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용진 스포츠칼럼

제목스포츠인물 열전 ③ – 잊혀진 복싱영웅 정신조를 아시나요?2018-04-12 20:1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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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인물 열전 ③ – 잊혀진 복싱영웅 정신조를 아시나요?


정신조(鄭申朝·75)를 얼마나 아시는지?

스포츠스타라고 다 유명하지 않다. 정신조는 대한민국이 올림픽무대에서 거둔 사상 두 번째 은메달(1964년 토쿄 제18회 하계올림픽 복싱 밴텀급)의 주인공이다. 첫 번째는 정신조보다 8년 전 송순천(1956년 멜버른올림픽 복싱 밴텀급)이 땄다. 이들의 은메달은 모두 불우한 시절 손기정이 거둔 ‘일장기 금’(1936년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이후 아직 공식적인 ‘태극마크 금’이 없던 상황에서 당대 한국 엘리트 체육이 수확한 최고 수준의 업적이다. 그러나 정신조의 은메달은 짧게 반짝 흥분했을 뿐 그 대견한 주인공을 오래토록 기억시키지 않았다. 송순천 역시 은메달이지만 이 경우는 그래도 ‘사상 처음’이 붙어 행복한 경우다. 하지만 한국체육사 초창기 걸출한 선수 중 한 명인 정신조의 비중이나 유명도는 동급들에 비해 훨씬 약하다. 토쿄 올림픽 은메달리스트란 기록사항 말고 알려진 게 별로 없다. 또는 사회가 알려고 하지 않았던 듯하다. 기사나 자료도 많이 검색되지 않는다. 심지어 대한복싱협회(한 달 전까지 아마추어복싱연맹)에 그의 연락처를 문의해도 오래 전 바뀐 전화번호를 알려줘 통화가 되지 않는다. 본인이 두문불출했거나 협회 행정력에 문제가 있을 수 있지만 협회 여직원이 전화번호를 알려주며 친절하게 “연락 안 될 수도 있다”고 덧붙인 것을 보니 꽤 오랫 동안 공식적인 관리대상에서 방치된 듯한 느낌이 든다. 복싱계 원로들과 연락이 닿지 않아 그의 근황을 아는 이도 많지 않다. 여러 곳에 수소문 끝에 최근 5개월째 부인 이병희(74) 씨와 함께 전북 순창군에 우거(寓居) 중인 그와 통화가 됐다.

- 왜 순창에 계십니까? 혹시 지인이라도 있나요?

“순창이 조용하다고 해서 왔습니다. 이곳에 지인은 한 사람도 없어요. 그냥 조용히 살고      싶어 충무의 아파트를 세 주고 왔습니다.”

- 건강이 좋지 않다고 하던데요?

“그런 거 없습니다. 괜찮습니다.”

- 현역생활 중 어떤 경기가 기억나시는지요?

“그져 그렇지요, 뭐. 특별한 것 없습니다.”

- 토쿄올림픽 결승에서 지셨는데요.

“아주 잘 못 됐습니다. 이길 수 있던 걸 졌으니 잘못됐지요.”

- 이미 반세기나 지난 일, 패배를 담담하게 볼 수 있는 시점 아닌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너무 아까와요.”

그는 목소리가 확고했고 답도 단답형으로 했다. 토쿄올림픽 결승서 진 것을 ‘잘 못 됐다’고 했다.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니고, 잘못 된 것은 세월이 가도 변함없이 잘 못 된 것이라고 생각하는 듯 했다. 수많은 경기 대부분을 이겼고 게 중 몇 경기를 ‘재수 없어’ 졌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 일, 그러나 한 번의 패배는 그에게 평생 남았다. 그는 현역생활 중 179전 173승 6패를 했다. 이 전설적인 전적을 노 파이터답게 특별한 거 없다고 회고했다. 물론 단 한 번의 ‘특별한 잘못’은 여기서 제외다.


