 이력은 가히 한국체육사 그 자체다.


이길용의 배재학당 5년 후배이자 축구 원로인 김화집은 회고한다.  “무슨 경기가 있든 첫 게임부터 끝까지 다 보고 나서 기록해 이를 신문에 보도하는 사명감이 넘치는 철저한 기자였습니다. 언제나 직접 경기 관전을 다 하고 나서, 마지막까지 선수들의 일거일동, 심판의 판정까지 다 지켜 본 뒤에 현장 위주로 기사에 충실을 기했거든요. … 엄정한 기사를 써서 보도했을 뿐 아니라 일일이 선전분투한 선수가 이기면 격려하고 지면 위로하기를 잊지 않는 운동기자의 모범으로 이런 분은 다시 없다고 봅니다.” 경기 기록만 가지고 멀끔하게 기사를 내는 요즘과는 다르다.

베를린올림픽 예선전을 앞둔 1935년 11월 이길용은 당시 동아시아 육상 중장거리의 3대 스타이던 손기정, 남승룡, 유장춘을 성북동 자택으로 불러 타일렀다. “세 선수 다 실력 발휘를 하면 올림픽 마라톤 제패는 자신한다. 하지만 셋 다 마라톤에 출전하면 일본인들이 올림픽 대표로 뽑을 리도 없고. 설혹 뽑힌다 해도 실적이 미지수니 유형은 5천, 1만미터에 출전하고 손, 남형은 마라톤에 나가는 게 어떤가?. ”(손기정의 회고). 경쟁자들 간에 종목을 조절할 만큼 운동기자 이길용의 영향력이 컸고 경기인들이 그를 믿었다. 손, 남 선수가 베를린 올림픽 대표로 뽑혔고 그의 충고로 올림픽 예선을 양보한 유장춘은 이듬해 메이지신궁대회(1937) 마라톤에서 우승했다.

이길용의 아들인 이태영은 아버지 덕에 스포츠 스타들을 조석으로 만났다. “광복 후 선수들이 성북동 집에 많이 왔습니다. 보스톤 마라톤 우승자인 서윤복, 함기용 씨 일행이 대회 참가 전 인사오고 우승 후에도 태극기와 미국 성조기를 가슴 양쪽에 달고 오셨지요. 전 그때 8살이었습니다”.

이길용이 이처럼 한 시기 체육계 멘토가 된 데는 소학교(=초등학교) 교사로 전심전력 남편을 뒷바라지한 부인 고(故) 정희선의 덕도 크다. “집안 걱정은 안 해도 되니까 전력을 기자생활에 기울이며 일할 수 있었죠. 가정생활은 다 내 책임이지요. 그때 내 월급이 50원이라면 신문사에서 당신은 3백원 받는다 해도 거의 다 교제비와 해외 원정비에 쓰고 동아일보에 톱기사 특종 기사를 많이 내는, 머리 좋고 재치 있어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 하던 민완기자였죠. 친분 있는 언론계 인사는 말할 것 없고, 손기정 선수 이전 김은배, 권태하 선수 등 체육인들도 걸핏하면 우리 집에 와서 시간을 같이 보내곤 했죠.”(부인 정희선의 회고).

이길용은 행복한 운동기자였다. 수많은 경쟁자 속에서 단 한 두 가지 종목에만 전전긍긍하는 요즘 체육기자와 달리 그는 한국체육 초창기 큰 그림을 거시적 안목으로 그렸다. 무엇보다 걸출한 경기인들의 신망을 한 몸에 받았다.



● 독립운동가, 지사(志士), 의거(義擧)기자

이길용의 또 다른 이력은 독립운동이다. 일제하 ‘후데이 센진’(不逞鮮人)으로만 전과 6범이다. 신문사 입사 전 이미 20대 초반에 옥고를 치렀고 ‘말살’ 의거 후 언론계에서 퇴출당해 광복까지 9년간 백수 생활을 할 때도 다섯 차례나 추가로 감옥을 오갔다. 가정 사정으로 중퇴했지만 일본 명문 도지샤(同志社) 대학 출신인 덕에 그는 1918년 (20세) 이른바 ‘잘 나가는’ 회사인 철도국에 취업할 수 있었다. 만주철도회사 서울 역무원으로 서울-만주간 기차를 타고 자주 압록강을 건너곤 했다. 그러나 이를 이길용은 독립운동에 활용했다. 상해 임시정부가 국내로 반입시키는 항일전단 등 비밀문건을 1년 넘게 운송하다 그는 1919년(21세) 현행범으로 체포돼 3년 중형을 받았다. 이때 서대문 형무소 안에서 고하 송진우, 낭산 김준연 등 쟁쟁한 투사를 만난다. 약간의 감형으로 2년만에 출소했으나 요시찰 인물인 이길용을 받아줄 직장은 없었다. 동아일보는 그래서, 별 수 없이 간 곳이다. 동아일보 사장이 된 감방 동기 송진우가 1921년(23세) 어느 날 이길용을 불렀다. 송진우는 그보다 아홉 살 연장이다.

