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칼럼

제목새전북신문칼럼 전북의 보물2018-07-12 10:2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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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전북신문칼럼 전북의 보물 ❶ – 이름짓기 청원행사(?~740)는 중국선불교의 큰 스님 중 한 명이다. 그는 잘못된 수행 방법 중 하나로 ‘나귀를 타고서 나귀를 찾는 병’을 들었다. 깨달음은 내 안에 있거늘 항상 바깥에서 구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타고 있는 ‘나귀’ 전북은 그야말로 보물 천지이다. 그 중 지나치기 쉬운 보물 하나가 전북인의 이름짓기 재주다. 남부시장 전주천 부근에 오래 된 아파트가 있는데 벽이 얼룩지고 주변도 소란스러워 그다지 상쾌한 풍경은 아니다. 그러나 눈이 번쩍 뜨이는 게 있다. 바로 아파트 벽에 큼직한 글씨로 써놓은 간판 ‘시냇가에 심은 교회’다. 아하 종교를 냇가에, 장바닥에 심는구나. 새삼 그 간판에서 ‘심는다’의 의미를 생각한다. 또 계룡산(전주시 완산구 삼천동) 중턱에 있는 ‘참 좋은 우리절’은 어떤가. 불교 신자 아니더라도 ‘참 좋은 우리절’은 한 번 쯤 합장하고싶은 마음이 들게 하는 작명이다. 치명자산 아래 한벽당에서 색장동가는 길은 전에 철길이었다. 지금은 철로가 뜯기고 오솔길이 생겼는데 그 이름이 ‘바람 쐬는 길’이다. 얼마나 멋진가. 째를 내지 않고 붙인 이름에서 미풍이 인다. 길 이름을 정한 공무원이 누군지 찾아 감사장이라도 주고 싶은 심정이다. 서늘하고 바람 솔솔 부는 날 길 양쪽에서 대나무가 나직히 ‘솨아 솨아’ 노래부를 때 이 길을 걸어보길 권한다. 살다보면 바람도 쐬야 한다는 것을 새삼 느낄 것이다. 문장과 뜻만 좋은 게 아니다. 전북인은 어감을 고르는 능력도 탁월하다. 이 고장에서 ‘솔’이라 하는 것을 서울에서는 ‘부추’, 경상도에선 ‘정구지’라 한다. 이 셋 중 어떤 단어가 가장 예쁘게 들리는가? 나는 솔에서 느끼는 향기를 정구지에선 느끼지 못한다. 부추는 웬지 정사각형같은 딱딱한 느낌이다. 전주처럼 소바집이 많은 곳도 드물 것이다. 그런데 왜 모밀국수라고 하지 않고 소바라 할까. 전북이 굳이 일본어에 둔감해서라고 생각되진 않는다. ‘말 맛’을 별나게 따지다보니 부드러운 어감의 소바를 선호한 것 아닌가 유추해본다. ‘바람쐬는 길’에 ‘싱건지’(동치미) 내음이 배어있다. 전주에 사는 행복이다. / 임용진 편집인 (2007년 03월 29일) 


전북의 보물❷ – 남원 테니스 전북이 대한민국에서 유명한 게 몇 개 있다. 콩나물해장국, 비빔밥 뿐만이 아니다. 전주 예수병원은 전국 최고의 암병원으로 이름을 날렸다. 미국인 의사 닥터 실이 원장으로 재직하던 80년대 초반만 해도 예수병원은 전국서 밀려드는 암환자로 수술 일정 잡기가 힘들었다. 대사습 놀이는 전주의 축제가 아니라 전국 축제였다. 판소리와 국악도들이 열망하는 최상의 등용문 역할을 했다. 이와 비슷하게 전북이 자랑하는 전국 최고 중 남원의 테니스가 있다. 아직 정구와 테니스 인구가 반반인 1970년대 남원 테니스는 전국을 석권했다. 남원 출신인 여자 이덕희, 남자 김춘호가 전국을 휩쓸었다. 이덕희의 꿈은 아시아가 아니라 세계였다. 이미 국내 최강이니 가만히 있어도 몇 년은 편했을 전성기 시절, 20대의 앳된 이덕희가 해외진출을 결심하자 모두 말렸다.‘왜 가냐’는 만류를 등지고 라켓 한 자루 달랑 들고 떠난 그녀는 1972년 한국 최초로 세계 4대 메이저대회(호주오픈) 본선에 나갔다. 10년 후인 1982년엔 당시 세계1위던 빌리 진 킹을 꺾고 미국오픈 16강에 올라 세계 스포츠계를 요란하게 했다. 김춘호도 당시엔 거의 막강이었다. 전영대, 전창대, 김춘호의 트로이카가 국내 대회 우승을 나눴으나 전문가들은 “춘호가 제일이다”고 했다. 그는 국가대표 테니스 감독을 거쳐 현재 국군체육부대 감독이다. 이덕희는 해외서 사업가로 성공, 매년 수십억원씩 자비를 들여 이덕희배 국제주니어테니스 대회를 주최한다. 올해 제7회 대회가 장충테니스코트에서 열리고있다(29일까지). 대구가 세계육상선수권을, 여수가 엑스포를 주최한다고 떠들썩할 때 신문에 자그맣게 묻혀버린 또다른 ‘주최’가 있다. 바로 경기도 안성시의 제13회 세계정구선수권 개최(9월8일 개막)이다. 이를 위해 안성시는 85억원을 들여 실내 정구 구장을 건설했다. 차후 이는 테니스 코트로 활용, 안성을 전국의 테니스 본산으로 만들 계획이라고 한다. 선수권 기간 중엔 세계 40개국서 600명의 선수가 안성을 찾는다. 사실을 말하자면 요즘 테니스 ‘전국최고’는 안성시이다. 남원의 영광은, 테니스 전북은 퇴색했다. 남원 뿐 아니다. 예수병원이 지역병원으로 변하고있다. 대사습놀이는 언론재벌 조선일보가 주최하는 광주임방울국악제에 위협당하고 있다. 새만금에서는 전북의 웅지를 설계하는 것은 좋다. 하지만 오랫 동안 전북이 가꾼 ‘보물’은 잃지 말자. / 임용진 편집인 (2007년 04월 25일) 



