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용진 스포츠칼럼

제목스포츠인물 열전 ① – 영원한 ‘촌장’ 김성집2018-04-12 20:2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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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인물 열전 ① – 영원한 ‘촌장’ 김성집

문석(文石) 김성집(95). 누가 그를 모를까.


한국 현대 체육사 그 자체인 이 미스터 올림피언에 관한 구구한 설명은 체육인들 사이에선 췌언에 가깝다. 그는 한국 사람으로는 단군 이래 최초로 태극 마크를 달고 올림픽 시상대(1948 런던올림픽 역도 동메달)에 섰다. 40세까지 국제무대 현역으로 뛴 뒤엔 ‘직업이 촌장’이라 할 만큼 태릉선수촌에서 18년간(1976~1994) 수많은 후배들을 가꿨다. 선수뿐 아니라 임원·심판으로 올림픽에 11회나 출전했다. 이 정도만으로 체육인 김성집의 이력은 가히 전설이다. 그러나 그는 단순히 존경받는 노선배나 유명 체육인은 아니다. 그 훨씬 이상으로, 민족 격동기 영웅이며 한국 체육사의 거목으로 우뚝하다. 무엇이 그를 영웅으로 만들었는가.


● 빈 마음

이동찬, 정주영, 구두회 씨 등 한국 재계 태두와 나카소네 야스히로 전 일본 수상의 공통점은 고려대학교 명예박사라는 점이다. 범상한 대학이라도 명예박사 하나 준다면 군중이 꼬이는 세상이다. 하물며 고려대학교 명예박사임에랴. 하지만 김성집은 그것을 거절했다. 고대 홍일식 총장 재임시절(1994~1998), 김성집은 이 대학 명예박사에 추대됐다. 체육계 원로인 민관식과 김상겸이 강력 추천했고 심의위원회도 통과해 박사호 붙일 일만 남았다. 그러나 김성집은 이를 한사코 사양했다. 일을 추진한 민관식이 소문난 다혈질답게 불같이 화를 냈다. “이놈이 다 된 일을 안 받으려 해. 제발, 고집 좀 꺾어라.” 민관식은 김성집보다 나이로 6개월 연장이다. 둘은 평생지기이자 한때 문교부장관(민관식)과 태릉선수촌장(김성집)으로 김성집이 모시던 사이다. 김상겸은 김성집이 가장 아끼는 고려대 후배였다. 이들이 극성으로 권하자 그는 장남에게 의견을 물었다. “어떻게 할까나.” “아버지께서 무슨 박사예요. 남 하고 싶은 사람 하라고 하세요.”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었다. 김성집은 집안 의견을 핑계로 이미 결정 난 ‘박사’를 결국 돌려보냈다. 그의 기준으로 미담도 아니고 신문 날 일도 아니어서 김성집 명예박사 파동은 고대 주변 아는 이들만 아는 일로 조용히 끝났다.

헬싱키 올림픽 육상 중장거리 3관왕(남자 5,000m, 10,000m, 마라톤)인 에밀 자토펙(체코)은 지난 1968년 ‘프라하의 봄’ 때 체코를 침공한 소련이 고위 관직을 미끼로 협력을 권하자 주저 없이 거절하고 거리의 청소부를 택했다. 화려한 육상이력도 거기서 끝났으나 자토펙은 체코의 영웅으로 남았다. 김성집도 박사호나 체육관료보다 역도 영웅을, 영원한 ‘촌장’을 택했다. 그는 대한체육회장도 할 뻔 했다. 88서울올림픽 한국선수단 부단장으로 올림픽을 성공시킨 김성집은 지난 1989년 대한체육회장 1순위 후보였다. 정치권과 후배 경기인들이 이구동성 그를 원했다. 그러나 그는 자기 대신 다른 재목을 강력 추천해 대한체육회장실에 들이고 자신은 본업 현장으로 돌아갔다. 88올림픽 후에도 김성집은 태릉선수촌장을 6년 더 했다.


● 궁핍의 시대, ‘덜거덕’

광복을 전후한 1940년대는 굴욕과 좌절, 자신감, 민족, 희망, 기대의 시대였다. 헤겔에 따르면 영웅이 지닌 위대함은 영웅 자신의 능력에서 비롯되기보다 시대가 그에게 부과한 소명과 시대정신에 근거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격동의 1930~40년대는 평범한 소년 김성집에게 민족적 소명을 부여했다.