“이 동지, 그래 얼마나 고생이 많았소? 건강이 괜찮다면 우리와 손잡고 기자로 일해 봅시다.(송진우)

“송 선배님, 후의는 고마우나 제가 이 신문사에서 무슨 일을 하겠습니까. 저보다 월등한 인재들이 모였으니 감당하기 어렵지요.”(이길용)

“원 별 말씀. 배재학당, 동지사대 출신으로 이 동지만한 사람이 누가 있소. 걱정 말고 기자로 뛰시오.”(송진우)


“글 쓸 줄 모른다”는 이길용의 사양에도 불구하고 송진우는 편집국장인  하몽 이상협을 불러 즉각 지시했다. “이국장, 임시정부 주요 문건을 밀송하다 형을 치르고 이번에 출옥한 동지인데 신뢰할 만해 우리 신문에 입사시키기로 했소. 명기자가 되도록 내일부터 취재 지시를 내려요. 의식 투철하고 재능이 뛰어나 조금만 숙달되면 대기자가 되리라 믿소.”

사장과 편집국장의 기대대로 이길용의 의식은 투철했다. 1932년 LA올림픽에서 당시 조사부 미술담당인 청전(靑田) 이상범과 상의해 한국인 마라톤출전 선수인 김은배(6위), 권태하(9위) 가슴에서 일장기를 지우더니 급기야 4년 후 베를린올림픽에서 둘은 또다시 의기투합, 동아일보에 무기한 정간의 ‘훈장’을 안겼다.

1936년 일장기 말살 의거 이후 이길용은 “앞으로 언론 기관에 일절 참여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쓰고 간신히 풀려났다. 그러나 이후에도 그는 1939년(41세) 술자리에서 광복을 빗대 “봄이 왔네, 봄이 와! 산에 들에 봄이 와…” 노래했다 하여 5개월 징역을 살았다. 또 1942년(44세) 성북동 동장 시절엔 ‘조기회’(朝起會)를 조직해 3개월간 동대문서에서 고초를 겪었다. 아침에 빨리 일어나 활동하자는 의미에서 ‘조기’(早起)라고 해야지 왜 “조선(朝)이 일어난다(起)고 했냐”고 저들은 다그쳤다. 물론 이는 단순한 트집이 아니라 일경의 간파대로 ‘고의성’이 보이는 작명이다. 그는 광복 45주년인 1990년 광복절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됐다. 그의 독립운동 관련 6차례 옥고 중 재판기록이 확인된 2건을 정부가 공식 인정한 결과다.

손기정은 생전에 이길용을 돌이켜 “그 분은 기자가 아니라 지사(志士)”라고 칭했다. 이길용 일대기인 “일장기 말소의거 기자-이길용”(한국체육기자연맹 편)을 집필한 문학평론가 임중빈은 책 끝머리에 이렇게 썼다. “흔히 ‘사건기자’를 떠받들어 우상시 하는 언론계 풍토이나 그보다 더 비중을 두어야 할 ‘의거(義擧)기자’가 있는 줄 안다. …일찍이 암흑 통치기에 ‘의거기자’의 기수로 마침내 기자도(記者道)에 순도(殉道)하는 열정을 아낌없이 발산한 이길용 선생은…기자 중의 기자로 역사적인 조명을 받아야 한다”.



● 의거(義擧)의 전말

대검 공안부가 공개한 일제하 정보보고문서에 따르면 1936년 8월 동아일보의 일장기 말소 경위는 이렇다. 이는 당시 사건을 수사하던 일제 경기도경찰부장이 8월27일 경성지방법원 검사정(=서울지검장) 앞으로 보낸 것이어서 사태 전말에 가장 가깝다.

“이길용은 8월23일 오사카 아사히(大阪朝日=아사히 신문 발행 스포츠 격주간지)에 게재된 손기정의 사진을 떼 내 조사부 화백인 이상범에게 ‘손선수의 사진을 24일자 석간에 실으려 하니 가슴의 일장기를 흐릿하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이상범은 이를 승낙하고 원래 사진에 덧칠해 일장기를 잘 안보이게 한 뒤 사진부 과장인 신락균의 책상에 갖다 놓았다. 그 후 사회부 기자 장용서가 사진부에 와서 신락균과 사진부원 서영호에게 ‘이상범이 일장기 부위를 지우긴 했으나 아직도 흔적이 남았다’고 하자 이들은 사진 동판(銅版)의 일장기 부분에 청산가리 액을 사용해 아예 말소한 뒤 인쇄부로 넘겨 다음날(25일자) 석간에 게재한 것이다”(대검공안부 공개, ‘소화11년 경찰정보철’에서 발췌)