전북의 보물❸ – 바람쐬는 길 5월, 계절의 여왕이고 가정의 달이다. 자식들 손잡고 부모 모시고 서늘한 그늘 아래 한적한 길을 거니며 도란도란 이야기라도 하는 것이 놀이공원 등 사람 북적이는 데서 땀 흘리고 짜증내는 것보다 훨씬 가정적인 풍경이라고 여겨진다. 이를 위해 가장 알맞은 길 하나를 소개한다. 바로 ‘바람쐬는 길’이다. 바람쐬는 길은 정식 행정지명이다. 전주시 교동 한벽루에서부터 색장동까지 가는 길이다. 편도 3.5㎞쯤 된다. 왼쪽에 중바위(치명자산)가 있고 오른쪽에 전주천이 흐른다. 지난날 전라선이 지나던 기찻길이었으나 지금은 레일을 뜯어내고 산책로, 자전거길이 됐다. 승용차도 통행이 가능하지만(4톤이상 트럭 출입금지) 되도록이면 두 발로 밟을 것을 권한다. 좁은 곳은 폭 2m 남짓인 이런 오솔길에서 차 타고 다니면 바람쐬러 나온 남들에게 괜히 폐만 끼친다. 한벽루 옆 기차 터널이 시작이다. 모든 시작은 어둡다. 터널의 통과의례를 치른 뒤 치명자산을 지나 약 1.6㎞ 거리에 장애우 시설인 참사랑낙원이 있다. 여기서부터 길이 좁아지고 본격적인 오솔길이 시작된다. 콘크리트 포장이 투수콘으로 바뀌어 걷기에 훨씬 편해진다. 요즘 이곳은 가히 빛의 테마파크다. 투수콘 색깔은 벽돌색이지만 빛에 따라 와인색으로, 루비색으로도 변한다. 길 양쪽 나무 사이로 햇빛이 스며들고 바닥의 나뭇잎 그림자는 바람에 흔들린다. 눈을 아래로 주면 자주색 괴불주머니, 노랑색 애기똥풀, 파란색 큰개불알꽃 등 야생화가 지천이다. 수종은 초입엔 느티나무지만 조금 걷다보면 은행나무가 양쪽에 서있다. 이곳은 초등학교 복도처럼 작고 정겹다. 바람은 은행나무 통로를 따라 가다 ‘풍문’(바람문)을 지나 ‘풍령’(바람고개)에서 정점에 이른다. 투수콘길 초입부터 여기까지 약 800m. ‘풍문’은 길 양쪽에 산에서 자란 소나무 한그루씩이 마치 대문형상으로 가지를 드리우고 있어 그렇게 불러본다. ‘풍령’이란 경사 1~2도 가량의 완만한 오르막이 계속되다 이곳을 기점으로 내리막이 시작되기 때문에 또 그렇게 이름 붙인다. 둘다 정식 지명은 아니고 내가 붙인 ‘사제’(私製) 이름이다. ‘풍령’을 지나 색장동까지는 확트인 논밭이다. 바람은 여기서 사통팔달한다. 터널-색장동-터널까진 걸어서 약 두 시간이 걸린다. / 임용진 편집인 (2007년 05월 02일) 


전북의 보물❹ – 복분자주 ‘프렌치 패러독스’(프랑스적 모순)는 즐거운 모순이다. 기름진 음식을 즐기는 프랑스인들의 심장병 발병률이 생각보다 낮은데 알고 보니 그 이유가 프랑스 ‘국민주’ 와인 때문이란 것이다. 재불 과학자 옥민호 박사( 파스퇴르 대학 교수)는 최근 포도주에 포함된 폴리페놀 성분이 심장병 원인인 동맥 경화를 원천봉쇄한다고 발표했다. ‘아시안 패러독스’도 있다.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인들이 높은 흡연률에도 불구하고 심혈관 질환과 폐암 발병율에서 서구보다 훨씬 낮아 모순이란 것이다. 미국 예일대 의대 E.섬피오 박사는 이것이 “녹차에 포함된 항산화 성분인 카테킨 때문”이라고 밝혀 ‘모순’을 풀었다. 조선대 임동윤 교수팀의 최근 보고에 따르면 복분자주에는 적포도주보다 약 30% 많은 폴리페놀이 들어있다고 한다. 당연히 복분자술은 고혈압, 협심증, 심근경색, 동맥경화 등 심혈관질환에 특효다. 복분자주 하면 지금까진 ‘성 기능’과 관련한 농담 정도가 떠올랐다. 그러나 포도주보다도 심혈관 질환예방에 더 낫다니 이제 복분자술 때문에 ‘코리안 패러독스’가 생길 판이다. 복분자의 본산이 전북이란 것을 감안하면 ‘전북 패러독스’라고 할 수도 있다. 아무련들 어떠리. 전북인으로선 ‘즐거운 모순’이다. 복분자는 제주도에서 강원도까지 다 잘 자란다. 그러나 아무 땅이고 다 좋은 복분자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로마네 콩티는 한 병에 200만원 이상 호가하는 세계 최고급 포도주다. 그러나 같은 지역(프랑스 브루고뉴 지방 로마네 마을)에서도 콩티를 생산하는 바로 길 건너편 포도밭의 와인은 2만~3만원짜리 중저가에 불과하다. 이같은 차이를 포도주 애호가들은 ‘테루아르’때문이라고 한다. 같은 품종이라도 밭의 환경(토양성분, 지하수, 바람 등)에 따라 커다란 차이가 생긴다는 것이다. 복분자에도 테루아르가 있다. 고창, 정읍, 순창 복분자술을 다른 지역서 모방하지 못하는 이유이다. 예컨대 고창의 바닷바람은 고창 복분자의 맛과 향에 배인 태생적 우월성의 비밀인 것이다. 미국과 FTA(자유무역협정) 타결됐고 유럽과도 FTA가 추진중이다. 머잖아 양질의 캘리포니아 네이파 밸리, 프랑스 보르도, 브루고뉴 포도주가 밀려들어올 것이다. 그러나 우리 고장 복분자술을 잊지말자. 전북경제에 좋고 심혈관 질환이 예방돼 더 좋다. / 임용진 편집인 (2007년 05월 09일) 


전북의 보물 ❺ – 혼불의 종가 허효원은 1920년대 초 열여섯 꽃다운 나이로 한 집안의 맏며느리가 됐다. 시할머니 청암부인, 시어머니 율촌댁에게서 유서 깊은 가문의 종부 수업을 받으며 그녀는 한국의 어머니요 여인으로 식민지 시대 모진 격랑을 헤쳤다. “내 홀로 내 뼈를 일으키리라”고 말한 시할머니 청암부인처럼 효원 역시 꿋꿋이 한 가문을 꾸렸다. 허효원의 집은 전북 남원시이다. 그녀는 소설 ‘혼불’의 여주인공이다. 소설가 고 최명희(1947~1998)는 삭녕 최씨다. 그녀가 “이것 하나면 된다”며 일생을 걸어 쓴 소설 ‘혼불’의 무대가 바로 남원시 사매면 서도리 노봉마을 삭녕 최씨 종가다. 그제 불의의 화재로 타계한 이 집안 맏며느리 고 박증순(93) 할머니는 최명희의 손위 올케가 된다. 전북 문단 원로인 최승범(77) 시인 역시 삭녕 최씨다. 최승범, 최명희 그리고 고 박증순 할머니의 남편이 모두 같은 항렬이다. 그래서 최명희는 최승범 시인에게 ‘오빠’라고 했고 박 할머니는 그를 ‘서방님’이라고 했다. 최씨는 큰 성씨다. 경주 최씨가 가장 큰 집이고 그 가지(관향)는 어림잡아 70곳 이상이나 된다. 그 중 ‘잔 가지’ 격인 삭녕 최씨에서 전북의 소설과 시를 대표하는 최명희와 최승범이 나왔다는 게 신기하다. 현재 삭녕 최씨 종가 자리는 백여년 전엔 노봉서원이었다. 임금이 현판을 내린 사액서원이었으나 19세기말 대원군의 철퇴로 서원이 헐린 뒤 향촌 명문인 최씨 집 자리가 됐다. 누백년 여기서 세거한 삭녕 최씨 종가를 동네서는 ‘칠 한림 집’으로 불렀다. 절개 곧고 학문 높은 선비를 ‘한림’이라고 하거니와 이 집안에서 홍문관, 사간원, 사헌부 등의 ‘한림’ 벼슬이 일곱 명이나 배출됐다. 고 박증순씨가 그 유서깊은 집안에 시집와 한 평생 종부로 위엄을 지켰다. 전남 보성이 고향인 박할머니는 10대 때 시집 와 한국전쟁으로 남편을 잃은 뒤 57년간을 과부로 살며 1남2녀를 훌륭하게 키웠다. 타계 직전까지 매일 새벽 4~5시에 일어나 세수를 하고 머리를 깔끔히 빗은 뒤 앞치마를 두르고 부엌문을 열었다고 한다. ‘혼불’ 주인공인 효원의 실존 모델 박할머니가 타계했다. 혼불의 작가도, 주인공도 타계한 터에 그 무대인 삭녕 최씨 종가 본채가 화재로 망실됐다니 안타깝다. / 임용진 편집인 (2007년 05월 16일) 