김성집은 1918년 서울 종로구 필운동에서 태어났다. 청운보통학교, 휘문고등보통학교(현 휘문고), 보성전문학교(현 고려대)를 졸업했다. 고교 때까지 그의 별명은 ‘골샌님’, 얌전한 모범생이었다. 1933년 5월, 휘문고 2학년(15살)부터 역도를 시작했으며 이후 그의 별명은 ‘덜거덕’으로 변했다. 학교 수업과 방과 후 역도만을 반복하는 일상으로 그 집 주변에서 역기 들었다 놓는 소리가 그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 역기는 수도관 파이프에 콘크리트 덩이를 무게에 맞춰 끼운 것이어서 소음이 더했다.

그러나 이 ‘덜거덕’ 탓에 소년 김성집이 입문 1년만에 전국을 제패하고 여러 차례 비공인 세계신기록을 세우자 일본역도연맹은 아예 1936년 베를린올림픽 역도종목 출전을 포기하는 등 김성집(=한국인)의 메달 획득을 방해했다. 1940년 예정된 올림픽도 세계대전으로 무산되자 김성집의 꿈은 멀어지는 듯했다.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금메달리스트인 손기정의 일장기 사진을 말소해버린 사건은 이 시기 피식민지 백성이 스포츠에 걸었던 열망과 울분을 단적으로 표현한다. 김성집도 손기정과 마찬가지로, 그것을 한 몸에 직접 받았다.

마침내 1948년. 한국은 잃어버린 올림픽을 런던에서 되찾았다. 세계대전이 끝난데다 8년만에 부활한 올림픽 축제여서 지구촌 전체가 후끈 달았다. 어려운  경제여건 속에서 출전비 마련을 위해 올림픽후원회가 궁여지책 끝에 발행한 ‘올림픽 후원권’(=복권) 100만장이 금세 동났다. 부인단체 주최의 ‘환송모성(母性)대회’ 등 전국에서 시민환송식이 줄을 이었으며 헌법제정에 바쁜 초대국회도 격려 메시지를 채택하는 거국적인 환송열기였다.

1948년 7월29일, 런던 엠파이어 스타디움에서 열린 제14회 런던올림픽 개막식에 29번째로 입장한 한국선수단은 눈물의 행진을 했다. 김성집은 11회나 참가한 올림픽 중 태극기를 앞세운 이때가 가장 감격스러웠다고 회고한다. 입장식 열 이틀 후인 8월10일 역도 75kg급에 출전한 김성집은 마침내 조국에 첫 메달을 선사했다. 추상(1972년 폐지)·인상·용상 합계 380kg으로 이집트의 엘 투니와 같았으나 계체량에서 김성집이 1.92kg 적어 동메달을 확정했다. 메달 광채는 금보다 덜했으나 감동은 못지 않았다. 영국 BBC방송 라디어전파를 빌려 하루 15분씩 한국에 경기결과를 전하던 서울중앙방송국(KBS전신)의 아나운서 민재호는 방송 내내 흐느끼다시피 보도했다. 서울과 전국에서 난리가 났다. 3년전 광복을 재현한 듯한 감동 속에서 김성집의 동메달은 민족사적 사건에 편입됐다.


김성집은 4년 후 6·25전쟁 통에 치른 1952년 헬싱키올림픽에서도 동메달 하나를 추가한다. 이때 역시 선수단 출전경비 마련차 올림픽 배지를 판매했으며 전국적 모금운동이 벌어졌다. 이은상은 송시를 짓기도 했다. “태극기 높이 들고 휘날리면서/ 가거라 세계무대 올림픽으로,/ 민족의 이름을 빛내리라고/ 두 주먹 부릅쥐고 나서는 모습.”(이은상, ‘올림픽환송가’ 중). 스포츠 내셔널리즘이 퇴색한 오늘 관점과는 다를 수 밖에 없지만, 당시로선 가슴 벅찬 진심과 눈물의 송가고 시대정신이었다.

김성집은 나이 마흔인 1958년 도쿄아시안게임을 마지막으로 역도화를 벗는다. 20대 전성기를 공백으로 보낸 불우한 역도 영웅은 좌절 속에서 핑계 대지 않았고 ‘덜거덕’을 멈추지도 않았다. “제 자신을 불쌍히 여기는 야생동물은 본 적이 없다”(D.H. 로렌스). 모범생 김성집의 내면엔 어떤 악조건 속에도 자기연민을 용납치 않는 야생성이 있었다. 그는 역기를 들 듯, 스스로를 들어올렸다.



