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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전북신문 칼럼 ‘아침을 열며’(2014년 3월 25일자)
한옥마을 목련이 활짝 폈다. 개나리 황금종이 담벼락에 늘어지고 임실 구담마을 매화, 구례 산동 산수유도 만개한다. 이산저산 꽃이 피니 분명코 봄이로구나.
 
하지만 이 계절은 예정된 배신이다. 왔다가 후딱 가니 반겨한들 쓸데 있나. 봄은 가나니 저믄 날에. 첫 사랑, 첫 치마처럼 온 몸에 봄을 감고 속절 없이 운 것이 어디 소월(素月)뿐이겠는가. 보통 사람들의 노래는 훨씬 더 아릿하다.
 
#1. 도시의 밤, 방황하는 남자.
 
아침부터 봄비가 내렸다. 시린 목덜미를 가리기 위해 트렌치 코트 깃을 세우고 충무로를 걷다보니 상가 유리창에 그녀가 어린다. 비처럼 사랑처럼 눈물처럼. 뭐가 자꾸 흘러내리는 바람에 별 수 없이 카페에 앉아 편지를 쓴다. 광화문 우체국에서 부치려 했으나 호주머니 속 편지는 언제나처럼 부치지 못 한다. 보신각 골목길을 돌아나오며 꾸깃꾸깃 편지를 찢고 종로 5가 대학로 쯤에서 담배를 꺼내 문다. 마로니에 잎이 바람에 흔들린다. 한참을 걷다보니 다시 명동. 눈부시던 네온 간판은 꺼지고 누군가 버린 꽃다발이 거리에 뒹군다. 유호 작사, 현인 작곡 ‘서울야곡’(1953)의 봄은 밤늦게까지 서울을 방황한다. 또 다른 노래. 이번에도 봄이지만 시공이 판이하다.
 
#2. 눈부신 날, 신작로, 여자.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 할 만큼 눈 부신 푸른 날. 연분홍 치마 흩날리고 옷 고름 씹으며 맘 졸여 기다리는데 무심한 산 새는 지저귀며 날아간다. 기다림에 지쳐 냇가로 와 풀잎을 띄우면 새파란 잎은 정처없이 잘도 흐른다. 인생처럼, 내 마음처럼. 새로 닦은 시골 아스팔트 길 위 햇빛이 쏟아지고 멀리서 타닥타닥 짤랑짤랑 우편마차 청노새가 달려오나 오늘 역시 내게 오는 편지는 없다. 어느새 저녁. 하루내 기다리고 기다리다, 타다 타다 못한 처녀 속은 황혼 속에 앙상히 메말라간다. 사랑은 천벌이다. 봄날이 가는데, 모든 아릿다운 색깔과 음향 속에서 내 무채색의 사랑만 기약 없는데 무슨 천벌이 더 필요할까. 손로원 작사, 박시춘 작곡의 ‘봄날은 간다’(1950)는 색의 향연이다. 연분홍, 산제비, 새파란, 풀잎, 꽃편지, 청노새, 황혼, 구름 등 갖은 색깔이 교차한다. 작사자 손로원은 원래 풍경 화가 출신이다. 화가의 시는 유행가로 써도 이만큼 된다.
 
두 노래 모두 3절까지 있고 3절까지 다 불러야 제 맛이 난다. ‘서울야곡’은 도시처럼 분주하다. 하루 종일 봄비를 맞으며 충무로, 종로, 대학로, 명동으로 돌아다닌다. ‘봄날은 간다’는 맑은 날 제 자리에 선 포즈다. 산새와 시냇물과 우편마차, 자연과 세상이 유전하는데 내 사랑만 홀로 선 자세여서 더 애처롭다. ‘서울야곡’의 쓸쓸함은 사랑 때문만은 아니다. 아마 대도시에 널린 돈, 명예, 자유, 헛 기쁨 속에서 헤매는 상징이기도 할 것이다. 그걸 찾아 도시로 온 ‘서울야곡’의 그는, ‘봄날은 간다’의 그녀가 기다리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자식! 편지라도 한 장 보낼 것이지.
 
봄은 찬란한 슬픔이다. 파란 강, 하얀 새, 푸른 산, 붉은 꽃은 또 오고 또 곧 지난다. 아직 초입이지만 이 봄도 그럴 것이다. 그러나 정작 슬픈 건, 아무리 봄이 와도 내가 마중을 못하는 것이다. 시인이 시인인 이유는 보통사람의 시인됨을 끄집어내주기 때문이다. 춘색이 아무리 찬란하면 뭐하나. 자신의 춘심(春心)을 끄집어내지 못한다면.
 
찢어버린 편지 한숨과 그것을 기다리는 앙가슴은 봄날의 영원한 주제다. 이를 잊지 말고, 노래방 가면 반드시 3절까지 부르시길. ‘봄날은 간다’의 그 찬란한 트럼펫 전주가 들리는 듯하다. 설레지 않나?
 
 
이건 뭔가. 반갑잖은 기시감인가. 세월호는 나를 다신 마주치고 싶지 않은 지난날로 실어 나른다. 서해페리, 성수대교, 대구 지하철. 지긋지긋한 사건의 연속이었다. 가슴 먹먹하고 머리 속이 하얗게 돼버렸지만 기사를 작성하고 남보다 빨리 송고해야 했다. 그전에 진작 기자노릇을 집어쳤어야 했다는 생각마져 든다. 그랬다면 이럴 때 남들처럼 가슴 조이며 TV 앞에 앉았을 수나 있을 것을. 요즘 나는 TV를 정면으로 못 본다. 이름 모를 무학여고 학생의 피묻은 작은 구두, 대구지하철 속의 그 새카만 냄새가 오랜 시간을 넘어 한꺼번에 엄습한다. 배 화면 저편에서 뭐가 튀어나올 듯하다. 이것도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인지.
 
1994년 10월 21일 오전 7시 48분. 성수대교는 가을비 내리는 날 아침에 무너졌다. 마침 월급날이이어서 새벽부터 누구와 저녁 약속을 잡을까 한가하게 헛 생각 하던 차에 날벼락을 맞았다. 데스크로부터 전화를 받고 현장에 도착하니 완전히 구겨진 16번 버스가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이 버스는 부러진 교각 상판에 운전적이 대롱대롱 매달렸다 뒤쪽부터 떨어져 희생이 컸다.  주변에 핏자국, 신발, 옷 가지가 널렸다. 역시 망가진 베스타 승합차와 세피아, 프라이드 승용차 등도 흩어져 있었다. 이날 32명이 사망했고 그중 9명이 여중, 여고생이었다. 왜 꽃같은 그들을 우리는 항상 앞세우나. 성수대교 북단에 위령탑을 세웠으나 오히려 허망했다. 사고 5년 후(1999년) 어느 여름날 사망 여고생의 한 아버지가 바로 위령탑 앞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서해페리(1993년 10월 10일) 침몰은 기자 입문 후 첫 번째 큰 사건이었다. 그 때는 현장에 접근 못하고 사고 해역 바닷가에서 우왕좌왕했다. 유족들의 오열에서 비극을 실감했다. 사망자 숫자를 정확히 파악하라는 데스크 지시가 빗발쳤으나 경찰, 병원, 재난본부, 유족이 다 제각각이어서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압도적인 슬픔 속에서 숫자, 팩트에 매달리느라 쩔쩔맸다. 그리고 이제사 고백한다. 서해페리 고 백운두(당시 56세) 선장께 죄송하다. 사고 후 육지 모처에서 백선장을 봤다는 루머가 돌았고 당국은 급기야 그에게 지명수배까지 내렸는데 이를 기다렸다는 듯 기사화했다. 다른 신문도 다 그랬으나 그렇다고 내가 던진 돌의 무책임이 경감되는 것은 아니다. 백서장을 비롯해 선원 7명 모두 나중에 인양된 선박 안에서 발견됐다. 그들은 최후까지 승객구조 작업에 힘썼다. 다시 그들에게 사죄한다.
 
대구지하철 참사는 2003년 2월8일 아침 9시53분에 났다. 192명이 사망했다. 사고 현장에 이튿날 도착해 맨 먼저 한 게 마스크를 산 일이다. 먼저 도착한 동료가 권했는데 그대로 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참담했다. 대구 중앙로역에 빽빽이 붙은 가족, 친구들의 손글씨 사연을 옮겨 적다보니 취재노트에 눈물이 떨어졌다. 최후의 순간에 그들은 휴대전화를 붙잡고 사랑하는 이들을 불렀다. 결혼 1년째인 한 신부는 깜깜한 지하철 안에서 남편에게 숨가쁜 목소리로 “오빠, 사랑해”란 말을 남겼다. 한 초로의 부부에게는 지하철 안의 막내아들이 “불효를 용서해주세요.”라고 했다. 그들이 남긴 마지막 통화, 문자는 ‘사랑해’, ‘미안해’, ‘용서해’가 대부분이었다. 슬픔에 몸을 가누지 못하는 유족들에게 나는 이런 걸 묻고 다녔다.
 
아침부터 세월호를 말하긴 정말 싫다. 하지만 그것 말고는 당분간 아무 것도 할 게 없다. 말을 해도 건성건성이고 음악을 들어도, 밥을 먹어도 그렇다. 세월호를 주제로 별 칼럼을 다 쓸 수 있을게다. 안전 불감증, 노블리스 오블리주, 지도자 선택의 중요성, 나아가 오는 6월 총선이 그래서 더 중요하다는 등 등. 그러나 나는 그게 왠지 다 거짓말 같다. 누구에 대한 분노도 아니고 지금은 한탄 뿐이다. 제발 몇이라도 생존해 있길. 그것만을 빌고 빈다. 전직 기자 건 누구건, 대통령이건 유족이건 다 한 맘일 게다. 제발.
 
새전북신문 칼럼(5월29일자 11면), ‘동학혁명, 그분의 유골’ 
 
지난 1995년 7월 한승헌 당시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이사장(변호사)의 눈길이 일본 아사히 신문을 인용한 한 국내 신문 기사에 붙박히듯 멈췄다. 동학군 장군으로 보이는 인물(‘그 분’이라 하자)의 두개골이 일본 홋카이도서 발견됐다는 내용이었다. 한 이사장은 즉시 일본에 확인하는 한편 천도교, 동학혁명 유족 관계자 등과 함께 봉환위원회를 꾸려 모셔오길 서둘렀다. 위원회 사무총장은 신순철 씨가, 실무 사무국장은 문병학 씨가 맡았다. 이들의 노력으로 1년만인 1996년5월 30일김포공항에 그 분 두개골이 도착했다. 같은 날 경찰 차량 에스코트로 예를 갖춰 전주에 도착, 오후에 덕진농합예술회관에서 진혼제가 열렸다. 흰 국화가 식장을 덮다시피 했고 1백여 년 적지를 떠돌던 선각 열사를 되 모신 행사에 온 고을 뜻있는 자들이 숙연했다. 이로써 동학은 실재했다. 이태조 어진을 한양서 모셔오던 지난날 전주는 왕권의 고향이었다. 수 백 년 후 그 분의 귀환으로 이제 민권의 고향이 됐다.
 
그 분은 홋카이도 대 문학부 창고 종이상자에서 발견됐다. 홋카이도 원주민인 아이누 족 6명의 두개골과 함께였다. 홋카이도 대학은 일본 제국주의 시절 인골학 연구 특성화 대학으로 지정된 곳이다. 말이 연구지, 남의 혼을 잘라 통치 목적으로 들여다 본 무뢰한의 만행에 불과했다.
 
그 분 두개골 왼쪽 아래편엔 ‘한국 동학당 수괴. 사토 마사지로에게서’란 글씨가 씌여있고 1906년 전남 진도에서 거뒀다는 쪽지도 함께 발견됐다. 유골 봉환을 추진한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가 국립과학수사원 등에 의뢰해 수 년 간 신원 확인을 위해 노력했으나 아직까지 누군지 밝히지 못하고 있다. 진도에서 그를 거뒀다지만 진도는 장흥 전투, 해남 전투 등에서 밀린 동학의 마지막 패전지로 팔도 용장이 모인 곳이다. 그 분은 황토현 대승에 참전했을까? 우금치 패전에도 변심치 않고 진도까지 왔다 결국 한을 남겼을까? 김구처럼 황해도 접주인가, 아니면 최시형처럼 경상도 출신인가? 고향도, 이력도 알 수 없다. 수많은 위대함처럼 익명일 뿐이다.
 
최근 시민단체 문화재제자리찾기 대표 혜문 스님이 전주역사박물관에 보관중인 동학군 장군(=그 분)의 두개골을 조속한 시일안에 안장해야 한다고 촉구하면서 그 분이 다시 주목받고 있다. ‘다시’라고 함은 그간에도 간헐적, 주기적으로 지적된 사항이기 때문이다. 지난 2010년 6월30일자 한겨레 신문에도 ‘96년 봉환 동학군 지도자 유골 15년째 안장 미뤄’란 제목이 보인다. 기사 요지는 비슷하고 ‘몇 년 째’라는 숫자만 달라지니 주기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혜문 스님 등은 ‘역사적 의의가 큰 유물을 박물관 창고에 방치하고 있다, 이는 우리 시대의 부끄러운 자화상’이라며 법적 책임까지 물을 태세다. 그 분을 모셔오긴 했으나 이후 후손들 처사가 영 시원찮다. 찾는 이 없는 컴컴한 박물관 수장고에 19년째 보관만 했으니 동학을 역사에 매립한 격이다. 이래서야 홋카이도 대 창고 종이상자와 다를 게 뭐 있을까.
 
하지만 전주역사박물관은 보관을 위탁받았을 뿐이다. 동학혁명기념일도 정하지 못했고 혁명 당시 산화한 수많은 열사들이 공식적으로 누울 곳도 마련하지 못한 것이 그분을 방치, 유전(流轉)시키고 있는 진짜 이유다. 왜 그걸 못 정했나? 이른바 동학의 후예, 관계자, 전문가들이 서로 평행선으로 우겼기 때문이다. 동학을 무슨 훈장처럼 소유하고 빼앗기지 않으려 하다 아무런 결정도 못한 채 동학의 진짜 의미를 방기했다.
 
유골 봉환 추진단계서부터 실질적인 관리 책임을 맡고 있는 곳이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다. 이 기념사업회는 그간 백방으로 노력했다. 진도나 정읍시 등과 여러 차례 진지하게 논의했으나 번번히 안치가 틀어졌다. 대의는 분명하되 실제에선 당자간 또는 지방끼리 이해가 엇갈려 책임지려는 자가 없으니 기념사업회로선 유구무언이되 부글부글 속이 끓을 노릇이다.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는 어제(28일) 이사회를 갖고 동학 장군 유골에 관한 현안을 논의했다. 그간 노력할 만큼 했고, 올해 내 어떻게든 결말을 짓겠다는 결기도 강하다. 관련자들끼리 협조해 이번엔 꼭 가슴 뿌듯한 결정을 내려주시길 바란다. 그게 목 없이 구천을 떠 돈 수많은 ‘그 분’들 뜻 아니겠는가? 모레(31일)는 혁명군이 동학 깃발 아래 전주에 입성한 지 120년째 되는 날이다.
 
새전북신문칼럼 온누리 – ‘작불납’(作不納) 2014.6.19. 
조선은 관리를 어떻게 뽑았나? 왕 마음대로 임명했나? 경국대전 등에 보이는 다음 몇 가지 용어들은 생소하지만 재미도 있다. ◾원의(圓議) : 둥그렇게 모여 의논한다는 뜻이니 서양 ‘원탁의 기사’처럼 민주적인 느낌이 든다. 실제 민주적이다. 사헌부, 사간원 벼슬아치들이 관직 후보를 대상으로 두루(=圓) 심사(=議)한다. 어떤 실력자가 추천했건, 심지어 왕의 교지일지라도 살벌하게 단점을 들춰내는 끝장심사. 보통 3회를 반복하니 엔간한 전력이 다 드러난다. ◾작불납(作不納) : 이상 둥그런 심사 결과 부적격자임이 드러날 경우 도저히 “임명(=作)을 못(=不) 받아들이겠나이다(=納)”고 강력히 저지한다. 엄정하고 분명한 사유가 따라 붙는다. ◾정조외(正曹外) : 역시 부적격 표시. 단, 의정부,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 예문관 등 바른(=正) 부서(=曹) 말고 딴 곳(=外)에만 채용하시라는 조건부 승인이다. 현실정치에선 품성보다 능력도 필수적임을 인정할 만큼 그들은 꽉 막히지 않았다. 승진(=品) 한도(=限)를 둔 채 조건부 승인하는 ‘한품’(限品)이란 말도 있다. ◾서경(署經) : 위 여러 가지를 통틀어 이르는 조선식 관직(=署) 심사(=經) 제도. 감찰기관인 사간원과 언론기관인 사헌부 대간들이 모여 5품 이하 관리를 대상으로 진행하는 서경은 절대적 권위를 가졌다. 비공식 인사청문회 격인 ‘원의’에서 한 번 ‘작불납’ 등으로 찍히면 왕일지라도 바꾸기 힘들었다. ‘서경’은 관리들의 친필 싸인을 뜻하기도 한다. ◾고신(告身) : 임명장이다. 관직 심사에 통과한 이가 몸(=身)을 고(告)하도록 하는 이 종이 한 장 얻기가 힘들어 역대 조선 왕들은 무수히 역정을 냈다. 요즘 같으면 5급 사무관 정도에 불과한 대간들의 싸인 때문에 하급관리 하나 맘대로 임명 못 했으니 고 노무현 대통령 어법을 빌자면 이럴 법도 하다. “왕 노릇 힘들어 못 해 먹겠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은 기자를 좋아하는 듯하다. 임기초 윤창중 청와대 대변인도, 최근 총리후보로 전국을 떠들썩하게 하는 중인 문창극 씨도 기자출신이다. 나는 지난날 두 사람 모두와 같이 근무했다. 윤 씨는 아예 논외지만, 문창극 전 중앙일보 주필은 얼핏 인간적으로나 재산상 흠결이 그닥 없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그는 조국의 지적 역사적 저력을 ‘게으르다’는 식으로 지나치게 낮춰 봤다. 그것이 그의 ‘서경’에 ‘작불납’이다. 현대판 ‘원의’인 인터넷은 문창극 씨 본인에겐 참극이지만 보는 이에겐 한바탕 소극(笑劇)이다. ‘고신’에 눈 먼 사회, 정말 웃긴다. (임용진 논설고문) 
 
새전북신문칼럼(6월24일자 11면) – 경기전의 추억 
나는 전주 한옥마을 한 복판에서 1956년 태어나 1972년 고등학교 1학년 때까지 살았다. 당시 풍남동 3가 67의 18번지, 경기전 담길이 내 태자리고 생애 첫 16년 동안 산 곳이다. 내가 너댓 살 시절만 해도 경기전엔 담이 없었다. 좀 있다 철사줄로 얼기 설기 쳐 출입관리를 하더니 초등학교 5학년 땐가 시멘트 담이 생겼다. 그냥 맨 시멘트가 아니라 좁쌀처럼 작은 돌을 박아 당시로선 멋을 냈는데 담 중간중간엔 경내가 보이도록 철제 빔으로 격자 공간을 만들었던 게 기억난다. 그런데 담 완공 후 며칠도 지나지 않아 등굣길에 보니 그 눈부시게 하얀 표면에 검은 색 스프레이로 뿜어 쓴 커다란 글씨가 확 눈에 띄었다. ‘판토마’. 이튿날엔 또 같은 크기로 경쟁하듯 ‘나바론’이란 붉은 색 글씨가 담벼락에 뿌려졌다. 어린 나이에 어딘가 섬칫한 이 말들은 나중에 알고 보니 모두 당시 열혈 어깨들이 자기 존재를 알린 거였다. 재미있는 것은 전주 한옥마을 아이디어를 내고 실천한 초기설계자 고 이동엽(1948~2013) 전 한옥체험관 관장이 ‘나바론’의 초대회장이었다는 사실이다. 이동엽 전 관장은 타계 전까지 문화사회적 기업의 대표 모델인 ‘이음’ 회장으로 전주 문화예술계를 이끌었다. 아직까지도 그가 평화동의 한 전통 주점에서 북채를 잡고 남의 판소리에 고수 겸 추임새를 넣어주던 모습이 생생하다. 이동엽은 갖은 신산에도 불구하고 방송인 신동엽처럼 밝게, 시인 신동엽처럼 의미있게 살다 간 진짜 전주사람이다. 그 시절 경기전에 담이 없다 보니 수많은 전주인들이 바람처럼 드나들고 모였다. 어린 내 눈에 경기전 여름 나무는 지금보다 훨씬 크고 그림자도 짙었다. 그 녹음 아래 모시 적삼 노인들이 살살 부채 부치며 유장하게 뽑던 시조 가락이 들리고 장기 말 놓은 소리도 ‘탕탕’ 울렸다. 경기전 모퉁이 지금 조경묘 있는 자리 독립 한옥은 항상 수수께끼였다. 또래끼리 실컷 떠들다 닫힌 문틈으로 들여다보면 어찌 알았는지 나이 드신 할머니 한 분이 그 집 대청 마루 깊숙히 앉아 손사래 치며 우릴 물리쳤다. 하도 허락지 않던 그 할머니에 관해 우리 꼬마들은 “미쳤다, 애기 잡아 먹는다”고 수군댔다. 나중 알고 보니 그 분은 조선 마지막 상궁으로 거기 스스로를 유폐시킨 것이었다. 하루 몇 차례 씩 경기전을 들랑거리면서도 나는 한 번도 그분을 가까이서 보지 못 했다. 경기전 주변 인물 중 또 다른 이가 ‘홀테박사’다. 내 외할아버지는 “홀테박사가 공부를 너무 많이 해 돌았다”고 했다. 풍남동 주민들은 그가 명문대 철학과를 중퇴했다고도 했다. 당시 40대처럼 보이던 홀테박사는 늘 거의 맨몸 맨발에 미제 군용담요를 어깨에 휘감고 다녔다. 키가 크고 말랐다. 박박머리와 검은 살결 때문에 간디처럼 보이기도 했다. 우리가 말을 안 들으면 어른들은 “홀테박사가 잡아간다”고 겁줬다. 사뿐사뿐 조용조용 걷던 그 철인은 어느 가을엔가 경기전 주변에서 자취를 감췄다. 항상 입가에 말이 맴돌았으나 한 번도 말을 않던 그는 진종일 경기전 담길을 걷곤 했다. 내 외할버지께선 1950년대 전주 대사습놀이 심사위원장을 지냈다. 그 분은 외손자가 경기전서 어깨 넘어 배운 시조토막이라도 할라치면 “잘 한다”고 칭찬해 줬다. 전주 활터인 다가산 아래 ‘천양정’ 고참회원이기도 한 그의 전통(箭桶 = 화살집)에서 꺼낸 진짜 시누대 화살을 쏴 옆집 높직한 굴뚝 너머로 날린 게 무릇 기하리요. 요즘 구경도 할 수 없을 그 화살이 아깝고 아깝다. 그 굴뚝 높은 옆집은 지난날 백양 메리야쓰(현재 BYC) 공장이며 지금은 경기전 건너 교동아트미술관이다. 지난 1979년 경기전 옆에 생긴 조류상이 지금도 있다. 새 사가는 이 매우 적으나 아직도 아침부터 지저귀는 새 소리로 귀가 즐겁다. 같은 시각 성심여고 세라복 소녀들도 재잘대며 경기전 옆을 지난다. 새와 여고생은 수십년 째 변하지 않은 이곳 아침 풍경이어서 흐뭇하다. 변한 것도 있다. 요즘 경기전은 월담해 들어갈 수 없고 시조 하던 노인들 자취종적 없으며 무엇보다 주말엔 무척 시끄럽다. 난 이동엽, 상궁, 홀테박사, 시조창, 화살, 새소리 기억이 있는데 요즘 한옥마을 어린이들은 훗날 경기전에 관해 어떤 스토리를 쓸 것인가. 임용진(전 언론인) 
 
 
새전북신문 칼럼 온누리(2014.7.17.) – 로린 마젤 로린 마젤
 
글을 쓸 땐 토끼도 되고 사자도 된다. 토끼처럼 가슴 졸이며 전전긍긍 할 때도 있고 사자처럼 게으름 피우다 단숨에 달릴 때도 있다. 오늘은 어슬렁거리고 있다. 먹이를 찾으러 새전북신문 등을 뒤적거리고있는데 인터내셔널 뉴욕타임즈 2면 아래 부음기사(=오비추어리)가 확 눈에 들어온다. ‘로린 마젤, 강력하고 수수께끼같은 지휘자 84세로 영면하다’
 
마젤은 말그대로 수수께끼 천재다. 세 시간 정도 되는 오페라를 통째로 수십개 씩 외웠다. 또 다른 마에스트로인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역시 눈 감고 교향곡을 지휘하는 것으로 유명하지만 오페라는 피아노, 현악, 관악 등 뿐 아니라 성악파트까지 마구 튀쳐나와 복잡하기 이를 데 없다. 나 같은 이는 평생 외워도 한 두 개나 가능할까?
 
다른 천재들처럼 그도 복합적, 모순적이다. 곡해석이 아름답고 섬세한가 하면 어떨 땐 무섭도록 완벽하고 딱딱하다. 청바지를 즐겨 입었지만 권위와 실력으로 항상 누굴 압도했다. 9세 때 슈베르트 ‘미완성 교향곡’을 지휘해 공식 데뷔했지만 대학(미국 피츠버그 대)에선 철학과 수학을 전공했다. 영어는 물론 불어, 독어, 포루투갈어, 스페인어, 이탈리아어를 완벽히 구사했다.
 
수십년 전 클리블랜드 교향악단을 이끌고 내한한 마젤을 세종문화회관(1978년)에서 본 적 있다. 열 띈 지휘 도중 바턴(=지휘봉)이 부러지자 파손된 손잡이를 상의 속주머니에 얌전히 갈무리한 채 침착히 연주를 계속하던 그를 수천관중이 숨죽이고 주시했다. 첼리스트 장한나의 스승이며 전주엔 못 왔으나 평양 공연을 포함 수차례 내한했다. 그는 지난 13일 타계했다. 거장 한 사람을 또 떠나보냈다.
 
 
새전북신문 칼럼(7월23일자) : ‘친구’ 어찌 해야 친구가 되나? 
 
나이가 같아야 하나, 또는 다른 게 있나? 새삼 이를 묻는 건 요즘 친구가 전날 친구와 다른 듯 생각되기 때문이다. 중고등 학교 동문끼린 1~2년만 기수 차이 나도 깎듯이 선후배를 따지는데 어떤 경우엔 직장 입사 동기란 이유로 4~5년 생물학적 나이차를 무시하고 예사로 반말을 한다. 어떤 게 옳은가. 과연 옳은 게 있나. 담헌 홍대용, 연암 박지원, 형암 이덕무, 초정 박제가가 모두 실학파다. 실학파 중에서도 이용후생을 강조한 이들이어서 각별한 사이를 유지했다. 나이가 제각각인데 담헌이 1731년, 연암이 1737년, 형암이 1741년, 초정은 1750년 생이다. 생물학적인 나이만으로 보면 같은 이용후생학파 내에서도 담헌이 고문, 연암이 회장, 나머지 두 사람은 후배 회원 또는 제자 격이다. 그런데 이들이 공통적으로 사용한 말이 있다. 바로 ‘벗’(=友)이다. 형암이 중국에 사신으로 가 북경의 명사들을 만났다. 그들이 ‘조선 학자 연암 박지원을 아느냐?’고 묻자 형암은 ‘그는 내 벗’이라고 했다. 그 다음엔 연암이 중국에 갔다. 역시 북경 학자들이 물었다. “형암과 초정을 아십니까?” 연암이 자랑스레 답했다. “잘 알죠. 제 제자들입니다.” 연암과 형암은 4년 차이다. 형암은 연암의 제자면서 친구고, 연암은 형암의 스승이면서 친구였다. 언뜻 보면 형암이 불경한 듯하지만 연암은 그의 ‘벗’ 발언을 문제삼지 않았다. 고작 4년 아래 형암을 제자라 칭한 연암도 요즘 눈으로 보면 이상하지만, 형암은 실제로 연암을 스승으로 모셨다. 벗이란 그렇게 광범위한 개념이다. 임금과 신하 사이도, 스승과 제자 사이도 벗이 될 수 있었다. 요즘처럼 한 두 해만 차이 나도 지시, 복종 관계가 자동 성립되는 건 옛 선비들은 상상도 못했다. 그렇다고 생물학적 연령을 무시하지도 않았다. 초정은 9살 연장인 형암조차 거의 스승으로 대했으니 한참 위인 연암이나 담헌에겐 말할 나위도 없다. 연암은 ‘불과’ 4살 연장인 담헌과 친구로 지내면서도 존경의 도에선 제자처럼 지극했다. 한 마디로 그들은 멋쟁이였다. 엄격하게 각 잡힌 선비들임이 분명하나 가끔 북한산 삼각산 계곡에서 서로 벌거 벗고 키득댔으며 선배, 후배, 스승, 제자가 한꺼번에 만나 낙수물 떨어지는 북촌 처마밑에서 당시 암담한 조선 현실을 고민하고 울분 토하던 멋진 동지이자 친구들이었다. 조선은 이들 친구 그룹 덕분에 적어도 지적(知的)으로는 후인에게 실망만을 주진 않고 있다. 언제부터인지 억지 규범이 세상을 지배한다. 동기는 나이에 상관 없이 ‘까고’ 지내도 된다는 건 대체 누가 알려준 것인가. 또 나이에 상관 없이 기수가 한 해만 높아도 선배고, 일년만 낮아도 후배란다. 진짜 웃긴다. 내가 누구를 존경한다거나 부린다거나 친구로 지내야 할 이유를 내 양심과 상관없이 규정해주는 사회는 도대체 수백년 전보다 발전한 것인가, 아닌가. 친구는 수평적 관계다. 사회 전체가 수직적일수록 친구의 중요성, 희소성이 더한다. 최근 나는 게스트하우스를 하면서 이를 절실히 느낀다. 대부분 25세 이하인 여행객들과 30년 이상 나이 차가 나지만 그들과 친구를 ‘먹으면’ 닫힌 게 열리고 막힌 게 뚫린다. 신기한 조화다. 닫고 막는 걸 당연시 하고 그 질서에 모범적으로 순응한 지난 수 십년이 그렇게 어색한 것이었던지, 지시와 복종이 아닌, 이해 협력이 사람을 이리 편하게 만드는 것을 왜 이제사 알았을까. 그래서 나는 결심한다. 친구 범위를 넓히자. 일단 십년은 너무 하고 한 구 년 쯤 어린 이들에게도. 나를 트고 젊은 친구를 허락하면 우리는 연암과 형암이 될 것이다. 이 얼마나 좋은가. 
 
 
온누리(2014.7.23.) – 음모론 
 
뉴욕의 택시 운전사 제리 플레처는 매사를 뒤집어보는 인물이다. 뒷자리 승객이 듣건 말건 그는 쉴 새 없이 입을 놀린다. “뉴욕 수돗물엔 불소가 들어있는데, 충치 예방이 목적이라고? 천만에. 수돗물을 먹는 뉴욕시민(주로 유색인)의 의지력과 사고력을 약화시키기 위한 것이지” 하는 식이다. 하도 음모 타령을 해 정신병자 취급을 받지만 결국 그는 국가권력의 거대한 음모를 밝힌다. 영화 ‘컨스피러시’(1997, 주연 멜 깁슨 · 줄리아 로버츠)의 줄거리다. 한국이 지난 1998년 IMF(국제통화기구) 외환위기로 백척간두에 섰을 때 국내 신문들은 외부 금융세력의 개입을 의심했다. 요지는 ‘태국에서 시작한 동남아 경제 위기는 미국 초국적 유태계 자본이 아시아 경제를 길들이기 위한 것이다. 한국 다음은 중국이다. 홍콩 반환 다음날부터 동남아 위기가 본격 시작됐다. 외국 투기자본이 2천억 달러를 동남아에서 빼갔다’(한국일보 1998년 2월 13일자) 등등. 음모의 메뉴는 무척 다양하다. 예수와 마리아가 결혼했다는 설(영화 ‘다빈치 코드’)부터 윌리엄 세익스피어가 가공인물이며 히틀러, 엘리스 프레슬리 등이 실제론 살아있다, 9·11 테러는 미국정부 자작극이다, 등등. 멀리 갈 것도 없이 KAL기 테러 한국정부 자작설, 이스라엘 잠수한 천안함 폭침설 등도 있다. 유병언 씨 사체 발견 발표를 두고 말이 많다. 의료민영화 반대를 잠재우기 위한 맞불 발표라느니 재보선지역 사전투표 참여율을 낮추기 위한 것이라느니. 다 신빙성 낮은 낭설이지만 문제는 유포되고 재생산된다는 점이다. 음모는 진실에 약하다. 진정엔 더 약하다. 애초부터 세월호 침몰이 ‘내 탓’이라며 진정어린 반성과 사후대처를 했으면 좋을 걸, 국무총리와 해경과 유병언 등에 책임을 지우려다 보니 일이 걷잡을 수 없게됐다. 음모는 대통령 뿐 아니라 온국민을 다치게 한다. 가련할진저. 
 