전북의 보물 ❻ – 컨버전스 ‘다이나믹 코리아’는 한국(코리아)의 활력(다이나믹)을 외국에 알리는 정부 홍보문구다. 원래 김대중 정부 말기에 정했는데 활성화된 것은 참여정부 들어서다. 뉴욕 케네디 공항, 파리 드골 공항 등 각국 관문에 설치된 한국홍보판에서 이 문구를 보고 어깨가 으쓱해진 적도 있다. ‘경제성장’, ‘월드컵’, ‘빠른 민주화’ 등이 ‘다이나믹’의 내용이다. 그런데 엉뚱한 면도 있는 모양이다. 한번은 국정홍보처의 한 고위인사가 이렇게 털어놨다. “다이나믹 코리아에서 외국인들이 ‘한국의 과격시위’를 연상해 고민이야.” 그래서 충고했다. “컨버전스 코리아가 어떤가?” ‘컨버전스(Convergence)’의 사전적 뜻은 ‘집합’, ‘수렴’, ‘동시발생’ 등이다. 다양한 계기를 한 곳에 모아 조화시킨다는 점에서 ‘상생’, ‘화합’의 속 뜻도 있다. 컨버전스의 극치는 비빔밥이다. 수십가지 재료를 섞어서 혼연일체 새 맛을 내는 절묘한 컨버전스다. 충남의 언론인 변평섭씨(충청투데이 회장)는 비빔밥에서 ‘컨버전스 리더십’을 읽는다. 상이한 개성을 한 그릇에서 버무려 훨씬 고차원의 가치를 창조해낸다는 것이다. 전주에 전혀 연고가 없는 그는 오로지 전주 비빔밥을 맛보기 위해 한달에 한 차례씩 대전에서 전주로 온다. 비빔밥 뿐 아니다. 찾아보면, 전북은 그야말로 컨버전스 천지다. 길거리 맥주, ‘가맥’은 어떤가? 슈퍼와 포장마차를 섞어놓은 전북의 특산품이다. 외지인들은 가맥의 컨버전스식 발상에 신기해 한다. 그러나 뭐든 편하게 섞는 전북인의 시각에서 보면 맥주를 주점에서만 먹는다는 것이야말로 팍팍한 고정관념이다. 또 다른 예가 밥집이다. 한 서울 친구가 전주시 교동의 허름한 밥집 유리창을 보고 놀랐다. 시래기국, 국수, 라면 등 요기 거리 메뉴와 함께 같은 크기 글자로 ‘막걸리’를 써 놨던 것이다. 막걸리는 술집에서만 파는데 여기가 밥집이냐, 술집이냐? 대강 그런 놀라움이다. 마침 석탄일. 화합과 상생의 날, 전북의 컨버전스가 모든 점에서 발휘되길 빈다. 혁신도시, 대학 통합, KTX 고속철 역사 위치, 35사단 이전 등을 둘러 싼 최근 갈등은 사실 ‘비(非)전북적’ 현상이다. 한국에 컨버전스가 필요하다면 전북이야말로 그 중심이다. 뭐든지 껴안는 드넓은 호남평야가 우리 고향이다. /임용진 편집인 (2007년 05월 23일) 


전북의 보물❼ – 완판본 공산 헝가리의 초대 문부상이자 맑시즘 문예평론가인 지어르제 루카치(1885-1972 )는 소설을 ‘신이 버린 시대의 서사시’라고 했다. 그리스의 ‘일리어드 오디세이’, 인도의 ‘샤꾼딸라’ 등은 총체성이 보존됐던 시대의 문학을 말하고 있다. 이야기를 가진 시, 즉 서사시로 쓰여있다. 그러나 상실의 시대, 자본의 시대, 소외에 들어서는 소설이 시를 대신한다. 더 이상 세헤라자데의 천일야화는 없다. 이야기를 사고 파는 시대, 근대적 생산관계가 소설을 탄생시켰다. 한국엔 17~18세기부터 소설이 성행했고 이를 읽어주는 이야기꾼이 있었다. 추재 조수삼(1762~1849)은 돈 받고 기이한 이야기를 구연해주는 노인의 존재를 이렇게 말한다. “이야기책 읽어주는 노인이 동대문 밖에 살았다. 그는 ‘숙향전’, ‘소대성전’, ‘심청전’ 등을 읽는데…가장 재미있는 대목에서 입을 다물면 사람들은 다음 이야기를 듣기 위해 다투어 돈을 던져준다”(‘추재기이’). 그러나 이야기꾼은 18세기 후반 상업적인 목판 소설인 ‘방각본’이 싼 값에 보급되면서 생업을 잃는다. 어제 국내 최초로 고소설 ‘삼국지’의 완판본 목판이 발견됐다. 완판이란 전주에서 출판된 방각본이다. 완판 외에 서울에서 출판된 경판과 안성에서 나온 안성판 등이 있었으나 전국에서 가장 인기있는 것은 완판이었다. 완판본은 글씨와 표현이 다른 지역 판본과 크게 달랐다. 완판본이 형용사와 감탄사를 많이 사용하는 리드미컬한 율문체인데 비해 경판본은 간결 소박한 산문체였다. 완판본이 날씬 반듯한 해서체로 누구나 알기 쉬운 반면 경판본은 흘려쓴 궁서 내지 초서체였다. 그래서 완판은 서민에게, 경판은 배운 이나 양반에게 인기가 있었다. 현재 효자동 도청과 도의회 청사의 표지석 글자체가 바로 완판본 춘향전에서 뽑은 것이다. 완판본의 고향답게 전주엔 백여년 전까지 책방이 많았다. 남부시장 일대 전주천변에 몇 걸음 사이로 서점이 밀집했다. 현재 다가동 2가에 전국 최대 서점인 ‘다가서포’가 있었고 완산교 1길엔 ‘서계서포’, 매곡교 옆엔 ‘칠서방’이 있었다. 전주시가 교동 향교 내에 완판본 체험 전시관을 만들 계획이라니 최근 발견된 ‘삼국지’ 목판도 여기 전시하면 좋겠다. 국문 소설은 봉건 말기 민초들의 희망과 절망, 꿈과 현실을 반영한 시대적 카타르시스였다. 그 한 가운데 완판본이 있었으니 전북의 문화 헤게모니는 어제 오늘 이룩된 게 아니다. / 임용진 편집인 (2007년 05월 30일) 