● 자부심과 고독

김성집은 지난해 1월 대한체육회 주최 제1회 대한민국스포츠영웅 헌정식에 참석치 않았다. 고 손기정과 함께 누구도 이의를 달 수 없는 스포츠 영웅임에도 그는 자서전 형식의 책을 마련해 헌정하는 이 자리에 장남만 대신 참석시켰다. 지난해 가을 제30회 런던올림픽에 동행하자는 대한체육회의 요청도 뿌리쳤다. 체육계와 언론은 대한민국 ‘첫 메달’의 주인공이 64년만에 그 감격적 현장에 동행하길 기대했으나 김성집은 “걷는 게 피곤하고 남들에게 짐 된다”고 사양했다.

그는 95세다. 공식 문서에 1919년이지만 본인은 1918년이라 하니 후자가 맞다. 애초 당뇨가 약간 있었으나 성실한 자기관리 덕에 거동이 불편할 정도는 아니다. 과식하지 않고 음식 가리지 않으며 식사자리에선 젊은이 못잖게 활기 차다. 술 담배는 소싯적부터 하지 않았다. 피부색이 60, 70대보다 낫고 요즘도 돋보기 없이 신문의 작은 글씨를 본다. 키 168cm 정도, 몸무게 수십년째 미들급을 유지하고 있으며 기억력은 젊은이들도 혀를 내두를 정도다. 그는 최근 한 달에 두 차례 정도 점심 나들이를 한다. 하나는 대한체육회 사무총장과 태릉선수촌장 등 재직시 친했던 후배들과 모임이며, 다른 하나는 역도 국가대표 출신 후배들과의 모임이다. 보행이 예전같지 않긴 하나 100m 걸으며 한 두 차례 숨을 돌릴 정도니 모임 참석이 불가능한 것은 전혀 아니다. 그런데 왜 “걷는 게 부담스럽다”고 했을까.


고독과 자부심은 영웅의 속성 중 하나다. 그레타 가르보는 36살 인기 정점에서 은퇴했다. 맥아더 장군 역시 이유 대지 않고 그렇게 사라졌다. 김성집은 요즘 상체를 약간 앞으로 숙이고 다닌다. “허리 굽은 거 보이기 싫다. 운동하는 후배들에게 좋은 영향 아니다”는 게 최근 공식 모임을 자제한 이유로 전해진다. 약 1세기 동안 바벨을 덜거덕 댄 노 경기인은 이제 우리에게 진퇴의 지혜를 전하려는 듯하다. 누가 그랬던가. 최상의 경기는 퇴장에서 완성된다고 했다.

김성집은 행복한 영웅이다. 손기정이 바르셀로나에서 황영조를 만난 것처럼, 그 역시 전병관을 만나 금메달 한을 풀었다. 가정도 행복하다. 4년 아래인 강순옥(91) 여사와 1944년 결혼해 현재 서울 송파구 아파트에서 해로하고 있다. ‘골샌님’, ‘덜거덕’ 외에 ‘돌’이란 별명도 있다. 8년간 체육회 사무총장 재직시(1968~1976) 어떤 청탁이나 외압에도 흔들리지 않고 원칙대로 일을 처리했기 때문에 얻은 별명이다. 그의 호는 문석이다. 옛 은사 서상천이 자신의 호인 ‘문곡’(文谷)을 따 애제자인 김성집에게 준 것인데 “선생님이 돌 석(石)자를 준 게 들어맞았다”고 웃기도 한다. 이밖에 선수촌장 시절 ‘호랑이’, ‘염라대왕’, ‘시아버지’ 등의 별명을 얻기도 했다. 선수촌 지옥훈련으로 악명 높은 불암산 크로스컨트리가 그의 작품이니 이런 별명을 얻게도 됐다. 선수촌 ‘호랑이’에게 국가대표들은 금메달로 보답했다. 1976년 몬트리올에서 나온 한국 최초의 올림픽 금메달(레슬링 양정모)부터 시작해 영원한 ‘촌장’ 김성집이 재직 18년간 캔 올림픽 ‘금’은 모두 31개이다.




임용진(전 중앙일보 기자)

※ 스포츠코리아(2013. 5.)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