 
온누리(새전북신문, 7월31일자) – ‘돌 윷판’ 
 
울산 태화강변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는 1971년 발견됐다. 호랑이, 늑대, 거북이 뿐 아니라 고래 그림이 사실적으로 새겨져 이곳이 선사시대 고래잡이의 고향이었음을 알게 해줬다. 동양학 권위자 라이샤워 교수는 고대 한국인이 알래스카 지나 캐나다 서해안까지 배 타고 다니며 무역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반구대 암각화가 그 유력한 증거이다. 그때 건너간 것일까. 한반도 전역에 있는 암각 윷판 유적이 알래스카와 남·북미 대륙에서도 발견된다. 미국 인디언들이 땅 바닥에 윷판처럼 생긴 것을 그리며 노는 모습은 이미 서부 영화 등에서 익숙한 장면이다. 파라과이와 볼리비아 인디언들은 우리처럼 윷을 ‘윷’이라 부른다. 넓디 넓은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도대체 고대에 어떤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윷놀이가 심상찮은 놀이임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환단고기’엔 “신지 현덕에 따르면 천부 원리로 만든 윷판으로 달력 원리를 강의하였다”고 돼 있다. 해·달·별의 운동 규칙, 사계 운행, 고대 세계관과 종교관을 담은 상징체계란 분석이 유력하다. 지구촌 전체 고인돌의 70%가 한국에 있고 그중에서도 전북 고창이 그 밀집(2,600여기)지다. 윷판 유적 많기로도 전북이 으뜸이다. 국내 200여 곳이 있다고 알려졌는데 최근 임실 가덕리에서 역대 최다인 돌 ‘윷판’ 39개가 무더기로 발견됐다. 고창 고인돌과 임실 윷판 유적 등으로 미뤄 전북은 한반도의 뿌리임이 확실하다. 무분별한 개발 등으로 사라지기 전에 ‘윷판’ 보존 연구가 시급하다. 그것은 민족의 원형일뿐더러 고대 인류사로 통하는 문이다. 
 
 
온누리(새전북신문 8월7일) – ‘얼차려’ 
 
율곡 이이는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다. 과거에서 아홉 번이나 장원 했다. 그러나 선비들간에 악명 높은 신고식은 인재라고 봐주지 않았다. 얼마나 심했으면 이이가 초임지인 승문원에서 신고식을 거부하다가 쫓겨났을까. 이 소식을 들은 대선배 퇴계 이황이 “아니 그것도 못 참고” 하며 혀를 찼다고 한다. 선비들은 신고식을 면신례(免新禮)라 했다. 하지만 관직사회에서 신참(=新)을 면(=免)하는 게 과거보다 어렵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면신례는 힘들었다. 먹물을 얼굴에 바르고 진흙탕에 구르고 심지어 오물을 먹어야 했다. 군기가 세기론 예문관이 으뜸이었다. 중종 땐 예문관 면신례 비명 소리가 왕 침소까지 들렸다 한다. 사헌부의 면신례는 ‘줄 빳다’ 형이었다. 신참을 세워 놓고 고참들이 돌아가며 그의 무릎을 주먹으로 쳤다. 율곡 이이는 홍문관 교리 재직중 임금에게 ‘면신례 금지’ 상소를 낼 정도로 폭력을 싫어했다. 나중에 그가 병조판서가 되자 병조에선 면신례가 없어졌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판서가 바뀌자 또 시작됐다. 신고식이나 군기 잡기는 어느 규범사회건 있다. 프랑스에서도 신입생을 진흙탕에 빠트리는 ‘비쥐타주’가 있다. 그러나 최근 육군 포병 28사단의 윤일병 사망사건은 너무 기가 막혀 말이 나오지 않는다. 행동 느리고 말 어눌하단 이유로 부대 하사, 병장, 상병 등이 동료를 지속적으로 학대해 사망에 이르게 했으니 이건 ‘얼차려’가 아니라 집단 살해다. 권오성 육군참모총장이 윤일병 사건에 책임지고 전격 사임했다. 김관진 국방장관도 윤일병 사망 다음날 이를 보고받았다 한다. 율곡 이이의 면신례 금지 이후 수백년이 흘렀어도 병조(=국방부)의 가혹 구타는 끊이지 않고 있다. 효종 땐 과도한 신고식을 시킨 ‘기총’(=소대장)을 목 베 효수했다고 했다. 그같은 일벌백계라도 필요할 것인지, 참 답답하다. 
 
 
온누리(8월14일자) – 필즈 메달
 
 ‘내시 균형이론’으로 유명한 존 내시(86·미국)는 괴짜다. 프린스턴 대학 재학 시절 결강을 밥먹듯 했는데 이유는 교수 강의가 자신의 자유로운 사고를 방해하기 때문이란 것이었다. 기존 이론을 깨며 제2의 아인슈타인으로 기대를 모았으나 정신분열증으로 중년에 혼란을 겪었다. 조숙한 천재인 그는 1958년 수학계 노벨상인 필즈 메달 수상후보로 추천되나 ‘너무 젊다’는 이유로 이를 받지 못한다. 대신 그는 한참 후인 1994년 노벨 경제학상을 받는다. 내시 스토리는 ‘뷰티풀 마인드’로 영화화 됐다. 러셀 크로가 천재의 고뇌와 환상을 연기했다. 수학은 골치 아프다. 하지만 난제와 씨름하는 게 인생 축도여서일까. 좌절과 환희를 오가는 수학자들 이야기는 영화 소재로 환영 받는다. ‘굿 윌 헌팅’에선 교수들도 쩔쩔 매는 문제를 한 청소부가 간단히 풀어버린다. 맷 데이먼이 미국 MIT(매사추세츠 공과대학) 청소부로, 로빈 윌리엄스가 이 불우한 청년을 감싸는 심리학과 교수로 나온다. 수학을 이용해 카지노에서 떼돈을 버는 영화 ‘21’은 MIT 졸업 수재들의 실화에 바탕했다. 13일부터 서울에서 세계수학자대회(ICM)가 열리고 있다. 어제 개막일엔 대회 사상 최초로 여성 수학자가 필즈 메달을 받았다. 필즈 메달은 지난 1924년 캐나다 수학자인 ‘존 찰스 필즈’가 제안해서 만들었다. 필즈 상은 주최국 대통령이 수여하는 게 관례다. 지금까지 수상자는 모두 52명. 미국, 프랑스, 러시아 등이 많고 일본도 3명을 배출했으나 한국엔 아직 없다. 서울 대회에 앞서 지난 7일부터 전북대에선 국제 응용수학 워크샵이 열렸다. ICM보다 규모는 작지만 세계 석학들이 모처럼 전북에 모였다. 수학자들은 바둑을 좋아한다고 한다. 바둑 잘 두는 전북. 뒤집으면, 수학 잘 하는 전북이 될 법도 하지 않은가. 
 
 
새전북신문 칼럼(8월20일자) – 동학은 흐른다. 
 
동학은 흐른다. 얼마 전만 해도 동학이 거룩한 흙덩어리 인형 아닌가 걱정했다. 동학 2주갑(=120주년)이라고 대학강단과 지자체 강당, 기념관, 신문특집면에 언급이 잦지만 대부분 역사적 회갑잔치며 초장수 노인을 기념하는 듯 해 감동은 적었다. 그런데 뜻밖에 한옥마을에 동학이 살고 있었다. 지팡이 아이스크림과 얼음맥주, 떡갈비 꼬치와 동등한 자격으로 120살 된 노령 동학이 젊은이들과 어울린 현장을 발견했으니 그것은 놀랍고 즐거운 일이다. 젊은 동학을 처음 만난 것은 지난해 9월초 한옥마을 부채문화관 앞마당에서다. 한낮을 약간 넘긴 토요일 오후 4시 좋은 햇살 아래 마당극 ‘녹두장군 한양 압송차(次)’가 공연되고 있었다. 관객은 수십명, 대부분 20대초반 배낭 여행자들. 관군에 사로잡혀 서울로 압송되는 동학 ‘수괴’ 전봉준과 당시 황해도 ‘애기접주’ 김구의 만남을 픽션화한 이 마당극에 그들은 ‘신기하다’, ‘재미있다’를 연발했다. 임시정부 주석 김구가 한때 동학당이었단 사실이 신기했을 것이다. 전봉준이라면 아득한 조선조 사람인데 근대 인물인 김구와 연결되니 신기했을 것이다. 전라도 충청도만의 동학난인 줄 알았는데 황해도 경상도 등 전국 혁명이었음을 마당극이 알려주니 신기했을 것이다. 기진맥진 피폐한 전봉준 장군에게 전주 비빔밥 한 그릇 대접하겠다는 주모가 등장하고 일본 순사와 젊은 동학 투사의 싸움에 주먹을 쥐게도 하니 재미 있다. 판소리 한 바탕처럼 여러 시간도 아니고 40분짜리 마당극이어서 젊은이들이 지루해 하지 않았다. ‘재미있다’, ‘짱이다’, ‘짱짱맨’ 등은 요즘 젊은이들에게 가치 언어다. 좋다, 멋있다, 아름답다, 최고다 등과 통한다. 반면 ‘구리다’, ‘오글오글하다’는 이와 반대 가치다. 유행에 뒤지거나 지나치게 폼 잡고 비장하고 장중하고 위대해 보일 때 ‘오글오글’ 등이 동원된다. ‘병맛’이라 하면 ‘밥 맛 떨어진다’와 같으므로 아주 나쁜 경우다. 이 중 동학은 어떤 표현이 적당할까. 실패한 혁명, 흙 냄새 나는 농민집단 동학이 현대 도시 젊은이에게 ‘짱’(=최고)일리 없고 ‘병 맛’만 아니어도 다행이다. 학자들이 역사적 의미를 강조하면 듣는 척 하지만 이 경우에도 동학은 ‘오글오글’하다. 경원동에서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하는 한 친구는 젊은이들에게 동학이 ‘5000분의 1’이라고 했다. 지난 한 해 그의 집에 묵은 게스트 약 5000명 중 단 한 사람이 동학에 관해 물었다 한다. “한옥마을 동학기념관이 어딥니까?” 이를 들었을 때 그는 놀라 자빠질 뻔 했다 한다. ‘먹방’(= 먹을 거리 관광) 일색인 젊은이 중에 그걸 묻는 이도 있으니 놀랄 만하다. 그 ‘5000분의 1’ 세대로부터 동학은 최근에도 재미있다는 상찬을 받았다. 작년 여름 이후 두 번 째 젊은 동학과 만났다. 역시 한옥마을에서. 지난 일요일(17일) 저녁 8시 태조로 공예품전시관 주차장. 비가 오는 가운데 야외 마당극 ‘가보세 갑오년, 전주성’이 공연됐다. 처음엔 실실 내리더니 빗방울 점점 세진 속에서도 사람들이 모여 마당 의자 백여개가 꽉 찼다. 이번엔 지난해보다 대규모 공연. 제작비만 1억원이 들었다 한다. 출연자가 훨씬 많고 농악대 버나 놀음, 씻김굿, 깃대 놀음, 밤 어둠을 이용한 큐빅 레이저 영상 등 보고 듣는 재미가 쏠쏠했다. 그러나 이번엔 무엇보다 감동이 더했다. 지난해와 달리 전봉준 김구 등 영웅 뿐아니라 민초들이 극을 이끌었다. 민초를 대표한 개똥엄마가 정읍 신평 출신 남편을 황토현에서 잃고 울부짖을 땐 비 내리는 게 다행이었다. 비와 눈물이 줄줄 흘러 관객 얼굴을 훔쳤다. 에필로그에서 전봉준이 어린 소녀 손을 잡고 등장 수많은 민초를 이끌며 관객석으로 발걸음을 옮기자 빗줄기는 폭우로 변했다. 그 속에서 결연한 나레이션으로 “다만 한 줄기, 우린 영웅이 아니었다. 갈라진 상생의 틈새에 오직 백성이었고, 한 가지 사람이었다”(서철원의 시, ‘달빛 처연’)가 선언처럼 고백처럼 읊조려질 때 나도 울었다. 아주 오랜만에, 재미있게 울었다. 한옥마을서 일 년 새 펼쳐진 이 두 동학 마당은 소설가 이병천 등의 손을 거쳤다. ‘동학 2주갑’이라고 백 마디 강의 열변을 토하면 뭐하나. 젊디 젊은 ‘5000분의 1’ 세대에 재미를 주고 한옥마을에 흐르도록 하지 않으면 동학은 죽은 영감이다. 동학을 전주천처럼 되살려 흘려준 그들의 노력에 박수 보낸다. 
 
 
온누리(새전북신문, 8월20일자) – 마이클 브라운 
 
미국 흑인과 경찰은 구원이 깊다. 유명한 로드니 킹 뿐 아니라 여럿이 두들겨 맞고, 총 맞고, 심지어 개에게 물렸다. #1. 지난 2013년 10월 8일. 도박으로 유명한 캘리포니아주 아틀란틱 시티 카지노에서 도박연령(21세 이상) 미달로 쫓겨난 스무살 청년 데이빗 카스터라니는 길 건너 경찰에게 한동안 욕을 해댔다. 1분 40초 간 이를 지켜보던 경찰이 K9에게 제압을 명령한 뒤 카스터라니를 마구 때렸다. 경찰용어로 K9은 경찰견이다. 카스터라니는 개에게 목을 물려 200바늘 이상 꿰맸고 만신창이가 됐으나 해당 경찰은 아무 제재도 받지 않았다. #2. 지난 2009년 1월1일엔 역시 캘리포니아 주 오클랜드 시 지하철 역에서 한 교통경찰이 수퍼마켓 직원인 오스카 그랜트(당시 22세)를 범인으로 오해, 사살했다. 그랜트는 무기가 없었고 경찰 지시에 ‘오케이’를 외치며 바닥에 엎드렸으나 변을 당했다. 어이 없는 죽음에 분노한 흑인 시위로 오클랜드 시내 차량이 불타고 가게 부서지고 100명이 체포됐다. #3. 흑인구타 피해 원조인 로드니 글렌 킹(당시 26세)은 1991년 3월2일 로스앤젤레스 인근 고속도로에서 과속 도주 혐의로 체포돼 경찰에게 무차별 구타를 당했다. 땅에 엎드린 피의자를 경찰봉으로 난타, 거구의 킹이 지면에서 여러 차례 튀어오르는 장면이 동영상으로 전파돼 LA흑인 폭동을 촉발시켰다. 지난 9일 미주리 주 세인트루이스 인근 퍼거슨 시에서 비무장 흑인청년 마이클 브라운(18)이 백인경찰에 의해 사살됐고 어제 세인트루이스에서도 흑인 한 명이 또 죽어 난리다. 그 불똥이 딴 데 튀지 않길 빈다. 두 도시의 한인 교포 수가 5000여명, 게중엔 전주 출신도 많을 것이다. 
 
 
온누리(새전북신문, 8월27일자) – 종군기자 
 
로버트 카파, 마거릿 히긴스, 마리 콜빈의 공통점은? 다 전쟁터에서 사망했다. 그들은 군인인가? 아니다, 종군기자다. 마리 콜빈은 현대 들어 가장 유명한 분쟁지역 전문기자다. 그녀는 지난 2001년 스리랑카 내전 취재 도중 수류탄 파편에 잃은 왼쪽 눈을 잃었다. 이를 검은 안대로 가린 채 기자가 아니라 장군처럼 포연을 누비던 그녀는 2012년 시리아 내전 취재 중 정부군 폭격으로 사망(56세)했다. 마거릿 히긴스는 금발에 바비인형 타입의 젊은 여성이지만 온 얼굴에 검댕을 묻힌 채 한국전쟁의 참상을 알렸다. 그녀가 오성장군 맥아더와 수원 비행장에서 대등하게 인터뷰하는 모습은 50년대 전세계 독립여성의 아이콘이 됐다. 히긴스 역시 콩고 등에서 얻은 풍토병으로 1966년 사망(46세)했다. ‘귀신 잡는 해병’이란 한국 해병 찬사는 그녀가 쓴 기사에서 비롯됐다. 로버트 카파는 더 말할 게 없다. 스페인 내전에서 총에 맞아 쓰러지는 병사 등 수많은 사진으로 전쟁의 비인간성을 고발했다. 더 생생하기 위해 더 가까이 있던 그는 1954년 베트남에서 지뢰를 밟아 사망(41세)했다. 한국에서도 지난 2004년 이라크 전쟁 당시 모 방송국 종군 여기자가 생생한 영상을 현지 보도해 관심을 모았다. 하지만 분쟁지역 전문가랄 만한 진짜 종군기자는 아직 우리에게 없다. 남의 전쟁터에 목숨을 내놓을 만한 여유가 없었을 것이다. 한국 현대사 자체가 위험천만 격동했으므로. 지난주 이라크 수니파 반군 IS가 미국의 프리랜서 종군기자 제임스 폴리(40세)를 참수해 전세계를 경악시켰다. 아직도 분쟁지역에서 실종, 납치, 억류된 기자가 수십명이라고 한다. 펜이 아니라 목숨으로 보도하는 세상이다.(임용진 논설고문) 
 
 
온누리 ‘가을비’(새전북신문 9월5일자) 
 
요 며칠 또 비가 왔다. 비에도 종류가 있다. 시기적으로 가장 빠른 게 매화우(梅花雨). 매화가 춘풍에 흩날리는 것이니 아름다운 꽃비지 진짜 비는 아니다. 일본에선 4월 쯤 사쿠라 꽃이 비 한 번에 져버리면 그걸 매화우라고도 한다. 두 번 짼 녹우(綠雨)다. 늦봄에서 여름 사이에 내려 녹음을 더 짙게 하는 고마운 비다. 고산 윤선도 고택인 해남 녹우당에선 비자나무(천연기념물 제241호)와 대나무 숲 주위로 녹색바람 불고 녹색 비가 온다. 실은 이는 임금의 은혜인 비와 이슬(=우로·雨露)을 빗댄 말이기도 하다. 녹우당은 효종이 세자시절 스승인 윤선도를 위해 수원에 지어준 것인데 윤선도가 나중에 효종 승하 후 낙향할 때 그 은혜를 잊지 못해 해남으로 옮겨 세우고 녹우당이라 이름지었다. 가을엔 찬비가 온다. 지난날 멋쟁이 백호 임제가 평양기생 한우(寒雨=찬비)를 만나 ‘오늘은 찬비 맞았으니 얼어잘까 하노라’ 한 마디 건네자 그녀가 ‘어이 얼어 자리, 원앙침 비단금을 어디 두고 얼어 자리’라고 받았다. 이 때 찬비는 멋스런 사랑비다. 이밖에 가수 자우림(紫雨林)의 보라색 비, 흑우(黑雨) 김대환의 검은색 비도 있다. 가을장마는 짖굿다. 시기가 일정한 여름장마와 달리 예측이 힘들고 폭우를 동반하기도 한다. 추석을 앞둔 수확 농가 심정이 조마조마하고 도내 레미콘 업계 등은 이미 발을 동동 구른다. 폭우가 바다 수온을 낮춰 가을 전어 값도 배나 올랐다. 곧 예년 날씨를 회복하긴 할 것이지만 갈수록 아열대화를 실감하고 있다. ‘가을 하늘 공활하니 맑고 구름 없이’(애국가 3절)가 그립다. 임용진 논설고문 
 
 
온누리 ‘추석 이후’(새전북신문, 9월10일자) 
 
추석 돼지가 됐다. TV 등에서 ‘송편 두 개면 밥 한 공기 칼로리’ 등으로 아무리 위협해도 추석은 먹는 계절이다. 기후 좋고 밥 맛 좋기로 이만한 때가 없다. 하지만 이번 연휴엔 왠지 속에 뭐가 얹힌 기분이다. 더부룩하고 거리끼고 개운찮고 심지어 온 몸에서 송신이 나는 듯했다. 이번 추석은 개인적으로 힐링과 거리가 멀었다. 왜일까. 죄송함 때문이다. 나처럼 ‘추석 돼지’를 경계할 경황조차 없는 이들에 대한 미안함 때문이다. 어린 중학생을 비롯한 302명의 세월호 사망, 실종자들. 말도 안 되는 그 사고로 인해 제 목숨 같은 이를 잃고, 서러움마저 잃고 공포와 분노와 의심과 증오만 남은 유족들. 추석이 그들에게 뭘 힐링해줬을 것인가. 박 대통령은 추석 당일인 지난 8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청와대를 거니는 사진과 함께 글을 올렸다. 글 내용은 이렇다. “오늘, 추석 명절 잘 보내셨습니까? 보름달을 보면서 소원을 비셨는지요? … 나라 경제와 국민 여러분들의 행복을 위해 모두 함께 소원을 빌어 그 꿈이 이루어졌으면 합니다” 국가 최고권력자가 개인 미디어로 서민과 소통하는 것은 참 괜찮은 풍경이다. 하지만 뭔가 대단히 중요한 게 빠졌다. 국민을 이끄는 것도 정부의 할 일이지만 어루만지는 것도 할 일인데, 국회의원이고 누구고 제 추석만 있지 남의 억장 무너지는 아픔엔 별 도움이 못 됐다. 남의 가슴을 찢는 일은 세계적으로 쌔고 쌨다. 시아파 반군에게 납치돼 참수당한 두 미국 기자의 부모는 또 얼마나 가련한가. 하지만 이들과 우리의 차이는 피해자들이 국가권력에 얼마나 기댔는가에 있다. 그들이 오바마와 껴안고 흐느끼는 새 우리 유족들은 쉰 목소리로 농성 중이다. 한가위를 보냈으니, 제발 한가위처럼 두렷이 안아주자. 눈이 부시게 푸르른 가을 날,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 할 자유라도 돌려주자. 임용진 논설고문. 
 
 
온누리 ‘석정과 동학’(새전분신문, 9월25일자) 
 
한 달 전, 동학 120주년 모악대동제를 준비하는 자리에서 임수진 씨(전 농어촌공사 사장)가 내게 물었다. “아니 석정 선생이 이런 시도 썼어?” 그 시는 이렇다. “징을 울려라 죽창도 들었다./ 이젠 앞으로 앞으로 나가자./ 눌려 살던 농민들이 외치던 소리 / 우리들의 가슴에 연연히 탄다.”(‘갑오동학혁명의 노래’ 1절) 석정 신석정(1907~1974)은 영월 신 씨다. 그들은 아전을 생업으로 삼았는데 동학혁명에 대거 참여했으며 동학 패망 후 의병에 투신했다고 한다. 위 노래는 정읍 덕천면에 있는 ‘갑오동학혁명기념탑’ 건립 당시(1963. 10.) 건립위원장인 가람 이병기의 위촉으로 석정이 시 쓰고 김성태(당시 서울대 음대 학장)가 곡을 붙인 것이다. 원래 피가 뜨거운 집안이던 만큼 석정이 동학을 노래해도 당연하다. 최근 석정의 현실참여 시 13편이 새로 발견됐다. 그간 ‘목가적’, ‘전원적’ 단서가 붙던 그의 면모와는 전혀 달라 놀랍다. “연약한 너의 아버지 이 감방에서/ 산송장으로 하고 있을지라도/ 인민의 나라 세우는 날 새나라 세우는 날/ 이 작은 피는 온몸으로 흘리리라/ 비처럼 사뭇 줄줄 흘리리라”(‘피’, 1946.5.6.), “건넌마을 ‘영이’네 아버지가 떠나자/ ‘순이’의 오빠가 뒤이여 자쵤 감추고/ 동네 젊은 사람들은 시나브로/ 뉘 원수를 갚아야 하기에/ 지리산으로 지리산으로 들어가는 것일까.”(‘지리산’, 1949. 1. 8.) 등이다. 한 달 후 부안에서 석정문학제가 열리고 올해는 특히 제1회 신석정문학상이 시상된다. 새 시 발견 계기로 거인 신석정의 고뇌가 확인됐다. 그것은 전북의 고뇌, 전북의 그릇이기도 하다. 임용진 
 
 
온누리 – ‘사제’(師弟), 새전북신문 10월2일자 
 
조훈현이 1963년 바둑유학 차 도일하자 일본 바둑계가 열 한 살 짜리 신동에게 매료됐다. 일본 바둑의 스승 세고에 겐사쿠가 그를 내제자로 받아들여 직접적으로는 ‘괴물’ 후지사와 슈코로 하여금 가르치도록 한다. 세고에는 조훈현보다 무려 64세나, 후지사와는 28세나 많으니 말이 스승이지 할아버지, 아버지 뻘이다. 그들은 조훈현을 ‘진주’라고 부르며 분신처럼 아꼈다. 조훈현이 1972년 군복무를 위해 한국으로 돌아가자 넉 달 후 노스승 세고에는 “조훈현이 보고싶다”는 말을 남기고 자살한다. 후지사와는 이후 제자가 그리울 때마다 술 한 병 달랑 차고 불현듯 서울로 날아와 조훈현을 만나고 돌아갔다. 실존주의 소설가 알베르 카뮈는 그보다 15년 연장인 ‘방랑의 철학자’ 장 그르니에를 10대에 만나 평생 스승으로 섬긴다. 두 사제 사이에 20년간 235통의 편지가 오갔는데 거기 이런 말이 있다. “저는 선생님의 발자취 속에 제 발자취를 남기는 겁니다”(카뮈), “그는 내게 뭘 배웠는가? 그는, 가르쳐야 하는 책임을 졌으면서도 제자에게 오직 제 꿈만 털어놓았던 한 인간의 주위에 있었을 뿐이다”(그르니에). 제자와 선생이 모두 공치사 한 마디 없이 겸손하다. 사제(師弟)는 인생 동지와 같다. 연암 박지원은 13년 아래 제자인 초정 박제가가 먼저 타계하자 상실감에 못 이겨 몇 달 후 역시 세상을 떴다. 먼 데 갈 것도 없다. 노무현 전 대통령 장례식장에서 오열하던 김대중 전 대통령을 보지 않았던가? 정읍의 한 고등학교에서 제자가 수업 도중 선생에게 철의자를 집어던졌다(1일자 새전북신문 1면). 좋은 제자를 만나 교육시키고 싶다는 선생의 공통된 바램은 진정 ‘공자왈 맹자왈’이 되버린 것인지, 입맛이 쓰다. 
 
 
온누리 ‘재조법관’(10월9일자 새전북신문) 
 
김병로(1887~1964)는 순창 복흥 사람이다. 초년에 최익현, 김동신 등의 의병군이 되어 일본과 전투했으며 일제강점기엔 독립운동가 전문 변호사를 했다. 광복 후 초대 대법원장으로 9년3개월간 재임하면서 이 나라 사법기초를 세웠다. 그는 대통령 이승만을 ‘폭군적인 집권자’로 칭하며 “이를 억제할 수 있는 길은 사법부의 독립 뿐”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평생 한복만 입었고 후배 법관들에게 정의와 청빈을 강조했다. “모든 사법 종사자에게 굶어 죽는 것이 영광이라고 말했다. 그것은 부정을 범하는 것보다는 명예롭기 때문이다.” 1957년 말 그가 대법원을 떠나며 남긴 말이다. 최대교(1901~1992)는 익산 출신이다. 1949년 당시 ‘이승만의 양녀’라 할 만큼 권력과 가깝던 상공부 장관 임영신을 수뢰 혐의로 기소해 권력의 미움을 받아 서울고등검찰청장 직에서 물러났다. 1960년 4·19혁명으로 서울지검장에 복직되나 1963년 군인 출신 박정희가 대통령이 되자 또 미련 없이 옷을 벗는다. 당시 검사 월급만으로 가계를 꾸리기 어려워 그의 아내가 편지봉투를 만들어 팔기도 했다. 도시락을 쌀 형편이 못 돼 점심시간에 누룽지를 밥 대신 먹다 ‘누룽지 검사’란 별명을 얻기도 했다. 그의 또 다른 별명은 ‘대쪽’이다. 검찰 내부에서 가장 존경받는 역대 검사 1위로 꼽힌다. 최근 국감 자료에 따르면 지난 10년간 임용된 전국 판, 검사(총 3,465명) 중 전북 출신은 2.3%(79명)다. 새삼스레 적다고 여겨지진 않는다. 인구(3.6%)나 총생산(3.1%) 등 전국 대비 전북의 사회·경제적 수치가 어차피 그 정도니까. 하지만 권부로부터 기피된 김병로, 최대교 등 전북 법조인의 올곧은 기백이 최근까지 ‘적은 숫자’로 이어진 것 아닌가 하고 생각해본다. 어차피 ‘재조’(在朝) 법관이나 검사 숫자가 중요한 것도 아니다. 정의는 양보다 질이니까. 
 
 
온누리 ‘동학, 모악, 대동’(새전북신문 10월23일자) 
 
주말인 지난 18일 오후 5시 사람이 많이 모인 가운데 경기전 문 앞에서 ‘동학농민혁명 120주년 모악천하대동제’가 열렸다. 전주 시민농악대가 이층 높이의 긴 장대에 무거운 대형 깃발을 매달아 힘차게 펄럭이며 대동제 서막을 열어 젖혔다. 이어 카리스마 넘친 전통 춤꾼 진현실이 도살풀이를 추며 120년 전 스러져간 수많은 동학꾼의 넋을 부르고 민족서예가 여태명은 큰 붓으로 ‘자주, 평화, 생명’ 큰 글씨를 단숨에 썼다. 지난 두 달 간 대동제를 지휘한 추진위원장 임수진(전 진안군수)은 하얀 두루마기 늘씬하게 입고 꿇어 앉아 하늘에 고했다. “평등의 이름 높이 달아 하늘에 고하노라. 상생의 물결 저무는 땅에 엎드려 고하노라. … 어두운 세상 녹두의 꽃으로 살아온 자들아. 그날 불의 뜨거움을 기억하시는가. … 전봉준, 김개남, 손화중 그리고 이름 없이 쓰러져간 동학의 전사들 … 모두 달빛 따라 밝은 데로 어서 나오시라.” 임수진은 얼굴은 호상이고 목소리는 힘찬 바리톤이다. 그는 이미 죽은 동학이 아니라, 그날 모인 관중 가슴에서 생생한 동학을 불러냈다. 이후는 진혼(鎭魂)이다. 지성철 검무, 장순향 춤, 여성농민합창단과 ‘노찾사’의 노래, 연희단 팔산대 풍물굿 등이 동학의 혼을 달랬다. 올해 동학 120주년 행사가 전국에 많다. ‘동학농민혁명 120주년 기념대회’가 2주 전 서울서 열렸으며 오는 28일엔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기념 학술대회도 열린다. 하지만 정부 돈으로 여는 이런 행사들은 매년 오는 광복절이나 한글날과 크게 다르지 않아 유감이다. 경기전의 이번 동학 120주년 대동제는 이런 점에서 의미 깊다. 순수한 민간모금(4천5백만원)과 민간 재능기부로 열렸다. 적은 돈으로 작은 마당에서 열렸으나 그 울림은 훨씬 컸다. 전북에서만 가능한 진짜 ‘대동’(大同)을 거기서 봤다면 과찬인가. 
 
 
온누리 – ‘화가’(새전북신문 10월30일) 
 
화가 박수근과 이중섭의 가난은 가히 설화적이다. 박수근(1914~1965)의 학력은 양구 공립보통학교가 전부다. 가난 탓에 상급학교 진학이나 유학은 꿈도 못 꾸고 독학으로 그림을 배웠으며 남들 다 하는 개인전을 생전 단 한 차례도 열지 못했다. 이중섭(1916~1956)은 일본유학까지 했으나 그것도 청년시 유복일 뿐 이후엔 돈이 없어 유화 물감 대신 페인트와 유채 에나멜로, 캔버스(=그림천) 대신 종이·장판지·담배 은박지 위에 그림을 그렸다. 그는 한국회화 사상 캔버스에 작품을 남기지 않은 단 한 명의 화가다. 그 이유는 궁핍 때문이었다. 가난으로 인해 그들은 공통점이 많다. 평생 찢어지게 가난했으면서도 그것을 따사롭거나(=박수근) 맑게(=이중섭) 형상화했으며 결국 가난 속에서 죽었다. 장소도 비슷하다. 박수근이 말년에 입원한 곳이 청량리위생병원이며 이중섭은 청량리정신병원이다. 둘 다 한국전쟁 피난 시절 각각 군산(=박수근)과 부산(=이중섭)에서 부두노동자를 했으며 아들 하나씩을 뇌염, 디프테리아로 잃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들은 사후 최고 평가를 받고 있다. 최근 한국미술시가감정협회 평가로 우편엽서 크기 한 장(=1호)당 평균 그림값 1위가 박수근(2억원 이상)이고 2위는 이중섭(1억1천만원 이상)이다. 우리 고장 젊은 미술학도들의 졸업전시회가 여기저기서 열리고 있다. 그러나 화가의 길을 택하는 건 소수일 뿐 대다수 미술학도들에겐 졸업작품이 마지막 작품이 되고 만다고 한다(본지 29일자 1면). 예술가는 평범한 월급쟁이와 다르지만 먹고 입는 생활인으로선 또한 보통사람과 다를 바 없다. 화가를 택한 젊은 예술가들에게 힘찬 박수를 보낸다. 아울러 전북인의 뛰어난 안목이 안목에만 그치지 않길 바란다. 그림은 ‘형편에 맞게’ 돈 주고 사는 것이다. 혹시 아나? 나중에 이들 가운데 박수근, 이중섭이 나올지. 온누리, ‘추안 급 국안’(새전북신문 11월6일자) 오늘은 출판이야기다.
 
 
 
 
한달 여 전 ‘추안 급 국안’(推案及鞫案)이 전주인의 힘으로 나왔다. 전주대학교 한국고전학연구원이 번역했고 전주 소재 ‘흐름’ 출판사가 펴냈다. 이 책은 선조 임진왜란 이후 고종 대한제국 전까지 약 3백년의 죄인 심문 기록이다. 죄인 중에서도 역모, 변란, 천주교 등에 관련된 중죄인 심문기록이니 요즘으로 치면 대검찰청 중앙수사부 조서를 수백년 동안 모은 것이다. 
완역된 분량은 글자수 672만 6,000자, 평균 404페이지 짜리 책 아흔 권이나 되는 거질이다. 책 아흔 권은 보통 크기 책장 다섯 개를 꽉 채우는 분량이고 무게는 합쳐 60kg, 값은 한 세트 300만원이다. 이를 완역 했다 하니 첫째, 내 고장 전북의 지적 역량과 근기(根氣)에 놀랐고, 둘째 이 거질을 서울도 아닌 지역 출판사가 발행해 수지 맞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전자는 자부심이고 후자는 안타까움이다.
하지만 판매는 무난하다고 한다. 초판 300 세트 가운데 두 달이 안 된 지금 기관, 단체, 대학 등에 반 정도 팔렸으며 미국 등 외국에서도 관심 문의가 오고 있단다. 300만원이면 적잖은 돈이지만 개인 구매자도 있다. 원로 사학자 조광 씨가 1호로 구입 신청했으며 소설가 김훈 씨도 샀다고 한다.
전주는 오래 된 출판 도시다. 완판본(完板本) 성가를 생각하면 지난날 전주는 요즘 파주 출판문화단지 쯤 된다. 지금은 다 쭈그러져 전주 소재 출판사 100여곳 중 전단이나 홍보 위주가 아닌 전문 도서출판은 단 몇 곳 되지도 않지만 그나마 조선왕조실록 버금 가는 거질 ‘추안 급 국안’이 전주 사람 힘으로 만들어졌다니 위안이다. 또는 희망이기도 하다. 오는 8일(토요일) 한옥마을 완판본문화관에서 연주와 전시회 ‘완판본 삼매경’이 열린다. 가서 한 번 즐겨보자. 전주 출판문화 부흥을 염원하며. /임용진(논설고문)
 
 
 
온누리 – ‘미나리 꽝’(새전북신문, 11월13일자) 미나리깡의 표준말은 미나리꽝이다.
 