전북의 보물 ❽ – 자장면 전주음식 하면 비빔밥, 콩나물 국밥이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이것만 전북의 맛이 아니다. 사천만의 음식 자장면도 전북이 전국 최고다. 어느 집이고 자장 한 그릇에 3,500원에 불과한 염가지만 맛은 천하 제일이다. 자장면이 한국음식이고 한국에서 전주 자장이 제일이니 ‘천하 제일’이 된다. 전주에서 중국인들이 경영하는 ‘진짜 자장면 집’은 5 군데다. 이 ‘5대 자장’은 아무데서나 시켜 먹을 수 있는 동네 자장이 아니다. 최소한 한 집 역사가 30년 이상씩이다. 일품향이 55년, 진미반점 42년, 홍콩반점 37년 됐다. 대보장과 영흥관도 30~40년 씩이다. ‘일품향’은 한국전쟁 직후인 1952년 조홍발(중국명 자오 홍 파) 씨가 설립했다. 산동성 푸싼(福山)현이 고향인 그가 산동식 만두로 전주인들의 입맛을 사로 잡은 55년째, 일품향은 중앙동 그 자리에 그대로 있다. 창업자 조홍발씨가 오래 전 타계한 후 그의 3남2녀 중 둘째 딸인 조충화(52)씨가 대를 이어 운영하고있다. ‘진미반점’ 역시 1964년부터 중앙동 같은 자리에 그대로 있다. 중국인 인국량(중국명 인 궈 량)씨가 개점해 영업하다 그의 제자인 유영백(중국명 리우 용 부어·53)씨가 20년 전에 인수해 지금에 이르렀다. 유영백 사장의 부친이 부안 줄포에서 서해반점을 경영했으니 여기도 대를 이은 자장면 집이다. 유사장의 고향은 중국 산동성 엔타이(烟台) 시다. ‘홍콩반점’은 1970년 문을 열어 올해 37년째지만 내력을 따지자면 그보다 한참 오래 된다. 이 곳 사장 윤가빈(중국명 인 갸 빈·61)씨의 부친이 바로 전주 중국집의 시조인 홍빈관 주인인 윤전성(중국명 인 관 신)씨였다. 광복 전부터 중국식 요정을 경영하던 1세 사장 윤씨가 한국전쟁 직후 홍빈관을 개업해 이를 큰아들에게 줬고 둘째아들 가빈씨는 홍콩반점을 차린 것이다. 이들의 고향도 중국 산동성 용청(龍城)현이다. 홍콩반점 자장은 색깔이 옅고 진미반점은 짙다. 홍콩반점이 설탕을 안 쓰면서도 달착히 입에 붙는다면 진미반점은 고소한 끝맛이 일품이다. 그리고 일품향의 군만두! 요즘 슈퍼에서 파는 딱딱한 과자 같은 냉동 만두가 아니라 부드럽고 향긋한 산동식 본토 군만두를 이곳 아니고 전국 어디에서 맛보랴. 이번 주말엔 가족과 함께 전주의 중국요리를 찾아보라. 자장 한 그릇, 군만두 한 접시에 불과하나 일품향, 진미반점, 홍콩반점의 역사를 합치면 이는 무려 ‘134년’의 문화행사가 된다. /임용진 편집인 (2007년 06월 06일) 


전북의 보물 ⓬ – 민체 고속도로 호남선 전주시 톨게이트엔 ‘전주’라는 한글 현판이 붙어 있다. 가로 세로 2m70㎝×9m 짜리 큼직한 나무판에 전주라고 새긴 흰 글씨는 어린이가 쓴 것처럼 비뚤비뚤하다. 누구나 ‘나도 저만큼 쓸 수 있다’는 생각이 들 만큼 쉬운 서법이지만 보면 볼수록 힘과 멋이 넘친다. 이 작품이 바로 전북의 서예 대가 효봉 여태명(52)의 글씨다. 효봉의 글씨체는 ‘민체’(民體)라고 한다. 백성(=民)의 글씨체(=體)니 누구나 쓸 수 있고, 친근하고, 가지고 노는 게 당연하다. 민체는 1990년 12월 독일 베를린 교통역사박물관에서 비롯됐다. 독일정부가 자국의 종이 생산 600주년을 기념해 마련한 한·중·일서예작가초대전에 한국을 대표해 한문서예를 출품한 효봉에게 한 독일인이 물었다.“너희 글씨가 어찌 중국과 똑 같냐?” 망치로 맞은 듯 멍한 느낌을 받은 효봉은 귀국 즉시 한글 서체 연구에 전념했다. 2년후인 1992년 그는 학회 논문 발표를 통해 민체의 개념을 정식으로 제안했다. 그 모델은 고전소설 필사본의 글씨체였다. 효봉은 민체를 “삼베 옷에 짚신 신고 헤어진 듯 하면서도 풍요로우며 형식은 자유롭고 구속됨이 없이 작가가 시간 별로 달라지는 슬픔과 기쁨, 넉넉함과 배고픔의 진솔한 마음을 표현하고 있다. 여기에는 삶이 있고 고통이 있고 그리고 사람이 살아 숨쉬고 있어, 장고 소리만 있는 것이 아니라 장고를 쳐대는 사람의 모습도 같이 어우러져 있다.”고 표현한다. 판소리 한마당처럼, 민체는 민초의 삶 그 자체이다. 고속도로 ‘전주’ 현판은 톨게이트 입구와 출구에 모두 붙어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두 현판의 글씨체가 다르다. 외에서 전주로 들어오는 입구 글씨는 자음보다 모음이 크다. 자음은 자식(=子)이고 모음은 어머니(=母)다. 전주에 들어오는 모든 이가 부모처럼 넉넉한 민족의 고향에 안기라는 뜻이다. 첫 글자인 ‘전’의 ‘ㅓ’와 ‘ㄴ’ 사이 여백은 전주의 지형을 형상화하고 있다. 전주에서 외지로 나가는 출구에선 반대로 모음보다 자음이 크다. 이는 자식의 성장이다. 전주의 기와 멋을 받아 청출어람하라는 뜻이다. 창암 이삼만(1770~1847) 이후 전북은 한국 서예의 본산이다. 고 강암 송성용(1913~1999년)과 효봉 여태명이 그 맥을 잇는다. 어제 화제를 모은 본지 2000호의 특별 제호가 바로 효봉의 작품이었다. / 임용진 편집인 (2007년 09월 05일) 