올림픽 폐막을 이틀 앞둔 1964년 10월 23일 저녁 7시25분.

밴텀급 결승이 열린 토쿄 고라쿠엔 아이스 팰리스의 한국선수단 관중석은 순식간에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불과 몇 분 전만 해도 다혈질 민관식(당시 대한체육회 회장)이 링사이드에서 큰 소리로 펀치를 주문했으며 신사로 이름난 허정구(당시 대한아마추어복싱연맹 회장)도 주먹을 휘두르며 흥분하던 상황이었다. 정신조는 이전까지 파죽지세였다. 1라운드에서 우간다의 호스티 파로그를 물리치고 2차전은 아르헨티나의 아볼 세자르마라즈를, 3차전은 쿠바의 페르민 에스피노자를, 4차전은 멕시코의 후안 파빌라 멘도자를 이기고 결승에 올랐다. 그러나 결승에서 그는 일본의 타카오 사쿠라이에게 2회 RSC로 졌다. 1회부터 눈에 띄게 오른손이 느려지더니 2회 두 차례 다운을 당하자 심판이 경기를 중단시켰다. 금메달을 당연시한 나머지 얼이 빠진 듯한 한국선수단에게 패자는 링에서 내려와 “죄송합니다”고 흐느꼈다. 그는 은메달을 따고도 죄인처럼 고개를 떨궜다. 나중에 민관식은 “의자에서 일어날 힘을 잃었다”고 회상했다.

사쿠라이와의 결승전은 당시 국내 일간지 기사 마감시간에 열렸다. 그래서 서울의 몇몇 신문사에서는 ‘정신조 사상 첫 금메달’과 ‘아깝게 은메달’이라는 제목으로 미리 신문을 만들어 놓고 라디오 방송에 귀를 기울였다. 결국 ‘올림픽 사상 첫 금메달 획득’이라는 희망뉴스로 만든 신문은 그날 저녁 모두 소각됐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정신조의 경기를 보기 위해 부산까지 갔다고 한다. 부산에서는 일본의 텔레비전 중계를 시청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고위층의 실망 탓이었는지 정신조를 비롯한 당시 선수단 환영식은 서울에서 열리지 않고 대전에서 열렸다. 토쿄올림픽 한국선수단 전적은 은 2(정신조, 레슬링 플라이급 장창선), 동 1(유도 미들급 김의태) 개. 공교롭게 이 메달 3개가 모두 결승 또는 준결승에서 일본에게 진 것이었다.

나중에 알려졌지만 정신조는 이미 며칠 전부터 경기를 치르기 힘든 상황이었다. 다음은 민관식의 회고.

“정선수는 1회전 경기를 치르다가 오른손 새끼손가락이 부러졌다. 남은 경기를 포기해야 할 만큼 큰 부상이었다. 그러나 코칭스태프는 정 선수의 부상 사실을 숨겼다. 정 선수는 재일동포 한의사가 놓아주는 침을 맞으며 경기를 거듭했다. 그런데 하필이면 결승전이 열리는 날 한의사가 나타나지 않았다. 고통이 심해지자 정 선수는 손에 마취 주사를 맞고 출전했다. 공이 울리고 사쿠라이와 마주 선 정 선수는 현기증을 느꼈다. 테크니션으로 유명한 정 선수였지만 판정까지 갈 자신이 없었다고 한다.

그는 속전속결이 상책이라고 생각하고 맹공을 퍼부었다. 그러나 너무 서두르다 빈틈을 보였고, 사쿠라이의 반격에 쓰러지고 말았다. 사쿠라이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소나기 펀치를 날려 정 선수를 그로기 상태에 빠뜨렸다. 결국 정 선수는 4분30초 동안 네 차례나 다운을 당했다. 정상적인 경기가 어렵다고 판단한 심판은 2라운드 들어 정 선수가 두 번째 다운을 당하자 경기를 중단시켰다.” <남기고 싶은 이야기>(중앙일보 2005년 11월 24일)