 
 
 
미나리꽝은 깡촌까진 아니지만 변두리의 대명사다. 개발되기 전 1960년대 서울 왕십리, 중랑천 일대 및 용두동 경동시장 등이 대표적인 미나리꽝이다. 조선 천지 어디든 땅 걸고 물 많은 곳은 미나리 키우기 좋았다. 인천에선 서구 신현동·원창동 일대, 남원에선 관왕멀(현재 금동), 전주에선 선너머 예수병원 일대(현재 중화산동)가 지난날 미나리꽝이다.
미나리는 겨울에도 청청하다. 나락을 벤 빈 논에 물을 대면 그곳은 겨울에 푸른 미나리 밭, 미나리꽝으로 변한다. 지난날 꽁꽁 언 미나리꽝에서 썰매를 지치노라면 얼음 아래 푸릇푸릇한 식물이 휙휙 지나치곤 했다. 미나리는 그렇게 얼음 속에서 커 우리에게 톡 쏘는 향미를 선사한다.
왕골이 자라는 웅덩이도 ‘왕골꽝’이라 한다. 왕골꽝, 미나리꽝의 ‘꽝’은 구덩이를 뜻하는 한자 ‘광’(鑛) 또는 ‘광’(壙)에서 왔을 것이다. 미나리나 왕골 모두 물이 고이는 웅덩이, 구덩이에서 자란다. 그것이 된소리가 돼(=硬音化) ‘꽝’으로, 다른 소리가 돼(=異音化) ‘깡’으로 변했을 것이다.
전북도가 내년 예산에 미나리꽝 조성 사업비 4억원을 편성했다(본지 12일자 2면). 익산 왕궁 등 오염도 높은 곳에 미나리꽝을 시범 조성해 정화 효과가 좋을 경우 새만금 권역으로 확대할 계획이란다.
미나리는 대표적인 디톡스 식물이다. 중금속 해독 및 수질 정화 기능이 뛰어나다. 매연 먼지가 많은 곳에서 일하는 이들에게 특효이며 가래를 삭히고 기관지, 폐를 보호한다. 복국에 미나리를 듬뿍 넣어주는 것도 맛 뿐 아니라 독을 중화시키기 위해서다. 새만금 호 수질정화를 위해 지자체들은 지난 10년간 1조 3,000억원을 썼다. 하지만 성과가 시원찮다. 미나리 해독 정화 효과가 입증되면 새만금 너른 호수에 푸르고 늘씬한 미나리 향기 바람에 날리는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 /임용진(논설고문)
 
 
 
온누리 – ‘카트’(새전북신문, 11월 26일자) “낙숫물이 정말 바위를 뚫을 수 있을까요?”(동준)
 
“죄 없는 사람 잡아가고 돈 있는 사람 지키는 게 경찰이가!”(순례)
“저희가 바라는 건 큰 게 아니에요. 저희를 투명인간 취급하지 말아달라는 거예요”(선희)
현재 상영중인 영화 ‘카트’(감독 부지영)의 대사들이다. 이는 지난 2003년 발생한 이랜드 계열 대형마트 홈에버의 비정규직 해고사건에 관한 영화다. 선희 씨(염정아 분)를 비롯해 비정규 직원인 순례(김영애), 혜미(문정희), 옥순(황정민) 씨 등은 회사 해고 통보로 하루 아침에 일터를 잃는다. 그 이후는 공황, 눈물, 호소, 분노의 스토리다. 노조의 ‘노’ 자도 모르는 아줌마들이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매장 시위를 하지만 생각만큼 불편하지 않다. 오히려 영화관 여기저기서 훌쩍이는 소릴 듣게 된다. 그녀들의 삶이 곧 내 삶이기 때문이다. 매장 안에서 ‘갑’인 고객들도 사실 대형마트만 나서면 대부분 ‘을’이기 때문이다.
선희 아들(도경수)은 영화 초반 ‘핸드폰 바꿔달라’고 조르는 평범한 고등학생이지만 나중에 실직한 어머니에게 제가 아르바이트로 모은 돈을 내민다. 동준(김강우)은 정규직임에도 선희 씨 등의 노조에 합세했다 괘씸죄로 잘린다. 더 이상은 스포일러를 피하기 위해 말하지 않겠다.
‘카트’를 본 국내관객은 현재 49만 5,000여명(영화진흥위 집계)으로 국내 박스오피스 2위다. 1위(‘인터스텔라’, 525만 6,000여명)와 차이가 크지만 아무튼 순항이 대견하다.
‘카트’는 하필 지난 13일 개봉했다. 1970년 11월13일 청계천 피복 노동자 전태일이 “노동자는 기계가 아니다”고 외치며 분신 절명한 바로 그날이다. 그 후 44년, 과연 세상은 얼마나 평등해졌을까. 영화 ‘카트’를 보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임용진(논설고문)
 
 
 
온누리 – 박병선(새전북신문, 11월27일자) 그는 전주 사람이다. 제9대 전북 도지사인 고 박정근의 2남3녀 중 셋째 딸이다. 서울대 역사교육과를 졸업했고 프랑스 소르본느 대학과 고등교육원에서 역사학과 종교학으로 각각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 여성으로 프랑스 유학생 ‘1호’(1955년)다. 프랑스 국립도서관 사서로 근무하며 그곳에 보관된 ‘직지심체요결’(1377년)이 인류사상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 책임을 세계에 알렸고 역시 프랑스 국립도서관 베르사이유 별관 창고에서 폐기 위기에 놓인 조선왕실 ‘외규장각 의궤’를 발견, 모국 송환에 평생을 바쳤다. 바로 재불 사학자 고 박병선(1923~2011)이다.
박병선은 평생직장이 보장된 프랑스 국립도서관 사서직에서 기밀누설 괘씸죄로 1980년 해고된다. “베르사이유 창고 고문서 더미 속에 방치된 ‘의궤’가 국보급이며 프랑스가 그 가치를 알기 전에 빨리 반환요청 하라”고 1979년 한국 정부에 알렸기 때문이다. 이를 밉게 본 도서관장이 사표를 종용했다. 이로써 책 열람을 봉쇄당한 후에도 그는 개인 자격으로 이 책 보기를 거듭 신청했다. “오조흐뒤 온네페빠?”(오늘도 안 됩니까?). 거듭된 냉대와 거절을 아랑곳하지 않고 한 달 간 매일 이렇게 물어 마침내 열람을 성공시켰다. 이후 10년간 누가 월급도 주지 않는 도서관에 나와 종일 책을 베끼고 세상에 가치를 알렸다.
‘직지심체요결’과 ‘외규장각 의궤’ 때문에 한국은 문화강국이 됐다. ‘의궤’는 2011년 5월, 병인양요 당시 강화도에서 빼앗긴 지 145년만에 고국에 돌아왔다. 그 반년 후인 11월23일 박병선은 필생의 노력을 마감한 듯 직장암으로 타계한다. 말년엔 병원치료비가 없어서 고생했다.
그제가 박병선 박사 3주기다. 아쉬운 것은 ‘네이버 인물’이나 ‘위키피디아’ 등에 그의 출생이 서울로 돼있다는 점이다. 태어난 해도 1923, 1928, 1929년으로 제각각이다. 박병선 호적 바로잡기가 시급하다. 특히 인터넷 상 혼란이 심하다. 박병선은 ‘가장 자랑스런’ 전북인이다. /임용진(논설고문)
 
 
 
온누리 – ‘눈’(새전북신문, 12월4일자) 꽁꽁, 펄펄. 사흘째 춥고 눈이 온다.
 
눈에 관한 수상(隨想)으로는 김진섭 ‘백설부’를 따를 게 없다. 어설픈 잡설로 눈을 오염시키느니 ‘백설부’를 그대로 옮기는 게 최선이다.
“무어라 해도 겨울이 겨울다운 서정시는 백설(白雪), 이것이 정숙히 읊조리는 것이니, … 백설이여! 잠시 묻노니, 너는 지상의 누가 유혹했기에 이 곳에 내려오는 것이며, 그리고 또 너는 공중에서 무질서의 쾌락을 배운 뒤에, 이 곳에 와서 무엇을 시작하려는 것이냐? 천국의 아들이요, 경쾌한 족속이요, 바람의 희생자인 백설이여! 과연 뉘라서 너희의 무정부주의를 통제할 수 있으랴!”
이 글은 고등학교 국어 책에서 배웠다. 그래서 읽으면 기억이 눈처럼 춤추며 나를 지난날로 되날린다. 김진섭(1903~?)은 목포 출신 수필가다. 서울대 초대 도서관장을 지냈으나 6·25 때 납북돼 말년엔 종적 없이 눈처럼 스러졌다.
김수영(1921~1968)의 ‘눈’도 빠뜨릴 수 없다. 이 열혈 시인은 눈에 기침 하고 가래침을 뱉는다. 순결한 눈에 고해성사하듯 자신의 비겁과 울분을 토한다.
“눈은 살아 있다/떨어진 눈은 살아 있다/마당 위에 떨어진 눈은 살아 있다 … 기침을 하자/젊은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눈을 바라보며/밤새도록 고인 가슴의 가래라도/마음껏 뱉자”
아, 김수영! 고운 눈에 침 뱉는 젊은 시인의 패기가 느껴지는가? 시대의 부조리, 몰염치, 위선에 괴로워 하던 그는 어느 새벽 술에 취한 채 버스에 치여 죽는다. 바람보다 빨리 눕고 바람보다 더 빨리 일어난다는 ‘풀’이 그의 유작이었다.
12월초에 이런 눈은 드물다. 기습폭설로 도내 초등학교들이 휴교했고 비닐하우스와 노지 작물들 피해가 예상된다. 하지만 난 눈이 오면 언제나 즐겁다. 아침 눈발 속에서 이웃에겐 경쾌한 목례를, 저녁엔 또 “눈을 털며 주막에 들고 싶다”(김동명, ‘눈’). /임용진(논설고문)
 
 
온누리 – ‘갑(甲)질’(새전북신문, 12월11일자) ‘갑(甲)질’이 뭔데 이리 우리를 허탈하게 하나. 단어풀이나 해보자.
 
◾정의 : 권력과 돈 있으면 아무거나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생각 또는 행동. 하지만 종종 삽질, 또는 헛발질로 연결된다. 힘의 껍질(=甲)만 벗으면 별 볼일 없는(=乙) 저질들의 전유물. 아파트 경비원에게 침을 뱉는 소시민 조무래기 갑질로부터 운항 중 비행기를 돌리는 으뜸 권력형 갑질까지 한국에 급속히 만연되고 있다.
◾증상 : 대한항공 조현아 부사장은 설명서 집착형 ‘매뉴얼 갑질’이다. 기내 땅콩 서비스 규칙이 승객 전체의 안전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할 정도로 불균형한 판단이 특징. 현대중공업 오너로서 대한민국 ‘갑중의 갑’인 정몽준은 아무 때나 누구에게나 화 내고 반말하는 중증 버럭질형 갑질이다. 그는 대한축구협회장 시절 자신보다 한참 연상인 모 상근부회장에게 기자들이 보는 앞에서 “이××야, 네가 뭔데 나서?” 하고 말해 주위를 아연케 했다. 몇 년 전 국회 통일외교위원회에서도 한 전문위원에게 “네가 너한테 물어봤냐? 너한테 물어봤어?”라고 막말하는 등 이 증상은 호전될 기미가 없다.
◾치료전망 : 소시민형 갑질은 그들이 자주 을을 경험한다는 점에서 치유 희망이 있으나 재벌 등 대물림 갑들의 유전병은 치유 불능이다. 에볼라보다 심각하다는 우려도 있다. 자신의 갑질을 정당하게 여기는 것, 실제론 어처구니 없는 삽질이란 점을 모른다는 것이 으뜸갑의 최대 문제이다.
◾종합소견 : 박 대통령은 최근의 십상시 파동이 ‘지라시’에 불과하다고 했다. 정윤희 씨는 이 파동이 ‘불장난에 놀아난 것’이라고 했다. 국정 희화화를 걱정하는 전 국민의 탄식을 ‘지라시’ 또는 ‘불장난’이라고 일축하는 것은 심각한 갑적 사고 아닌가? 대통령의 언동을 차마 ‘갑질’이라고까진 못하겠다. 그래도 출범 이래 변치 않는 이 정부의 태생적인 ‘갑 DNA’는 매우 절망적이다. 이나라 슈퍼 울트라 갑 대통령은 대체 누굴 위해 봉사하나? / 임용진(논설고문)

온누리 – 사투리(새전북신문 12월18일자)
 
 
 
  소석 이철승(93)이 현역 국회의원 시절 대정부질의에서 모 장관을 질책했다. “장관. 기다, 아니다를 분명히 하시오.” 이 경우 ‘기다’는 ‘아니다’의 반대말이다. ‘그렇다’의 뜻이다. 소석 특유의 낮고 또렷한 톤으로 국회의사당에서 ‘기다’를 들었을 때의 그 상쾌함이라니!
 
   완주군 용진면 시천리가 고향인 소설가 이병천(59)은 창작 판소리 ‘쇳대도 긴디’를 썼다. 전라도 출신의 한 병사가 6·25 때 암구호인 ‘열쇠’를 잊고 그 방언인 ‘쇳대’라고 했다가 봉변 당한다는 내용이다. 최후 순간까지 ‘쇳대도 긴디(=맞는디)’를 반복하는 이 촌 병사의 사연이 안쓰럽고 우습게 구연된다. 이 경우 ‘기다’는 ‘틀리다’의 반대말이다.
 
   전라도 사투리 중 ‘거시기’ 만큼 복합적이고 편리하고 자주 쓰이는 말이 ‘기다’이다. ‘맞다’, ‘옳다’, ‘그렇다’, ‘그것이다’ 등의 뜻을 가진다. 혹자는 표준말이라고도 하는데 나는 서울 생활 수 십 년 동안 서울 사람들에게서 자연스레 ‘기다’가 나온 걸 들은 적이 별로 없다. 혹자는 영남인들이 ‘이것이’를 ‘이기~’로, ‘저것이’를 ‘저기~’로 하는 걸 예로 들어 영남사투리라고도 하지만 이 경우엔 말이 줄었을 뿐 독립 품사로서 ‘기다’ 역할을 하지 못한다. 국어사전에도 올라있지만 ‘그것이다의 준말’이란 풀이 하나여서 우리가 쓰는 ‘기다’ 만큼 복합적이지 않다. 한문투에서 ‘그런가, 그렇지 않은가?’를 ‘기연(其然)가 미연(未然)가’라 하고 여기서 ‘긴가민가’가 나왔다. ‘기다’도 그 ‘기’(其=그렇다)에 나왔을 것이란 추측도 가능하다. 사투리인 듯 하고 표준말인 듯 하고, 뜻도 여러 가지여서 참 긴가민가한 게 ‘기다’이다.
 
   사흘 전 국립국어연구원이 표준말 18개를 새로 인정했다. ‘허접하다’, ‘개기다’ 등 그간 다소 허접히 여긴 말들이 교양어, 표준어가 됐다. 말도 생명이 있어 자주 쓰면 살고 안 쓰면 죽는다. 전라북도 말 많이 쓰자. 우리에게 표준은 결국 지역 사투리 아니겠는가. ‘기여, 안 기여?’ /임용진(논설고문)
 
온누리 – 청양 세화(靑羊 歲畵)
 
 
  한옥마을 고하문학관은 전북이 낳은 대표적인 시인 고하(古河) 최승범(85)의 개인 서실이다. 여기 출입구를 열면 현관에 큰 책상이 있고 그 위 각종 책과 문방구가 어지러진 가운데 작은 양 몇 마리를 발견할 수 있다. 헝겊으로 만든 것, 검은 돌로 된 것, 플라스틱 뿔이 꼭 진짜 산양을 닮은 것 등등 형태도 가지가지다. 그래서 언젠가 고하께 물었다. “왜 양이 이리 많습니까?”. “허허, 내가 양띠잖아”. 1931년 생인 최승범은 양의 덕이 “외유내강, 순하고 강인하다”고 했다. “지킬 것 지키는 게 선비답다”고도 했다.
 
   올해는 을미(乙未)년, ‘푸른 양’의 해라고 한다. ‘을’(乙) 자 들어간 해가 오행으로 ‘목’(木)에 해당하고 ‘목’은 푸른색이니 그래서 ‘푸른(=乙) 양(=未)’이란다. 푸른색은 청결과 평화, 지조의 상징이다. 옛부터 선비의 색이다. 중국에선 선비의 옷에 푸른 색 깃을 댄다 해서 맑은 선비를 ‘청금(靑衿=푸른 옷깃)’이라 불렀다. 지난 2012년엔 유럽전역에서 푸른 색 양이 눈길을 끌었다. 베르사이유 궁전 등 유명 궁전과 공원에 푸른 양 조형물 수 십 마리가 연중 전시됐다. 더불어 전시장엔 ‘모두 평등하고 모두 중요하다’(=All are equal, everyone is important)는 구호가 걸렸다. 이 역시 평화, 평등의 상징, 푸른 양이었다.
 
   지난날 설 풍속 중 세화(歲畵)가 있었다. 액을 막기 위한 용이나 장수를 뜻하는 도인, 복이 넘친 선녀 등을 그려 연초에 서로 선물하면 이를 대문 등에 붙이는 것이다. 요즘 카드나 연하장처럼 성행했으니 조선 때 도화서 그림쟁이들은 연말 한 달 이상을 세화 그리느라 바빴다는 기록도 있다.
 
최승범은 오랜 지기인 서양화가 오승우(86)로부터 매년 정초 판화 한 장씩을 받는다. A4 크기 종이에 그해의 띠를 그린 것이다. 지난해엔 말 그림, 그 지난해엔 뱀 그림 등을 십여년 째 받고 있다. 올해 오승우는 또 양을 그려 보낼 것이다. 하지만 그들만 그럴 것도 아니다. 보통 사람인 우리라고 못할 것 없다. 올핸 파란 색 싸인펜으로 양이라도 한 마리 그려 친구 지인에게 선물하자. 평등, 평화, 청렴의 소원도 담아서. / 임용진(논설고문)
 
   새해 소망은 모두 양이다. 다음 양들을 바란다.
 
 
 
  ▲ 세상은 평화로운 거양 : 이슬람 원리주의 무장집단 탈레반이 지난해 파키스탄 페샤와르 군인자녀학교에서의 만행(어린이 등 150명 사살)을 반성하고 재발 방지를 약속했다. IS(이슬람 국가) 역시 참수 공포에 떨던 서방인질 수십명을 풀어줬다. 러시아는 체첸반군과, 중국은 달라이 라마와 화해했다.
 
  ▲ 전북, 부자 될 거양 : GDP(국내총생산) 등 수치에서 언제나 전국 대비 2% 안팎이던 전북 경제규모가 두 배 가까이 신장했다. 전주 한옥마을 관광객은 1천만명을, 전북 도내 관광객은 1억명을 바라볼 만큼 급증했다.
 
  ▲ 따스한 학교 될 거양 : 김승환 교육감이 학교폭력방지에 손발 걷고 나섰다. 지난해 우림중 여중생 폭행사건 등은 더 이상 전북에 없다. 지난해 전국 꼴찌(5.7%)던 도내 중학교 3학년 기초학력 미달 비율도 크게 나아졌다. 전북 교육에 미래가 생겼다.
 
  ▲ 결혼할 거양 : 박근혜 대통령이 결혼 발표를 했다. 대번에 청와대에선 비선이 없어졌다. 십상시도 없어졌다. 비선이 없어지자 국가에 비전이 생겼다.
 
  ▲ 광복 고희(古稀)양 : 광복 70주년을 맞아 국제정세 호전되고 통일에 서광이 비쳤다. 연초 남북정상회담을 했고, 한국과 갈등 빚던 극우 아베의 일본 내 입지가 약화됐으며 미국, 북한 갈등도 약화됐다.
 
  ▲ 안전한 세상이양 : 세월호 3법 국회통과 후 국정조사 등으로 대한민국이 리셋됐다. 책임, 안전, 노블리스 오블리주 등이 가치가 됐다. 세월호 1주년인 4월16일은 속물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의 기일, 전국적인 참회와 애도의 날이 됐다.
이 모든 게 태반 꿈일 거다. 그러나 올해 연말 이중 단 몇 %라도 남았으면 하는 희망에서 과거형으로 썼다. 세상은 늑대 투성이지만 그래도 양 몇 마리는 살아남지 않던가? / 임용진(논설고문)
 
 
온누리 – 주진우
 
 
 
 
  오늘은 기자 얘기다. 왜 하필 기자 얘긴가. ‘그가 일 개 월급쟁이 기자가 아니라 권력을 감시하는 시민정신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그가 어디 사람인가. ‘전북 사람이다’.
 
   바로 주진우(43세·시사IN 기자) 씨 얘기다. 그는 한국에서 가장 몸값 비싼 기자다. 지난 1992년 언론계 투신 이후 그 일신에 걸린 소송이 100여건(누적), 민사 소송액이 한때 70억원에 달했다. 소를 제기한 자는 모두 종교, 정치, 경제계의 슈퍼 갑들이다. 구체적으로 순복음교회, 청와대, 삼성그룹 등 이 나라 ‘갑 중의 갑’이다.
 
   주진우 씨는 박근혜 대통령과 5촌 간인 용수 씨와 용철 씨 사망사건에 대통령 친동생 지만 씨가 연루됐다는 의혹을 보도했다고 기소(명예훼손 및 공직선거법 위반)됐으나 지난해 1심 무죄에 이어 최근 2심(고등법원)서도 무죄 판결 받았다. 재판부는 “권력에 대한 감시, 국민에게 정치적 의사 결정에 필요한 정보 제공으로 이뤄진 만큼 언론활동은 이를 최대한 보장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설명했다.
 
   지난 2002년 모 일간지 사회부 데스크 시절 주진우 당시 신참기자를 첨 봤다. 장발, 가죽 재킷 차림, 날씬한 몸매에 눈매 날카로운 그는 사회부 사건 담당이지만 축구도 박사였다. 당시 한일 월드컵 취재를 체육부기자보다 잘했다. 신문기자에게 기사관련 소송은 일종의 필화다. 귀찮커니와 때로 소송액도 엄청 나 될 수 있으면 재판 걸릴 기사는 피하려 한다. 하지만 신참 주기자는 그때 이렇게 말했다. “힘있다고, 무섭다고 피하면 누가 씁니까. 제가 한 번 열심히 써 보렵니다.”
 
주진우 씨는 고창 출생, 전주 전일고를 졸업했다. 그가 몸 담고 있는 시사주간지는 삼성그룹이 광고 댓가로 기사 삭제를 요구하자 여기 반발한 기자들이 모여 만든 독립언론이다. 이 회사 전임 사장(백승기·61), 전임 편집국장(김은남·49), 현임 편집국장(이숙이·50)이 모두 전주 출신이다. 전주인들은 동학혁명 이래 천생 올곧은가보다. 다른 언론사 얘기이지만, 최근 주진우 기자 ‘무죄’가 통쾌해 써봤다. 임용진/논설고문
 
 
온누리- 담합, 유출,반말
 
  이완구 국무총리 후보 인준 청문회가 요란하다. 소동 중 압권은 한 기자의 취재녹취 파일 유출이다. 이 후보와 식사 도중 대화를 녹음한 것이 유출 돼 후보자의 언론관, 김영란 법에 대한 생각, 기자와의 관계 등이 생짜로 노출됐다. 가장 곤란한 게 이 후보 본인이지만 대한민국 언론도 고개를 못 들게 됐다. 몇 가지만 짚어보자.
   ▲ ‘반말 하는’ 관계? : 공개된 녹취록대로라면 이 후보는 방송사 국장, 부장과 전화 한 통화로 시사프로 출연자(=패널)를 교체하고 담당 기자 인사에 개입하는 등 언론사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힘이 세거니와 어투도 무척 고압적이다. 언론사 간부에게 ‘야’ 호칭을 쓰고 동석한 기자들을 ‘너희’라고 부르고 있다. 신문사에 입사해 제일 먼저 배우는 게 권력자에게 ‘기죽지 않기’이다. 특히 취재원과 사적으로 밀착해 ‘형님, 동생’ 하는 게 금기시된다. 보도의 객관성, 공정성을 확보하려는 편집국 특유의 문화이다. 그런데 말투에서부터 ‘야’, ‘너희’를 허용하고 보니 이 후보의 언론사 인사 개입 등이 사실이었으리란 오해를 받아도 할 말 없게 됐다. 
 
   ▲ 담합? 판단 잘못? : 문제의 녹취 당일 이 후보와 식사한 기자는 모두 넷. 문화일보, 한국일보, 중앙일보, 경향신문 정치부 기자다. 이 중 경향신문 기자만 빼고 나머지 셋은 모두 녹취를 한다. 그러나 이 세 신문은 모두 기사화 하지 않았다. 발언 사안으로 볼 때 언사 마디마디가 ‘기사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게 보이지 않았다면 기자와 데스크의 자질 부족이고, 보였음에도 기사 밖의 다른 이유로 쓰지 않기로 담합(= 속칭 ‘당고’)했다면 그들은 기자랄 수 없다. 속류(俗流)집단에 불과할 뿐이다.
 
   취재를 위한 녹취는 요즘 비일비재니 그게 적법이냐를 꼭 따져야 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녹취 파일 제3자 유출은 심각하다. 취재노트조차 독자를 위한 것이거늘, 녹취 파일을 제 재산마냥 남에게 그냥 건넨다면 그것은 기자 도리가 아니다. 목숨 걸고 취재했다면 그랬을까? 취재 ABC부터 다시 배워야겠다. /임용진(논설고문)
 
 
 
요우커(2015.1.26.)  
 
나그네가 돼 돌아다니는 것을 일본은 ‘여행’(旅行), 중국은 ‘여유(旅遊)’라 한다. 우리도 여행이라 쓰지만 이는 일본에서 왔을 가능성이 크다.
 
나그네 ‘여’(旅)까진 같은데 그 다음 글자가 다르다. 일본이 ‘다닐 행’(行)을 쓰는 건 뭔가 행위 지향적이고 절도 있는 일본식 단체관광을 연상시킨다. 중국이 ‘놀 유’(遊)를 쓰는 건 이에 비해 여유있고 소란스럽고 건들거리는 듯한 느낌이다. 문화 차이가 양국 사용 단어에도 나타나는 듯해 흥미롭다. 조선조 양반들의 여행기록이 ‘유산록’, ‘유산기’ 등의 이름으로 남아있는 걸 보면 한국도 전엔 여행에 ‘놀 유’를 많이 썼음을 알 수 있다.
 
중국인 관광객을 뜻하는 ‘요우커’는 ‘노는’(= 遊) ‘손님’( = 客)이다. 이들 놀러온 ‘요우커’ 때문에 지난주 설 명절 서울이 북적댔다. 명절 닷새 동안 사상 최대인 13만명이 몰려 서울 백화점 매출고를 신나게 올렸다고 한다.
 
하지만 중국은 아직 놀기를 시작조차 하지 않았다. 소득별 소비 발전단계에서 해외여행은 1인당 국민총소득 10,000달러를 기점으로 는다는 게 정설이다. 한국도 지난 1990년대 중반을 기점으로 외국여행이 폭증했다. 중국은 현재 7,000~8,000달러 수준이다.
 
전주 한옥마을에도 중국 관광객이 자주 보인다. 얼마나 오는지, 와서 무슨 활동하는지, 뭘 먹는지에 관한 통계는 아직 없다. 한국 관광객 마중도 힘드는데 그럴 겨를이 어딨나 할지 모르나 요즘 중국 ‘요우커’들은 서울 명동에만 몰리지 않는다. 한국 사람들 가는 덴 다 간다. “한국에 왜 가나?” “전주 ‘빤판’(= 비빔밥) 먹으러 한옥마을 간다” 곧 ‘요우커’들 사이에서 이런 말이 나올 수도 있겠다. 서울은 갈수록 그들이 놀기에 너무 낯익은 곳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갈수록 여유가 본격화할 ‘요우커’ 맞이 채비를 한옥마을이 서둘러야겠다. / 임용진(논설고문)
 
 
 
온누리, ‘김영란’ (새전북신문 2015.2.26.)  
 
지난 주는 한국 법 문화사의 한 에포크라 할 만하다. 지난 2월 27일 부정청탁 금지법(‘김영란 법’)이 국회 본회의 통과됐으며 반세기 이상 완강하던 간통죄는 3월 3일 헌법재판소 위헌판결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부패청탁 방지를 액수까지 세세히 법으로 규정한 건 한국이 세계 처음이란다. 간통죄가 남아있던 건 이슬람 국가들을 제외하고 한국이 세계 마지막이었단다.
 
‘김영란 법’은 김영란(60) 전 대법관이 국민권익위원장 시절 발의했기 때문에 그 이름을 붙였다. 김 전 대법관은 여성 최초로 대법관이 됐으며 재직시 소수 의견을 많이 냈다. 호주제 폐지, 사형제 폐지 등에 적극적이었으며 대법관 14명 중 진보 색채가 강한 박시환, 김지형, 이흥훈, 전수안, 김영란 대법관을 당시 언론에선 ‘독수리 5형제’라 부르기도 했다.
 
똑 부러지는 소신 때문에 그런 별명이 생겼지만 김 전 대법관은 사석에선 ‘독수리’와는 전혀 먼 인물이다. 지난 2006년 가을 김 전 대법관이 여 판사들과의 한 회식 석상에서 그 흔한 인사말이나 건배사도 사양하고 까마득한 후배들과 거의 수다 차원의 대화를 하는 걸 상쾌하게 바라본 적 있다. 이게 뭐 대단할까 싶지만 대부분 판사, 특히 검사들은 회식자리에서 선배 ‘한 말씀’ 없이는 밥 숟갈도 들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한국의 여성 대법관은 지금까지 총 4명이다. 김영란, 전수안이 전직이고 박보영, 김소영 법관은 현직이다. 1954년 황윤석 판사가 최초 여성 법관으로 임관한 이래 현재 한국의 여성 판사 비율은 20%가 넘는다. 프랑스가 55%를 넘는 등 한국도 조만간 여성 판사 다수파 시대가 올 것이다.
 
미국에선 종신제 연방 대법관을 ‘저스티스’(=정의)라 한다. 별명이 아니라 공식 호칭이다. ‘김영란 법’은 한국 ‘저스티스’의 시금석이 될 것이다. 여성은 대개 정의에 민감하면서도 부드럽게 경색된 곳을 풀어준다고 한다. 대법원에서 시작했으니 청와대까지도 퍼지길. /임용진(논설고문)
 
 
온누리 ‘흙의 날’(새전북신문 2015.3.5.)
 
 
 
나는 대지의 살이다. 애초 단단했으나 바위에서 떨어져 나와 수백년 동안 으깨지고 밟히면서 작은 입자가 돼 이 행성을 포근히 덮고 있다. 부드러움은 내 상징이다. 모든 게 나로부터 나와 결국 나로 돌아온다. 황금도 내게서 나고 백골도 내게로 안긴다. 단 한 줌의 나로써 생명을 발아하고 영면을 감싸기 충분하다. 이국을 떠돌다 이국에서 죽은 프레더릭 쇼팽이 조국 폴란드에서 가져온 작은 컵 속 흙을 제 무덤에 뿌려달라 했듯, 나는 모든 생명의 이부자리다.
 
천원지방(天圓地方). 하늘의 덕은 두렷하지만 내 덕성은 단정하다. 언제나 씨 뿌리면 싹 나고 열매 맺고 사시절기가 어김 없이 딱딱 맞아 떨어지도록 해준다. 경칩에 단단한 속 마음 열어 주고 춘분에 햇볕 받고 청명, 곡우엔 훈풍과 비바람으로 갈무리해 내 자양분은 머잖아 천지에 푸름을 뿌릴 것이다.
 
그러나 내 속은 실은 만신창이다. 갖은 화학비료, 농약, 수은, 카드뮴, 니켈 등 이 오래 전부터 후벼 파 이미 농 흐르고 진액 찐득여 겉만 번드르르하다. 옆 나라 중국은 이미 그 거대한 땅 16%가 오염됐다고 한다. 모두가 돈 욕심 때문이다. 산을 산으로, 숲을 숲으로 보지 않는 인간 욕심에 나 역시 땅이 아니라 ‘땅 값’이 됐다. 오랜 세월 남을 정화시키고 남을 기르는 데 바쳤으나 이젠 내가 아파 그럴 여유가 없다. 속이 부글부글 끓어 터질 듯하다.
 
마침 올해가 국제연합(UN)이 정한 2015년 ‘흙의 해’이다. 한국도 어제인 3월11일울 국가기념일 ‘흙의 날’로 정하는 법이 국회 통과돼 곧 발효된다. 이 날을 정한 건 ‘하늘(天)+땅(地)+사람(人)’에서 ‘3’월을, 한자 10(十)과 1(一)을 합하면 ‘흙(土)’이 되기 때문에 거기서 ‘11’일을 택한 것이라 한다. 작위적이건 아니건, 아무튼 기특하다. 지금부터라도 흙을 되살려야 할 것이다. 4년 전 3월11일은 공교롭게도 동일본 대지진 악몽이 터진 날이다. 농도(農道) 전북이 제안한 ‘흙의 날’ 제정은 자연에 대한 고마움과 외경을 되새기도록 해준다. /임용진(논설고문)
 
 
‘금요일엔 돌아오렴’ 몇 구절을 옮긴다.  
 