전북의 보물 ⓭ – 석정 시인 신석정(1907~1974)은 거인이다. 문학적 자취가 그렇거니와 키도 팔척에 가깝고 음성이 우렁우렁했다. 이와 관련된 일화 한 토막. 1940년대 초반 어느 해인지 친구 몇 사람과 용하다는 전주 시내의 한 판수(소경 점쟁이)를 찾았다. 그가 하라는 대로 손을 내밀자 이리저리 만져보던 판수 왈, “손바닥 한 번 두껍네. 당신 자동차 운전수지?”  1950년대의 또 다른 오해 사건. 고향(부안)에 낙향, 농사로 생계를 꾸리던 석정을 8살 연하의 후배 시인 미당이 처음 찾아왔다. “처서가 좀 지났지. 밀짚모자 눌러쓰고 채마밭에 거름을 주는 농꾼에게 ‘석정 선생댁이 어디요?’ 했더니 그이가 ‘여기’라고 하데. 그분이 아버님이셨어.” 석정의 3남 신광연씨에게 들려준 미당의 회고다.  신석정을 기리는 시비가 전북에 3개 있다. 전주시 덕진공원에 있는 시비는 석정이 전북문화상 심사도중 뇌일혈로 쓰러져 운명(1974년7월6일)한 지 1년만에 세웠다. 언론인 이치백 씨와 문단이 주도했고 도비와 당시 국회의원 김광수(전 대한교과서주식회사 사장) 씨의 도움을 얻어 시 ‘네 눈망울에서는’을 새겼다.  두 번째 시비는 시인의 고향에 있다. 서거 17년만인 1991년 향리의 후학과 제작을 중심으로 건립위원회가 조직돼 그해 음력 7월7일(석정 생일) 준공했다. 부안읍에서 새만금에 들어가는 길목이며 해창교를 건너자마자 쉽게 만날 수 있다. 다리 이름 그대로 이곳은 ‘바다 창문’(해창)이다. 바다를 향해 툭 트인 곳에 시 ‘파도’를 새겼다. 드라이브 코스로도 그만인 곳. 동진강 휴게소를 지나자마자 이런 표지판이 눈길을 잡는다. ‘속도를 늦추면 변산반도의 아름다움이 더 잘 보입니다.’ 시인의 혼은 사후에 도로표지판까지 관리하고있다.  세번째 시비는 전북대 교정에 있다. 현 정문 삼성문화회관 입구에 가람 이병기 시비와 나란히 마주보고있다. 2000년대에 전북대 국문과가 주창해 시 ‘산산산’을 새겼다. 석정은 전주고 국어교사던 1950년대 후반 전북대 국문과에도 출강해 ‘시론’ 등을 강의했다. 석정의 맏사위인 고하 최승범(77) 시인이 당시 그의 제자였다. 이번 주말(16일, 일요일) 석정의 고향인 부안에서 석정문학제가 열린다. 올해는 시인의 탄생 100주년이라 더욱 특별하다. ‘운전수’ 시인, ‘농꾼’ 시인의 울림이 들리는 듯하다. / 임용진 편집인 (2007년 09월 13일) 


전북의 보물⓯ – 도로원표 식당에만 ‘원조’가 있는 게 아니다. 길에도, 땅에도 원조가 있다. 레절루트(캐나다 노던테리토리 주)는 북극이 지척인 외딴 마을이다. 북극 탐험가들과 에스키모 몇 십 명 밖에 없는 이 외진 마을 입구 이정표를 보고 신선한 충격을 받은 적 있다. ‘파리까지 ○○○㎞, 뉴욕까지○○○㎞’ 하는 식의 표지판 수십개가 어른 키 높이로 서 있었다. 이처럼 ‘여기서부터 몇 ㎞’라고 쓰인 이정표를 도로 원표라고 한다. 원표는 길과 땅의 원조다. ‘우리가 중심’이라는 사고며 지리적 주체성의 선언이다. 미국 워싱턴 백악관 앞엔 ‘제로 마일 스톤’(Zero Mile Stone)이, 프랑스 파리 노틀담 성당 앞엔 ‘제로 포인트’(Zero Point) 이정표가 각각 서있다. 세상 중심과의 거리가 ‘제로’라는 뜻의 원표다. 한국의 ‘중심 제로’는 서울 광화문 사거리에 있다. 그렇다면 전북엔? 바로 전주시 팔달로 기업은행 앞에 도로 원표가 있다. 은행 정문 입구 화단에 선 장방형 원표는 화강석으로 만들어졌으며 길이(지상고) 1m40㎝, 가로 세로 25㎝×25㎝ 크기이다. 들여다보면, ‘1964년 10월10일 전주라이온스크럽 건립’이라고 정면에 새겨져있다. 세워진지 43년이나 되지만 워낙 글씨를 깊이 파고 바탕이 좋은 화강암인지라 마치 새 것 같다. “보통 비석 글씨는 음각이 얕고 ‘V’자 형태로 가파르게 파지만 이 글씨는 몽글몽글한 ‘U’자형으로 깊이 새겼지. 돌도 최상의 황등석으로 주문했어.” 화강석 원표 건립을 제안한 유승국(88·의사·전주라이온스클럽 창립멤버)씨의 회고다. 애초 원표는 돌이 아니라 나무 재질이었다. 현 위치에서 북쪽으로 20m 떨어진 우체국 앞에 일제강점기 때부터 있던 것을 유씨 등이 제안해 ‘백년도 더 갈’ 돌로 만들어 다시 세운 것이다. 위치를 옮긴 이유는 현재 자리가 구 시청 정문이었기 때문이다. 정갈한 예서체 글씨는 석당 고재봉의 휘호라고 전한다(‘전주라이온스클럽 30년사’). 원래 길이 6척(1m80㎝)짜리 돌인데 40㎝는 땅에 묻혔다. 원표 옆과 뒤 3면엔 이렇게 새겨졌다. ‘목포 173천(粁), 부산 169천, 신의주 745천, 청진 964천, 서울 272천, 평양 525천’. 천(粁)이란 ‘㎞’를 뜻하는 한자다. 60년대가 그립다. 당시 전주는 신의주, 평양, 서울, 부산과 함께 이 나라의 중심이었다. 그것을 증거하는 원표가 지금은 건물주의 정원수에 가려 잘 보이지도 않는다. / 임용진 편집인 (2007년 09월 27일) 


