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용진 스포츠칼럼

제목스포츠인물 열전 ② – 올림픽 첫 금메달리스트 양정모2018-04-12 20:1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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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인물 열전 ② – 올림픽 첫 금메달리스트 양정모


요즘 한국 문화 체육계는 불가능이 없어 보인다. 축구 월드컵 본선에 단골로  진출하고 베를린·칸·베니스 등 국제 영화제 수상명단에서도 빠지면 서운하다. 올림픽 수영·피겨 스케이팅·스피드 스케이팅과 골프 남·녀 메이저 대회서도 곧잘 우승한다. 한류가 세계를 휩쓸더니 급기야 싸이가 말발굽 소리도 요란하게 세계 대중가요의 심장인 빌보드차트 위쪽을 점령했다. 이건 금석지감을 넘어, 몇 십 년 전과 비교하면 아예 남의 나라 풍경이다.

그러나 모든 봇물도 실은 단 하나의 물꼬에서 터진다. 1976년 8월1일. 제21회 몬트리올 올림픽 레슬링 자유형 페더급(62kg)에서 당시 스물 네 살의 부산 사나이 양정모가 금메달 소식을 전했다. 대한민국 이름으로 딴 첫 올림픽 금메달. 마침 광복의 달이었다. 양정모의 ‘태극기 금’은 식민지 시절 손기정이 남긴 ‘일장기 금’(1936년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우승)의 상처를 단번에 씻었다. 기쁨도 섞이는 요즘 금메달과 달리 양정모의 ‘금’엔 한풀이 눈물만 넘쳤다. 그것도 단 한 개에서. 잠깐 오래된 필름을 먼저 본다.



● “욕봤다”

그해 여름은 유난히 더웠다. 35도를 넘는 더위가 연일 계속됐고 한 달 가까이 비도 내리지 않아 전국 농부의 마음이 타들어갔다. 일요일인 8월1일 오전. 보름간 계속된 몬트리올 올림픽 폐막을 불과 네 시간 앞둔 시점이어서 한국선수단의 가슴도 시커멓게 타들어갔다. “이번에도 안 터지나”. 손기정 이후 40년간, 태극기로 올림픽에 나간 지 28년간 꿈쩍도 하지 않던 금맥이다.

마침내 오전 9시45분, 캐나다 몬트리올 현지시각으로 7월31일 오후 8시45분. 정규방송을 중단한 채 KBS·DBS(옛 동아방송)·TBC(옛 동양방송) 합동으로 실황을 중계하던 아나운서 목소리가 감격을 누르지 못하고 떨려나왔다. “국민 여러분, 기뻐해주십시오. 마침내 대한민국의 아들 양정모가 금메달을 땄습니다.” 일요일 휴간날이어서 신문이 나오지 않았으나 몇몇 일간지는 급히 ‘금’을 전하고자 호외를 찍었다. 운동선수가 호외 주인공이 된 것은 손기정 이후 양정모가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다음날 신문은 1면 톱에 “태극기 아래 첫 금메달”, “민족의 숙원 이룩” 등으로 제목을 뽑았다. 기사 본문도 “도시에서 농촌에서, 계곡에서 해변에서 감격과 환희의 강풍이 해일처럼 일렁거렸다.”(이상 경향신문)고 감격을 쏟았다.

오이도프(몽골)와 결승을 끝내고 ‘금’을 확정하자 레슬링경기장인 리처드 모리스 체육관이 함성으로 떠나갈 듯 했다. 양정모는 눈물을 흘리며 태극기를 들고 매트 주위를 돌았다. 금메달 갈증이 풀리자 거짓말처럼 한국의 무더위도 싹 가셨다. 금메달을 딴 그날부터 이틀간 전국에 호우가 내렸다. 시인 전봉건은 단비에 빗대 그를 “가뭄에 큰 소나기 같은 젊은 한국인”(1976. 8. 3. 동아일보 특별기고)이라고 썼다. 고향 떠난 서러움 탓인지 미국, 캐나다 등 해외교민들의 울먹울먹한 확인이 국내 언론사에 빗발쳤다. “이게 사실이냐”, “한국이 진짜 금을 땄나”. 결정적인 한 마디는 가족에게서 나왔다. 그의 아버지 양승묵 씨는 국제전화를 통해 연결된 아들에게 진한 부산사투리로 말했다. “정모야, 욕 봤다”. 이는 프로복서 홍수환의 어머니가 외친 “수환아, 대한국민 만세다”(1974)와 함께 두고두고 회자하는 명언이다.