● 그들
 
“(복원된 핸드폰) 동영상에서 구명조끼 입는 장면이 나오더라구요. 그런데 우리 아들이 거기서 친구들에게 구명조끼를 챙겨주고 있더라구요. 하나 날라다주고 손 털고, 또 하나 날라다주고 손 털고, 앞에 있는 여학생이 구명조끼가 작아 안 맞으니까 다른 것 가져다 비닐 뜯어서 주고 그래요. 그 모습을 보니까 우리 아들이 이렇게 하고 있었구나, 친구들을 도와주고 있었구나 싶었어요. 또 배가 기울어 떨어지려는 아이가 있었는데 … 우리 애가 체격이 작아 못하니까 옆에 친구랑 같이 둘이서 끌어 올리는 모습도 있고… 아이들이 이렇게 무섭고 힘든 상황에서도 서로 챙겼구나 싶었어요. … 다른 애들은 문자도 전화도 했는데 어떻게 우리 아들은 전화도 문자도 안 했을까 되게 의문을 많이 가졌었어요. 그 순간에 우리 아들은 그렇게 하고 있었던 거예요. …지금도 사무치게 아픈 게, 생존자 아이들이 전하는 말이 아이들이 서로 밀치지도 않고 구해줄 줄 알고 줄 서서 있었다고 그래요.”(4반 김건우 학생 어머니 노순자 씨)
 
“우린 미지가 어떻게 죽었는지 몰랐어요. … 근데 생존 학생이 안산법정에서 증언을 했데요. ‘반장(미지) 때문에 살았다. 반장이 선장 역할 다 했다. 반장이 지금 우왕좌왕하지 말고 조금 있다가 나가자. 지금 문을 못 여니까 물이 좀 찬 다음에 나가자, 한 사람씩 한 사람씩 나가자’ 이랬다는 거야. 미지는 아마 위에 있다가 다시 배 밑으로 들어간 것 같아. 밑에서 한 사람씩 올리고. 근데 이 아이가 올라가려고 하는데 물에 쓸렸데요. 그래서 자기도 죽는구나 생각했는데 마침 봉을 잡고 있어 간신히 살았대. 자기까지만 살고 밑에 있는 애들은 쓸려 들어가 버리고. …미지는 맨 밑에서 걔까지 올려주고 물에 쓸려서 소식이 없었던 거지. 생존자 말이 없으면 우리 딸이 그랬는지 몰랐을 거야.”(1반 유미지 학생 아버지 유해종 씨)
 
 
 
● 남겨진 이들
 
“친한 친구 둘의 동생들하고 승희가 절친이었는데 그 동생들도 이번에 (사고로) 잘못됐어요. …한 친구는 (신호등) 빨간 불인데도 차도로 뛰어들어 차가 치면 바로 인생 끝인데 왜 그게 어렵지라고 생각한대요. 저도 여기(아파트)에서 떨어지면 인생 끝인데 왜 그게 안 될까 그런 생각 많이 하고. …제가 잠수부가 되어 애들 찾으러 가는 꿈도 꾸고, 제가 거인이 돼서 배를 끌어올리는 상상도 많이 하고.”(3반 신승희 학생 언니 승아 씨)
 
“오일짼가 육일짼가. 진도 할머니들이 집에서 만든 식혜를 가져와 돌아다니면서 주는데, 처음에는 안 먹는다고 그랬어요. 그런데 할머니들이 막 우시는 거예요. 애 찾아가려면 먹으라고. 그래야 산다고. 잘 못 되면 안 되니 한 모금이라도 먹으라고. 할머니들이 이제 우리 걱정하면서 막 우시니까한 모금 넘겼는데 그게 사고 나고 처음 먹은 음식이에요. 한 모금 넘기면서 나도 울고, 할머니들도 울고.”(신승희 학생 어머니 전민주 씨)
 
 
 
벌써 세월호 참사(2014년 4월 16일) 1년이다. 이걸 참회와 정화의 1주년이라 해야 할지 가슴에 묻은 내 자식들의 1주기라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간 일이 참 많았다. 도망, 변명, 잠깐 비친 눈물, 진실 침몰 그리고 이어지는 막말, 막말, 막말. 무엇보다 그 장본인들이 점점 몰염치해진다는 게 우리를 절망하게 한다. 유족 슬픔에 바리게이트를 치고 라면을 먹은 교육부 장관에서부터 무개념 유명 목사와 고위 언론인, 서울대 교수 및 최근 세월호특별조사위를 ‘탐욕의 결정체’라 한 청와대 정무특보까지. 지난 1년간 확인한 것은 우리 사회의 세월호 선장이 이준석 씨 단 한 사람에 그치지 않았다는 점이다. 진도 할머니들이 유족들에게 식혜를 권하며 울 때 나는 혹시 속으로 그들에게 단 한 번이라도 ‘고통앞에 중립’을 요구하지 않았던가?
 
가슴 아프지만, 세월호도 필경은 세월이 약일 것이다. 하지만 아직은 절대 아니다. 잊을 수 없고 관대할 수도 없다. 당신과 나에겐 눈물이 더 필요하다. 그걸 위해 팽목항을 순례하거나 안 된다면, 책 한 권 권한다. ‘금요일엔 돌아오렴’(창비, 1만2천원). 수학여행 마치고 금요일에 온다는 그들 약속을 앞으로도 평생 기다려야 할 남겨진 이들의 육성기록이다. / 임용진(논설고문)
 
 
 
온누리 – 도핑(새전북신문 3월25일자)
 
 
 
 
  한때 랜스 암스트롱은 인간승리의 아이콘이었다. 그는 죽음의 경주라는 ‘투르 드 프랑스’ 사이클 대회를 7번 제패했다. 고환암을 앓고 이혼하는 등 심신의 역경을 겪었으나 그는 그때마다 오뚝이처럼 일어났다. 암을 이겼다는 의미에서 국내 스포츠신문 제목은 그를 ‘암(癌) 스트롱(= strong · 강하다)’이라 부르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재단을 통해 암환자들에게 4억달러 거액을 기부해 자선 천사가 됐다. 암스트롱 재단이 만든 노란색 ‘리브 스트롱’(=강하게 살자) 팔찌는 희망과 투지의 상징으로서 전 세계 젊은이들의 팔에 걸렸다. 한국에서 몇 천원에 팔린 그걸 심지어 나도 찬 적 있다.
 
   그러나 모든 게 ‘허영의 시장’이었다. 암스트롱은 2013년 1월 미국 유명 토크쇼인 오프라 윈프리 쇼에 출연해 자신의 ‘도핑’ 사실을 시인했다. 우승을 위해 근육 강화제 등의 금지약물을 정기적으로, 수년 간 투약했다고 털어놨다. 이미 세계사이클연맹 등이 압박하고 루머가 기정사실화된 터이긴 했으나 그의 ‘배신’은 전세계를 경악케 했다. 그간 그를 우상처럼 믿었던 이들의 희망이 날아갔다. 암스트롱 본인은 그간 받은 메달, 상금을 모두 반납했으며 연봉과 광고계약을 통한 연간 2800만달러의 수입도 끊겼다. 하루 아침에 그는 ‘기만의 아이콘’이 됐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실망스러운 건 암스트롱의 변명이다. 남들도 다 하지 않느냐, 약물투입은 이미 사이클링 계에 만연해있기 때문에 필요악이다, 심지어는 “나는 도핑이 반칙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 세계에선 경기의 일부”라고까지 했다. 이에 비해 같은 사이클 팀 동료인 타일러 해밀턴은 혐의를 인정하고 진심으로 참회하는 스포츠맨 십을 보였다.
 
   한국최초의 올림픽 수영 금메달리스트(2008년 베이징 올림픽, 자유형 남자 400m)이자 아시안 게임 2연속 3관왕인 ‘마린보이’ 박태환이 국제수영연맹(FINA)으로부터 24일 도핑으로 인한 자격정치 및 메달수상 취소 처분을 받았다. 이로써 박태환이 내년 리우 데 자네이루 올림픽에 출전할지 미지수지만 문제는 그게 아니다. 박태환이 랜스 암스트롱이 될 것인가, 타일러 해밀턴이 될 것인가. 그의 스포츠 맨십은 지금부터다. 우린 ‘마린보이’가 양심마져 도핑하지 않았길 간절히 바란다.
 
 
 
1200억원(새전북신문, 4월9일자)
 
 
 
 
  정부가 진 빚이 얼마나 빨리 증가하는지를 보여주는 걸 국가채무시계라 한다. 한국의 나라 빚은 지난해 총 500조원이 넘었고 매초당 136만원씩 재꺽거리며 늘어난다. 하루엔 1천200억원 가까이 늘어난다.
 
   현대그룹 정몽구 회장은 지난해 개인 고액 납세자 2위이다. 현대글로비스매각 차익으로 인한 양도세와 기타 배당 소득세, 근로소득세 등으로 그 혼자 세금 1천200억원을 냈다. 국내에 벤츠 자동차를 파는 메르세데스 벤츠코리아는 지난해 총 매출액 2조2천45억원을 올려 영업이익 1천2백억원을 남겼다. 프랑스 인상주의 화가 클로드 모네의 작품 여섯 점이 다음달 뉴욕 경매에 나온다. 총 예상 낙찰가는 1억1천만 달러(약 1천200억원)이다.
 
   1천200억원이 어느 정도 돈인지 알아보기 위해 열거했다. 개인으로서야 연봉 1억원을 받는 고소득자가 1,200년을 모아야 하는 거액이지만 산업, 사회, 나라의 덩치로 보면 또 달리 보인다. 1천2백억원은 한국 2015년 정부 예산액(258조 5천856억원)의 0.046%며 같은 해 서울시 예산액(35조 1천897억원)의 0.34%이다. 올해 전북교육청 예산(2조 6천485억원)의 4.5%이기도 하다.
 
   세월호 참사(4월16일) 1년이 다가오는 판에 정치권이 급하긴 급한가 보다. 박근혜 대통령의 ‘인양 적극 검토’ 발언 이후 하루도 안 돼 여야 국회의원 158명이 인양 촉구를 결의했다. 남의 고통엔 중립을, 권력자의 일거수일투족엔 여, 야를 떠나 신속무비하게 튀는 그 운동신경이 놀랍기만 하다.
 
   세월호를 건져 올리려면 1천200억원 정도 들 것(해양수산부 조사)이라 한다. 부장검사 출신 새누리당 김진태 의원은 이를 ‘혈세 투입’이라고 비난했다. 대통령 최측근인 김재원 청와대 정무특보는 세월호 진상규명위원회 사무처를 ‘세금도둑’이라고 나무랐다. 하지만 그들이 보지 못하는 돈도 있다. 감사원 조사결과 전임 이명박 대통령 시절 한국 정부가 해외자원개발에 투자해 손해 본 액수가 3조 4000억원이다. 세월호 28대를 건질 수 있는 큰 돈이 적자의 심해에 빠져 인양 불능이란다. 과연 뭐가 ‘혈세’고, 누가 ‘세금 도둑’인지. /임용진(논설고문)
 
 
 
 
온누리 – 살고싶은 도시(새전북신문 4월19일자)
 
 
‘말은 태어나면 제주로 보내고 사람은 서을로 보내라’고 했다. 다산 정약용은 1836년 74세로 타계하며 아들 정약유에게 “뭔 일 있더라도 사대문 밖으로 이사 가지 말라. 서울을 벗어나는 순간 기회는 사라지고 사회적 재기하기 힘들다”고 일렀다. 요즘도 검사 등 고위공무원 인사 철에 누가 서울로 들어왔나, 지역에 하방됐나가 관심인 것을 보면 ‘큰물’이 좋긴 좋은가보다.
 
하지만 서울이 크긴 여전히 크나 ‘좋은 물’로서 위치는 많이 약해졌다. 지난 주 한국갤럽이 발표한 ‘한국에서 가장 살고 싶은 도시’ 설문(13세 이상 남녀 1,700명 면접조사, 신뢰도 95%) 조사에서 서울은 여전히 1위였으나 선호도는 10년 전보다 크게 하락(22%→16%) 했다. 제주, 부산, 춘천, 대전 순으로 2~5위며 전주는 6위(2.6%) 했다. 나머지 순위인 대구, 광주, 경주도 모두 2%대여서 차이는 ‘도찐개찐’이지만 10년 전 전주가 순위 밖으로 밀렸던 것과 비교하면 무척 고무적이다.
 
‘살아 진천, 죽어 용인’이라 적은 이중환은 역저 ‘택리지’에서 사람이 살 만한 4대 조건으로 ‘지리, 생리, 인심, 산천 경계’를 꼽았다. 전주는 이 넷이 모두 들어 맞는다. 최근 KTX 고속열차 개통 등으로 교통이 확 뚫렸고(=‘지리’) 산물 풍부한 곡창(=‘생리’)이며 ‘인심’이야 말할 나위 없다. 경치도 여느 곳 못지 않으려니와 최근 일년에 6백만명을 넘는 한옥마을 관광 ‘대박’은 그 ‘산천 경계’의 현대판 정점이다.
 
영어권 경제 잡지인 ‘이코노미스트’는 매년 ‘살고 싶은 세계 10대 도시’를 조사 발표한다. 전주도 그런 국제 조사에서 주목 받았으면 좋겠다. 아무튼 전주가 강릉, 대구, 광주, 일산, 경주, 인천, 청주, 수원, 포항, 원주, 울산(이상 7~17위)보다 살고 싶은 도시라니 반갑다. 하지만 도시 성적보다 더 중요한 건 대한민국 성적이다. 세월호와 성완종 리스트 태풍 속에서 아무리 전주에 숨은들 얼마나 쾌적할 것인가. 그런 생각하니 또 부질 없고 씁쓸해진다. / 임용진(논설고문)
 
 
녹두장군의 귀환(임용진 칼럼. 새전북신문 4월17일자)
 
 
 
 
  전주시가 한옥마을에 전봉준 동상을 세운단다. 기념식화 한 세월호, 성원종 리스트 파문, 대통령 출국 등으로 심사 산란하며 날씨조차 꾸물대던 차 이 소식을 들으니 한 모금 감로수 같다. 새전북신문 4월15일자 1면에서 이 뉴스를 봤다. 마침 세월호 1주기 하루 전날이었다.
 
   기사에 따르면 김승수 전주 시장이 “추경 예산 확보를 계획하고 있다. 전봉준 장군 동상 건립을 통해 전주가 동아시아 최초의 민주주의 실험장이었음을 알리겠다”고 했다 한다. 경비 마련과 목적, 명분이 구체적인데다 지자체 장의 의지이니 곧 모습을 드러낼 것으로 기대된다. 참, 잘한 일이다. 이를 바라던 시민이나 추진 중인 공무원들 모두 박수감이다. 전주 아니면 어느 도시가 이런 일을 할까? 은근히 자부심도 든다.
 
   동상이 생기면 어떤 모습일까, 한옥마을 어디에 설까, 크기는, 높이는? 등등을 상상하며 우울한 가운데 그래도 잠시 생각을 달린다. 우린 이미 전주 덕진공원에 ‘전봉준 선생상’을 가지고 있다. ‘전봉준 선생상’은 시골 훈장 출신답게 머리에 중인이 쓰는 좁은 갓을 쓰고 왼손은 가슴에 얹고 오른손에 종이 문서 하나를 높이 치켜들고 있다. 표정 결연하고 돌돌 말린 종이가 먼 데서 보면 횃불 형상인 것이 아마 1894년 6월11일 체결된 ‘전주화약(和約)’ 문서인 듯하다. 농민군과 정부군 사이에 체결된 이 평화 약속은 ‘탐관오리 엄벌’, ‘토지 균등 분배’ 등 폐단이 많은 12가지 정치(‘폐정12조’)를 고치는 것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전주 청년회의소와 풍남청년회의소 공동으로 제작했으며 조각가 배형식의 작품인 이 동상도 좋다. 그러나 덕진공원 외진 곳 수목에 가려 찾는 이 적은 것이 제일 아쉽다. 실패한 서민의 꿈, 처연한 녹두장군이라기보다 갓 쓴 지식인처럼 보여 가슴이 덜 뭉클한 것도 티이다.
 
   또 다른 동상은 정읍 황토현 전적지 동학농민혁명기념관 내에 있다. 덕진공원처럼 역시 다글다글한 얼굴, 오른손은 치켜들었고 왼손에 문서를 움켜쥐었다. 아마 ‘고부기포’ (1894.3.) 선언 문서거나 관군과 벌인 황토현 전투 대승(1894.4.) 직후의 어떤 문서일 것이다. 이 동상은 덕진공원 것과 달리 갓을 벗은 맨머리 민상투에 단구지만 균형잡힌 몸매 등 전체적으로 수십만 농민군의 혁명 지도자답게 훨씬 힘찬 인상을 준다. 좌대와 동상 높이까지 합쳐 6m가 넘어 우러러 볼 수 밖에 없으며 동상 주변을 돌며 벽에 새긴 농민군의 함성 등으로 인해 전체적으로 다이나믹하다. 하지만 여기에도 영웅서사의 비극적 감동은 없다. 감동은 그게 사실이고 내 일 같아야 오는데 우리는 1894년 11월 동학군 4만명이 우금치에서 관군에게 궤멸돼 산하를 피로 물들이고 전봉준은 12월2일 순창 피내리에서 부하 김경천의 밀고로 잡혀 서울로 잡혀가 고문과 재판 끝에 이듬해인 1895년 4월24일 한강 마포 절두산에서 망나니에게 목이 잘렸단 것을 알 뿐이다. 동학 이후엔 을사보호조약과 35년의 일제 강점, 분단, 동족상잔, 기나긴 독재, 신자유주의가 있을 뿐이어서 그 이기적, 맹목적 군상 속에서 황토현 승전지 전봉준 동상의 힘찬 포즈를 현실적 승리로 느끼기 힘들다.
 
   전봉준을 알려주는 가장 유명하고 유일한 사진은 그가 서울 일본 영사관에서 한국 법무부(‘법무아문’)으로 압송되기 직전 들것에 앉아 찍힌 것이다. 일본인 사진작가 무라카미 텐신(村上天眞)이 1895년 2월27일 일본영사 우치다의 사전 허가를 얻어 촬영한 것이라고 최근 고증됐다. 체포 후 약 석 달에 걸친 고문과 심문에도 불구하고 그의 안광은 여전히 꿰뚫듯 형형해 대혁명가의 기개를 전한다. 가무잡잡 마른 얼굴과 텁수룩한 수염, 두드러진 태양열과 광대뼈는 그간의 시린 고통 탓이리라. 이미 거동을 못해 들것에 얹혔으나 작은 이 사나이가 옆에 선 호송 병사를 위압하는 듯 보이는 것은 나만 그러한가?
 
   개인적으로 나는 전봉준 최후의 이 사진이 가장 좋다. 무명 잡역부 둘이 그를 들 것에 태우고 칼찬 병사 둘이 호위하는 이 장면은 멸시와 고문에 탈진한 조선의 꿈을 은유한다. 작은 체구의 이 사나이가 한옥마을 어디선가 들것에 앉아 우릴 쳐다보는 걸 상상해본다. 수많은 젊은 관광객들과 함께 동학도 수백년째 전주에 앉아 한옥마을에 흘렀던 것임을 새삼 느끼고 싶다. 그것은 동학의 오랜 꿈을 역사에서 건질 것이다. 마치 세월호 인양처럼 말이다. 하지만 이 모든 건 그냥 개인 생각이다. 어떤 모습으로 세워지면 어떠랴. 녹두장군 전봉준이 돌아오신단 것만 해도 가슴 벅차다. 그의 귀환은 전주가 한국문화 뿐 아니라 정신과 용기, 정의의 중심이란 걸 뜻한다. 한옥마을 전봉준 동상 제작 결정에 다시 박수를 보낸다. /임용진(논설고문)
 
 
지난 2008년 이 온누리 난에 ‘전북의 보물’을 30회 가량 연재하다 사정상 중단했다. 오늘부터 다시 시작한다. 첫 회는 ‘꽃동산’이다.
 
   세상엔 예쁜 정원도 많다. 덴마크 티볼리 파크는 개장(1843년)한 지 170여년이나 되는 세계 최고(最古) 테마파크다. 각종 탈 것 뿐 아니라 정원이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이를 본받아 만든 게 국내 용인 에버랜드이다. 지난 1975년 개장 당시 이름은 용인자연농원이다. 요즘도 매년 5월부터 벌이는 에버랜드 장미축제엔 수백만 송이 장미가 아찔한 향기와 자태를 경염한다. 이밖에 경기도 가평에 아침고요수목원이 있고, 캐나다 뱅쿠버엔 ‘부처트 가든’이 있다. 특히 부처트 부인이 오랜 석회암 광산에 식물을 심어 1904년부터 조성한 부처트 가든은 세계인의 정원으로 사랑받는다. 또 싱가포르 가든스 바이더 베이의 클라우드 포레스트와 일본 하코네 국립공원 등 정원 아름답다는 델 많이도 가봤지만 제일 아름다운 보석은 제일 가깝게 있다. 바로 내고장 전주 완산칠봉 ‘꽃동산’이다.
 
   비 그치고 활짝 개인 그제(20일) 전주시립도서관 뒷산 완산칠봉 ‘꽃동산’을 찾았다. 불과 2분이면 오를 수 있는 작은 동산. 첨에 그저 무심히 오르지만 곧 누구나 화들짝 놀란다. 안전에 전개되는 붉은 피들. 연산홍, 자산홍, 겹벚꽃, 수사 해당화 등이 갑자기 벌떡 일어서 상춘객의 눈을 습격한다. ‘세상에 뭐 이런 데가’ 하는 감탄사가 절로 난다. 도원경, 파라다이스가 따로 없다.
 
   ‘꽃동산’은 조선 때 중죄인 목을 베던 초록바위 뒤켠에 있다. 그들의 피와 한이 배어 그리 붉은가. 원래 이곳은 시민 김영섭(71) 씨가 사재를 털어 조성한 철쭉 동산이다. 박봉에 시달리며 그의 선친이 좋아하던 철쭉을 심느라 부부싸움도 수태 했다 한다. 이곳을 전주시가 사들여 15억원 들여 단장하고 5년전에 시민들에게 개방했다니 실은 시민들도 아는 이가 반도 안 된다. ‘꽃동산’은 지금 활짝 피었다. 아침엔 사람 없어 좋고 밤에도 전등 불 아래 화사 화려하기 지극무쌍이다. 이건 전주 시민의 복. 며칠 내 꼭 가시길 권한다. /임용진(논설고문)
 
 
온누리 – 전북의 보물2. 강남고속버스터미널에서
 
서울 강남 고속버스 터미널 호남선 매표소엔 전주 전용 창구가 없다. 광주행만 전용 매표소가 있고 전주 표를 사려면 ‘전노선 발매’라고 적힌 데서 줄을 서야 한다. 광주만 고유명사고 전주는 꼭 ‘기타 등등’인 듯해 씁쓸했지만 요즘엔 그렇지도 않다. 표를 사 가지고 승강장 홈쪽으로 우회전하면 단연 전주 일색과 마주친다. 널찍한 터미널 통로를 사이에 두고 승강장 맞은 편 한 가운데서 ‘삼백집’, ‘베테랑 분식’, ‘한국집’ 간판이 눈에 확 들어온다. 승객들을 위한 끼오스크와 편의점 등 가게 수십 개가 있으나 눈에 확 띄는 건 이 전주 출신 ‘삼총사’다.    몇 해 전만 해도 그만그만한 분식집, 패스트 푸드가 터미널 음식의 대명사였다. 하지만 강남 고속터미널 호남선에 관한 한 이젠 전주 음식이 대명사다. 콩나물 국밥(=삼백집), 칼국수와 쫄면(=베테랑 분식), 비빔밥(=한국집) 등 ‘전주 표’가 서울 강남을 평정했다. 터미널 내엔 송추 가마골 갈비탕, 명동 칼국수 등 유명 음식점도 있으나 베테랑 분식 앞에 곧잘 긴 줄이 늘어서는 걸로 봐 전주의 한 판 승이 역연하다. 갈 길 바쁜 승객들이 뭐 먹겠다고 음식점 앞에 장사진을 치는 것 자체가 진풍경이다.
 
   삼백집은 이미 세종청사점 등 전국에 26개 분점이 있다. 한국집 역시 고속터미널 말고 강남에만 직영점 두 곳(현대백화점 강남점, 롯데백화점 잠실점)을 뒀고, 베테랑 칼국수는 고속터미털이 서울 1호점이라지만 약진할 게 분명하다. 이뿐 아니다. 터미널 내 전주 한식집 ‘고궁’이 있고, 전주 콩나물국밥 대명사 중 하나인 ‘현대옥’은 전국에 무려 160개, 서울에만 18개(강남 7개소) 점포가 있다.
 
   여름날 초코파이 구입을 위해 땡볕 아래 땀 뻘뻘 흘리면서 기다리던 행렬을 기억할 것이다. 좋건 싫건 초코파이와 ‘풍년’은 이미 전주 그 자체가 됐다. PNB풍년제과가 현대백화점과 신세계백화점에, 풍년제과가 롯데백화점에 각각 입점해 서울 속 전주 땅을 구축하고 있다. 음식은 손끝 창조, 입맛 창조다. 이로써 전주는 부동의 대한민국 음식수도, 창조 수도가 됐다. 전주사람인 그대, 고속버스터미널에서 어깨가 으쓱할 만하지도 않은가? /임용진(논설고문)
 
 
온누리 – 홍준표
 
 
 
 
  그는 서울 명문 K대 법과대학 행정학과 72학번이다. 재학중 학교 인근 제기동 지점에서 시중은행 창구직원으로 근무하던 한 외모반듯한 처자에게 반했다. 그는 당시 대학 등록금 10만원을 매일 2천, 3천원씩 쪼개 찾는 전법으로 한달 간 그 여자 직원 창구앞에 줄을 섰다. 그러나 일방적인 ‘눈도장’일 뿐 정작 그녀는 이 명문대 생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줄서기 작전이 별무효과이자 그는 연줄과 학연을 동원하는 네트워크 구애로 작전을 바꿨다. 대학선배인 그 은행 지점장을 찾아가 중매를 간청했다. 상사인 지점장의 권고 겸 지시로 소개팅에 성공, 둘은 교제를 시작했다. 그러나 이 소식을 들은 처자의 시골 아버지가 당장 불호령을 내렸다. “연애하려고 서울 갔냐? 은행 그만 두고 내려와라.”
 
   처자의 고향은 부안 줄포. 고깃배도 갖고 있는 바닷가 유지의 딸로 군산여상을 졸업하고 선망의 은행원이 돼 큰 도시 서울까지 갔으나 정작 어른의 완강한 반응 앞에 그녀는 하릴없이 귀향했다. 그러나 거기서 그만들 사내가 아니었다. 경남 창녕이 고향인 그는 주민등록상 주소지를 전북 줄포로 바꿔 군(=방위병) 생활을 줄포에서 하며 아예 눌러 앉기 상주 작전으로 한층 더 다가섰다.
 
   1970년대면 약 반세기 전이고 무대는 좁은 면단위 지역이다. 지역 텃세는 물론 경상도, 전라도가 엄연한 시절이어서 경상도 사투리 뚝뚝한 젊은이가 비우호적인 지역 한 가운데로 사랑을 위해 뛰어든 것은 용감하긴 할지언정 성사 가능성이 지극히 낮아 보였다. 그러나 머리 좋고 뚝심 좋은 젊은 방위병은 복무 틈틈이 주경야독해 고시에 합격했고 둘은 해피엔딩, 결국 결혼에 골인한다. 그 후 젊은 남편은 승승장구해 검사, 국회의원, 도지사가 됐고 젊은 은행원 출신 처자도 여사님이 된다. 여기까진 좋다. 남편 이름은 당시엔 홍판표, 지금은 홍준표(61) 경남 도지사다. 부인은 이순삼(60) 씨다.
 
   홍준표 경남 도지사가 ‘성완종 리스트’와 관련, 총선 공천헌금 1억2천만원 출처를 “처의 비자금”이라고 발언해 파문이 일고 있다. 남편도 모르게 비자금을 만들어 줬으니 홍지사 장가 한 번 잘 간 것 같다. 전라북도 처자를 얻으려 노력한 그의 선견지명이 빛난다. 하지만 위기에 처를 들먹이고있으니 왕년 모래시계 검사의 기개는 오간 곳 없게 돼버렸다. /임용진(논설고문)
 
 
 
세월호는 누가 건지는가(새전북신문 칼럼 – 5월15일)
 
 
 
 
  세월호 얘기 또 하자. 지난달 정부의 세월호 인양 결정은 적절했다고 본다. 돈, 시간, 위험한 작업 등 이유로 반대 의견이 많았지만 “실종자 가족과 전문가의 의견과 국민 여론을 수렴해 세월호 선체 인양을 적극 검토하겠다”(4월6일)는 대통령 한 마디에 반대론은 쑥 들어갔다. “아이들은 가슴에 묻는 것”(국회의원 김진태), “세월호 너희 돈으로 건져라”(어버이연합회)던 막말 수준의 인양 반대론자들은 자라목이 돼 최고 권력자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뭔가 많이 찜찜하다. 왜 거금을 들여 그 배를 건져야 하냐는 불만도 분명 이유가 있다. 그 대변자들이 권력 앞에 ‘알아서’ 일시에 입을 다물었지만 앞으로 인양과정에서 크고 작은 난관에 부딪힐 때마다 ‘것 봐라, 내 뭐라 했냐’는 식의 비아냥을 내놓을 게 충분히 예상된다. 무엇보다 먹고 살기 어려운 이 세상에서 민초들간에도 인양 합의가 충분치 않은 듯해 아쉽다. 그래서 꼭 건져야 하는 이유 두 가지만 말하겠다.
 
   첫째, 개인 슬픔 치유다. 295명이 사망했고 9명이 실종됐다. 그 유족들 슬픔이 극점에서 하향곡선을 그리도록 하는 실질적, 제의적 조치로 인양이 필수적이다. 인양의 진행은 사회가 슬픔에 동참하는 과정이다. 인양을 계기로 유족 슬픔은 클라이막스에서 완화될 것이다. 특히 아직 시신이 발견되지 않은 9명의 유족들에게 인양은 절대적인 출구이다. 520명이 사망한 JAL 점보기 추락사고(1985년8월12일) 등 많은 대형참사를 기록한 ‘슬픔 전문가’ 노다 마사아키(71·일본) 씨에 따르면 “뜻밖의 재해로 소중한 이를 잃은 유족들의 심리는 ‘쇼크→부정→분노→우울→재사회화’의 경로를 밟는다“고 한다. 시신 발견은 이중 죽음을 ‘부정’하는 유족들에게 그 다음 단계로 이행토록하는 결정적인 포인트다. 부당한 죽음의 공간인 세월호 인양 역시 같은 의미가 있을 것이다. 세월호가 저 어둠에 있는 한 우리 슬픔은 부정, 분노 단계에서 나아가지 못한다. 그것은 치유되지 않는 슬픔, 한, 거부, 자기 파괴이다. 세월호 유족의 자살충동률은 일반인보다 10배나 높다(55%, CBS 조사)고 한다. 유족 반 이상이 자살 충동을 느꼈거나 기도하고 있다. 세월호 희생자인 고 권순범(단원고 2학년6반) 군의 아버지 권상혁(58) 씨가 지난 8일 스스로 목을 맸다. 어버이날이었다.
 
   둘째, 한국의 절망 치유를 위해 반드시 세월호를 건져야 한다. 이건 집단과 역사와 비전의 문제다. 역사적, 집단적 ‘부정의 단계’를 넘어서야 한다. 미국 뉴욕 ‘그라운드 제로’는 911테러 10주년인 2011년 9월11일 개장했다. 공식이름이 ‘국립911추모관’(The National September 11 Memorial)이다. 911테러로 2,843명이 사망했다. 그 미증유 비극의 현장에 사망자 모두의 이름을 동판에 새겨 영구보관하고 미국에서 가장 높은 1,776피트(541m) 104층 짜리 건물을 세웠다. 모든 것이 사라진 슬픔의 빈 자리에 지난날보다 높고 빛나는 기념물을 세운 건 ‘꺾어진 꿈’에 대한 반어다. 1,776피트는 미국 독립기념의 해(1776년)를 상징한다. 폴란드 아우슈비츠 수용소는 또 어떤가. 유대인 150만명을 학살한 인간 야수성을 증거하는 이곳은 1972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이곳은 피해자인 유대인 뿐 아니라 가해자들도 단골로 찾아 숙연히 반성한다. 아우슈비츠에 수학여행 온 독일 초등 학생들의 심각한 표정을 보다가 뭔가 세상엔 희망이란 것도 있겠구나 하고 느낀 적 있다.
 
   개인적으로, 인양된 세월호는 탐욕과 무책임, 불성실의 기념관이 됐으면 한다. 배안에서 기다리라는 무책임한 안내방송을 듣고 질서정연히 따른 학생들, 위기 순간에도 급우 먼저 내보낸 뒤 그곳에 남은 아이들을 영원히 기억하는 곳이었으면 한다. 세월호 이후 수많은 국민이 느꼈던 절망감, 배신감을 치유하기 위해선 다시 거기서 눈물을 흘려야겠다. 슬픔도 종류가 있다. 지금 우리가 느끼는 슬픔은 치명적, 자멸적이고 건전치 못한 감정이다. 이를 딛기 위해선 손을 잡고 통곡할 세월호의 공간이 다시 필요하다. 무기력한 이 나라가 그때 한 번 아름답게 울기 위해 난 세월호를 건져 보관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해양수산부가 14일 오전 정부 세종청사에서 세월호 후속조치 추진본부 및 세월호 선체 인양 추진단 현판식을 가졌다니 이제 일이 본격화 됐다. 하지만 진짜 세월호는 대통령 지시나 해수부가 건지는 게 아니다. 빠뜨린 건 기득권이지만, 건지는 건 민초가 한다. 지겹다 말라. 세월호 얘기는 그들 울음이 다이아몬드 될 때까지 한다. /임용진(논설고문)
 
 
 
조희연(새전북신문, 5월21일)
 
 
   조희연(60) 서울시 교육감은 전북 사람이다. 정읍 출신이고 전주에서 풍남초등학교와 전주 북중학교를 나왔다. 중학 때 그의 집은 동문 사거리 근방이었다. 가냘픈 체구에 여성스런 외모, 목소리 톤 높은 모범생이었다. 당시 전주 북중은 고교평준화 정책으로 폐교가 예정된 명문이었다. 조 교육감은 그곳 수재들 속에서도 학급 1등을 거의 빼앗기지 않았다.
 