전북의 보물⓰ – 서예비엔날레 우스개 소리 하나. 30년 전 한 신문사 입사시험 상식에 출제된 문제다. “비엔날레를 설명하시오.” 이에 대한 답. “비엔나에서 열리는 미술전시회.” 물론 틀린 답이다. ‘비엔’(Bien)은 ‘격년’, ‘2년’을 뜻한다. 정답은 ‘2년에 한 번씩 열리는 국제미술전람회’다. 가장 오래 된 베니스 비엔날레(이탈리아·1895)를 비롯해 사웅파울루, 시드니, 리용, 이스탄불 등의 도시가 홀수해에, 로마, 아바나, 베를린, 타이베이 등이 짝수해에 각각 비엔날레를 개최한다. 3년만에 한 번씩 열리는 것은 트리엔날레다. 카네기 트리엔날레(1896)를 비롯해 밀라노, 봄베이 트리엔날레가 유명하다. 독일의 현대미술전인 카셀 도큐멘타는 특이하게 5년마다 열린다. 전북도 세계적인 비엔날레를 가지고있다. 바로 ‘세계서예전북비엔날레’(공식명칭)다. 서예에 관한 한 역사, 권위, 규모 면에서 이는 세계 최고다. 2년 전 서울이 ‘서울세계서예비엔날레’(2005.7.7. ~ 7.19.)를 열었다. 명예대회장이 김영삼 전 대통령이고 후원도 서울시, 문화관광부, 한국문예진흥원, 한국예총 등 뻑쩍지근했다. 그러나 결과는 망신만 당했다. 행사 일환으로 서울역사박물관이 전시한 조선유학자유물특별전의 출품작 상당수가 위작임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위작을 인쇄한 공식 도록이 회수됐고 조직위의 안목과 체면은 땅에 떨어졌다. 이후 2년이 넘었으나 서울이 비엔날레를 잇는다는 소식은 아직 없다. 부산에도 서예비엔날레가 있다. 지난 2005년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총회 기념으로 첫회를 시작해 현재 2회(13일까지, 부산문화회관)가 열리고 있다. 올해는 중국, 일본, 싱가폴 등 6개국 405명의 작가가 참가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아직 초창기고 애초 정치행사의 부산물이란 점에서 전북과 다르다. 지난 1997년 시작된 전북서예비엔날레는 올해 6회째, 순수한 민간 주도고 아직까지 단 한 차례 잡음도 없다. 올해는 한·중·일을 비롯해 미국·영국·브라질·프랑스 등 28개국 1,100여명의 서예가와 화가, 디자이너 등이 출품했다.이 ‘세계 최고’가 한 달 넘게(10.4.~11.6.) 계속된다. 이 가을, 전북에 글자 향기가 짙다 . 참, 앞서 오답의 주인공은 뻔뻔스레 직업을 계속해 이 글을 쓰고 있다. / 임용진 편집인 (2007년 10월 04일) 


전북의 보물⓱ – 남천교 중세 이탈리아 시인 단테(1265~1321)는 구원의 여인 베아트리체를 다리 위에서 처음 만났다. 피렌체를 흐르는 아르노 강 위 베키오 다리가 그들의 밀회장소였다. 같은 나라 희대의 바람둥이 카사노바(1725~1798)는 베니스 총독관저인 두칼레 궁에서 무기형을 받고 ‘탄식의 다리’를 지나 교도소로 향했다. 역시 베니스 산마르코 광장 인근 리알토 다리. V자를 거꾸로 세운 듯한 이 특이한 아치 아래로 관광객을 태운 곤돌라와 함께 칸초네 ‘리알토의 연가’가 나직히 흐른다. 이런 다리는 모두 지붕과 벽을 가진 폐쇄형 구조다. 통상적인 의미의 다리라기보다는 ‘강 위의 집’에 가깝다. 전주천 위에도 ‘집’이 생긴다고 한다. 전주시는 남천교의 현재 넓이를 확장해 그 한 켠에 한옥을 올리고 밤에는 조명도 밝힌다고 발표했다. 전주천이라고 다 같진 않았다. 한벽당 일대는 남천(남천)이고 물이 다가교를 지나면 서천(서천)이라 했다. 남천이란 전주향교 남쪽에 있다는 의미요, 서천이란 다가산이 전주의 서쪽 진산이기 때문이다. 이런 식의 작명은 한강도 마찬가지다. 지금은 서울을 흐르는 강 전체지만 전에는 ‘한강’하면 한남대교 일대만 일렀다. 이곳의 강폭이 가장 넓기 때문에 ‘너를 한’(한) 자를 썼다. 마포나루 일대는 서울의 서쪽이어서 서강(서강)이라 불렀다. 강 줄기를 주변의 경관이나 지역과 조화시켜 이해하고 이름도 그런 식으로 붙인 것이 우리 조상의 습관이었다. 전주 남천은 병풍처럼 펼친 중바위(승암산)를 뒤로 하고 초록바위를 바라보며 흐른다. 전에 이 자리엔 홍교(홍교)가 있었다. ‘홍’은 무지개를 뜻한다. 돌다리인데 무지개처럼 가운데가 두렷이 솟은 아치형이어서 홍교라고 불렀다. 이 돌 무지개 다리 위엔 승암산의 불기운을 누르기 위한 용 다섯 마리가 새겨져 있어 한층 보기 좋았다. 게다가 ‘남천표모’(=남천의 빨래하는 아낙)까지. 상상해보라. 기린봉에선 달이 나오는데(=‘기린토월’) 남천 무지개 다리 아래 밤을 도와 빨래하는 아낙들을. 남천교 부근의 경계가 그만했다. 현재 남천교는 1958년 놓인 것이다. 밋밋한 콘크리트 슬라브여서 아쉬웠던 차에 한옥 지붕을 올리겠다니 일단 발상이 기특하다. 그러나 툭 트인 남천에 ‘집’을 지어 혹시 부담이 되진 않을지 전문가들이 잘 헤아리시기 바란다. 전주식 ‘강 위의 집’은 서양의 그것과는 달라야 할 것이다. / 임용진 편집인 (2007년 10월 10일) 