‘네 차례나 다운’이란 건 민관식의 착오다. 정신조 본인이 ‘두 차례 다운’이라고 기억하니 그게 맞다. 하지만 다른 상황은 틀리지 않는다. 경기 중 골절과 하필 결승전에 침 치료를 받지 못한 것 등이 모두 불운적 요소다. 한 손으로만 싸웠기 때문에 졌다고 변명할 수도 있다. 하지만 정신조는 이를 수십년 째 ‘잘못’으로 표현하고 있다. 국가체육과 내셔널리즘, 상대국에 대한 감정 때문에 ‘은메달 죄인’을 만들던 시대는 이후로도 한참 계속됐다. 정신조는 그걸 변명 없이 받아들이던 제1세대 체육인이다. 또는 ‘야생동물’이라고 할 수도 있다. “나는 자신을 불쌍히 여기는 야생동물은 본 적이 없다”(D.H. 로렌스)

그가 패한 뒤 정신조를 둘러싼 소문이 무성했다. 그가 결승을 앞두고 외박을 했으며 모 언론사에서 단독 인터뷰를 위해 그를 숙소에 들여보내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는 사실이었다. 일에 대한 기자들의 열의는 예나 지금이나 극성스러울 정도로 대단했지만 한편 정신조 금메달이 그만큼 당연시됐던 것이다. 물론 정신조 자신은 여기에 대해 가타부타 변명치 않았다.

정신조는 올림픽 이듬해인 1965년 27세 나이로 현역 은퇴한다. 한양대학교 경영학과 재학 중 대한석탄공사 기획부 조사과에 일반사원으로 입사했다. 나이로 봐 아마추어 은퇴는 어쩔 수 없다 해도 올림픽메달리스트라면 지도자나 도장 경영, 프로전향 등을 우선적으로 고려하는 게 순서다. 그러나 대기업 사원으로 아예 바꿨으니 그의 복싱계 고립은 이때 이미 예고됐다.

- 왜 프로전향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냥 하기 싫었지.”

- 권투는 왜 시작하셨습니까?

“그냥 하고 싶어서요.”

단답형의 인물은 솔직담백하지만 일반적으로 인터뷰 하기가 힘들다. 속의 무엇을 끄집어내기가 쉽지 않다. 일반적으로 긴 시간이 지나야 속내를 털어놓는 타입이고 자세히 사정을 설명 않다보니 ‘그냥’ 등의 말을 자주 쓰게 된다. 하지만 주변인들의 말을 종합하자면 정신조는 ‘프로 무끼’는 아니었다고 한다. 뛰어난 테크니션이지만 프로 타입 또는 프로선수감은 아니란 뜻이다. 정신조는 한양대학교 1학년 때인 19세(1957년) 때 남보다 늦게 권투를 시작했다. 이전까진 태권도를 했는데 권투가 좋아 제발로 청계천 3가에 있는 일성체육관에 찾아가 당시 유명 지도자인 고봉아, 주상점 사범 등에게 권투를 배웠다. 1950, 60년대는 권투선수 인기가 좋았다. 세계적으로 프로권투 인기가 높아 자연스레 권투로 눈길을 돌렸을 것이다. 왼손잡이며 타고난 운동신경과 체력에 더해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체육관에서 연습하다보니 그는 운동 시작 1년만에 제1회 동아시아 선수권대회 플라이급에서 우승하는 등 최강자로 급부상했다. 1960년 로마올림픽에 출전(플라이급) 2회전 탈락했으나 자카르타 아시안게임(1962), 자유중국 4개국 친선대회(1963) 등에서 우승해 아시아 최강으로 군림한다. 그는 공격형 파이터와 수비형 복서를 겸하고 각종 펀치도 기분 나는대로 구사해 상대를 괴롭혔다. 그러나 깨끗한 테크니션인 그가 승리를 위해 반칙도 불사하는 프로세계로 쉽사리 전향할 순 없었을 것으로 보는 관측이 일반적이다.