● 사회운동가, 무소유 신봉자, 갈매기 사진작가

매트에만 전념하는 대부분 동료들과 달리 양정모는 체육관 바깥으로도 시야를 넓히고 살았다. 레슬러로서 올림픽 금메달 1개(1976)를 비롯해 아시안게임 금메달 2개(1974, 1978), 세계선수권대회 은메달(1978)과 동메달(1975) 하나씩을 땄다. 한국의 모스크바올림픽 불참으로 1981년 현역은퇴 후 지도자 생활(1981~1999 · 한국조폐공사 감독)까지 그는 성공한 체육인으로 길을 걸었다.

IMF(국제통화기금) 외환위기로 한국조폐공사 레슬링 팀이 해체되자 그는 실업자가 됐다. 어찌어찌 레슬링 밥을 계속 먹을 수도 있었겠지만 “자유롭게 살고 싶어” 그는 매트를 떠났다. 이후 그의 활동 폭은 사회봉사, 후배양성, 취미 등으로 확장됐다. 양정모의 최근 명함은 재능기부 봉사단체인 ‘희망나무 커뮤니티’ 이사장이다. 지난해 소외된 이웃을 위해 이를 설립했다. 그는 불자다. 절에 잘 다니진 않지만 집안 내력이 불교며 법정의 ‘무소유’ 정신을 존경한다. 이 커뮤니티도 ‘돈에 억매이지 않는 순수한 모임, 인간관계’를 실천하고자 만들었다. 이 단체는 사회 각계의 재능기부로 불우청소년,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 소아암 어린이 등에 도움을 주고 있다. ‘희망나무’는 지난해 9월 인씨엠예술단(단장 노희섭)과 함께 세계 초연 오페라 ‘다윗왕’을 무대에 올렸으며 지난 1월엔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위안부 할머니들을 위한 갈라 콘서트도 열었다. 이 단체엔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인 이준호(쇼트트랙·1992 릴레함메르), 박시헌(복싱), 박성수(양궁·이상 1988 서울) 등 후배 체육인과 기업인, 변호사, 의사 등 각계 전문가들이 재능을 기부하고 있다.

그는 또 아마추어 사진작가이기도 하다. 3년전 대구에서 전시회를 가졌다. 부산 갈매기를 많이 찍어 고향에선 ‘갈매기 사진가’로 통한다. “사진은 빛의 예술입니다. 그 빛을 바라보고 있으면 문득 바다갈매기가 고기를 물고 있기도 하고, 양재천 왜가리가 미꾸라지를 낚기도 합니다. 빛을 포착하기 위해 인내와 정신집중이 필요합니다. 기다리다 순식간에 잡아야 하니, 타이밍을 맞춘다는 점에서 레슬링과 비슷하지요.”

금메달을 안겨 준 8월1일은 그에게 자부심과 희망이 담긴 날이다. 그래서 사진전시회(2010)도, 희망나무 커뮤니티 설립(2012)도 모두 8월1일에 했다. 올해 8월1일은 또 어떤 양정모 날이 될까.



● “그냥 할란다”

양정모는 부산 사나이답게 선이 굵다. 잔 말 많지 않고 꾀부리지도 않는다. 곧이 곧대로 성격 탓에 손해 보고 오해도 받지만 언제나 답은 나와 있다. 양정모답게 ‘그냥 가는’ 것이다.

1974년 9월 테헤란 아시안게임 결승리그 최종전. 이미 라이벌 오이도프를 제압하고 은메달을 확보한 양정모와 개최국 이란의 나바이가 금메달을 놓고 맞붙었다. 레슬링은 이란의 국기(國技)나 마찬가지다. 유력한 자국 금메달을 응원하려 관중이 구름처럼 몰렸고 당시 팔레비 국왕 부처가 직접 로열석에 앉았다. 특히 나바이에겐 일생의 부귀영광이 걸린 중요한 경기. 나바이가 말했다. “큰 선물 줄테니 한 번 져 줄 수 없나”. 양정모는 그냥 쳐다봤다. 그리고 그냥 이겨버렸다. “그 결승전은 내 생애 최상의 경기였습니다.”

1976년 8월1일 몬트리올 올림픽 자유형 페더급 오이도프와의 결승전. 요즘과 달리 이전 경기 벌점까지 안고 올라가는 당시 규정상 양정모는 상대에게 폴 패 또는 큰 점수차로만 안 지면 금메달을 가지는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 적당히 피하면서 요령껏 우승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 더구나 건국 후 최초의 금메달이 걸린 경기 아닌가. 당연히 코치진은 애가 달았다. “야 폴 패만 안 당하면 돼. 수비 위주! 알았지? 잡히지 말라고. 욕심내서 이길 생각 말라고. 알았지?” 양정모의 반응은 뚱했다. 그리고 라이벌에 대한 예의라는 듯 최선을 다해 경기를 치렀다. 역전-재역전, 엎치락 뒤치락 끝에 오이도프에 8대10으로 뒤졌으나 종합채점 결과 합계 1점이 앞섰다. 아슬아슬한 진짜 금메달이었다.