전북의 보물 ⓲ – 쇠 비 전북의 보물은 땅 속에도 있다. 지난 1979년 전주시 고사동 현재 영화의 거리 부근 옛 시민극장 터에 여관(당시 우신여관)을 신축하기 위해 땅을 파다 비 하나가 나왔다. 나무 비도 돌 비도 아닌 쇠로 된 철비였다. 수 백 년 땅에 묻힌 듯 녹이 슬었으나 산화가 심하지 않아 충분히 글자를 알아볼 만했다. 앞면에 새겨진 글귀는 ‘관찰사 이헌구 청간선정비’. 헌종 연간인 1837년부터 1839년까지 전라감사를 지낸 이헌구(1784~1858)의 선정비였다. 뒷면엔 “그 분이 떠나신 지 23년 후 기미년 4월 어느날 세웠다”고 음각됐다. 이 ‘기미년’은 1859년이다. 전주를 떠난 것이 23년이고 세상을 뜬 지 5년 후다. 누가 그만한 세월이 흐른 후 남의 기림을 받는가. 더구나 돌이나 나무가 아닌 ‘영세불망’(=‘영원히 잊지 말라’)의 쇠로 만든 기념물을 받는가. 이헌구(李憲球)는 전주 이씨고 호는 국간(菊幹)이다. 1837년 1월20일 전라감사에 임명돼 1839년 12월10일 임기를 마치기까지 23개월 동안 전주에 있었다. 전라감사와 전주부윤을 겸했으니 요즘 치면 도지사, 시장을 같이 했다. 전주에 재임한 조선시대 전라감사(당시엔 전라남북도와 제주도까지 전주가 ‘다스렸다’) 마흔 한 명의 행장을 기록한 책 ‘벼슬길의 푸르고 맑은 바람이여’(최승범 저)는 이헌구를 이렇게 쓰고있다. “(이감사는) 청검 근면한 지방관으로서 관내 백성들의 어려움을 살피고 돕는 일에 힘썼을 뿐 저 때의 변경 이웃나라 백성들에게도 덕화를 생각하였던 ‘사려심원’한 명감사였다.” 속담에 “정승 댁 개가 죽으면 가도 정승이 죽으면 안 간다”고 했다. 이헌구 ‘정승’은 본인이 돌아간 후 호남 백성들의 기림을 받았으니 영광이 지극하다. 전라감사 재직 중도 아니고, 한성판윤·좌의정 등 내직으로 승진한 후도 아니고, 그 분 돌아간 후 전라도민들이 그를 기렸으니 흔치 않은 일이다. 이 비는 1979년 출토 후 토지주인 김일호씨가 전북대에 기증해 지금 전북대 박물관 앞 스텐레스 울타리 속에 서 있다. 그 비 앞면 오른쪽에 이렇게 새겨져 있다. “맑은 기품으로 간결한 일처리에 / 그 빛을 밖으로 들어내지 않았음이여 / 세월이 흐를수록 더욱 그리웁거니 / 어찌 잊을 수 있으리오.”(최승범 역). 어제 전북 출신 정동영 씨가 민주신당 대선 후보로 결정됐다. 그가 땅 속에서 나온 이 철비를 기억했으면 한다. / 임용진 편집인 2007년 10월 15일 


전북의 보물 ⓴ – 헌책거리 헌 책은 막걸리 잔과 같다. 시인 김용호(1912~1973)는 적었다. “어디든 멀찌감치 통한다는 길 옆 주막 / 그 수없이 많은 입술이 닿은 이 빠진 낡은 사발에 나도 입술을 댄다. / 흡사 정처럼 옮아오는 막걸리 맛”(‘주막에서’ 첫 부분). 느낌이 너무 낡았다면 와인 카페나 와인 잔으로 바꿔도 좋다. 향기의 공유. 누군지 모를 이가 책갈피에 꽂아놓은 바싹 마른 꽃잎. 헌책방에서는 혼자 있어도 많은 이와 만난다. 그들은 책꽂이 안에 숨어 낮은 소리로 묻는다. “향기를 맏았냐”고. 전주 구도심엔 헌책방 5곳이 모여있다. 동문사거리에서 팔달로를 보고 왼쪽에 한 개(‘비사벌서점’), 오른쪽에 네 개(‘꼬비서점’, ‘한가서점’, ‘태양서점’, ‘일신서점’)가 있다. 최근 이곳에서 노시인 최승범씨(76)와 1시간 동안 바장댔다. 간간이 들르는 교복 차림 중·고교생을 제외하면 손님은 거의 없었다. 서점에서 최시인은 “시집 어디 있어요?”하고 물었다. 이에 대한 주인의 답은 비슷했다. “저 선풍기 아래 몇 권 밖에 없어요”, “사다리 뒤에 찾아보세요”. 시집은 외진 곳에, 그나마 쥐 오줌만한 자리 위에 빌리듯 앉아 있었다. 참고서류나 두꺼운 미술서적, 전집류, 백과사전 등이 잘 보였다. 70~80년대 헌책방의 주 상품이던 ‘창작과 비평’, ‘사상계’, ‘문학과 지성’ 등 잡지는 거의 볼 수 없었다. 마지막 들른 꼬비서점엔 철지난 레코드 LP판이 8,000장이나 있었다. 7,500원짜리 해리포터 시리즈(아즈카반의 죄수) 한 권이 3,500원. 1990년대 새빛문화사가 낸 벽초 홍명희의 임꺽정 한 질(전9권)이 1만8,000원, 내셔널 지오그래픽 잡지 과월호 한 권이 1,500원이었다. 무척 쌌다. 이 곳 서점은 15년~20년씩이나 된다. 헌 책의 미세먼지 탓에 나는 콧물을 줄줄 흘렸으나 최시인은 여유 있게 서가를 사이를 산책했다. 그는 시집 두 권과 ‘기행문선집’(1964, 북한 조선문학예술총동맹)을, 나는 역시 ‘기행문선집’과 고 김홍섭 판사의 에세이 ‘무상을 넘어서’(1971, 성바오로서원)를 샀다. 최시인이 7,500원, 나는 7,000원을 썼다. 싸고 맛있다는 것은 헌 책과 막걸리의 공통점이었다. / 임용진 편집인 (2007년 10월 18일) 


전북의 보물<22> – 알프(AALF) 어제자(8일) 새전북신문은 도내 한 행사에 요란한 박수를 보냈다. 16면 발행의 신문 치고 파격적으로 8개면을 털어 ‘AALF’ 특집을 만들었다. 전북의 일간지 열두개 중 대부분이 이를 단신처리 하거나 아예 무시했다. 가장 역사가 오래된 메이저 전북일보만 1면 톱기사로 ‘박수’에 동참했다. ‘AALF’의 정식명칭은 ’2007전주 아시아아프리카 문학페스티벌’(Asia Africa Literature Festival)이다. 7일부터 14일까지 아시아와 아프리카 작가 314명(해외 44개국 65명, 국내 249명)이 전주에 모여 문학 축제를 벌인다. 올림픽, 월드컵, 엑스포도 아닌 문학행사가 뭐 대단하다고 박수를 받나? 그 이유는 이렇다. 첫째, ‘AALF’(이하 ‘알프’)는 전주 규모 이상이다. 단군 이래 이 나라가 주최한 문화 행사 중 최대다. 해외작가 65명은 그 나라를 대표하는 문학인들이다. 이 중에서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몇 명은 나올 게 확실하다. 서울이건 평양이건 이들을 모두 불러 모은 적이 없다. 나라가 주도하거나 응원하지도 않은, 전주에 의한 전주인의 국제 행사가 이 만한 질과 규모로 치러지는데 박수가 없을 수 없다. 둘째, ‘알프’는 전북이 세계 제일로 무엇을 내세울 것인지를 보여주고 있다. 간척지 개발도, 첨단산업도 좋지만 문화파워야말로 전북의 미래다. 그것이 지구촌 제3세계 문학의 수도로 전주를 대번에 기립시켰다. 마다가스카르 국민시인인 데지레 필리페 라마카벨로(68)씨는 8일 오후 이렇게 말했다. ‘저처럼 고상하고 예의바른 건물은 보지 못했다. 저 나무는 금처럼 빛난다.’ 저 건물은 경기전이며, 저 나무는 은행나무였다. 베트남 여성 소설가 레민퀘 씨는 ‘춘향이 여기서 났냐?’고 물었다. 여기는 한옥마을이었다. 셋째, 전북 출신은 잘 뭉치지 못한다는 편견을 문학인들이 보기 좋게 뒤집었다. ‘알프’를 주최한 전북작가회의(의장 이병천)는 전국 문학단체 중 ‘최강’으로 인정받는다. 수많은 작가를 배출한 문학역량에서도, 그들이 일치단결하는 결집역량에서도 최강이다. 이것이 서울과 부산도 못하는 ‘알프’를 전북이 성공시킨 이유다. 그간 전북에선 박수가 적었다. 남이 뭘 잘해도 곁에서 소리 내 격려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젠 박수를 치자. 꾀벗고 손바닥이 벌개지도록 나는 ‘알프’에 박수를 보낸다. / 임용진 편집인 (2007년 11월 08일) 