그래도 송충이는 솔잎을 잊지 못한다. 정신조는 이후 회사와 권투, 일반인과 체육인을 오갔다. 대한석탄공사를 사직하고 수유동에 조강체육관을 설립하는가 하면 유도대학(현 용인대학교) 복싱 전임코치로 후배를 양성했으며 1980년대 중반엔 선박회사 이사, 아마추어복싱연맹 이사 등을 했다. 하지만 1990년대 이후엔 복싱계에도 관여하지 않고 캐나다로 이민 갔다 귀국, 최근 충무를 거쳐 순창에 거주하기에 이르렀다. 한 마디로 초반의 화려한 캐리어 치고 변화 역정이 많았다.

- 왜 연맹 임원을 관두셨나요?

“복싱이 잘 되려면 여럿이 힘을 합쳐 밀고 나가야되는데 중간에 사심있는 자들이 너무 많아요. 그런 게 보기 싫어서 그만 둔거지요.”

- 요즘도 그런 생각이신가요?

“예. 남들 하고 섞이는 게 싫으면 섞이지 말아야지요.”

- 존경한다거나 모델로 삼는 국내외 선수가 누굽니까?

“그런 거 없어요. 로마 올림픽 같이 갔던 송순천 선배하고는 좋아했어요. 져서 같이 울기도 하고.”

정신조는 현역 시절 동료 사이에서 그닥 인기가 있진 않았다. 자부심 강하고 고집 센 외톨이 타입이었으니 당연하다. 하지만 그는 예나 지금이나 그런 걸 개의치 않는다. 반면 그를 무척 아끼는 선배, 스승들이 있었다. 그가 고명상고 재학 중일 때 전병온 이사장은 학비를 전액 면제해 주고 코치까지 초빙해 책상을 치운 교실에서 훈련토록 했다. 유망주 시절 그를 개인 지도한 일성체육관 고봉아 관장은 도쿄올림픽이 열리기 전 운명하는 순간까지 “신조가 메달 따는 모습을 보지 못하고 죽다니…”하며 안타까워했다. 대한체육회가 메달리스트들에게 지급하는 연금과 석탄공사시절 안정된 월급쟁이 생활 등으로 그는 한때 비교적 넉넉했다. 태릉선수촌 빙상장 구내매점을 경영하기도 했는데 경제사정이 좋을 땐 불우한 후배 이웃들과 어울리고 술도 잘 샀다고 한다. “그 사람 단순할 정도로 솔직담백하지요. 정의의 사나이고 성격이 화끈하지요. 누가 옆에서 보살펴만 줬으면 한국체육계의 대들보가 됐을 것입니다.” 2년 선배이자 지기인 조석인 대학복싱연맹 회장(77·전 대한아마추어복싱연맹 전무이사)의 평이다.

정신조는 1938년 서울 명륜동에서 5남매 중 셋째로 출생했다. 그가 현재 사는 순창군 유등면은 한 때 순창에서도 두메산골로 쳤으나 요즘엔 다리가 생겨 교통이 편해졌다. 현재 키 165cm, 몸무게 78kg. 체육인이나 자연인으로 원로지만 아직은 짱짱하다고 자부한다. 조석인 회장 등 지인 몇몇과만 연락하고 서울, 전주 등 대도시 나들이는 거의 하지 않는다.

대한복싱협회(회장 장윤석)는 요즘 이름과 정관을 바꾸고 대대적인 개혁을 진행중이다. 한국에 복싱이 최초로 소개된 것은 1912년 10월 7일 광무대 단성사 주인 박승필에 의해 유각투(柔角鬪)구락부가 조직되면서부터였다고 한다. 한국복싱 100년을 넘기는 시점에서 개혁 중흥과 함께 권투인들도 이젠 그만 좀 척박하게 살았으면 한다.                       임용진(전 중앙일보 기자)

※ ‘스포츠코리아’(2013. 7.)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