이에 따르면 손기정 가슴의 히노마루는 두 번 지워졌다. 한 번은 사진 상태에서 화백 이상범에 의해, 또 한 번은 이미 동판 제작된 상태에서 사진부와 사회부 기자들에 의해 청산가리로 더욱 확실하게 ‘말살’됐다. 주모자도 이길용 외에 이상범, 신락균, 장용서, 서영호 등 여럿이다. 또 다른 자료는 당시 사회부 데스크인 빙허 현진건의 공감도 전한다. 평기자 단독으로 제작지시가 불가능한 편집국 시스템상 현진건의 동의는 필수적이었을 것이다.

이 의거로 인해 이길용을 비롯해 현진건, 신낙균, 서영호가 언론계에서 영구 추방된다. 이미 8월13일자에 일장기를 지워 보도한 조선중앙일보(발행인 여운형)는 “인쇄상태가 나빠 (일장기가) 안 보인다”고 변명했으나 동아일보 불똥으로 폐간된다. 동아일보 발행의 월간지 “신동아” 9월호 화보에서도 히노마루가 지워져 잡지 주간인 최승만과 사진부 송덕수가 연행된다. 역시 동아일보 자매지인 여성잡지 “신가정” 9월호는 일장기를 피해 손기정의 발 사진만 게재하고 “이것이 베를린 마라톤 우승자, 위대한 우리들의 아들 손기정 선수의 발”이란 캡션을 달았다. 일경이 이를 다그치자 담당기자인 수주 변영로가 “그야 마라톤에선 다리와 발이 제일 아니요?” 라고 느긋이 반문했으나 “신가정”과 “신동아”는 결국 폐간을 면치 못했다. 사태 진원지인 동아일보가 무기정간에 그친 게 그나마 다행이었지만 송진우 사장과 장덕수 부사장, 김준연 주필, 설의식 편집국장, 양원모 영업국장, 현진건 사회부장, 이여성 조사부장, 최승만 잡지부장, 신낙균 사진과장, 사회부 체육주임 이길용, 화백 이상범, 기자 장용서, 서영호 등 무려 14인이 사직한다. 일제는 사주인 인촌 김성수까지 책임을 밀어붙여 동아일보마저 없애려 했으나 이길용 등이 끝내 편집국 단독 결정이라고 우겨 그나마 정간에 그쳤다. “히노마루를 지우는 게 아니고 농도만 옅게 하려던 게 그리 됐다”는 식이었다. 동아일보는 정간 9개월 6일만인 1937년 6월3일 속간되지만 민족정신의 휴면기는 이미 시작된 뒤였다.

투옥 40일만에 감옥 바깥으로 나온 이길용 등의 심신은 피걸레가 되다시피 망가졌다. “저희 바깥 양반은 몸집이 작아도 남달리 튼튼해 병치레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종로경찰서 고문 후 몸이 완전히 상해버렸어요. 면회는 안 되고 여러 차례 옷만 차입했지요. 그때가 여름이어서 속옷과 와이셔츠를 들여보냈는데 나오는 옷가지는 언제나 피투성이였습니다.”(부인 정희선의 회고).

 


● “1920, 30년대 체육사는 이길용 스크랩 북”

사회활동 정지된 1936년 이후 광복까지 이길용에게는 소외와 고독, 울분, 병고, 술잔의 나날이었다. 누이동생 남편인 한종성이 유학 중 부득이하게 창씨개명했다는 소식을 듣자 “너희도 일본놈 다 됐냐?”고 호통 쳤다. 1940년 8월 동아일보가 폐간되자 그는 더욱 비통해 했다. 만해 한용운의 집인 심우장을 찾아 그와 함께 법담으로 허무감을 달랬으며 사찰순례를 떠나기도 했다. 당시 조선일보 운동기자 이원용, 언론인 성재 이관구, 소설가 상허 이태준, 월탄 박종화, 고미술 수집가 간송 전형필 등이 그의 지우다.