   그의 집은 평범한 중산층, 아버지는 공무원이었다. 기독교를 열심히 믿었다. 개구쟁이들이 참기 힘든 점심 도시락 앞에서도 그가 식전 기도 빼먹는 걸 보지 못했다. 하지만 모범생 예수꾼 조희연도 노는 덴 열심이었다. 음악, 미술 쪽 재능은 생각나지 않으나 체육시간엔 발군이었다. 날래게 축구 잘했고 당시로선 논다는 중학생들이 다니는 탁구장 출입도 빈번했다. 넓이 1cm의 하얀 색 비닐 띠가 둘린 교모를 쓰고 얼굴 붉어질 때까지 힘껏 공을 받아치던 그의 스매싱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약골 조희연이지만 워낙 운동신경이 뛰어나 그를 이기는 이가 드물었다.
 
   내가 아는 조희연의 면모는 두 가지다. 모범생과 투사. 얼핏 얍실해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콧날과 턱선이 분명하다. 의지의 사나이다. 목소리가 높고 약간 떨리지만 음색은 청청하다. 힘 앞에 갈등할지언정 결국엔 양심과 소신을 굽히지 않아 1970년대 말 서울대 사회학과 재학시 제적돼 감옥에 갔다.
 
   이 시대의 진보적 학자 조희연 서울시 교육감에게 법원이 이달초 벌금 500만원을 선고했다. 지난해 5월 보궐선거 중 상대 후보 고승덕 변호사에 관한 ‘허위사실’을 유포했다는 혐의다. 하지만 조 교육감은 인터넷에 이미 널리 퍼진 고 후보의 미국 영주권자 의혹을 해명하라고 요구했을 뿐이다. 당시 경찰도 무혐의, 중앙선거관리위원회도 경고로 끝낸 사안을 검찰이 시효 만료 하루 앞두고 기소했다. 세간의 지적대로 ‘훈방’으로 끝낼 사안에 ‘사형’을 선고하도록 국가권력이 부추긴 셈이니, 서울시 교육감 조희연 재판을 전북이 ‘서울 일’로만 볼 수 없는 이유다. /임용진(논설고문)
 
 
 
경기전(온누리, 5월28일)
 
 
 
 
   경복궁은 조선 개국(1392년) 이태 뒤인 1394년 터를 다듬어 이듬해 390칸 대궐로 일차 완공한다. 이후에도 중건을 계속해 경회루 연못과 광화문 등으로 번듯해진 것은 1420년대 들어서이다.
 
   창덕궁은 1405년 조성 시작해 1412년 정문인 돈화문이 건립됐고 창경궁은 1483년에사 완공됐다. 덕수궁은 그 한참 후인 조선중기 건물이다. 난데 없이 궁전 건립을 나열하는 것은 경기전이 1410년 완공됐기 때문이다. 순서로 경복궁, 창덕궁과 거의 비슷한데 이는 경기전이 그만큼 중요했단 얘기다. 함경도 시골 무장이던 이성계의 혈통이 실은 유서 깊은 고을에 뿌리를 두고 있단 걸 강조하기 위해 조선 초부터 경기전 건립을 서둘렀다. 경기전은 새 왕조 집단이 혈통 정당성을 강조하기 위해 땅 위에 지은 ‘용비어천가’이다.
 
   지난 1970년대 초까지 경기전엔 담이 없었다. 일제강점기 때 생긴 중앙초등학교가 경내 서쪽 반절을 쓰고 있었고 이태조 진영을 모신 본전도 관리부재로 누추했다. 그러다 담이 생기고 입장료도 소액과 무료를 오락가락하다 지난 2012년부터 1천원씩(어른)을 받고 있다. 지난 30년 새 중앙초등학교를 바깥으로 내보내고 전각 관리동, 창고, 조경묘, 사고(史庫) 등을 복원시켰으며 어진 박물관을 신설했다.
 
경기전 입장료가 다음주 월요일(6월1일)부터 3천원으로 오른다. 규모가 비할 데 없이 좋아졌으니 3천원을 받아도 가치는 있다. 또 경복궁, 창덕궁(이상 3천원)은 물론 가까운 남원 광한루(2천5백원)와의 입장료 ‘품격’ 균형도 필요하다. 한옥마을 주말 인파는 3천원 아니라 그 이상을 내고라도 경기전에 줄을 설 것이다. 하지만 최근 콩나물국밥 값 등이 경쟁적으로 오른 후여서인지 뭔가 아쉽다. 하루 아침에 경기전 입장료가 세곱배기 되고 보니 한옥마을 관광 ‘대박’ 통에 지자체 인심마져 박해진 느낌이다. /임용진(논설고문)
 
온누리 – 메르스(새전북신문, 6월11일)
메르스는 중동호흡기 증후군이다. 하지만 그 이름을 무능력, 무책임 증후군으로 바꿔야 할까보다. 다음 사례를 보자.
 
 
 
  △ 문형표의 저주 : “메르스는 전염성이 낮다. 일반 국민들에게는 전파 가능성이 없다”(5월20일)고 문형표 보건복지부 장관이 말했다. 그러나 ‘사망 9명, 확진 108명, 격리 3천4백39명’이 현재(6월10일) 상황이다. 월드컵 우승국을 예언할 때마다 그 나라가 초반 탈락하는 이른바 ‘펠레의 저주’다.
 
  △ ‘15명’ : 지난 1일 국무회의에서 박근혜 대통령은 “(우리나라에서) 지금까지 15명의 환자가 확인됐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때 이미 ‘18’명이었다.
 
  △ ‘유체이탈’ : 박근혜 대통령이 “그동안 여러 문제점들에 대해, 또 국민 불안 속에서 어떻게 확실하게 대처 방안을 마련할지 이런 것을 정부가 밝혀야 한다고 생각한다”(6월3일)고 말했다. ‘정부’에서 대통령 자신이 빠지는  ‘유체이탈’식 화법으로 나머지 각료를 질타하자 보건복지부가 그 유명한 포스터를 대처방안으로 내놓는다.
 
  △ ‘포스터’ : “낙타와의 밀접한 접촉을 피하세요.” “멸균되지 않은 낙타유 또는 익히지 않은 낙타고기 섭취를 피하세요.” 이같은 보건복지부 포스터에 누리꾼들은 다음 댓글을 달았다.
 
  △ ‘퇴근 할 때 당분간 낙타는 타지 말아야겠다’ / ‘휴, 정부의 조치 아니었다면 낙타유를 마실 뻔 했지 뭐야?’ / ‘낙타고기 먹는 재미로 살던 한국인들 큰일 났네’ 등등 : 아이러니하게도 지난 3월 중동 순방시 두 차례 낙타고기를 시식했다고 자랑한 사람이 바로 박대통령이다.
 
  △ ‘동무들이 돌아옵네다’ : 뉴욕타임즈가 최근 만평(6월8일)에서 한국을 희화화했다. 김정은이 만면에 희색을 띈 가운데 몇몇 탈북인들이 메르스가 무서워 다시 북한으로 회귀하는 그림이었다. 그 순간 문형표 보건복지부 장관은 ‘국격’ 때문에 메르스 대응등급을 상향조정 못했다고 변명하고있었다.
 
   메르스도 미구에 잦아들 것이다. 그러나 무능과 무책임의 역병은 치유 난망이어서 더 무섭다. / 임용진(논설고문)
 
 
임용진 칼럼 – 백릉 채만식(새전북신문 – 6월 12일)    “철없는 아저씨는 차라리 죽는 게 나아요.” (‘치숙’, 1938)    “이 태평천하에 그런 짓을 하다니, 쳐 죽일 놈. 죽일 놈.”(‘태평천하’, 1938)
 
 
 
   채만식(1902~1950) 소설의 명 대사들이다. 일본 강점기를 태평성대로 생각하는 ‘치숙’의 소년이나, 미래의 경찰서장 감인 손자가 동경(=토쿄) 유학 도중 사회주의 운동가로 체포됐다는 소식에 절망하는 ‘태평천하’의 윤직원 노인이나 모두 웃기는 인물이다. 소설 속에서 그들이 비웃는 대상이 사실은 정상이고 자신을 정상이라고 여기는 소설상 화자가 사실은 조롱받아 마땅하니 독자와 작가는 공모해 세상의 무지에 맘껏 검은 웃음을 보낸다. 칼날을 품은 웃음. 위선과 악덕을 찌르는 풍자는 채만식의 장기였다.
 
   어제가 백릉 채만식 타계 65주기다. 그는 전북 군산에서 태어나 서울에 살다 익산에서 돌아간 전북인이다. 한국 리얼리즘 문학의 고봉인 그를 기려 군산시 내흥동에 채만식문학관이 있다. 우여곡절을 겪었으나 지난 2003년부터 채만식 문학상도 수상된다. 우여곡절이란 바로 그의 ‘친일’ 논란이다. 지난 2005년 ‘친일 청산을 위한 시민연대’는 백릉의 친일 이력을 문제삼아 문학상 중단을 촉구했다. 한 때 그쳤던 문학상이 작년부터 재개됐으나 ‘친일’은 여전히 채만식의 아킬레스 건이다. 과연 그 상처가 어디까지인가.
 
   문학사가 임종국, 김윤식 등은 채만식이 친일단체(=조선문인보국회)에 가담했고, 친일문건(=연설문 등)이 있으며 친일작품(=‘여인전기’·1944)을 썼기 때문에 명백한 친일작가라고 한다. 이에 대해 최근 국문학자 최유찬, 방민호 등은 채만식이 암흑기 최고의 저항작가, 리얼리스트라고 재평가하고 있다. 논쟁은 논쟁이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자신의 언설일 것이다.
 
 
 
   “많은 수의 영리한 사람들이 저의 이익과 안전을 도모하기 위하여 진심으로 일본 사람을 따랐다. 역시 적지 아니한 수효의 사람이 핍박을 받을 용기가 없어 일본 사람에게 복종을 하였다. 복종이 싫고 용기가 있는 사람은 외국으로 달리어 민족해방의 투쟁을 하였다. 더 용맹한 사람들은 외국으로 망명도 않고 지하로 숨어 다니면서 꾸준히 투쟁을 하였다. 용맹하지도 못한 동시에 영리하지도 못한 나는 결국 본심도 아니면서 겉으로 복종이나 하는 용렬하고 나약한 지아비의 부류에 들고 만 것이었었다.”(‘민족의 죄인’·1948)
 
 
 
   ‘본심도 아니면서 겉으로 복종이나 하는’ 어정쩡한 협력이었다 하더라도 채만식은 자신에게 매질을 그치지 않았다.
 
 
 
   “한번 살에 묻은 대일협력의 불결한 진흙은 나의 두 다리에 신겨진 불멸의 고무장화였다. 씻어도 깎아도 지워지지 않는, 영원한 ‘죄의 표식’이었다. 창녀가 가정으로 돌아왔다고 그의 생리(生理)가 숫처녀로 환원되어지는 법은 절대로 없듯이”(‘민족의 죄인’)
 
 
 
   채만식 인생과 문학의 엑기스는 바로 이같은 자성이다. 자신도 용서 않는 리얼리즘. 친일파 자손이자 일본육사를 졸업한 이종찬(1916~1983) 장군은 “일제에 부역한 게 부끄럽다“며 광복 후 창군에 합류하지 않았다. 이종찬만 참 군인이고, 채만식이 참 소설가 아닌 건 아닐 게다. 통영 청마문학관엔 아저씨 시인 유치환(1908~1967)과 젊은 처자 시인 이영도(1916~1976) 사이에 오간 수십 년 간의 연서가 전시돼있다. 사랑이건 불륜이건 있는 걸 고스란히 드러내는 게 인생이고 역사다. 채만식 문학이 저항과 현세적 굴종, 지적 고뇌, 반성, 후회를 민낯으로 보여준다면 채만식문학관도 그처럼 리얼리스틱 했으면 좋겠다.
 
   현재 채만식문학관엔 친일 이력에 관한 도큐먼트나 전시물이 없다. 이게 내 불만이다. 정작 채만식이 이를 봤다면 뭐라고 했을까. 대법관도 국무총리 후보도 ‘아 몰랑~’ 시침 뚝 떼고 벼슬만 바라기 때문에 이 시기 ‘자성의 기념물’은 더욱 절실하다. / 임용진(논설고문)
 
 
 
온누리 – 삼성(새전북신문, 6월18일)    한 기업이 청와대와 맞먹는 규모의 별도 기자단을 운영하고 매주 수요일 정례 기자회견을 여는 곳은? 한 기업의 일년 매출액이 대한민국 일년 예산(2015년 375조 4천억원)과 맞먹는 곳은? 삼성그룹이다.
 
   삼성그룹으로부터 보도자료를 받는 국내 언론은 80군데 정도다. 이들은 2년 전 기자단을 결성했다. “불필요하고 소모적인 경쟁에서 벗어나 원활한 취재한경을 만들기 위해서”다. “삼성그룹과의 건전한 파트너 쉽”을 만드는 것도 목적중 하나다. 이들은 매주 수요일 삼성그룹 사장단 회의 후 그룹 홍보팀장(부사장 급) 주재로 기자회견 또는 간담회를 갖는다. 삼성 그룹은 사장단 회의에서 걸러진 정보, 주제, 담화를 기자단을 통해 국민에 알린다. 온 나라를 강타하고있는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에 대해 삼성은 ‘석고대죄’ 말고 할 게 없는 듯하다. 삼성그룹은 지난주 수요일 기자회견을 걸렀으며 어젠(17일) “고개를 못 들 정도로 부끄럽고 참담한 심정이고 깊이 반성하고 있다”, “국민 앞에 송구하기 그지 없다”고 밝혔다. 그 말 말고 할 게 뭐 있을까.
 
   현재 메르스 확진자 중 네 명이 서울 삼성병원 의사다. 서울 삼성병원 응급실이 질병관리본부에 ‘메르스 의심’ 환자를 최초 보고한 게 지난달 17일이다. 여기까진 ‘최고의 삼성’답다. 다른 병원이라면 그런 병을 의심조차 안 했을지 모른다. 문제는 메르스 진원지 ‘삼성’을 정부가 감싼 데 있다. 지난 4일 박원순 서울시장이 병원 이름을 직접 언급하기까지 ‘삼성’은 기피단어였다. 명분은 국민의 혼란방지였지만 혹시 ‘삼성의 혼란 방지’가 진짜 이유 아니었을까.
 
   메르스는 역병이되 사람이 그걸 키운 셈이다. 바로 정경유착, 신자유주의의 인재(人災)다. 세월호도 그렇고 메르스도 그렇다. 혹시 반성한다. 언론과 자본유착은 없는지. 그걸 삼성그룹 기자단이 ‘건전한 파트너 쉽’으로 오해한 것 아닐지. 딴은 이런 오해가 가난한 지방신문의 걱정거리는 아니다. 하지만 부끄럽다. / 임용진(논설고문)
 
 
 
온누리 – 조선일보(새전북신문,6월25일)
 
 
 
 
  조선공산당은 조선일보 기자들이 만들었다. 1925년 4월 경성부 황금정(서울 을지로 1가) 중국집 아서원에서 조선공산당 창립을 주도한 이가 바로 그 유명한 박헌영, 김단야, 임원근 3인방이다. 모두 당시 조선일보 기자다. 박헌영은 뒷날 북한 정권 수립 초기 부수상 겸 외무상을 지냈으나 간첩죄로 몰려 1956년 처형된다. 김단야는 러시아 망명 활동 중 반혁명 혐의로 소련 비밀경찰에게 체포돼 1938년 사형된다. 임원근은 북한 제1기 최고인민회의 의장인 허헌의 사위고 역시 북한 요직을 두루 거친 허정숙의 첫 남편이다.
 
   이밖에도 조봉암, 김재봉, 홍남표, 홍덕유, 신일용 등 쟁쟁한 공산주의, 사회주의자들이 모두 동시대 조선일보에 몸 담았다. 1920년대 한국 공산주의 운동은 크게 세 갈래다. 소련 이르쿠츠크파를 잇는 ‘화요회’(박헌영)와 중국의 ‘상해파’(신일용), 일본 유학생 계열 ‘북풍회’(조봉암). 이 셋이 모두 조선일보에서 만난다.
 
   6·25발발 65주년을 하루 앞둔 어제 서울 인사동 한 경매장에 손바닥만한 크기(27×19cm)의 조선일보 호외(1950년6월28일자) 한 장이 거액에 나왔다. 무려 1억원대다. 호외는 ‘인민군, 서울 입성- 미국대사관 등 완전해방’ 제하에 “28일 오전 3시 30분부터 조선 인민군은 제 105군 부대를 선두로 하여 서울시에 입성하여 공화국 수도인 서울을 해방시켰다”고 대서특필하고있다. 이어 “오래 갈망하여 맞이하던 조선인민군대를 서울시민들은 열열한 환호로서 환영하였다”고 적고 있다.
 
   이에 대해 조선일보는 “우리가 발행한 것 아니다”고 손사래친다. 1970년대 이후 우익논객 선우휘, 김대중, 류근일, 조갑제 등과 함께 국내 최강 언론으로 군림하고있는 조선일보로서 1920년대 박헌영 등이나 1960년 그날의 호외가 달가울 리 없다.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도 좌익은 ‘주홍글씨’였다. 그는 한때 공산당에 가입했던 전력을 없애고자 친형의 절친인 북한밀사 황태성을 사형하고 이후 반공 철권으로 내달았다. 기회포착, 얼굴 바꾸기, 강한 현세 추수(追隨)의지 등 조선일보와 박 전대통령은 많이 닮았다. / 임용진(논설고문)
 
 
 
온누리 –  이한열(새전북신문, 7월9일자)
 
 
   어제 20대 청년 다섯 명에게 물었다.
 
   “이한열을 아나?” “…” “박종철은?” “…” “그럼 이름 뒤에 ‘열사’를 붙이면 아시겠나?” “어디서 들은 것 같기도 하고…” 그래서 오늘은 내 머리 속에 이한열만 맴돌고 있다. 오늘은 28년 전 서울 시청 앞에서 고 이한열(1966~1987)의 노제를 치른 바로 그날이다.
 
   이한열은 전두환 군부에 맞선 1987년 6월항쟁 도중 최루탄을 맞고 사망(당시 연세대 경영학과 2학년)했다. 당시 데모 진압용 최루탄 SY44는 30도 각도로 위를 향해 발사하도록 돼있는데 어떤 전경이 이를 총처럼 조준해 이한열의 뒤통수를 직격했다. 이한열을 비롯한 시위대는 교문 안으로 후퇴하는 중이었다. 의식 잃고 쓰러진 이한열을 동급생 이종창(당시 연대 도서관학과 2학년)이 발견하고 부축했으나 그는 이미 동공이 풀렸고 코와 뒷머리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이 장면을 잡은 로이터 통신 기자 정태원의 사진 한 장이 신문 1면에 실려 6월 항쟁 도화선이 됐다. “한열이를 살려내라!”
 
   이한열이 의식을 잃은 게 6월9일, 그후 딱 스무날 만에 전두환 후계자 노태우는 이른바 ‘6·29 선언’을 발표해 시민에게 항복했다. 사경을 헤매던 이한열은 7월5일 사망한다. 그 나흘 후인 7월9일 초대형 영정을 앞세운 ‘민주국민장’ 장례식이 연세대 본관 → 신촌로터리 → 서울 시청 앞에서 치러진다. 목사 문익환이 서울 시청 광장에 운집한 100만 시민 앞에서 ‘이한열!’을 피 토하듯 부르던 게 눈에 선하다.
 
   그러나 어즈버 태평연월. 김주열, 전태일, 박종철, 이한열을 아무리 초혼(招魂)해도 대한민국은 답이 없다. 박종철 고문 치사(1987년1월)를 알고도 은폐 축소했다는 혐의를 받은 당시 검사가 현직 대법관이고 대표적인 공안통 검사는 국무총리가 됐다. 세상도 역사도 한 판 춤. 누군 잊기 위해, 누군 기억하기 위해 춤 춘다고 한다. 우린 지금 무슨 춤을 추는지. / 임용진(논설고문)
 
온누리 – 막걸리(새전북신문, 7월16일자) 
 
 
 
 
  요즘 구물구물한 날씨, 오늘은 막걸리 타령이다.
 
   인걸만 지령이 아니고 막걸리도 땅을 따른다. 와인처럼 막걸리도 숙성주라 기후, 물맛, 손맛 따라 느낌이 제각각이다.
 
서울 ‘장수막걸리’는 꼭 서울내기들처럼 세련됐다. 전국 800개 양조장 주 유일하게 인공탄산을 첨가해 맑은 첫맛, 쌈빡한 끝맛이다. 적당히 묽은 농도에 우유처럼 희디 흰 장수막걸리 한 두 병 차고 북한산 정상에서 한 잔, 내려오다 기슭 주막에서 또 한 잔 하던 걸 잊지 못한다. 수많은 이가 서로 부딪히지 않기 위해서인지 대도시가 시골보다 규칙을 잘 지킨다. 장수 막걸리는 서울 사람들처럼 질서 순응, 규칙 준수형이다. 점도와 탁도, 신맛·쓴맛·단맛의 균형이란 점에서 장수막걸리는 가히 국가대표급 ‘범생이’다.
 
   전주, 전북에도 막걸리 수 십 종이 있다. 장수 번암막걸리, 진안 냉천막걸리, 남원막걸리, 완주 천둥소리와 뿌리깊은 막걸리 등 금세 생각나는 것만 십여종인데 게중 유통 강자는 ‘전주막걸리’다. 전주 막걸리 통칭이 아니라 (주)전주주조가 생산하는 고유 브랜드인 ‘전주막걸리’는 일단 첫맛이 서울 것보다 묵직하다. 걸쭉하다. 탄산이 일체 없고, 김치로 치면 아주 미세하게 군둥내가 난다 할까? 그래서 서울 등 외지인에겐 대번에 호불호가 엇갈린다. 하지만 잔을 거듭하다보면 이내 ‘인’이 박혀 그 ‘개미’를 잊지 못한다. 뭐라 딱히 표현 못하나 시원하고 혀를 잡는 것을 전북인들이 “개미 있다” 할 때의 바로 그 표현 ‘개미’다. 전주막걸리는 전국 공장 막걸리 중 유일하게 천연 암반수를 사용한다.
 
   인천 ‘소성주’, 부산 ‘생탁’도 명주다. 소성주는 넓은 포용력과 쏘는 듯한 청량감을 동시에 갖췄으며 생탁은 마시노라면 부산사투리가 입속에서 충돌한다. 이밖에 지하수로 빚은 여수 ‘개도막걸리’, 장수막걸리와 소성주 중간 쯤인 경기도 표준 맛 ‘지평막걸리’ 등 대한민국은 넓고 마실 건 많다. 이상 모두 공장 제조품이 이 정도니 송명섭 막걸리, 금정산성 막걸리 등 누룩으로 빚은 수제(手製)야 말해 무삼하리요. / 임용진(논설고문)
 
온누리 – ‘수목 막걸리'(새전북신문, 7월23일자)
 
 
 
 
  전주 막걸리 집 전성시대다. 평화동, 효자동, 우아동, 인후동, 서신동, 삼천동, 경원동 등 막걸리 타운에 전국에서 수많은 손님이 몰린다. 이들에게 매혹은 막걸리 맛보다 안주다. 푸짐한 안주, 싼 값을 내건 시내 유명 막걸리 집에 입장하겠노라고 주말 장사진이 늘어서는 건 이미 익숙한 풍경이다. 그러나 아득한 옛날부터 그랬던 건 아니다. 전주 막걸리 시대 첫 장은 불과 20년 전도 안 되는 1997년에 열렸다. 삼천동 ‘수목 막걸리’가 효시다.
 
   ‘수목’은 원래 막걸리 집이 아니다. 전남 화순 출신의 여성 정선희(62) 씨가 1994년께 삼천동 골목에 ‘수목’을 열고 첨엔 약주 청주 등을 팔았다. 손맛 있고 질 좋은 안주를 내 값도 비교적 쌌다. 그러나 1997 IMF(국제통화기금) 외환사태로 나라가 거덜 나자 서민술인 막걸리로 주종을 바꿨다. 하지만 내는 안주는 그대로여서 “값싸고 안주 끝내주는 집”으로 금세 소문 났다. 전주 식 표현으로 술꾼을 ‘똥꾼’이라 한다. 전주 최강 ‘똥꾼’인 양동주, 김덕중(60) 씨 등이 당시 팔팔하던 40대 초반 주력(酒力)으로 ‘수목’에 출퇴근 하며 주위를 끌어들여 이곳은 곧 명소가 됐다.
 
   정선희 씨는 친절하기보다는 막걸리 집 주인답게 걸걸하고 의리파다. 혼자 하는 가게고 고객이 몰리다보니 한시 바삐 술이 고픈 단골들은 제집마냥 걸레 들고 술상을 치워야 했다. 양동주 씨가 말했다. “사람 하나 쓰지 그러냐”. 정선희 씨가 답했다. “그 돈(=인건비)으로 손님 안주 한 상 더 내겄다.”
 
   ‘수목’의 철학은 최고급 재료와 즉석에서 만든 신선 안주였다. 미리 만든 안주를 밖에서 공급받아 너줄하게 늘어놓는 요즘 막걸리 집과는 차원이 다르다. 정선희 씨는 2000년대 중반 ‘번암 막걸리’를 경영했고 약간 공백을 거쳐 지난해 9월1일 ‘수목’을 다시 열었다. ‘수목’의 후예가 요즘 천하제일인 삼천동 ‘용진집’이다.
 
  삼천동이건 서신동에서건 요즘 전주 ‘똥꾼’들은 찾을 수 없다. 대신 관광객들로 떠들썩하다. 족히 수백 곳은 넘을 지금 전주막걸리 집 봇물은 한 세대 전 ‘수목’에서 터뜨렸다. / 임용진(논설고문)
 
 
 
 
온누리 – ‘똥꾼'(새전북신문, 7월30일자)
  오늘은 아침부터 죄송하지만 똥타령이다.
 
지난번 막걸리 타령에서 ‘똥꾼’이란 말을 썼더니 ‘신문지상에 넘새스럽다’, ‘술꾼 놔두고 그게 뭐냐’는 불만이 들린다. 하지만 어쩌랴. 똥꾼이란 전주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쓰는 말인 것을. 분명 고상한 표현은 아니다. 싸구려 술집 골목에서 도는 상말이다.
 
   소설가 이병천은 “ ‘똥꾼’엔 말 맛이 없다”고 질색한다. 하지만 똥을 좋아한 작가도 많다. 대표적인 분이 연암 박지원(1737~1805)이다. 그는 ‘열하일기’ 중 ‘일신수필’에서 “중국에서 가장 볼 만한 게 흙덩어리과 똥무더기”라고 말했다. 이때 똥은 쓰임을 날카롭게(= 이용·利用) 하는 문명의 상징이다. 또 소설 ‘예덕선생전’에선 동네 똥장수인 엄행수를 “군자답다”고 극찬한다. 엄행수는 아침이면 삼태기로 똥을 퍼나르는데 거기엔 말똥, 쇠똥, 입회령(돼지똥), 좌반룡(사람똥), 완월사(닭똥), 백정향(닭똥) 따위가 가득하다. 소설 ‘호질’에서도 위선자인 북곽선생이 호랑이 꾸짖음에 놀라 빠지는 데가 똥거름통이다. 연암의 글엔 온통 똥 향기가 그득하다.
 
   연암 등에게 똥은 메타포지만 아무 사심 편견 없는 어린이들에게 똥은 그 자체로 재미다. 그 이상 재미있는 말이 없어 이제 갓 말 배우는 아이들도 ‘똥!’이라고만 하면 자지러진다. 동화책, 그림책 이름도 그래서 “누가 내 머리에 똥 쌌어”(베르터 홀츠바르크), ‘강아지똥’(권정생) 등 똥이 많이 들어간다. 애기똥풀이란 야생화는 ‘아기’ + ‘똥’이 결합된 가장 아름다운 작명 중 하나다. 똥으로 사람 재밌게 하는 건 담시 ‘똥바다’(김지하) 만한 게 없을 것이다. 임진택이 판소리로 만들었고 후에 무개념 ‘일베’(=일간베스트)족을 풍자한 ‘인터넷 똥바다’로도 진화한 이 담시엔 똥이란 말이 족히 천번은 나온다.
 
   나는 아무래도 철 없는 쪽에 가까운가 보다. 이병천 지적대로 ‘똥꾼’이란 표현에 말 맛 적은 건 알겠으나 그래도 갈수록 거부감이 없어진다. 막걸리를 ‘똥이 가게’ 마시는 전주 서민 ‘똥꾼’들과 어울릴 때 가장 즐겁다. 와인, 양주와 ‘똥’이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 또한 맘에 든다. / 임용진(논설고문)
 
임용진 칼럼 – ‘게하’에서(새전북신문 8월7일자)    닷새 후가 말복(12일)이다. 청년 실업자수는 115만명, 가계부채 총액은 1천 100조원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어제 모처럼 국민담화를 해 집권 후반기 구상을 밝혔다. 요점은 노동시장개혁을 통해 청년실업을 줄여야 한다는 것인데 임금 등에서 기성세대 양보를 강조했으니 이젠 창조경제가 아니라 ‘양보경제’ 시대인가 보다. 고용절벽이란 말을 써야할 정도로 절박한 건 공감하지만 앞으로 제 몫을 나눠야 할 기성세대에겐 연일 계속되는 폭염경보보다 대통령 말씀이 더 더위 나게 생겼으니 오늘은 객담이나 할까보다. 게하 이야기다.
 
   게하란 게스트하우스 준말이다. 고속버스터미널을 고터라 하는 것처럼 젊은이들은 뭐든지 줄인다. 호구지책으로 게하를 한 지 2년째다. 매일 대하는 게 젊은이들이어서 온통 새 세상이다. 그간 실감한 걸 두서 없이 적으면 이렇다.
 
 
 
  ● 여자와 남자는 얼마나 다른가.
 
   여성은 계획을 세우고 또 세우고 변경하고 가다듬는다. 한 두 달 전에 예약했다 입실 며칠전에 일정을 바꾸는 경우가 많다. 남성은 이에 비해 아무 생각이 없다. 성수기 방이 꽉 찼을 때 땀 흘리며 무거운 짐 메고 예약도 없이 불쑥 들어와 제 것 달라는 투로 “방 없어요?” 묻는다. “없어요”라고 하면, “알았어요”. 두 말 없이 나가 그들은 찜질방으로 직행한다.
 
   여성은 양파처럼 겹겹이다. 퇴실 후 여성실엔 일반적으로 남성실보다 남긴 것, 떨어뜨린 것이 많아 개업초 ‘여성이 깨끗하다’고만 믿던 나를 당황케 했다. 게하에선 그날 만난 생면부지 젊은이들끼리 밤늦게 술파티를 벌이기도 하는데 여성은 남성과 같이 있을 때보다 동성끼리만 있을 때 훨씬 더 크게 깔깔 거리고 술도 엄청 마신다. 남성은 남들 다 가는 주말에 여행 떠나지만 여성은 싸고 한적한 주초를 선호한다. 그래서 월요일엔 여성 게스트가 남성보다 많다. 난 딸을 키웠지만 그저 건성이었을 뿐 여성의 ‘화장발’이 변장 수준인 줄은 몰랐다. 낮에 입실할 때와 저녁 취침 무렵, 다음날 얼굴 가다듬고 퇴실할 때가 그때그때 달라서 같은 이에게 “누구…” 하고 실수한 적도 있다. 이런 작은 것도 모르고 오십 구년을 지낸 나는 얼마나 인간에 무지했나 속으로 웃는다. 물론 모든 남녀가 다 그렇다는 건 아니니 오해 없으시길.
 
 
 
  ● 내 친구는 어디까지인가.
 
   군대건 회사건 성인 사회는 보통 수직구조다. 지시, 이행의 계서적 관계에서 나도 수십년을 살았다. 이에 비해 게스트하우스는 완전 수평사회다. 입실하는 게스트의 연령, 출신, 나라가 제각각이지만 ‘여행’ 하나로 그들은 오픈된다. ‘여행객’ 하나로 그들은 수평이다. 호스트(=쥔장)인 나도 수십년 아래 젊은이들과 점점 친구가 되어가고 있다. 첨엔 날 부르는 게스트들의 ‘아저씨’ 호칭이 어색했으나 요샌 속으로 ‘할아버지라고만 하지 말아다오’ 주문한다.
 
이십대 초반 멋을 낸 여성 게스트가 현관을 들어서자 마자 묻는다. “오늘 남성 게스트 많아요?” “별로 없는데, 난 어때요?” “제 스타일 아니에요” 우리는 깔깔거리며 웃는다.
 
   게하를 하다보면 ‘이게 인생’이란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인생 별 거 아니다. 사람 만나는 거고 사람 헤어지는 거다, 하고 생각한다. 인연이라 할 수도 있는데 그들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미쳐선 내가 임마누엘 칸트 만큼 고상하진 않지만 적어도 ‘수단’으로 만나진 말아야지 경계한다. 언젠가 스님 도법이 그랬다. “차이점 말고 공통점을 찾아라”고. 각지에서 와 진지하게 인생, 장래에 관해 이야기하는 젊은 게스트들은 어린 나이에도 공통점을 찾으려고 대견하게 노력한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페이스 북에서 이런 글을 공유했다고 한다.
 