전북의 보물 <23> – 고은 일주일에 한 번 칼럼 쓸 때가 되면 여러 가지 주제가 쌓인다. 오늘은 교통사고 ‘나이롱’ 환자, 위장취업, 은행나무(2), 고은 시인의 네 가지가 있다. 이 중 마지막을 고른다. 지난 9일 오후 전주시 풍남동에서 시인 고은(75) 강연회가 열렸다. 그는 일제강점 아래 소년기를 보냈다. “그땐 역사가 없는 시대였어. 여러분은 그게 어떤 건지 잘 몰라. 단 한 마디도, 학교는 물론 집에서도 우리 말을 쓰면 안되요. 상상이 가?” 청중은 100명 가까이 돼 보였다. 대부분 눈이 반짝반짝한 청소년들. 할아버지 시인의 평어조가 오히려 친근했다. “나는 한글을 동네 손위 머슴에게서 배웠어. 학교가 아니고. 학교서는 일본말, 일본글만 썼으니까. 그것도 아주 우연히 그냥 배워서 그것으로 이광수 뭐 그런 소설들을 읽었지. 초등학교 3학년 때 해방이 되고 나니 선생님이 ‘한글 읽을 줄 아는 사람 손들어’ 하시는데 우리 반에서 손 든 학생이 나밖에 없더라고. 그 정도로 압박이 심했지. 시인이 될 줄은 몰랐어. 체육선생님이 되고 싶었어. 시란 것은 초등학교 4학년 때 국어책에서 읽은 ‘광야’가 처음이야.” ‘광야’는 광대무변한 공간(=‘광야’)과 시간(=‘천고’)의 노래이다. 게다가 ‘백마타고 오는 초인’까지. 천, 지, 인이 합친 스케일은 감성기의 소년을 흔들었다. 이어 두 번째 충격은 ‘문둥이 시인’ 한하운이었다. “중학교 1학년 때 밤길을 가는데 저기서 희미한 빛이 나. 가까이 가보니 한하운시집이야. 누가 잃어버린 것을 주워 도망치듯 집으로 가져갔어요. 이불 속에서 밤새 읽었어. 그리고 두 가지를 결심했어요. 하나는 ‘문둥이가 되겠다’. 둘은 한하운처럼 사방을 돌아다니겠다.” 청중은 웃었으나 고은은 진지했다. 그 결심처럼 시인의 대승적 혼은 이후 수 십년 간 세상의 병을 한 몸에 안고 떠돈다. 칠순의 시인을 만난 것은 행운이었다. 목소리는 열정적이고 안광이 여전했다. 이 강연은 14일 끝난 아시아아프리카문학축제(AALF) 중 하나였다. 문학축제 후 진행이 엉성했네, 시민참여가 적었네 하는 평가도 나오는데 다 훈수꾼얘기다. “누구나 가슴에 시가 있습니다. 나는 여러분이 시인임을 증명하는 의미에서 시인입니다.” 아직도 노투사, 노시인의 말이 귀에 남았다. 그는 전북 군산 출신이다. / 임용진 편집인 (2007년 11월 15일) 


전북의 보물 <24> – 작촌석 7~8년 전 전주시 서문교회 뒤 다가동 한 골목에서 있었던 일이다. 오래 된 집을 헐고 2층을 신축하기 위해 집주인이 건축에 방해가 되는 골목 입구 돌기둥을 부러뜨렸다. 높이 2m30㎝, 가로 세로 30×30㎝ 크기의 돌기둥. 수십년 여기 산 주민도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하잘 것 없는 구조물이다. 하지만 이를 지켜본 한 동네 어른이 집주인에게 타일렀다. “이게 뭔 줄 아나? 자네 나이보다 오래 된 내력있는 물건이니 부수지 말아.” 그 어른이 바로 서예가 작촌 조병희(1910~2005)다. 이 돌기둥은 하나가 아니다. 전주시 다가동 3가 중앙길 174번지와 156번지 사이 골목 앞에 2m 간격을 두고 쌍으로 서 있다. 직사각형의 화강석에 자연스런 결을 내 다듬었다. 왼쪽 기둥은 멀쩡한데 오른쪽 기둥은 아래쪽이 가로로 동강나 다시 붙인 게 확실하다. 두 기둥 모두 윗 부분 같은 높이에 구멍이 나 있다. 그 사이로 무엇을 끼웠을 것이다. 무엇을 끼워 걸치면 사찰의 당간지주, 일본 신사의 도리이처럼 출입구 역할을 했을 법하다. 어딜 표시하던 돌기둥이었을까. 작촌은 이곳이 일제 강점기 시절 유곽이었고 돌기둥은 그 표시라고 설명했다고 한다. 효산 이광열이 편찬한 ‘전주부사’(1943)에 따르면 애초 중앙동, 다가동 근방에 유곽이 있었고 후에 그것이 현재 전주초등학교 근방으로 옮겼다고 한다. 작촌의 증언대로라면 이 돌기둥은 옮기기 전의 다가동 유곽을 표시하는 ‘물건’이니 그 내력이 적게 잡아도 80~90년이다. 그러나 주민 얘기는 다르다. 이곳에 18년 산 서영진(60대후반 여성)씨의 말. “확실친 않아. 옛날 여기가 군대든가, 사관학교 자리였다든가. 저 돌기둥 부러진 것도 내가 붙여놓으라고 해서 저렇게 붙였어. 멀쩡한 돌기둥을 왜 부수냐고. 저것이 집 알켜주기 얼매나 좋은디…” 둘의 증언이 다르지만 신빙성은 아무래도 작촌 쪽에 있다. 돌 기둥은 작촌 옛집에서 10m 거리 밖에 안 떨어졌다. 그분이 여기서 1세기나 사셨으니 ‘사관학교’가 아니라 ‘유곽’설이 정확할 것이다. 하지만 유래대로 이름을 밝혀 유곽기둥이라 하자니 좀 뭐하다. 하찮은 돌이나마 작촌 덕에 형태를 보존했으니 ‘작촌석’(鵲村石)이라 하면 어떤가. /임용진 편집인 (2007년 11월 22일) TE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