최근에도 그는 뻔히 알면서 지는 경기를 ‘그냥’ 했다. 위기의 한국레슬링을 위해 뭔가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지난 1월 대한레슬링협회 제32대 회장에 출마해 낙선했다. 3명 출마에 결과는 0-16 참패. 대의원 16명 가운데 양정모를 찍은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왜 나왔나 오해와 억측이 많았으나 그는 지고도 당당했다. 출마연설에서 레슬링인들의 분열, 갈등, 태만을 통렬히 질타했다. 그의 찌렁찌렁한 목소리에 총회장이 숙연해졌다. 그는 참패와 체면 구길 걸 뻔히 알면서도 레슬링계 원로로서 한바탕 꾸짖기 위해 나온 듯했다. 총회장을 나가는 그에게 후배들이 머리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선배님”



● 오이도프 내 친구

양정모(61)도 환갑을 넘긴 나이. 머리에 희끗희끗 서리가 내렸다. 호적엔 1953년으로 됐으나 자신은 1952년 12월3일 생이라 하니 그게 맞다. 부산 대청동에서 방앗간을 하던 아버지 양승묵 씨와 어머니 박월선 씨 사이 2남3녀 중 넷째이자 장남으로 태어났다. 부산 건국중, 건국상고, 동아대학교 문리대학 체육학과를 졸업했다. 중학교 2학년 때 레슬링에 입문, 9년 연속(1970~1979년) 한국 레슬링 페더급 자유형의 선수권을 빼앗기지 않았다. 1975년 태릉선수촌 수영장에 놀러온 여대생 손은주(58) 씨를 만나 연애 끝에 1978년 결혼했다. 슬하에 1남 양효영(33) 씨. 금메달 덕에 1976년부터 대한체육회 ‘경기력 향상 연구연금’을 매달 받고 있다. 얼마나 받을까? 당시 매월 10만원, 지금은 100만원씩이다.

평생의 라이벌 오이도프와는 친구처럼 지낸다. 오이도프가 3살 연상이다. 세계선수권(1975 민스크)에서는 그에게 졌지만 올림픽(1976), 아시안게임(1974)서는 양정모가 이겼다. 아시안게임 금메달을 놓친 나바이와 마찬가지로 오이도프도 올림픽 금메달에 한이 맺혔다. 오이도프는 지난 2002 부산아시안게임에서 양정모를 만나 “올림픽 금메달은 네 것이지만 결승 맞대결서는 내가 이겼다”고 장난처럼 우겼다. 양정모를 비롯한 한몽우호협회는 지난 2006년 양쪽팔 신경마비증세로 고생하는 오이도프를 부산에 초청, 치료해주기도 했다.

양정모는 아닌 것, 틀린 것은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사람이다. 취재 중 최근 언론의 오보 두 가지를 지적했다. 하나는 자신의 1976년 금메달이 태릉선수촌 한구석에 재떨이와 함께 방치됐다고 전한 모 신문 기사다. 이와 관련, 오리지널 금메달은 현재 자신이 보관하고 있고 전시품은 복제된 것이란다. 다른 하나는 한국체육대학 설립 계기에 관해서다. “귀국 직후 청와대 보고 자리에서 제가 박대통령께 한체대 설립을 건의했다고 일부 신문이 썼는데 절대 아닙니다. 당시 정동구 감독(현 체육인재육성재단 이사장)이 건의해 그렇게 된 겁니다. 바로 잡아주세요”



● “레슬링은 살아 남는다.”

양정모의 ‘태극기 금’은 이후 스포츠공화국 대한민국을 달리게 했다. 베를린올림픽 후 40년간 적막하던 한국의 올림픽 금맥은 양정모를 분기점으로 지난해 2012 런던올림픽까지 36년간 모두 104개(동·하계)로 급히 불어났다. 이중 10% 이상인 11개가 레슬링 한 종목에서 나왔다. 레슬링은 쇼트트랙과 양궁(이상 19개씩)에 이은 한국스포츠 최고의 효자종목이다. 지난 2월 IOC(국제올림픽위원회)가 레슬링을 올림픽 핵심종목에서 제외한 이후로 이 효자종목의 어깨가 축 쳐졌다. 하지만 양정모는 위축되지 않았다.

“레슬링의 몰락은 나 양정모의 몰락입니다. 김연아(피겨 스케이팅)와 손연재(리듬체조)의 시대에 레슬링이 안 변하고 어쩌겠습니까. 혼나는 게 당연하지요. 상대기술에 걸렸을 때 뚫고 나온 필살 의지로, 생존본능으로 위기를 뒤집을 것입니다. 레슬링은 반드시 살아남습니다.” 그는 뼛속까지 레슬러다.


※ 스포츠코리아(2013. 6.)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