   “우리는 지구라고 하는 멋진 펜션에 잠시 왔다 가는 여행객들입니다. 적어도 지구를 우리가 만들지 않았고 … 다들 일정 기간 후에 떠나는 것을 보면 이곳에 여행 온 것이 맞는 듯합니다. 단지 여행의 기간이 3박4일이 아닌 70, 80년 정도일 뿐인데 우리는 여행 온 것을 잊을 때가 많습니다.…여행을 소중히 여겨주세요. 나에게도 딱 한번이지만 다른 사람에게도 딱 한 번 있는 여행이니까요.” 반기문 총장이 유엔이란 펜션(=게스트하우스) 주인이라면 박근혜 대통령은 대한민국 펜션의 주인이다. 제발 여행자의 철학이여, 저들을 교화시킬진저. 소소(笑笑). / 임용진(논설고문)
 
 
 
온누리 – 막걸리 전사(前史) (새전북신문, 8월6일자)    오늘날 전주는 대한민국 막걸리 수도라 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전국 막걸리가 수백 종이나 되지만 전주처럼 막걸리 타운이 여럿 생기고 본토박이들의 사랑이 지극한 곳은 없다. 전주 막걸리 맛에 대해선 호불호가 엇갈리나 그 애주열기에 관한 한 논자들 간에 이견(異見)이 별로 없다. 인구대비 막걸리 집 숫자로 전주가 단연 전국 최다일 것이다.
 
   1970년대 초 막걸리 집은 선술집 형태였다. 요즘처럼 상과 의자를 갖춘 펍 스타일이 아니라 주모와 고객 사이에 너비 두 자(60cm) 안팎의 긴 시멘트 대를 놓고 그 앞에 술꾼들이 일렬 횡대로 서서 마시는 그야말로 ‘선 술’ 집이다. 전주시내 주객 양동주(60) 씨에 따르면 “1970년대초 현 남부시장 앞 동양당약방 사거리에서 교동 옛 건강탕 사거리까지 170m 거리에 선술집이 12개나 됐다” 할 정도로 서민의 사랑을 받았다.
 
   하지만 1970년대 중반부터 막걸리는 ‘조국 근대화’와 급속히 자취를 감춘다. 그나마 가장 늦게까지 버틴 건 구 도청 맞은 편 팔달로변에 있던 ‘정화집’이다. 생존 전략인지 또는 지난날 주막 전통인지 ‘정화집’에선 주인에 고용된 월급쟁이 색시 몇 명이 술시중을 들었다. 당시 한 되 값이 150원. 지금의 1.8L(막걸리 세 병) 짜리보다 작은 1.2L 정도 주전자 하나와 안주 여남은 가지가 나왔다. 하지만 정화집도 1979년 겨울께 문을 닫고 이후엔 약주시대다.
 
  중앙시장 옛 소방서 자리 ‘설화집’, 한국은행 사거리 골목 ‘버들집’, 대성동 옛 자동차운전면허시험장 부근 ‘하동집’ 등이 잘 나가던 약주집이다. 약주 한 되에 300원. 먹을 만한 안주에 역시 술시중 색씨가 가끔 동석했다. 약주집에 이어 스탠드 바, 오픈식 노래주점 등이 인기를 끌면서 막걸리는 아주 잊혀진 듯 했다. 삼겹살, 등심 등 호황기 고기 안주에도 맞지 않았다. 하지만 1990년대 말 IMF(국제통화기금) 외환위기가 뜻 밖에 막걸리 중흥 계기가 됐다. 어려운 시기 서민들은 값싼 막걸리를 벌컥벌컥 들이켰고 1997년 개업한 삼천동 ‘수목’이 거기 불을 댕겼다. 지금은 권토중래한 막걸리집들이 전주 대표 브랜드가 됐다. / 임용진(논설고문)
 
 
 
온누리 – 가맥(새전북신문,8월13일자)    지난 주말 화제는 가맥축제였다. 경원동 한국전통문화전당서 이틀간 열린 이 축제에 총 1만여명이 몰렸다. 애초 조직위원회 예상으로 하루 1천명 씩, 이틀간 2천명 들겠거니 예상했는데 이를 다섯배나 넘겼으니 문자 그대로 ‘대박’이다. 참가자들이 안주 사려고 한 시간씩 장사진을 쳤다. 그들은 의자가 모자라 행사장 잔디밭에 주저앉아 남녀노소 모르는 이끼리 서로 잔을 건넸다. 모처럼 한여름밤 시원하게 시끄러웠다.
 
   애초 작당은 술꾼 서넛이 했다. 천상묵(호남한의원장), 소야(스님·동화작가), 임동식(하이트맥주 차장), 김정두(경제살리기도민회의 팀장) 등은 자주 잔을 맞대면서 전주 가맥을 지역명물화 하자는데 평소 의견일치를 본 사이. 경원동 영동가맥을 비롯한 업주들도 취지에 절대 찬성했다. 이들은 나이로 가장 연장이고 신망이 두터운 김영배(63·전 민족예술총연합회 이사장)에게 조직위원장을 맡으라 부탁했다. 김영배는 다음 셋을 조건으로 허락했다.
 
   “첫째, 관 지원 안 받는다. 둘째, 가맥업소들이 물리적 위치나 행사내용에서 중앙에 위치해야 한다. 셋째, 정치인 등의 ‘갑질’ 간섭을 불허한다.”
 
   행사는 그대로 됐다. 전주시는 장소제공 등 행정지원만 했다. 한국관광공사가 3천만원 지원 조건으로 이것저것 요구했으나 조직위원회는 거절했다. 행사에 참여한 가맥업체 12개 부스마다 긴 줄이 늘어서 그들은 싱글벙글했다. 술자리에 밥맛 떨어진다는 이른바 3대 기피 직종, 정치인·공무원·기자도 눈에 띄었으나 어디까지나 그들은 명찰을 뗀 술꾼으로서 즐거워했다.
 
   지난해 동학 120주년 모악대동제도 관 지원을 일체 피하고 민간주도로 이뤄져 호평받았다. 전주 사람들은 참 깐깐하다. 없는 도시, 가난한 곳이지만 남의돈 받을 데와 안 받을 데를 가린다. 올해 첫 가맥축제가 성공함에 따라 내년엔 더 확대될 것이다. 현재 유명한 대구치맥페스티벌, 인천송도비어페스티벌, 해운대송도맥주축제 등이 전주를 부러워 할 날이 곧 올 것이다. / 임용진(논설고문)
 
 
 
온누리 – 백정기(새전북신문, 8월20일)
 
 
 
 
“나의 구국 일념 은 첫째, 강도 일제(日帝)로부터 주권과 독립을 쟁취함이요. 둘째는 전세계 독재자를 타도하여 자유․평화 위에 세계 일가(一家)의 인류공존을 이룩함이니 왜적 거두의 몰살은 나에게 맡겨 주시오.”
 
   1933년 3월, 중국의 조선인 아나키스트 거물 백정기(1896~1934)는 주중 일본대사 아리요시 아키라를 암살키로 하고 동료들에게 이렇게 선서했다. 결행일은 3월17일, 장소는 상해 홍커우의 일본 요정 육삼정이다. 아리요시와 국민당 내 친일 중국 정객이 회동하는 것을 틈타 육삼정에서 그들을 몰살할 계획이었다.
 
  백정기는 동지인 이강훈, 원심창과 육삼정에서 200m 떨어진 음식점 송강춘 2층에서 대기했다. 무기는 바로 전 해(1932년) 윤봉길이 홍커우 공원에서 사용한 것과 같은 대형폭탄. 윤봉길 의거 후 임시정부 주석 김구가 상해를 벗어나면서 오면직에게 맡긴 폭탄 2개를 그대로 쓰기로 했으며 이밖에 교전에 대비, 권총 2자루와 탄환 20발, 수류탄 1개를 더 준비했다. 백정기와 이강훈은 아리요시 등이 보이면 2층에서 던져 적중시킬 참이었다. 하지만 적의 출현만 초조히 기다리던 그들에게 일경이 들이닥쳐 모두 체포당하고 말았다. 아나키스트 중 밀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배신자가 누군진 물론 아직까지 자세치 않다.
 
   영화 ‘암살’이 인기다. 일본군 사령관과 민족반역자 암살기도, 밀정의 등장, 실패 및 반전 등 재미도 있지만 관람 중 백정기 의사가 떠올랐다. 그는 재판에서 무기징역 받고 1934년 6월 5일 옥중 순국했다. 그는 재판장을 향해 “총살하든 교살하든 그것은 너희들 자유다. 정당한 행동을 하다 죽는 것을 조금도 후회하지 않는다”고 일갈했다. 서울 효창공원 삼의사(상해의거 윤봉길, 동경의거 이봉창, 육삼정의거 백정기)묘역에 안장됐으며 정읍군 영원면에 백정기의사기념관이 있다. “조국이 독립되면 내 무덤에 꽃 한 송이만 꽃아 주기 바란다”. 백정기의 유언이다. 그는 전북 부안군 동진면 하장리(현재 부안읍 신운리) 사람이다. / 임용진(논설고문)
 
 
온누리 – ‘잊지 않는다'(새전북신문, 8월27일)
 
 
 
 
  전주는 안 잊는 도시다. 전주에 오는 관광객들은 한옥마을을 걷고 연꽃향기에도 취하지만 시내에 널린 노란 세월호 현수막에 놀란다. 팔달로를 비롯해 기린로, 백제로 등 간선 도로 양쪽에 매달린 노란 개인 현수막 1천7백여개가 일년 오개월째 안타깝게 휘날리고 있다. 50cm × 120cm 정도 되는 길다란 노란 천에 시민들이 저마다 사연과 염원을 썼다. 오늘 아침 본 것 중 하나엔 ‘사람아, 아 사람아!’(채니, 주니)라고 써 있었다. 짧지만 금새 가슴이 먹먹해진다. 아, 사람아. 내 전주 사람들이여!
 
   세월호 현수막 덕에 전주는 충경로 은행나무 샛노란 가을 뿐 아니라 사철 황금 물결이다. 가슴이 너무 아프지만, 그래도 ‘하트 오브 골드’(황금마음)가 여기 있다. 전주에 온 외지인들이 말한다. “아니, 여긴 아직도 세월호가 있네!” 어떤 이는 움찔 깨닫고 어떤 이는 반대로 불편한 기색이다. 하지만 당신들 반응과 상관없이 전주는 계속 할 것이다. 잊지 않을 것이다.
 
   한옥마을 건너편 풍남문 광장은 비운의 도시 안산과 함께 전국 세월호 추념의 중심이다. 세월호참사전북대책위원회 천막이 사건 발생 후 죽 열려있고 그 주변 매달린 수많은 노란 리본은 그들이 떠났던 봄날 개나리 울타리처럼 출렁댄다. 한 시민이 기증한 세월호 주목 나무가 있고 그 아래 최근 조촐한 세월호 농성 표지석도 만들었다. “잊지 않고 행동하겠습니다.” 이렇게 쓰여있다.
 
   전주시도 대단하다. 비판의 현장인 개인 현수막, 천막 등 설치물에 대해 한 번도 ‘철거하라’는 등 시비를 걸지 않았다. 천막 옆에 지난달 위안부 피해자를 상징하는 ‘평화의 소녀상’이 제막됐고 시간을 거스르자면 121년 전 전봉준 등 동학군도 바로 여길 통해 혁명수도에 입성했을 것이다. 전주가 그런 곳이다.
 
   대책위는 풍남문 광장에서 개인 현수막 신청을 계속 받고 있다. 값을 물으니 한 장에 육천원이란다. 뭘 쓸까, 문구를 고심해 나도 하나 신청해야겠다. 내 염원도 천개의 바람으로 그들 심연에 닿길. / 임용진(논설고문)
 
 
온누리 – 팽목(새전북신문, 9월3일자)
 
 
 
 
  지난 8월29일 팽목항에 당일치기로 다녀왔다. ‘가야지, 가야지’ 진즉부터 맘만 먹다 마침 세월호 침몰 500일이란 계기도 있어서 몇 달 전 고등학교 영어 교사를 명예퇴직한 친구와 함께 오전 10시 10분 승용차로 출발했다. 전자지도에 ‘팽목항’을 입력하니 자동적으로 ‘진도항’으로 바뀐다. ‘아하, 지난날 이리시(현재 익산시)처럼 사고 후 이름을 바꿨구나.’ 거리는 230km. 전주서 서울 가는 정도다.
 
   무안, 함평 거쳐 진도대교를 지나니 12시 40분, 팽목까진 약 30분이 더 걸렸다. 진도 대교 위에서만 봐도 벌써 물살이 하얗게 빠르다. 팽목에 도착하니 승용차들이 많다. 마침 주말이어서 인근 관매도, 조도 가려는 관광객과 세월호 추모객이 뒤섞였다. 바다가 보이고 자갈밭에 분향소가 있고 조금 더 가면 길이 50m 쯤 되는 방파제가 있다. 그것 뿐이다. 푸른 바다, 눈부신 햇살, 빨간색 등대와 정적이 전부다. 다 멈추고 조용한 가운데 방파제 난간에 달린 수많은 노란 리본만 바람에 요란하다. 이것이 소리 없는 아우성이다. 세월호가 침몰한 곳은 여기서 30km나 떨어진 먼 바다니 보이는 건 다도해 섬 뿐이다. 유족들이 얼마나 애를 태웠을까.
 
   등대 아래 빨간색 하늘나라 우체통 하나가 있다. 내 친구가 거기 편지를 써 넣는다. 나도 써 넣었다. ‘사랑한다, 그대들. 내 아들 딸만큼. 산 자들도 슬프다. 부끄러움은 이제 접자. 앞으로 할 일이 생겼다. 잊지 않으려 애쓸 것. 내가 인간임을 자각케 해준 너희들을 항상 사랑한다. 세월호 500일, 한 애비가’
 
   분향소에서 한 유족을 만났다. 단원고 재학중이던 아들 사진이 거기 있는 분이다. “진실요? 우리 생전엔 아무 것도 못 밝히고 아무 것도 바꿀 수 없을 겁니다. 저 사람들이 얼마나 강한데요.” 담담한 그 목소리가 절규하듯 들렸다. 전주에 돌아오니 나보다 먼저 팽목에 다녀온 다른 친구가 묻는다. “아무 것도 없지?” 나는 속으로 답한다. ‘아무 것도 없음이 있데’.
 
   사람은 누구나 제 삶의 순례자지만, 많은 이들에게 팽목은 인생 순례의 정점일 것이란 예감이 들었다. 앞으로도 오랫동안. / 임용진(논설고문)
 
 
온누리 – 난민(새전북신문, 9월10일자)
 
 
 
  그 사진을 보셨을 거다.
 
   그 꼬마는 빨간색 셔츠, 파란색 반바지를 입고 있었다. 시리아 북부 코바니 출신의 3살 남아 에이란 쿠르디는 부모, 형과 함께 시리아 내전을 피해 배 타고 지중해를 건너다 파도에 휩쓸려 익사했다. 쿠르디 시신은 지난 2일 터키 해변에서 발견됐다. 바닷물에 시달렸음에도 작은 두 발은 운동화를 꼬옥 신고 있었다. 사고 현장에선 가장 먼저 주인 잃은 운동화가 눈에 띄는데 쿠르디는 생전 모습 그대로, 옷차림 그대로여서 더 가슴 아팠다. 죽음의 바다를 건너고 나서야 추위와 공포를 벗어날 수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가슴 아픈가. 더구나 세 살 어린 것이.
 
   백사장에 엎드려 자는 듯한 쿠르디의 얼굴과 머릿카락을 파도가 쉴 새 없이 어루만지고 있었다. 아직도 우윳살이 남은 두 손바닥은 하늘을 향해 반쯤 펴져 있었다. 지난날 가끔 취재 현장에선 ‘사진기자가 될 걸’ 하고 느낄 때가 있었다. 사진은 백 마디 말보다, 어떤 명문보다 훨씬 직정적(直情的)이다. 수사나 거짓이 없고 빛처럼 빠르다.
 
   쿠르디의 사진은 전 세계를 각성시켰다. 시리아 내전에 관한 관심을 환기했다. 독일, 프랑스는 즉각 2만~3만명 씩 시리아 난민 입국을 더 허용했다. 쿠르디 죽음을 계기로 수 만 명에 이르는 시리아 어린이들에게 물과 음식, 주거 등 그나마 안정된 환경이 약속됐다.
 
   국제난민의정서, 세계난민기구 등 법적인 장치가 있지만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외국인에 대한 난민지위 인정을 꺼린다. 경제적, 사회적 부담이 큰 까닭이다. 하지만 즉각 시리아 난민 입국을 발표한 독일, 프랑스에서 보듯 주권국의 의지가 결국 문제다. 어떤 인도적 사태에 대해 정부는 결정하고 국민은 성숙한 자세로 이를 지지하는 게 선진국이다. 한국은 어쩐지 모르겠다. 제 나라 청소년 100여명을 수장하고도 정부는 미적거리고 국민은 무관심해 자국내에서 자발적 난민계층이 생겨도 가슴 아픈 줄 모르는 희한한 나라는 아닌지. / 임용진(논설고문)
 
 
 
 온누리 – 수학여행(새전북신문 9월17일자)
 
 
 
 
    지난 1960년대 후반 육지 출신 김선생이 군산 선유도 국민학교(=초등학교) 교사로 부임한다. 그는 섬 어린이들이 자동차는 고사하고 자전거마져 구경한 일이 없음을 알고 안타깝게 여겨 서울 수학여행을 계획한다. 그러나 반대가 심하다. 어떤 부모는 집안 일손이 딸리니 학교가 돈 내고 어린이들을 데려가라고 한다. 하지만 방과 후 갯지렁이를 잡아 여비를 마련하는 등 우여곡절 끝에 서울 수학여행을 성사시킨 선유도 어린이들. 수학여행 마지막 날 김선생 친구 등이 마련한 리어카를 선물로 받으며 그들은 “내 고장을 꼭 잘 사는 곳으로 만들겠다” 다짐한다.
 
     이는 영화 ‘수학여행’(1969·감독 유현목)의 줄거리다. 당시 한국일보에 실린 실화를 바탕으로 했으며 김선생 역을 고(故) 구봉서가 맡았다. 당시 난 국민학교 졸업반이었다. 팔달로 변 지금은 없어진 옛 아카데미 극장에서 단체관람 하며 동시대, 동년배의 현실에 어린 눈물을 적신 기억이 있다.
 
    요즘 수학여행은 판이하다. 며칠 전 국회에 제출된 교육부자료에 따르면 대전 동신과학고가 학생 한 명당 306만원을 내고 뉴욕 등을 다녀와 전국 고교 수학여행비 최고액을 기록했다. 충북과학고( 302만원·미국), 한국민족사관고(297만원·영국), 인천진산과학고(288만원·미국), 부산과학고 (282만원·미국) 등이 비싸기 ‘베스트5’에 들었고 돈 문제에선 항상 등외인 전북이 여기서만은 웬일인지 ‘10위’(전북과학고, 126만원·일본), ‘11위’(전북외고, 125만원·싱가포르) 했다.
 
    반면, 연천의 한 야영장에서 숙박을 해결한 경기 용인고(2만5천원)나 지역간 이해를 위해 전라도를 다녀온 경남 의령여고(12만원) 등도 있다. 도내 무주 푸른꿈고(9만원)도 임실·곡성·구례를 돌았다. 그러고 보니 수학여행비 비싼 곳은 모두 자사고, 특목고이고 싼 곳은 일반고, 대안학교이다. 그들이 왜 비싼 돈 들여 외국만 가려는지 모르겠다. 예컨대, 문화상품 천지인 진도를 돌면서 동시대에 스러진 세월호 동급생의 꿈을 팽목에서 추모한다면 그건 ‘위험한’ 수학여행인가? / 임용진(논설고문)
 
 
온누리 – 추석 잡화(雜話) (새전북신문, 9월24일자)
 
 
 
 
   이번 주말이 추석연휴다. 신소리나 한 번 하자.
 
   명절 땐 맛으로도 귀향한다. 타지 사는 전주 출신들에겐 풍년제과 땅콩센베이, 일품향 군만두, 백일홍 찐빵, 홍콩반점 짜장, 콩나물국밥, 막걸리, 비빔밥 등이 대표적인 고향 맛이다. 대부분이 반세기 이상 문을 열어놓고 있지만 몇 달 전 중앙동 홍콩반점이 폐점했다. 햇볕 따뜻한 이층 창가에서 후루룩 후루룩 하던 그 구수한 연갈색 짜장면 맛을 이젠 더 이상 볼 수 없다.
 
   없어진 게 또 있다. 고스톱 풍정이다. 명절이면 부모 친척 형제 친구끼리 방석 깔고 앉아 안방 건넌방서 마주치던 화투장 소리가 안 들린 지 꽤 오래다. 고스톱을 일본이 한국사람 심성 망가뜨리기 위해 보급했다는 음모론부터 한때 너무 성행했던 나머지 고스톱 망국론까지 나와 두들겨 맞았으니 그 놀이가 잦아들지 않았다면 오히려 이상하다.
 
   하지만 나는 고스톱 옹호론자다. 술을 손위 사람한테 배우듯 고스톱도 그렇게 배우면 된다고 생각한다. 영국 사람들이 식탁에서 브릿지 하듯, 미국 가정이 프로 스포츠 중계로 소통하듯 우리도 명절에 윷놀이, 고스톱 핑계로 이야기 꽃 좀 피우면 안 될 게 뭔가. 고스톱은 남 탓 하는 책임전가가 단점이라고 한다. 하지만 서로 핀잔 주고 얼굴 벌개지며,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도 나누면서 즐길 수 있는 게 고스톱의 덕이다. 치다 화내고 후회하면서 인간수양도 된다.
 
   연휴기간 중 뉴스로는 프란치스코 교황 미국방문을 전하는 외신이 좀 참신하다. 게스트하우스에 살며 소형차 애용하는 이 서민 교황이 미국 고질인 빈민, 이민 문제에 어떤 언급을 할까, 대선후보 도널드 트럼프를 비롯한 공화당 우파는 또 어떤 반응을 보일까.
 
   명절은 생활 전선 속 짧은 휴전(休戰)이다. 추석 덕담이랍시고 상투구에 불과한 단체 인사문자를 내 전화기 속에 마구 난입시키는 건 이 휴전 협정 위반이다. 자제해 주시기 바란다. / 임용진(논설고문)
 
 
임용진 칼럼 – 어른들의 대한민국(새전북신문, 9월25일자)
 
 
 
 
   나는 평상시 윗옷 깃에 꽂는 노란색 세월호 작은 리본을 결혼식 등 남의 경사에선 가끔 뗀다. 보는 이가 어찌 받아들일까, 눈치를 보아서인데 또 떼면서도 내가 이걸 떼야 하나 망설이고 자신을 못마땅해 한다.
 
   추석도 마찬가지다. 명절에 하필 세월호 얘기람. 하지만 꼭 해야겠다. 기만적인 무관심이 도를 지나친 듯하기 때문이다. 중앙일간지, 공중파 TV 등은 물론이려니와 ‘여당 대표 사위 마약 투약’ 등을 하루 내내 ‘하하’ 대며 곱씹는 종편 유선방송에 이르러선 할 말이 없다. 최근 묻혀 버린 세월호 이슈는 이렇다.
 
   ▲ 세월호 특조위 활동 시작 / 예산 제로, ‘낙하산’ 직원 등 때문에 출범 후 반년간 유명무실 고사당할 뻔했던 특조위(정식명칭 ‘4·16세월호참사 특별조사위원회)가 뒤늦게 살아나긴 했다. 특조위 고위직(=행정지원실장), 실무직(=조사1과장)을 정부 파견 관리로 충원하는 절충안을 특조위원들이 받아들였고 예산도 당초 신청한 160억원에서 45%가 깎였으나 89억원이 배정됐다. 특조위는 지난 14일부터 앞으로 6개월간 피해자 대상 진상규명 조사신청을 받는다. 수사권, 기소권 없는 독립조사권이긴 하지만 특조위 본령이 이제 시작됐다. 하지만 걱정은 크다. 한국 국가권력이 딴 건 몰라도 1947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이른바 ‘반민특위’ 이후 민간 차원의 조사는 여러 이유로 비틀거나 심지어 방해하는 특별한 재능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 세월호 배·보상 접수 / 해양수산부는 지난 1일부터 오는 30일까지 9월 한 달 간 세월호 참사 피해자 대상 배상, 보상을 접수한다. 보도에 따르면 해수부는 ‘특별법 규정에 따라 신청 기간이 끝나면 원칙적으로 배보상을 더 신청할 수 없다’고 밝혔다 한다. 하지만 난 상식적으로 알지 못하겠다. 민간 특조위가 피해자 진상규명 조사신청을 받고 결과를 내려면 앞으로 반년도 훨씬 더 걸릴 터인데 정부 해수부는 이달 내에 피해신청을 완료하고 기한 넘기면 보상도 없다니, ‘선 보상, 후 피해조사’는 혹 앞뒤가 바뀐 것 아닌가. 희생자 일부나 화물주, 어민 등 보상이 시급한 이들과 상세한 조사 및 심리적 보상을 우선시하는 이들 사이엔 시간 개념이 다른데도 이 차이를 인정치 않고 몰아치니 정부는 흡사 ‘사건 종결’로 오해한 것 아닌지 모르겠다.
 
   ▲ 추모교실, 비겁한 어른 / 안산 단원고엔 당시 2학년이던 희생자들의 교실 10개가 아직도 524일째 빈 자리로 남아 돌아오지 않는 주인들을 추모하고 있다. 올해 2학년 학생들은 딴 교실서 공부하고있다. 또 지난 6일 KBS TV ‘도전 골든벨’에 출연한 한주연(안양 부흥고) 학생은 “기억하고 싶지 않다고 해서 모른 척 하고, 나의 일이 아니라고 해서 못 본 척 하는 비겁한 어른은 되지 않을 거예요.”라고 말했다. 발언 대부분이 잘리고 불과 몇 초 방영됐지만 이 명료한 세월호 ‘불망’(不忘) 선언은 트위터, 페이스 북에서 큰 이슈가 됐다. 지난 5월엔 같은 프로에 출연한 고창여고생 수백명이 노란리본을 달고 나오기도 했다.
 
   지난해 4월16일을 기점으로 대한민국엔 ‘좌 우’, ‘빈 부’에 이어 또 하나 대립항이 추가됐다. ‘잊지 않는 자’와 ‘잊(으려)는 자’이다. 20, 30대 청년 세대는 임금피크제, 일자리, 연금 등 ‘밥그릇’ 관련해 기성 세대를 불신한 지 이미 오래다. 세월호 이후엔 ‘잊지 않는’ 10대가 여기 가세했다. 혹시 저들에게 불신과 불망의 조기교육을 시킨 것 아닌지, 후과를 어찌 감당할 것인지. 어른들의 대한민국이 나는 심히 우려된다. / 임용진(논설고문)
 
 
 
온누리, 전주 2017 FIFA U-20월드컵
 
 
 
 
   축구는 사람을 울리고 웃긴다. 도하의 비극. 지난 1993년 10월25일 일본 열도가 패닉에 빠졌다. 카타르 도하서 벌어진 미국월드컵 최종예선 마지막 경기에서 일본은 이라크에게 인저리 타임 종료 10초전에 동점골(2-2)을 허용하는 바람에 손에 다 잡았던 월드컵 티켓을 놓쳤다. 대망의 첫 월드컵 본선진출이 날아간 순간 국가적 실망과 낙담으로 도쿄 시 전체에 한 동안 정전과도 같은 정적이 흘렀고 이후 곧 비통한 흐느낌으로 변하던 과정을 마침 도쿄에 있던 나는 진하게 목격했다.
 
   그보다 10년 전 한국은 멕시코에서 신기원을 쐈다. 1983년 6월12일 제4회 멕시코 세계축구청소년선수권 4강전 몬테레이 경기장. 우루과이를 상대로 전후반 1대1로 비긴 한국은 연장 종료 1분 전(연장후반 14분) 신연호(당시 고려대1년)의 빨래줄 같은 슈팅으로 ‘4강 신화’를 썼다. 우루과이가 우루루 무너졌다. ‘악바리’ 박종환 감독이 이끈 한국은 이 대회서 붉은 색 상의를 입고 벌떼처럼 달렸다. ‘붉은 악마’의 시작이었다.
 
   축구는 인생이다. ‘세계 불패’인 브라질이 지난해 브라질 월드컵서 독일에 치욕의 1-7 패를 당할 줄 뉘 알았으랴. 영국의 전설적 선수 리네커가 “축구란 다 큰 남성 열한 명이 90분 공을 쫒아다닌 뒤 결국 독일이 이기는 경기”라 했지만, 독일도 언젠간 눈물을 흘릴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전 프랑스 국가대표 지네딘 지단(43)을 좋아한다. 시오노 나나미도 그를 “결혼하고 싶은 선수, 로마시대 백인대장 같은 이”라고 표현했다. 다 불세출의 선수지만 마라도나가 망나니, 메시가 완전체, 펠레가 천재, 베컴이 째쟁이라면, 지단은 인간의 고뇌와 허탈을 그라운드에 표현한 드문 경기인이었다.
 
   전주가 대전, 인천 등과 함께 오는 2017년 6월 20세 이하 축구월드컵(2017 FIFA U-20)을 유치했다. 전주월드컵경기장은 축구팬들 사이에 ‘전주성’이라 불리운다. 지난 2002년 한·일 월드컵에 개최에 이어 ‘전주성’에서 15년만에 더 젊은 월드컵을 볼 수 있다니 가슴이 뛴다. 내가 사는 곳은 참 좋구나! / 임용진(논설고문)
 
 
온누리 – 구절초 공무원(새전북신문 10월8일)
 
 
 
 
  정읍 산내면은 농사 말고는 별로 생업이 없고 그나마 칠보댐으로 인해 경작지가 물에 잠겨 농사지을 땅조차 좁은 곳이다. 어찌 살기 힘들었던지 지난 10여년 전 이곳 상투리 문맹률이 15%나(전국은 2%) 됐다 한다. 정읍 출신 관리 김문원(58·현 정읍시청 국장) 씨가 이때 산내면장으로 부임했다.
 
   요즘 차산차해(車山車海), 전국 명물이 된 ‘정읍 구절초축제’는 당시 김면장이 처음 발안한 것이다. 동기는 물론 가난 탈출이다. 소득증대를 위해 면민들과 함께 수도권 아파트에서 고구마, 곶감 등 소출을 직접 팔기도 했지만 별무 효과, 신통한 게 없을까 찾던 중 마을 논에 심어놓은 경관농업용 구절초가 김면장 눈에 띄었다. ‘이걸로 바깥 사람(=돈)을 끌어들이자’. 김면장 아이디어에 당시 유성엽 시장(55·현 국회의원)이 적극 찬성해 w지난 2005년 제1회 구절초 축제를 치렀다. 예산 고작 3000만원. 첫 장소는 지금과 달리 능교리 허궁실 논에서 소규모로 치렀으나 첫해 벌써 관광객 2만여명이 들었다.
 
   ‘대박 예감’을 실현하기 위한 준비기로 2006년 한 해는 축제를 쉬었다. 습기에 약한 구절초 살리기에 애를 먹었던 첫 장소 대신 망경대(산내면 매죽리) 야산으로 옮겨 구절초 씨를 대량 뿌리고 이듬해인 2007년 제2회 축제를 했다. 입장인원이 금새 두배로 늘었다. 돈이 문제였지만 산내면 출신으로 당시 기획재정부 사무관이던 안내형 씨(59·현 기재부 국장)가 든든한 백이 됐다. 그가 상사를 설득해 받아놓은 예산항목은 지금도 안정적인 중앙정부 자금줄이 돼 이를 가지고 꽃 심고, 다리 놓고, 도로 정비하고, 폭포 만들어 오늘의 대형 축제 밑거름이 된다.
 
   현재 치러지는 제10회 축제 입장료는 3,000원이다. 이중 2,000원을 입장객에게 현물 교환권으로 반환해주는데 이는 김생기 현 정읍시장(68) 아이디어다. 공무원이란 구절초와 같다. 이름 없는 들꽃이지만 게 중 어떤 이는 세상을 향기롭게 한다. 그래서 오늘은 일부러 김문원, 유성엽, 안내형, 김생기 이름을 명기했다. 올해 구절초 축제 예산은 2억4천만원, 관리비 5억원이며 지난해 관광객 수 55만명, 경제유발효과는 60억원이었다. / 임용진(논설고문)
 
 
 
온누리 –  총장 ‘삼김'(三金)
 
 
 
 
  고 김상협(1920~1995)은 지난 1975년 고려대학교 총장이었다. 그러나 유신 정부가 ‘긴급조치 7호’로 고대에 휴교령을 내리고 군대를 캠퍼스 내에 진주시키자 도의적 책임을 지고 총장실을 물러난다. 그는 풍모가 호랑이고 걸음걸이는 우보(牛步), 언변 유창했으며 동경대 법학과 졸업, 일찍이 잡지 ‘사상계’ 필자 시절부터 가장 깨어있는 지식인으로 존경받았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1977년 다시 고대 총장에 취임하나 1982년 전두환 신군부의 국무총리 제의를 수락하기 위해 두 번째로 총장직을 사임한다. 이미 1980년 초헌법 권력기관인 국보위원(=국가보위입법위원)이던 그는 입각 일성, “굽은 것은 펴고 막힌 곳은 뚫겠다”고 했으나 총리 재임 1년반 동안 아무 것도 펴지도, 뚫지도 못했다.
 
   고 김준엽(1920~2011) 역시 임기 중 사임한 고대 총장이다. 김상협이 호랑이라면 김준엽은 학이었다. 항일 광복군 출신인 김준엽은 풍모 후리후리하고 검은 테 안경에 행동거지며 목소리 인자했으나 외유내강, 평생 권력과 타협하지 않았다. 데모 주동자를 징계하라는 압력에 “내가 그만 두겠다”고 버티다 신군부에 미운 털이 박혀 결국 1985년 임기 중 사임한다. 제자들은 그가 그만두자 ‘총장님 사퇴 반대’ 시위를 한 달 이상 계속했다. 김준엽 역시 1988년 노태우 정권으로부터 국무총리 제의를 받았으나 일언지하에 거절한다. 그가 일기에 쓴 이유는 이렇다. “많은 학생이 아직도 감옥에 있다. 제자가 감옥에 있는데, 스승이라는 자가 어떻게 그 정부의 총리가 될 수 있겠는가.”
 