1945년 마침내 광복(47세). 그 눈부심 속에서 이길용도 가슴 벅찬 활동을 재개했다. 김성수, 송진우, 김준연, 조병옥 등이 성북동 56번지 그의 사랑방에 모이더니 한민당을 태동시켰다. 한민당 요직을 맡고 동아일보 복간과 함께 광복 이듬해 사업부 차장으로 복직했다. 체육계 중책도 다시 맡았다. 그러나 봄이 너무 짧았다. 그의 서재엔 장서 1만권이 있었고 체육관련 자료가 산더미였다. 광복 후부터 특유의 꼼꼼함으로 한국체육사 집필을 시도했으나 6·25가 모든 것을 앗아갔다. 1950년(52세) 7월17일 그는 인공 요원에 연행된 뒤 종적을 감췄다. “많은 인사들과 같이 북으로 끌려가면서 아무리 살펴보아도 이길용 선생은 한 번도 뵐 수 없었어요.” 일제하 동아일보 동료기자면서 평양까지 끌려갔다 구사일생 탈출한 황신덕의 메마른 증언이다. 여러 차례의 옥고 끝에 건강을 크게 잃은 이길용으로서 누구에게 호소할 겨를도 없이 숨을 거뒀거나 납북 대열에서 탈락해 종적 불명이 됐을 것으로 추정할 뿐이다.

그는 타고난 문장가였다. 1933년 불과 30분15초 동안 경비행기에 올라타 서울을 상공 굽어본 뒤 이를 동아일보에 12회나 연재할 만큼 관찰력, 필력이 뛰어났다. 같은 해 낙동강 수재민들에 관한 르포르타주로 전국의 심금을 울렸으며 1947년 현장취재기 ‘단장의 38선, 비극의 현장’은 혼신을 다한 명문으로 분단 아픔이 장기화할 것을 우려했다. 한글 세로쓰기 일색이던 1930년대에 이미 체육면 가로쓰기 조판을 관철시킬 만큼 신문쟁이로서도 선구적이었다. 가로쓰기 조판은 그보다 60년 후인 1990년대 들어서야 한국 종합일간지들에 보편화된다.

기록면에서 한국체육사가 온전해진 것은 순전히 그의 덕이다. 아들 이태영은 “집에 체육사 기초 자료가 3~4 박스, 사진자료도 2~3 박스가 있었다.”고 기억한다. 이는 대한체육회가 발간한 “한국체육대감”(1956년)에 활용돼 일제하 체육사의 원 자료가 됐다. 이 책 편저자 김창문은 “이길용씨가 간직했던 1920년 이후 1936년 중반기까지의 운동경기 기록을 모아둔 스크랩 북을 입수하게 됐다. 그래서 해방 전의 기록마저 정연하게 되니…이 스크랩 북이 있음으로 해서 이만한 책이 나오게 된 것을 기꺼이 말해 둔다.”고 감사를 표했다.



● “그는 운동선수를 영웅으로 만들었다”

이길용은 1899년 9월9일 경남 마산에서 태어나 초등학교를 인천(영화학교)에서, 중등학교는 서울(배재학당)에서 다녔다. 당시로는 늦은 34세(1932년)에 여교사던 부인 정희선과 결혼, 슬하에 5남(두영, 하영, 태영, 광영, 우영) 1녀(두옥)를 뒀다. 이중 3남 태영(72·대한언론인회 부회장)은 한국일보, 일간스포츠, 중앙일보에서 체육기자로 일관해 ‘운동기자’ 대를 이었다. 아버지 이길용이 1927년 조선운동기자단을 조직했고 아들 이태영은 1983년 정식 발족한 한국체육기자연맹의 초대 회장을 지냈다. 이길용은 문호이자 주호였다. 납북 한 달여전 동아일보 후배 김진섭과 만나 일인당 막걸리 한 말 석 되 씩 마셔 용금옥(서울 중구 다동) 술을 동냈다는 전설이 있다. 예리하고 비판적, 대쪽기질이 강했으나 주당답게 사람 만나기 좋아하고 사회활동에 적극적이어서 언론, 체육계 선후배들이 그를 따랐다. 한국체육기자연맹(회장 김경호)은 그를 기려 1989년부터 이길용체육기자상을 수상하고 있다. 이길용기념사업회(이사장 장충식) 등 주관으로 지난해부터 기념비 건립이 추진되고 있기도 하다.

이길용은 나이 서른 중반에 기자 생활을 접고 50대 초반에 행불돼 활동기간이 비교적 짧았으나 그 그림자는 한국체육사 누구보다도 크고 길다. 베를린올림픽에 출전했던 농구원로 이성구의 다음 찬사가 이길용의 면모에 가장 약여할 것이다.

“이길용 기자는 워낙 특별한 체육인이었지요. 운동선수를 영웅으로 만드는 실력이 단연 출중했어요. 우리 체육계 전반을 좌지우지하는 분이었습니다. 두 번 다시 그런 분은 안 계시겠죠. 체육용어 통용도 이길용 선생부터였고, 민족정기 진작을 운동경기로 이끌어 나간 분으로 우리 체육사상 거의 유일무이합니다.”


※문학평론가 임중빈은 일장기 말소 ‘사건’이 아니라 ‘의거’라고 써야 한다고 주장했다. ‘의거’의 집단적, 의도적, 역사적 함의를 존중해 이 원고 역시 ‘의거’를 선택했음을 밝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