   최근 국사교과서 파문 가운데에 또 한 명 고대 총장 출신이 있다. 국정화 ‘총대’를 멘 김정배(77) 국사편찬위원장이다. 국편 위원장은 국무총리보다 두 단계 낮은 차관급이지만 김 위원장 역시 언제고 이 정부에서 영의정 입각 가능성이 있는 사람이다보니 선배 고대 총장들과 오바랩 됐다. 김 위원장은 사학과 교수던 김준엽의 직계지만 권력욕에선 세 김 씨 중 가장 센 듯하다. / 임용진(논설고문)
 
 
 
온누리 – ‘막 프로젝트’①
온누리 – ‘막 프로젝트’ 1(새전북신문 10월22일자)
 
 
 
   어제가 음력9월9일 중양절, 국화술 먹는 날이니 오늘도 막걸리 타령이다. 나흘 전 전주시의회에서 이경신 의원(새민련)이 ‘막 프로젝트’ 재정비를 주문했다(새전북신문 19일자 보도). ‘막 프로젝트’란 ‘막걸리 프로젝트’의 준말이다.
 
   지난 2007년 전주 삼천동 등 막걸리 골목을 문화상품화하자는 아이디어를 내고 이름짓고 추진한 것은 양창명(64), 안세경(58) 등 전주의 대표적인 ‘똥꾼’(=주객)들이었다. 양창명은 전직 언론인이며 안세경은 당시 전주시 부시장이다. 둘 다 전주 출신, 하루라도 막걸리를 마시지 않으면 입에 가시가 돋치는 이들이다. 양창명은 그때 평화동 주점인 ‘전주막걸리’에 출근하다시피 하며 혼자 하루 두 주전자(750ml 여섯병) 이상씩을 비웠다. 전주시내 청년 똥꾼들 멘토격인 그는 몇 가지 습관 또는 원칙이 있다. 막걸리 두 병에 맥주 한 병을 섞어 마신다, 막걸리 외의 주류는 입에 대지 않는다, 취태를 부리지 않는다, 술값 계산은 후배에게 양보 않는다 등등. 술이 들어갈수록 피부가 매끈하고 고와지는데 막걸리 전도사답게 그는 “이게 막걸리 덕분”이라고 전파했다.
 
    안세경 역시 호주가지만 고위직 공무원이다보니 마음껏 마시진 못했다. 하지만 거의 매일 저녁 대신 막걸리를 들이키는 소문난 매니아다. 그가 어느 날 고교 6년 선배인 양창명에게 말했다. “형님, 막걸리 골목을 전주 명물로 만듭시다.” “어떻게?” “제가 행정적으로 지원할테니 형님이 민간 프로젝트 총대를 메세요.” “좋다!” 고향사랑, 전주사랑으로 두 똥꾼은 흔쾌히 의기투합했다. 그 프로젝트 이름이 막 결정하고 막 밀어부친 ‘막 프로젝트’(정식명칭 ‘테마업소선정 지원사업’)다. ‘막’이란 어감이 막걸리만큼 서민적이었다.
 
   양창명이 ‘막 위원회’(=테마업소선정지원사업위원회) 위원장이 되고 역시 후배 ‘꾼’인 여태명, 송만규 8명이 위원으로 뭉쳤다. 시가 업소에 직접 지원하는 대신 전북도 예술인총연합회와 손잡고, 그 산하 미협, 문협 등 9개 예술단체가 각 업소와 자매결연해 지원하는 방식으로 일이 추진됐다. 시 예산 1억여원이 시 → 예술인단체 → 막걸리집으로 분배됐다. 위원회는 그 과정을 조율, 관리 했다. 위원회는 물론 무보수 봉사직, 똥꾼들의 명예직이었다. 막 프로젝트는 막걸리 도시의 막걸리인에 의한, 막걸리를 위한 거사로 추진되고있었다. / 임용진(논설고문)
 
 
 
임용진 칼럼 – 소소한 책읽기(새전북신문 10월26일자)
 
 
 
 
   초등학교 6학년 쯤 ‘어린 왕자’(생 텍쥐베리)를 읽었는데 하나도 재미 없었다. 지금 봐도 재미있진 않지만 몇 대목 심상(心象)은 여전히 남아있다. 예컨대 ‘이름’. 여우가 어린 왕자에게 말했던가? “네가 내 이름을 불러주면 우린 서로에게 특별한 의미를 갖는 존재가 되는거야”라고. 김춘수에겐 그게 꽃이다. “내가 그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경영하는 게스트하우스 칠판엔 매일매일 그날 게스트들 이름이 쓰여진다. 그야말로 갠지스 강 모래알처럼 수많은 이름 중 이 칠판 인연만큼은 내가 여우처럼, 김춘수처럼 부르겠다는 나름 기특한 뜻이다. 어린 왕자가 여러 별을 다니며 만나는 군상 중에 술고래도 있다. 그는 “술 취한 게 부끄러워 술을 마신다”고 했다. 술꾼 핑계 대는 게 꼭 나 같아 우리 집 어린 왕자(=게스트)들이 집 주인을 어찌 볼까 가끔 실소(失笑) 한다. 난 그들에게 뱀인지, 꽃인지, 술고랜지? 40여년 전 읽은 한 동화 이미지가 고등학교 국어 책 속 시(=‘꽃’)로, 게스트하우스 칠판으로 확장되고 바뀐다.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이다.
 
   독서는 생활을 만든다. 난 차를 없앤 지 3년 됐다. 전주라는 중소도시가 딱 자전거 이동 크기이기에 돈도 아낄 겸 그렇게 했는데 이건 ‘월든’(헨리 데이빗 소로)에서 배웠다.
 
   소로에겐 ‘전원주의’, ‘숲의 성자’ 등의 수사가 따라다니지만 사실 그는 매우 혁명적인 사람이다. 1845년(28세) 그는 단돈 20여 달러를 들고 미국 메인 주 콩코드 숲 월든 호수로 들어가 2년을 산다. 전원적 삶을 위해서가 아니라 노예제도와 자본주의에 찌든 숨 막힐 듯한 19세기 중반 미국의 ‘일상적 정체성을 파괴’하는 모험이었다.
 
   그가 월든 호숫가에 통나무집을 짓고 혼자 살며 남들에게 당연시된 의식주를 최소화한 것과 중소도시 전주에서 차 없이 지낸다는 건 물론 비교대상이 아니다. 하지만 불편과 주위 반대, 남의 시선 등에도 불구하고 차를 없앤 덴 만분의 일 ‘소로’적인 결단도 있다. 고백컨대, ‘차 없이 살기’에서 난 시민적 자부심마저 느낀다.
 
   무엇보다 소로에게 배운 건 ‘시민불복종’이다. 그는 알려진 대로 전원적 보수주의자가 아니라 당대의 이단아고 혁명아였다. 노예제도에 반대하기 위해 메인 주에 내는 세금을 거부해 1846년(29세) 감옥에 갇혔다. 이때 그를 면회하려고 온 철학자 R.W.에머슨에게 “당신은 왜 감옥 밖에 있냐?”고 묻기도 했다. 그는 “부정한 권력에 복종하지 않겠다고 결심하라. 그러면 자유로워지리라”고 말했다.
 
   2차대전 중 소로의 책을 돌려 읽은 덴마크인들은 나치가 유대인들에게 달도록 한 노란별표시를 자기들도 착용함으로써 악법에 저항했다. 세월호 노란 리본을 유족 아닌 이들에게서 보는 것도 같은 이유일 것이다. 사드배치, 국정 국사교과서 등 문제에서도 소로식 시민불복종이 자주 눈에 띈다. 아마 ‘월든’을 읽은 건 나 뿐 아닌가보다. 가을이라 책 이야길 했다. 책은 개인 일상에 침입해 세상을 바꾼다. / 임용진(논설고문) 
 
 
 
온누리 – 11월의 팔달로(2015.11.5.)
 
 
 
 
  그래도 아름답다.
 
  올해는 가뭄 때문에 단풍, 낙엽 색깔이 칙칙하리라더니 엊그제 춥고 오늘 말짱 갠 하늘 아래 전주시내 팔달로 은행나무 가로수들이 갑자기 샛노란 황금빛으로 바뀌어 내 눈을 아프게 한다. 이제 곧 우수수 지겠지. 아직 ‘체로’(體露)는 아니나 금세 ‘금풍’(金風)이 올 것이다. 노란 잎이 풍성히 매달려 그 안의 가지가 드러나지 않았으나 이미 황금 빛 깨달음이 숨어있다.
 
   ‘벽암록’은 중국 송나라 때 책으로 역대 선승들 화두 공안을 모은 선불교의 앤솔로지다. ‘체로금풍’은 그 중 하나다. 한 중이 선종의 태두 운문선사(864~949)에게 물었다. “나무가 시들고 잎이 떨어졌을 땐 어떠 합니까?” 운문 왈, “몸이 드러나고 금풍이 불지”(=‘體露金風’).
 
   금강경, 금각사 등에서 보듯 불가의 ‘금’(金)은 깨달음이다. ‘금풍’은 황금 바람, 깨달음의 바람, 서방정토에서 부는 바람이다. 그게 춥고 헐벗고 메마른 담에사 오는 것이니 만사는 버린 담에 얻고 텅 빈 뒤에야 찬다. 생명도 내 쉰(=호·呼) 담에 들이 쉬는(=흡·吸) 것이요, 승마도 스키도 스케이팅도 다 타기 전에 넘어지면서 배운다. 무가에서도 진짜 스승은 맞는 걸 먼저 알려주지 때리는 것부터 가르치지 않는다고 했다. 낙목한천이 되고 비우고 넘어지고 세월에 두들겨 맞은 뒤에야 금빛 바람이 불어오니 오늘은 나무 한 그루가 네 스승이고 내 스승이다.
 
   난 팔달로 은행나무가 정말 좋다. 이때쯤 나무에서 떨어져 보도에 질척대는 시큼떠름한 은행 과육에도 불구하고 전주시가 가로수 은행나무를 베어버리지 않는 걸 보니 그 황금잎에 황홀해하는 건 나뿐 아닌가보다. 이를 위해 사소한 악취 쯤 참는 거겠지 생각하니 그 여유가 또 전주 시민들 답다. 젊은 외지 관광객들이 한복을 입고 은행나무 아래 재재거리며 사진 찍는다. 그들은 새싹이다. 가을에 봄이 있고, ‘체로’와 ‘새싹’이 희희낙락하니 그 비빔이 조화롭다. 전주 ‘금풍’이 사람들도 채색하는가보다. / 임용진(논설고문)
 
 
온누리 – ‘국정’ 국사(새전북신문, 11월12일자)
 
 
 
 
   며칠 전 한옥마을 외곽 헌책방 거리에 갔다. “옛 국사 국정교과서 있어요?” “없어요” “많이 찾나요?” “예!”
 
   그래도 두 번째 들른 곳에서 단 한 권 남은 국정 국사교과서를 3,000원 주고 살 수 있었다. 국사편찬위원회가 만들고 교육인적자원부가 발간한 2004년도 고등학교 ‘국사’ 책이다. 이보다 이 년 전인 2002년 초판 발행 했고 2004년은 3판째이다. 나는 국사책 첫 ‘국정화’ 세대다. 유신 2년 후인 1974년에 국사책이 처음 국정화됐고 난 그해 그걸로 고3 일 년 간을 배웠다. 당시도 이름이 ‘국사’ 였고 활자는 지금보다 컸다고 생각된다. 배우긴 했으나 내용이 잘 기억나지 않아 고교 단체 SNS에 “생각나는 내용 있으면 알려달라”고 올렸더니 금세 답이 돌아온다. ‘동학혁명을 동학난이라 했고 4·19는 의거, 5·16은 혁명이라 했던 것 같다’, ‘북한 김일성은 항일운동 경력을 부풀린 ‘가짜 김일성’이라고 기술돼있었다” 등등.
 
   내가 구입한 2004년판은 30년 전 첫 국정 국사책과 많이 달랐다. 우선 부피가 434페이지나 되는데다 활자 크기가 전보다 작아 내용이 지난날보다 적어도 두 배는 많았다. 올컬러며 곳곳에 일차 사료를 축약한 읽기 자료도 삽입돼 이해를 도왔다. 구체적인 표현은 동학난이 ‘동학농민운동’으로, 4·19는 의거에서 ‘혁명’으로, 5·16은 혁명에서 ‘정변’으로 바뀌어져 있었다. 이 2004년판은 김대중 정부 시절 만든 것이다.
 
   지난 2011년 없어진 국정 국사 책을 새로 만들어 내후년부터 가르칠 게 확실하다. 격한 반대 속에서도 대통령이 지시하고 국사편찬위가 실무를 맡았으니 그리 추진될 것이다. 쓸 사람이 없다지만 막상 구한다면 제 이름자 돌보지 않는 이야 왜 없겠는가. 전북과 경기도를 비롯한 전국 13개 시도의 진보 교육감들이 이미 ‘국정’ 대신 ‘대안’ 국사교과서 또는 참고서 사용을 공언했으니 내봤자 실효도 의문시되지만 아무튼 이 정부의 고집은 천하제일이다. 또 하나, 전주 사람들의 주체적, 실증적 관심도 알아줘야겠다. 그들이 헌책방에서 ‘국정’을 동낼 정도니 말이다. /임용진(논설고문)
 
 
 
온누리 – 공안 장검(公安 長劍) (새전북신문, 11월19일자)
 
 
 
 
  박정희 전대통령은 애초 보통학교(=초등학교) 교사였다. 수재만 모인다는 대구사범 졸업 후 문경공립보통학교에서 2년 반을 근무하다 만주군관학교에 입학, 23세로 뒤늦게 군문에 들어선다. 당시 지역유지급인 보통학교 교사를 때려치고 대여섯 살 이상 아래 동생뻘들과 같이 장교 수업을 받은 이유는? “긴 칼 차고 싶어서”였다고 한다.
 
   ‘ 긴 칼’은 권력이다. 보통학교 교사도 그때 ‘신의 직장’임에 틀림 없으나 기껏해야 분필 가루 마시며 애들 상대하는 것보다 긴 일본도 옆에 차고 절커덕 대는 장교를 택한 게 권력 직효였음은 당시 ‘보쿠세이키’(=‘박정희’의 일본식 발음), 후일 ‘다카키마사오’(=‘박정희’의 창씨명)의 행로에서 여실히 증명된다.
 
   어찌 보면 권력의 길이 가장 선택하기 쉽다. 눈에 보이기 때문이다. 군국 제국주의 일본 아래서 나이든 군수, 교장보다 새파란 일본군 소위가 더 힘세다는 걸 당시 보쿠세이키만 알았을 리 없다. 일본 경찰 자체도 식민지 권력이었으나 그중에서도 최강은 ‘특고’(特高), 고등계 형사였다. 지금으로 치면 공안 담당이다. 경찰이나 검찰 모두 공안 쪽이 지금도 세다.
 
   강력부, 형사부, 특수부, 공안부 등 검사도 전공이 다양하지만 이중 권력 지남철은 역시 공안 쪽이다. 황교안 국무총리와 김수남 차기 검찰총장 예정자는 대표적인 공안통 검사 출신이다. 둘은 이석기 내란 음모사건과 통합진보당 해산을 법무부장관(=황교안)과 수원지검장(=김수남)으로 합작 지휘했다. 이들이 휘두르는 ‘긴 칼’은 사백여 년 전 한산도에서 깊은 시름하며 수루에 홀로 앉은 이가 옆에 찬 ‘긴 칼’과 같은 지, 다른지. 누군 그걸로 민족을 구했고, 누군 정권을 구하려는지.
 
   마르크스는 “하나의 유령이 유럽을 떠돌고 있다. 공산주의라는 유령이”(공산당선언)라고 했다. 한국에선 빈사의 공안 유령이 회생해 떠도는 듯하다. / 임용진(논설고문)
 
 
 
 
임용진 칼럼 – 대통령의 사생활(새전북신문, 11월23일자)
 
 
 
 
    한 때 대통령 되려면 숨겨놓은 딸 하나 쯤 있어야 한다는 농담이 돌았다. 그도 그럴 것이 어제 세상을 뜬 김영삼 전 대통령과 고 김대중 전 대통령 등이 오랫동안 ‘숨겨놓은 딸’ 루머에 시달렸다. 고 미테랑 전 프랑스 대통령 역시 수 십 년 간 딸을 숨겼다. 그는 친구의 딸을 사랑해 재임 동안에도 내연을 계속했으며 대통령 관저인 파리 엘리제 궁에서 불과 5km 거리에 이른바 ‘작은 집’을 두고 그쪽으로 퇴근할 정도였다. 둘 사이 딸 마자린 팽조가 1996년 미테랑 장례식에 나타남으로써 소문이 공식 확인됐다.
 
     프랑스인들은 미테랑의 혼외정사를 로망스 정도로 여긴다. 친구가 자기 딸을 집에 감금하고 못 만나게 하자 현직 대통령 미테랑이 심야에 친구 집 앞에서 “내 사랑을 내놓아라”고 고함지르기도 했다. 잡지 ‘파리마치’가 1994년 한 식당에서 식사중인 아버지 미테랑과 숨겨진 딸 팽조를 파파라치 사진으로 보도하자 프랑스 전체가 일순 시끄러웠으나 곧 ‘뭘 그런걸…’ 하는 분위기로 바뀌었다. 한국에서도 ‘YS’와 ‘DJ’의 숨은 딸 이야기는 가십성 이상으로 발전되지 않았으니 대통령의 사생활에 관해선 프랑스까진 아니더라도 한국에도 똘레랑스(=관용)가 없다 할 순 없겠다. 우리도 적어도 공사(公私) 구분은 한다는 얘기다.
 
     하지만 요즘 문제되는 ‘대통령의 7시간’에 관해선 사정이 다르다. 세월호 참사 당일인 지난해 4월16일 오전 10시쯤 박 대통령은 서면(書面)으로 첫 보고를 받은 뒤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를 방문하기까지 7시간 동안 대면보고 지시도, 대통령 주재 회의도 하지 않았다. 일찍이 없던 참사니만큼 문서 보고 즉시 비서실장이나 주무장관을 불러 얼굴 맞대고 따져 물었어야 정상임에도 불구하고 종적 무상 부재했으니 과연 그에 합당한 이유가 뭔지, 어디 있었는지 밝혀야 할 것인데 뭐가 거북한지 자꾸 덮으려는 인상을 줘 오히려 문제가 커졌다.
 
     급기야 최근 세월호참사특별조사위원회가 이를 조사하겠다 하자 여당 추천 위원들이 ‘총사퇴 불사’ 기자회견을 했는데 이마져 해양수산부와 미리 짜 맞춘 액션이란 의혹이 최근 보도로 드러났다. 언론이 할 일을 하네, 못하네 하지만 그래도 꼭 필요한 게 이런 경우다. ‘머니투데이’는 작은 경제지지만 지난 19일자에 세월호 특조위 여당 추천 위원들의 ’현안대응 방안‘을 공개해 특종을 터뜨렸다. 해수부가 작성한 이 행동지침에 따르면, 특조위가 ‘대통령의 7시간’을 조사하려할 경우 이에 속한 여당측 위원들의 단계별 방해전략이 제시돼있다. “①의결과정에서 문제를 계속 제기하며, ②필요시 여당 추천의원 전원 사퇴 표명하고, ③특히 부위원장이 앞선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여당추천위원들은 19일 기자회견에서 ‘특조위는 기울어진 운동장’(= ①)이라 했으며, ‘전원사퇴 불사’(=②)를 외쳤고, 18일 회의 도중 이헌 부위원장이 퇴장(=③)하면서 지침을 충실히 이행했다. 하지만 어떤 내부자고발로 지침이 폭로됐으니 이 정부 신뢰는 더 땅에 박혔다. 세월호 참사 진상을 은폐하려는 이들에게 조사하라고 명함을 줬으니 피의자가 피해자를 조사하는 격이다. 박대통령은 지난주 국무회의에서 근엄한 표정으로 ‘국민들이 진실된 사람을 뽑아주시라’고 주문했다. 과연 진실을 중시하긴 하는 모양이지만, 그 진실이 세월호에 관한 한 예외임을 확인시킨 게 이번 문건 파문이다.
 
     ‘대통령의 사생활’이라 할지라도 박 대통령과 미테랑, YS, DJ 사이엔 차이가 크다. 그들은 적어도 근무시간에 종적 무상하지 않았으며 국가재난을 7시간이나 방치하지 않았다. 마이니찌, 요미우리 등 일본 주요신문은 수상의 하루 일정을 매일 분단위로 자세히 보도한다. 수상이 어느 식당에서 몇시 몇 분 누구와 만나 얼마짜리 무슨 메뉴를 먹을 것인지 나올 때도 있지만 그걸 사생활 침해로 여기는 일본 수상이 있단 소린 듣지 못했다. 한국의 장관급 각료들은 그들이 국내에 있는 한 대통령이 부르면 반드시 한 시간 내에 현신해야 할 의무가 있다. 그런 신료들을 콜 하지 않은 ‘7시간’을 어찌 설명할까. 회사 다녀본 이는 알 것이다. 일개 영업사업도 근무 중엔 자신의 자취를 항시 회사에 알린다. 하물며 국가 막중대사를 경영하는 대통령임에랴. 고 박정희 전 대통령도 사생활 도중 비운의 저격을 당했으나 그것조차 어디까지나 퇴근 후의 일이다. 세월호 참사 같은 경우 박 전대통령이라면 오히려 근무 공백을 스스로에게 결코 용납치 않았을 것이다.
 
     세월호 참사 특조위는 오늘(23일) 오전 전체회의를 열어 ‘대통령의 7시간’ 조사 건을 의결한다. ‘지침’대로 여당 추천의원 4명은 사퇴하고 나머지 위원들만으로 통과될 게 확실하다. 대통령의 사생활은 이제 없다. / 임용진(논설고문)
 
 
 
 온누리- 과메기, 홍어, 칼국수 
 
   
 
  음식이 기호라고? 권력이기도 하다.
 
   MB(=이명박) 맏형이자 최근 포항제철 비리혐의로 구속된 이상득(81) 전 국회부의장은 전성기 시절 매년 12월쯤 국회에 과메기를 자주 반입했다. 그는 지난 2010년 겨울 국회 의원회관 식당에서 과메기 시식회룰 열어 국회의원과 출입기자들에게 직접 맛보기 시범을 보이기도 했다. 포항 태생이자 당시 원내대표던 김무성 현 여당 대표가 이 시식회를 후원했으니 비린 과메기 냄새가 그들 권세와 함께 국회에 진동했다. 포장마차에서도 과메기가 한 때 날개 돋친 듯 팔렸으나 MB 퇴진 후엔 그 인기가 전만 못한 듯하다.
 
   과메기는 비릿하고 홍어는 코를 찌른다. 전라남도 식 삭힌 홍어는 한때 야당 상징이었으나 DJ(=김대중)가 청와대 주인이 되자 일순 권력 후각이 됐다. 그 몇 해 전만 해도 낮선 메뉴던 ‘삼합’이 국민음식이 됐다. 종로, 광화문, 여의도에 홍어집이 눈에 띄게 늘고 미중(味衆)은 연신 눈물을 흘리면서도 ‘푹 삭힌 홍어’를 연호했다. 실세 단골인 한 홍어집에 사람이 모이고, 번창하고, 식당 주인마저 목에 힘 주고 다녔으니 나머지 권력 촌극이야 일러 무삼하리요.
 
   YS(=김영삼)는 삼선교, 성북동 등 주로 서울 강북 구도심 칼국수집을 다녔다. 특히 북악 스카이웨이에서 자하문 상명대학 쪽으로 내려가기 직전 성북동 ‘국시집’이 그의 평생 단골처다. 강남 ‘소호정’에 다닌 건 비교적 훗날 일이다. 이 집들 공통점은 고기 국물이 듬뿍 밴 경상도식 ‘국시’ 계통이란 점이다. 닭 칼국수나 조개 칼국수와는 맛이 다르다.
 
   인걸이 가고 나니 입맛도 무상하다. 오늘 낮엔 그냥 담백하게 칼국수 한 그릇, 저녁엔 홍어에 탁배기나 한 사발 할까보다. 과메기는? 솔직히 내 입맛엔 별로다. / 임용진(논설고문)
 
 
 
온누리 – ‘V’ (새전북신문 12월3일자
 
영화 ‘브이 포 벤데타’(2005, 감독 제임스 맥티그)는 명화는 아니지만 수작이다. 포탈 등에 검색하면 장르는 액션, SF 등으로 나오지만 나름 메시지가 분명한 정치 드라마다. 무대는 2040년 영국. 나치 히틀러를 닮은 독재자 ‘셔틀러’와 이에 맞선 이름 없는 피해자 겸 투사 ‘V’의 대결 이야기다. 결국 정의가 승리한다. 언제나 가면을 쓰고 나오는 V는 위선적 지배집단을 부수며 자신의 죽음을 역사의 제단에 바친다. 승리와 죽음. 전형적인 영웅서사 구조다.
 
    새삼 이 영화가 생각나는 건 일주일 전 박 대통령이 국무회의에서 ‘복면 시위 금지’를 지시했기 때문이다. 이후 여야는 물론 나라 전체가 복면, 가면 논란이다. 이와 관련, 영화속 V의 대사가 남 일 같지 않다.
 
    ▲“가면 뒤엔 살덩이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의 신념이 있다”
 
    ▲“국민이 정부를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정부가 국민을 두려워해야 한다”
 
    ▲“기억하라, 기억하라. 11월5일을”
 
    ▲“너희들이 가진 건 총알과 그 총알에 맞기를 바라는 희망 뿐이지”
 
    이번 주말 또 한 차례 대규모 시위가 광화문에서 예정돼있다. 수많은 이들이 또 마스크를 쓰고 ‘기억하라, 4월26일(=세월호 참사일)!’ 등을 외치며 ‘물대포와 그 물대포에 맞기를 바라는 희망’세력에 격렬히 부딪칠 것이다. 영화 속 독재자 셔틀러는 뜻밖에 저항이 거세자 당황해 소리 친다. “마스크를 쓴 자는 무조건 체포하라!”
 
    ‘브이 포 벤데타’ 한 번 씩 보시길 권한다. 영화는 기득권 상징인 영국 국회의사당이 우렁찬 ‘1812년 서곡’(차이코프스키) 대포소리와 함께 폭파되는 걸로 끝난다. 박근혜 대통령을 비롯해 김무성·황교안·김수남 씨등 최고 권력층에게 이 영화가 특히 유익할 것이다. 아니, 이미 봤을지도 모르겠다. 어디까지나 파국은 그들이 가장 두려울 것이므로. / 임용진(논설고문)
 
 
 
온누리 – ‘막 프로젝트’⓶
 
 
 
   두 달 전 ⓵편을 쓰고 이거저거 딴 소재 때문에 ‘막 프로젝트’를 미뤘으니 해 넘기기 전에 오늘 두 번 째를 써야겠다.
 
   최근 전주 막걸리가 비싸다는 말이 나온다. 푸짐하고 맛난 안주를 싼 값에 준다는 소문만 믿고 전주 서신동, 삼천동 막걸리 타운을 찾은 일부 외지 관광객들이 ‘비싸다’, ‘맛 없다’고 불평하기 시작했다. 음식도 이미지 장사다. 대부분 미각보다는 소문을 파는 건데 나쁜 평판은 전염병보다 빨리 번진다. 이미 상업화된 한옥마을은 그렇다 치고 전주 막걸리에서마저 남들이 ‘바가지’, ‘상혼’을 연상한다면 이런 낭패가 없다.
 
   최근 논란이 되는 건 이른바 ‘세트 판매’ 또는 ‘코스 판매’다. 한 주전자(750ml 막걸리 세병 들이) 단위로 주문하고 주문시마다 새 안주를 주는 보편적인 ‘주전자’ 판매 대신 ‘세트 판매’는 최초 주문액(5만~6만원)이 비싸고 안주도 한꺼번에 많이 준다. 정신없이 바쁜 성수기에 이만원짜리 한 주전자 놓고 몇 시간씩 끄는 눈치 없는 고객을 원천봉쇄할 수 있는데다 전반적으로 매출총액이 높기 때문에 업주측이 이를 선호한다. 하지만 고객 입장에선 호주머니 부담이 크고 음식낭비 등으로 개운찮은 인상을 받는다. 상다리가 휘어지게 깔리는 안주는 ‘서울 촌 놈’ 겁주긴 하겠으나 선술집 특유의 간소한 감동이 없고 눈치 빠른 고객은 금세 ‘상혼’을 의심한다. 지난 10월초 이경신 시의원이 전주시의회에서 ‘막 프로젝트 재정비’를 주문한 게 바로 이런 이유다.
 
   물론 전주 시내 ‘똥꾼’들은 이미 자신의 비밀스런 단골집이 있다. 남부시장 ‘정읍집’ 등 몇몇 식당이나 경원동 ‘주인네 막걸리’, 서서학동 ‘진안집’ 등이 한 주전자 기본 1만~1만2천원으로 괜찮게 마실 수 있는 곳들이다. 기본 2만원이긴 하지만 서신동 ‘달빛주막’도 실속파들에게 인기다. 하지만 관광객들에겐 역시 교통편이나 실내장식, 편의시설, 화장실 등을 고려해 서신동, 삼천동, 효자동 등 막걸리 타운을 추천할 수 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전주 막걸리 집 원조 중 하나인 삼천동 ‘수목’이 최근 ‘기본 1만원’(막걸리 세 병)에 동참했다는 건 토속주객이나 관광주객 모두에게 희소식이다. ‘푸짐하고 맛나고 싼’ 게 진짜 전주 재산이다. 관청의 ‘제2의 막 프로젝트’가 바로 이 기본에서 출발해야 할 것인데 이미 서민들이 먼저 시작했으니 역시 전주답다. / 임용진(논설고문)
 
 
임용진 칼럼 – 혼미, 용렬, 무도(새전북신문, 12월22일자)
 
 
 
 
  또 연말. 교수신문 사자성어가 뉴스가 됐다. 올핸 뭐가 뽑히려나 궁금했는데 ‘혼용무도’(昏庸無道)라고 그제 보도됐다. 올해 한국사회가 ‘혼미하고 용렬하고 도가 없어서’ 뽑혔다고 한다. ‘혼미’는 어둡다, 어리석다이고 ‘용렬’ 역시 비슷한 뜻이다. 사람이 순하고 어리석은 걸 ‘용(庸)해 빠졌다’고 하는데 바로 그 용법이다. 누가 혼미하고, 용렬하다는 것인가? 바로 대통령이다.
 
   매년 연말과 연초 교수신문은 묵은 해 평가와 새해 희망을 담은 사자성어를 십여년 째 발표하고 있다. 교수 800명에게 설문한 것이라니 전국 수만 명 교수 중 어떻게 대표성이 있는진 잘 모르겠으나 매년 선정돼 지상에 오른 사자성어를 보면 촌철살인 묘가 있어 곱씹을 만하다. 그런데 올핸 그 겨냥하는 바가 사회 전체를 에두르지 않고 청와대를 직격해 말 그대로 촌철‘살인’(殺人)이 돼버렸다. 이를 두고 홍준표 경남지사가 “혼자 고군분투하는 여성 대통령이 안쓰럽다”며 “한국사회의 지식인집단까지 극한 용어로 흔들어대면 대한민국은 앞으로 2년을 어떻게 운영하느냐”고 걱정했다. 그의 걱정은 국정운영 차원이기도 하지만 ‘안쓰럽다’, ‘여성’ 등의 표현으로 볼 때 박근혜 대통령 개인에 대한 페미니스트적 동정으로 보여지기도 한다. 대한민국 대통령이 여성이면 어떻고 남성이면 어떤가. 어쩌다 대통령이 비난을 지나 부하(=홍 지사)에게 동정까지 받게 됐는지 정말 안쓰런 노릇이다. 대통령 본인은 이런 평가가 큰 불만일 것이지만, 지난 3년 치세 동안 남들에게 치유와 희망보다 고통과 실망을 준게 사실이다.
 
   ● 혼미 : 지난 여름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 사태는 어리석은 정부가 뭔지 현주소를 보여줬다. 문형표 전 복지부 장관은 메르스 1번환자가 확진된 지난 5월20일 “전염병이 낮다. 일반국민에게 전파 가능성이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피해가 눈덩이처럼 커지고 국내 첨단 삼성병원이 부분 폐쇄되고 지난 11월말 마지막 80번 환자가 사망하기까지 메르스는 사망 38명, 확진 186명, 격리 16,000명과 미증유의 공포, 불신을 남겼다. 국가재난 질병 콘트롤타워가 청와대인지 보건복지부인지 삼성인지 시청인지 경제부총리인지 헛갈릴 정도로 서로 미루고 말을 바꾸는 무책임, ‘국격’ 때문에 대응등급을 상향조정 못했다는 해당 장관의 무지, 이 장관은 더구나 사태 발생 엿새만에 그것도 일대일 대면보고가 아닌 국무회의 자리에서 대통령에게 보고했다고 국회 증언했으니 국가시스템이 부재해도 이런 부재가 없다. 역시 미증유 재난인 세월호 침몰참사 시에도 대통령에겐 7시간 동안 대면보고나 지시행위가 없었으니 사건은 우연히 커지지 않았다. 무책임, 무능력, 불신 등 혼미 종합판이었다.
 
   ● 용렬 : 범인, 보통사람 등을 가리키는 말이 ‘용’이고 못나고 낮은 걸 가리키는 게 ‘열’(劣)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강한 대통령인 듯하다. 여당과 정부가 그의 눈치 보기에 여념 없다. 오죽하면 ‘박심’(朴心)이 모든 정치 행위의 기준이 될까. “진실한 사람을 뽑아달라”는 국회에서의 이례적인 대국민 주문이 선거법 위반인지 아닌지 모르겠으나 이 때문에 진짜 박(=진박)과 가짜 박(=가박)이 생겼으며 원조 친박, 청와대 친박, 복박(復朴), 탈박(脫朴) 등 희한한 말이 파생됐다. 모두 ‘박심’ 농도가 기준이니, 이 나라가 민주주의인 건 맞지만 여당 주변에선 ‘박(朴)주주의’라 하는게 옳을 듯하다. 하지만 이게 정말 강한 것일까? 여당과 청와대 바깥에서 보자면 이는 다 큰 어른들이 벌이는 소극적(笑劇的) 병정놀이다. 여당 표밭 일부지역에선 ‘박심’을 벗어나면 ‘불신지옥’이겠지만 다른 데선 오불관언이다. 민의가 아닌 대통령의 마음을 눈치 보게 하면 강하긴 강하다 하겠으나 대인배라 할 순 없다. 자신에 대한 비판을 수용하지 않고 그럴 기세가 있으면 ‘배신의 정치’로 몰아치고 국민과 역사에 대해 ‘혼’이 있네, 없네 하고 지역 편 가르기가 이보다 심할 때 없으니 군자, 대인, 뛰어난 이의 정치는 분명 아니다.
 
   ● 무도 : 세월호 참사 이후 600일이 더 지났다. 그간은 인본주의적 도리나 정치신의 등이 없는 무도(無道)의 시기였다. 박대통령은 지난해 5월 중순 진도 팽목항에 찾아가 눈물 흘리며 위족을 위로했으나 그 한 달 후 국회연설시엔 ‘살려주세요’를 연호하는 유족들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고 이후 세월호 관련 일체 언급이 없다. 애초 ‘악어의 눈물’을 흘린 건지 참 무도할 따름이다.
 
   조선 역대 왕 중 재위 후반이 전반보다 나은 이가 숙종이다. 그는 46년 재위 동안 처음엔 장희빈을 둘러싼 궁중, 여성 문제로 ‘난정’(亂政)·‘혼군’ 소릴 들었으나 후반기엔 신료들의 남인, 노론, 소론 싸움 속에서도 수시로 민간에 미행(微行)하며 대동법 확대실시, 상평통포 주조, 일본통상 등 특히 민생 쪽에서 좋은 치적을 이뤘다. 이 정부도 그러면 좋겠다. 내년엔 희망이 있어야 하므로. / 임용진(논설고문)
 
 
 
 
 
 온누리- ‘말 많을까 하노라'(새전북신문, 2015.12.24.)
 
 
 
 
  올해도 다 저문다. 다사다난이란 표현으로 모자랄 만큼 사건이 많았다. 양의 해였지만 늑대에게 다 잡아먹혔는지 순한 양 울음소린 묻혀버렸다. 대신 국내 메르스 전염, 해외 파리테러·시리아 난민사태 등으로 신음과 비명이 그치지 않았다. 이말 저말 말도 많았다. 기억나는 것만 간추린다.
 
  ▲“이 세상에 진실을 이길 것은 아무 것도 없다” / 이완구 전 국무총리가 지난 5월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으로부터 불법 정치자금을 받은 혐의로 검찰에 출두하면서. 결국 ‘진실’ 때문에 그는 역대 최단명 총리(63일 재임)가 됐다.
 
  ▲“옛말에 ‘들어갈 때 마음과 나올 때 마음이 한결같은 이가 진실된 사람’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 박근혜 대통령이 엊그제 국무회의에서. 몇 달 전 국회에서 “진실한 사람을 뽑아달라”고 호소하더니 여전히 ‘진실’ 노이로제를 뿌리치지 못하고 있다. 대통령 화법에서 ‘진실’은 ‘불복종’에 대한 반대말이다.
 
  ▲“잘못된 역사 교육으로 청년들 입에서 ‘헬조선’이란 말이 회자되고 있다”/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가 지난달 역사교과서 국정화와 관련해서. 젊은이들의 절망적인 취업난, 불평등 코리아(=‘헬조선’)가 교육 탓이라니 이번엔 해경이 아닌 교육부를 없애려나?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자존심)가 없냐?” / 올해 최고 히트작인 영화 ‘베테랑’에서 경찰 역 맡은 황정민이. 가슴이 확 뜷렸다.
 
  ▲“나라가 발전하고, 국민이 편안하게 살기 위한 노력을 계속 하다가 대통령까지 됐다”, “정말 간절하게 원하면 온 우주가 나서서 도와준다” / 박근혜 대통령이 어린이날 청와대를 방문한 어린이들에게. 누리꾼들은 즉각 “내가 힘든 이유는 온 우주가 감동할 만큼 노오력하지 않았기 때문” 등의 댓글을 달았다. ‘노오력’은 불가능과 동의어가 돼버렸다.
 
  ▲“모기가 더 무섭다” / 프란치스코 교황이 지난달 아프리카를 방문하며 “테러가 무섭지 않냐”는 질문에. 이런 지도자는 남의 가슴을 울린다.
 
  ▲“야구는 해봐야 하는 것이고 결과는 끝나봐야 아는 것” / 김인식 감독이 지난달 세계야구 ‘프리미어 12’ 일본과의 준준결승에서 9회 역전승(4-3) 한 뒤. 우리 인생도, 가난한 전북도, 대한민국도 아직 안 끝났다. 장갑 벗어봐야 안다. 연말 힘들 내십시오! / 임용진(논설고문)
 
 
온누리, 전북문화관광재단(2016.1.7.)
나는 전북이 ‘문기’(文氣)의 고장이라고 생각한다. 문화의 기운과 기세가 다른 어느 곳보다 세다. 한 마디로 문기란, 누가 뭐라지 않아도 문화를 생활 가운데 위치시켜놔야 직성이 풀리는 DNA다.
 
팔 년 전 인천에서 이태를 살았는데 그야말로 ‘해불양수’(해불양수)의 도시다. 바다는 작은 물을 사양치 않는다는데 시장실(=당시 송영길 시장)에선 전라남도 사투리가, 기획관리실장 방에선 경북 포항 사투리가 들렸다. 항구다운 포용심이 인천의 자산이다. 그런데 이상한 건, 인천시립미술관이 없다는 것이다. 있긴 한데, 무슨 일로 건립계획만 세우고 십년 이상을 작은 데서 더부살이하고 그나마 여기저기를 전전하고 있었다. 전주 같으면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인천엔 시립국악단도 없다. 역시 전북 같으면 생각 못할 일이다. 뭐가 좋고 나쁜 게 아니고, 인천의 진취심·포용력 못잖게 거기 살면서 전주 ‘문기’가 그리웠단 얘기다.
 
전북문화관광재단이 새해부터 일을 시작했다. 지난 15년간 논의만 하다 송하진 현 지사 취임과 함께 법제를 서둘러 조직, 예산을 갖추고 출범했으니 전북으로선 숙원 하나 해결한 셈이다. 못 사는 이들에겐 문화나 관광이 다 우선 순위가 아닌 듯하다. 실제로 문화예술 관련 예산이 매년 깎여 새 기구 출범초부터 전북 문화예술인들이 ‘예산 배정 확대’를 요구하며 서명운동을 하고있는 실정이다. 하지만 일단 만들었다는 게 중요하다. 광주가 2010년, 인천이 2004년 시립 문화재단을 만드는 등 실용 절차에선 전주가 뒤졌지만 일단 물길을 잡았으니 전주 ‘문기’를 쏟을 일만 남았다.
 
재단의 첫 대표이사는 소설가 이병천(60) 씨다. 단구의 이 사나이는 전북을 대표하는 이야기꾼이면서 지난 2007년 ‘아시아-아프리카문학페스티벌’을 전주에서 성공적으로 치른 주인공이다. 모옌(중국), 나달 엘 사다위(이집트) 등 60개국 작가 80명이 참가한 이 단군 이래 최대 문학행사기간 동안 전주는 세계문학의 수도였다. 방송국 PD 출신이기도 한 이병천 대표에 내재한 조직, 행정 역량이 재단에서 한껏 발휘되길 바란다. ‘문기’는 전북의 자존심이자 피우면 꽃이고 닦으면 돈이 되기도 할 것이다. /임용진(논설고문)
 
 
 
온누리, 히말라야(2016.1.14.)
 
영화 ‘히말라야’가 새해 극장가 화제다. 지난해 말 상영 시작 이래 최단기간 700만명을 넘어섰다 한다.
 
‘히말라야’(감독 이석훈, 출연 황정민·정민)는 엄홍길의 ‘휴먼원정대’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 산악인 박무택과 장민은 지난 2004년 에베레스트 등정 후 하산과정에서 조난당한다. 이들을 구하기 위해 대원 백준호가 산에 오르나 그마져 함께 실종된다. 엄홍길은 이들 아끼는 후배 세 명의 시신을 되찾기 위해 2005년 ‘초모랑마(=에베레스트) 휴먼원정대’를 결성한다. 등정이 아닌 시신 수습을 목표로 한 원정은 인류 등산 사상 처음이다. ‘히말라야’는 고도 8,000m 설산에서 이뤄지는 산악인들의 우정과 도전을 그리고 있다.
 
네발과 티벳, 중국에 걸친 광대한 지구의 지붕 ‘히말라야’엔 8,000m 급 이상 봉우리가 스무개 쯤 있다. 이른바 ‘8,000급 14좌’란 그 중에서도 주봉 14개를 뜻한다. 이 ‘14좌’를 첫 완등한 이는 살아있는 전설 라인홀트 메스너(72·이탈리아)다. 무산소와 알파인 스타일로 고봉을 누빈 메스너 외에도 예지 쿠크츠카, 에르하르트 로레탄 등도 14좌의 전설들이다. 한국에선 엄홍길이 첫 완등(2000년)했고 이후 박영석, 한왕룡, 김재수, 김창호, 오은선 등이 뒤를 잇고 있다.
 
‘좌’(座)란 그냥 좌석이 아니고 보살, 부처, 고승의 자리다. 그래서 별자리를 ‘성좌’(星座)라 하고 열 네 개 높은 봉우리도 ‘14좌’로 존칭한다. 혹자는 엄홍길 등의 14좌 등정을 ‘제패’라 표현하고 무슨 운동경기처럼 ‘기록’이란 말도 쓰는데 이는 매우 참담할 뿐이다. 설산에 혼을 묻은 예지 쿠크츠카, 우에무라 나오미, 고상돈, 박영석, 박무택, 장민, 백준호, 지현옥, 고미영 등이 들으면 코웃음칠 것이고 살아 돌아온 엄홍길 등도 몸을 사릴 것이다. ‘14좌’란 겸손과 성실, 용기, 동료애에 주는 대자연의 백지 훈장일 뿐이다.
 
14좌 완등자 중 한왕룡은 군산 출신, 오은선은 남원 출신, 11좌 완등 후 하산 중 사망(2009년 낭가파르밧)한 고미영은 부안 출신이다. ‘히말라야’를 보고 영화관을 나서는 관객들 얼굴엔 대개 눈물자국이 있다. 고산 뿐 아니라 진도 근해에도 우리 동료, 동포, 어린학우들이 아직 갇혔는데. 영화관 밖 현실은 무척 답답하구나. / 임용진(논설고문)
 
 
 
임용진 칼럼, 산의 향기(2016.1.15)
 
삶의 향기가 이 코너 제목인데, 과연 그 향기란 뭘까.
 
인간사 수많은 직업 중 가장 멋지면서도 이해 안 되는 직업 중 하나가 전문 산악인이다. 도전, 사내다운 멋이 있고 남보다 월등한 체력과 집중력과 의지력이 부럽지만 한편 그 무서운 데를 왜 가나, 사서 고생하나, 가정은 누가 돌보나 하는 등 걱정 때문에 막상 나 보고 하라면 절대 못 할 일이 그것이다. 특히 마지막 대목, 가정에 관해선 많은 여성들이 ‘산악인은 무책임하다’고 분노하기까지 한다.
 
하지만 산악인도 사람이다. 찬 바람 살을 에는 빙벽에서 비부악하거나 크레바스 벼랑에 쳐박히다 간신히 걸려 식은 땀 흘리는 그들도 자식과 아내(남편), 부모에 때문에 자주 속으로 운다. 물론 질질 눈물 흘리진 않는다. 돈벌기와 거리 멀다는 건 모든 이가 다 인정하니 아예 맘이 가볍다. 하지만 가장 서운한 건 주변의 몰이해다. 예술가도, 카레이서도, 이종격투기 선수도 인정받는 직업이다. 이에 비해 산악인은 돈도, 존경도, 제대로 된 직업인으로서 인정도 없다. 혹 먹고살기 위해 상업등반이라도 할라치면 ‘버렸다’고 손가락질 하고 전성기 후 이벤트성 도전을 하면 ‘한물 갔다’고 외면 한다. 하지만 그들의 자부심은 매섭다. 그 단적인 예를 본다.
 
▲허영호(63) : 북극해는 지름 2,000km의 얼음바다다. 수많은 원정가, 탐험가들이 여길 걸어서 건너려 했으나 ‘난빙대’ 때문에 실패했다. 난빙대란 북극해 주변을 빙 두른 평균 너비 150km 이상의 크고 작은 얼음산 구역이다. 바다가 해변과 부딪치며 녹고 얼기를 반복해 만든 울퉁불퉁한 이 ‘악마의 벽’, 난빙대를 건너면 북극 원정은 99%이상 성공했다고 봐도 틀림없다. ‘전설’ 라인홀트 메스너(72·이탈리아)도 1995년 3월초 이 난빙대에 막혀 후퇴했다.
 
메스너 실패 며칠 뒤 러시아 헬기 안트노프 24 한 대가 그 난빙대 상공을 날고 있었다. 허영호 대장을 비롯한 한국의 ‘북극해도보횡단원정대’가 탔다. 작은 얼음동산이 삐죽삐죽 칼처럼 끝도 없이 이어진 난빙대를 굽어보며 그들은 말이 없다. 러시아인 헬기 기장이 허영호에게 제안했다. “저긴 걸어서 못 간다. 난빙대 끝 부분에서 내려주겠다” 허영호가 잠깐 있다 말했다. “노! 기수 돌려라. 우린 처음부터 시작한다.”
 
허영호 원정대는 세 달 뒤인 그해 6월19일 캐나다 엘즈미어 섬 워드헌터 곶에 도착해 세계 원정사상 두 번 째 북극해 도보횡단을 성공시켰다. 허영호가 그날 헬기 기장에게 ‘예스’ 했다 하더라도 아무 문제 없었을 것이다. 전문가 말고 누가 시비할 일도 아니다. 하지만 허대장의 ‘노’ 덕분에 원정대는 99일간 죽을 고생, 위험한 고비, 동상과 함께 대자연에 대한 떳떳함을 얻었다. 진짜 원정을 성공시켰다.
 
▲박영석(2011년 사망·당시 48세) : 그는 북극해에서 허영호와 반대 결정을 내렸다. 히말라야 8,000m 이상 고봉 14좌를 한국인 최초로 완등한 박영석은 에너지 덩어리, 쾌속의 사나이, 기록의 사나이다. 1993년 에베레스트를 시작으로 2001년까지 8년2개월만에 ‘14좌’를 모조리 올랐다. 1998년 한 해에 ‘6좌’나 올라 기네스 북에 등재되기도 했다. 그런 ‘기록’을 의식해서였을까. 그는 2005년 4월 비행기 타고 난빙대를 건너 북극점 원정을 시작했다. 4월30일 도보로 북극점에 도달, 또 다른 기록을 추가하나 ‘쉬운 길’을 택한 찜찜함은 남았다.
 
박영석은 이후 2009년 에베레스트 남서벽에 ‘코리안 루트’를 개척, 원정의 질에 관한 아쉬움을 말끔히 씻는다. ‘히말라야 14좌 모두에 코리안 루트를 내겠다’는 게 그의 포부였다. 이때까지 한국 산악인들은 남이 내 놓은 길을 따라 정상에 올랐다. 등정(登頂)만 했지 등로(登路)가 없었다. 히말라야 산신령이 조금만 더 너그러웠던들 박영석의 꿈은 이뤄졌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는 2011년 10월 안나푸르나 코리안 루트 개척 중 실종된다. 그의 묘비가 안나푸르나 베이스 캠프에 있다. 박영석은 세계의 지붕이 됐다.
 
요즘 만원사례인 영화 ‘히말라야’(감독 이석희)에 보면 엄홍길(56)의 꿈이 ‘16좌 완등’ 운운 하는 대사가 나온다. 하지만 그런 거 다 팔기 위해 언론 등이 만든 거다. 허영호, 엄홍길, 박영석 등은 산 이외 훈장이 필요 없는 족속들이다. 아는 듯 모르는 듯, 먹고 살고 원정대 비용도 마련하기 위해 묵인했지언정 저급한 ‘마케팅 용어’를 그들 본심으로 오해해선 안 된다.
 
히말라야 ‘14’좌를 세계 첫 완등한 라인홀트 메스너는 1988년 제15회 캘거리동계올림픽 조직위원회가 수여한 공로 메달을 이렇게 거부했다. “등반에선 싸우는 상대도 없고, 심판도 없다. 단지 나 자신과의 싸움이 있을 뿐이다.”
 
시성(詩聖) 라빈드라나드 타고르도 말했다. “참다운 목표는 최고의 한계점에 도달하는 게 아니라 완성을 추구하는 것이다. 이 완성은 끝이 없다” 남이 몰라 주더라도 무한히 높은 곳에 올라 무한한 완성을 추구하는 산꾼들에게 고산행은 향기 짙은 한 편 시다. 누가 시인에게 이유를 묻겠나. /임용진(논설고문)
 
 
 
 
온누리, 대한(2016.1.21.)
 
너무 따뜻해 올핸 수도 한 번 안 얼고 지나나 했더니 오늘 내 집 온수가 얼었다. 그리고 아뿔싸, 뒤뜰 울타리에 내놓은 소나무 분재와 화분 몇 개도 홉박 눈을 이고 있어 황급히 실내에 들였으나 행여 벌써 동해(凍害) 입지 않았나 걱정 된다.
 
오늘이 대한(大寒)이다. 말이 ‘큰 추위’지 사실 보름 전 ‘작은 추위’(=소한)보다 못한 게 보통 절기의 흐름이다. 그래서 속담에 ‘소한 얼음 대한 가서 녹는다’, ‘대한이 소한에 놀러가 얼어 죽었다’, ‘대한 끝에 양춘(陽春·따뜻한 봄) 있다’고 했다. ‘춥지 않은 소한 없고 포근하지 않은 대한 없다’고도 했다.
 
일년 이십사 절기는 매 계절에 여섯 씩 분포되는데 겨울은 ‘추위 들임’(=입동)에서 시작돼 ‘작은 눈’(=소설), ‘큰 눈’(=대설), ‘겨울 클라이막스’(=동지)를 지나 한 굽이 꺾이며 ‘작은 추위’(=소한), ‘큰 추위’(=대한)로 끝난다. 모두 보름 간격이다. 그러니 대한은 겨울 끝이고 푸릇푸릇 봄이 일어서는(=입춘) 바로 앞이다.
 
달력상 연말 연시는 이미 지났으나 계절적으로는 대한이 한 해 끝이요 입춘이 새해 시작이다. 제주도에선 그래서 대한 전후한 요즘을 ‘신구’(新舊)라 한다. 묵은 해, 새해가 갈마든다는 의미의 ‘신구’는 이사에 좋다는 속설이 있어 요즘 제주에선 요즘 전·월세값이 오르고 방 구하기도 어렵다.
 
‘대(大)’, ‘소(小)’ 이름값을 하려는 것인지 올해는 이례적으로 대한이 훨씬 춥다. 기상대 발표로는 북극 기온 상승으로 제트 기류 속도가 느려져 한반도에 영향을 미친 것이란다. 앞으로 며칠 더 추울 것이라지만 이 정도 추위야 여느 겨울도 한 두 차례 보여주는 것, 사계절 뚜렷한 곳에 사는 이로선 오히려 반갑기조차 하니 위축되진 말자. 올해 입춘은 보름 뒤인 다음달 4일이고 또 설이 곧 닿아있다. 그믐달, 섣달이 오가는 대한 ‘신구’여서 또 무척 바쁘고 즐거운 계절이다. / 임용진(논설고문)
 
 
 
온누리, 눈의 국적(2016.1.28) 지난주 대한 폭설 이후 소낙눈이란 말이 자주 들린다. 여름 소낙비처럼 겨울에 단기간 강하게 퍼붓는 눈이 그것이다. 이전에도 간간히 쓰이던 말이나 이번에 새삼 소낙눈 위력을 실감했다. 서해안에서 제주까지 불과 하루 이틀새 수십 센티씩 쌓였다. 제주 공항 등이 마비되고 전국이 설설엉금 기어 다녔다.
 
이번 소낙눈을 볼작시면 함박눈도 일부 있으나 전반적으로 가루눈이었다. 장독대에 밤새 쌓인 복스런 눈에 아침 창이 환해지고 누렁이 컹컹 짖으며 발자국 남기던 그런 눈이 아니다. 어릴 때부터 봤던 한국 눈이 아니라 흡사 북극이나 캐나다 북쪽지방에서 경험한 그런 가루눈이다. 겨울철 영하 수십도까지 내려가는 추운 나라에 내리는 눈은 일단 크기가 작다. 습기 전혀 없고 쌀가루보다 약간 큰 조그만 눈이 밀가루처럼 우수수 떨어진다.
 
잿빛 하늘에서 멋들어진 춤사위 뽐내며 우왕좌왕 천천히 낙하해 옷이나 손에 닿은 순간 약간 찬기를 남기고 찰나에 스러지는 한국 함박눈(=snow flake)과 달리 북극 가루눈(=powder snow)은 바람 없는 날은 거의 줄눈으로 수직 강하하고 바람 센 날은 아예 블리자드(=폭풍설)처럼 횡으로 얼굴을 때린다. 함박눈은 곡선이고 이번 가루눈은 직선이었다. 함박눈 내리면 대개 포근하지만 이번 눈 내릴 땐 추워 목을 싸매야만 했다.
 
에스키모 말엔 눈 색깔, 형태에 관한 표현만 수백 개가 있다 한다. 그 정도까진 아니지만 우리도 다양한 편이다. 적설량 관련해서도 겨우 발자국 날 정도로 약간 내린 게 ‘자국눈’, 땅을 살짝 덮은 건 ‘살눈’, 30cm 정도 쌓인 건 ‘잣눈’, 키 만큼 쌓인 건 ‘길눈’이라 했다. 이번 폭설은 ‘잣눈’이었으나 북극 온난화로 앞으로 ‘길눈’에 대비해야 할 게 뻔하다.
 
삼한사온은 거의 없어졌고 눈 내린 날 포근하다는 것도 곧 옛말이 될 게다. 스키 타기엔 이번 같은 가루눈이 최상 조건이다. 2018평창동계올림픽대회 조직위원회가 좋아하겠다. 하지만 난 춤 추는 조선눈, 복스런 함박눈이 훨씬 좋다. 이것도 필경 사라질 것, 그래서 더 안쓰러운갑다. / 임용진(논설고문)
 
 
 
온누리 – 난(蘭) (새전북신문, 2월4일자)
 
 
 
 
  동양란 꽃 향기는 유향(幽香)이다. 숨은 선비를 은유한다. 화려 요란하지 않으니 잘 관찰하지 않으면 드러나지 않는다. 유향, 난향은 킁킁대며 냄새 맡는 게 아니다. 두 손 귀에 모아 유심히 숨죽여 듣는 거다. 작은 소리 포착하듯, 정신집중하고 향기(=香)를 들어야(=聞) 하는데 들리는 이에겐 그 향기가 ‘난향만리’(蘭香萬里)지만 안 들리는 이에겐 지척이라도 마이동풍이다.
 
   매,란,국,죽 문인화 사군자 중 난초는 유독 그리지 않고 ‘친다’고 한다. 난 잎은 칼과 같다. 굳고 뾰죽한 게 선비 기개다. 그걸 붓으로 죽죽 쳐 나감은 맘 속에 기른 수양, 공부, 인내, 결기의 표시다. ‘기르다’나 ‘치다’나 다 수양, 배양의 뜻이 있다. 또는 겨울 초입 가지치기 하듯 망설임 없이 먹으로 백지를 가르는 것이니 아무래도 난잎은 ‘그리다’보다 ‘치다’가 훨씬 어울린다.
 
   문인화 묵란은 옛부터 수월 임희지·표암 강세황·완당 김정희 등이 잘 그렸고 근세엔 석파 이하응이, 최근엔 시인 김지하가 즐겨 그렸다. 특히 고종 아버지인 대원군 이하응의 석파란이 유명하다. 그는 정권을 잡기 전, 파락호 시절부터 난을 쳐 팔아서 생계했으며 후일 청나라 천진으로 3년간 압송돼 불우낙척했을 때도 난 치기로 소일했다. 저항시인 김지하 역시 암울한 유신시절 사형수 독방에서 난을 치며 생을 이었다. 완당, 석파, 지하 등에게 묵란은 칼이고 저항이고 사람 향기, 희망의 향기였다.
 
   그제(2일) 박근혜 대통령 64회 생일에 더불어민주당 김종인 선대위원장이 동양란 화분을 선물로 보냈으나 청와대로부터 세 차례 퇴짜 맞고 우여곡절 끝에 받아들여졌다 한다. 선물로 보낸 난은 30만원짜리 ‘황금강’이었다 한다. 이는 일반 한란 등보다 키가 작고 잎이 노릿한 황금색이어서 꽃보다 잎을 감상하는 품종이다. 고가의 난을 보내고 사양한 이유는 잘 모르겠으나 그들이 하필 난으로 농(弄)한 것은 불만이다. 이제 난향마져 정치가 가져가려는 것인지. 제발 그 분들께 부탁하거니와, 오는 봄 내 작은 방 춘란 향기까지 오염시키진 마시라. / 임용진(논설고문)
 
 
 
온누리, 에곤 바르(새전북신문, 2016년2월18일자) 
 
 
 
 
  지난해 타계한 에곤 바르는 동방정책과 독일 통일 입안자다. 사회민주당 총리던 빌리 브란트의 전폭적 후원 아래 바르는 지휘봉을 잡고 1960년대부터 독일 통일을 이끌어 마침내 1990년 10월 무너진 베를린 장벽 위에서 ‘환희의 송가’를 부르게 한다.
 
   그는 “통일을 항상 생각한다. 그러나 통일을 말하지 않는다”고 했다. 바르는 통일을 직접 언급해 미국, 구 소련 등을 자극하는 일을 피했다. 대신 동·서독 통행 허용이나 가족 방문같은 ‘작은 발걸음’으로 변화를 시작해 나중에 이를 기정사실화 했다.
 
   브란트가 이끈 사회민주당은 구 소련, 동독 등 공산주의 연합에 다가서 독일 통일 당위성을 이해시키며 실마리를 풀었다. 이게 ‘동방정책’이다. 반면 당시 야당인 기독민주당의 외교정책은 ‘할슈타인 원칙’이다. 동독과 수교하는 나라와 단교하고 서독은 자유주의 서방과 유대를 굳혀 힘 우위로 통일을 압박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1982년 총선서 사민당이 헬무트 콜의 기민당에 진 뒤에도 바르의 동방정책 기조는 유지된다. 콜 총리가 현실을 받아들여 기존 할슈타인 원칙을 포기했을 뿐 아니라, 어제까지 정적이던 바르로 하여금 2년 더 재직하며 통일설계를 완성토록 했기 때문이다.
 
바르는 생전에 한국 개성공단을 ‘대단한 상상력’이라고 극찬했다. 당시 정동영 통일부장관에게 “한국 통일은 독일식으로도, 베트남식으로도 갈 수 없다. 개성공단에서 그 해법을 본다”고 말했다. 그는 또 “경제적 곤경이 정권 붕괴를 초래할 것이란 생각은 환상이다. 남이 경제적으로 옥죌수록 그들은 자신의 허리띠를 더 졸라맨다. 결과적으로 울브리히트(당시 동독 지배자)의 입지를 강화하고 분단을 심화할 뿐”이라고도 했다.
 
   요즘 통일부는 분단부, 또는 반(反)통일부가 돼버렸다. 홍용표 통일부 장관 입으로 개성공단 폐쇄를 발표한 것부터 블랙코미디다. ‘흡수통일’, ‘적화통일’, ‘궤멸’ 등 남북양쪽에서 통일에 관한 말이 많으나 진정한 염원은 없다. 2년 전 박근혜 대통령의 ‘통일 대박’ 발언은 일순 신선했으나, 쉽게 대박이 오지 않을 것이니 쉬운 포기도 예상됐다. 바르는 “기적을 기다리는 건 정치가 아니다”고 했다. 통일을 기적처럼 바라는 이는 정치가 자격이 없다. / 임용진(논설고문)
 
 
 
임용진 칼럼, ‘전북인 소석’을 추모함(새전북신문, 2016.2.29.)
 
 
 
   소석 이철승이 타계했다. 내가 그를 만난 게(실은 그가 날 만나준 게) 지난해 10월26일이다. 그게 박정희 전 대통령 피살일이어서 날짜를 기억한다.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헌정회 원로의원회관에서였다. 모 잡지 인터뷰 건이었는데 아마 이게 그의 마지막 공식 인터뷰였을 것이다. 정치, 체육 등 문답을 끝낸 뒤 오후 두시 쯤 소석이 늦은 점심을 사줬다. 굴비 백반이다. 점심은 사담이니, 자연 전주 얘기가 나왔다. 그는 내게 고향 선배, 중·고·대학교 선배다. 내 아버지보다 칠 년 연장이니 자연 백부가 조카 대하듯 말한다. 그의 목소리는 낮고 갈라지는 듯하면서도 울림이 있다. 특유의 말투를 살리기 위해 좀 번잡해도 녹음 그대로 전달한다.
 
   “나는 파티 등에서 개인 소개를 이렇게 얘기해. 나는 맛과 멋을 흥과 신명으로 비비는 전주 비빔밥 출신이요. 그게 의미가 있어. 인간이 맛을 알아야 하고, 멋을 알아야 한단 말이여. 전주 비빔밥이 맛과 멋이 있잖어, 응? 그러면 흥이 나야 할 거 아녀. 육자배기라도 한 마디 하고, 춤도 추고 단가라도 부르고. 그래서 흥이 나면 신명이 나는 거지. 그것이 일제시대 탄압 속에서도 이 민족을 살린 것이고, 그것이 내 건강과 장수의 비결이여. 그래서 내가 후진이나 정치인들에게 내 소개를 이렇게 하고, (전북 출신) 동지들도 그럽시다 하는 거여. 이런 얘기 하는 놈이 누가 있어?”
 
   소석의 보스다운 화법이 전달됐는지 모르겠다. 그 내용은 고향 자랑이고 비빔밥 사랑이다. 1970년대 초 어느날 흑백TV 뉴스로 방영된 야당영수 이철승의 대정부 질의 장면이 생각난다. “장관! 기요, 아니요를 분명히 하시오!”. 소석에게 전주 말은 국회건 어디서건 대한민국 표준어였다.
 
   7년 전에도 소석을 특집 인터뷰 했다. 정동영 당시 제17대 대통령선거 후보가 이명박 후보에게 참패한 직후, ‘전북 정치, 어디로’를 묻기 위해 2009년 12월19일 서울 무교동에서 그를 만났다. 전북엔 대통령 될 뻔한 인물이 둘 있다. 소석과 정동영. 둘 다 야당 영수급이고 소석은 특히 5·16 군사혁명 전까지 김대중, 김영삼 전 대통령보다 훨씬 거물 정치인으로서 30년 아래 고향후배, 중·고등학교 후배인 정동영에게 해 줄 말이 분명 있을 거라 판단했다. 역시 당시 육성을 그대로 전하면 이렇다.
 
   “정치란 건 질 때도 있는 거여. 승부 이후가 중요해. 나도 고향을 사랑하지만, 그러나 공인으로, 정치인으로 살아오면서 지역감정이란 졸렬한 카테고리에 예속되진 않았어요. 헌정 사상 최초로 배출한 도 출신 대통령 후보를 당선시키지 못해 도민들이 섭섭하겠으나 대선은 전북 대표가 아니라 국가 대표를 뽑는 자리여. 크게 졌으니 뭔가 이유가 있을 것이고 그것을 객관적으로 따지고 잘못을 되풀이 않아야 미래가 있어.”
 
   그는 1988년 13대 총선에서 DJ바람을 업은 손주항에게 무려 6만여표 차로 참패해 정계 은퇴한다. 득표율 고작 9.8%. 당시 소석 캠프 가족표도 안 나왔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소석 자신이 “묘목을 키워 사람들이 편히 쉴 정자를 만들 수 있을 만큼 자랐는데 꺾어버린 셈”이라고 섭섭해 했다. 하지만 섭섭한 걸로 끝, 다른 정치가들처럼 유학, 칩거, 은퇴번복, 복귀 등으로 간을 보진 않았다. 이때가 소석 66세. 이후 그는 자유총연맹, 서울평화봉사상재단, 헌정회 등 명예직에만 관계하며 자신이 졸렬해짐을 경계했다.
 
   어떤 이는 승부에 목숨 걸고, 어떤 이는 피 터지게 싸우다가도 일단 경기가 끝나면 원위치한다. 김대중, 김영삼, 이철승이 다 마초지만 두 김 씨가 전자라면 소석은 후자였다. 그는 7선의원다운 완력을 자랑하되 표독하지 않았고 절치부심하되 상성(喪性)에 이른 적이 없다. 김제 만경처럼 넓고 유복한 그에게서 나는 천생 ‘평야인’(平野人)을 봤다. 그래서 굳센 섬 출신, 짠물들에게 애초 패배가 예정됐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소석은 자주 “내가 스포츠맨”이라고 자랑했다. 대학(보성전문) 때부터 역기를 들어 팔순에도 근육 탄탄했으며 평생 술, 담배를 하지 않았다. 하지만 같은 헬스 매니어라 할 지라도 김영삼 전 대통령을 스포츠 맨이라 하진 않는다. YS에게 스포츠는 정치를 하기 위한 체력이었을 뿐이다. 이에 비해 소석은 평생 거의 종교적으로 바벨에 매달렸다. 자신을 채찍질하는 잣대, 엄격함, 자제력이 그의 바벨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스포츠맨답게 그는 1988년의 총선 참패를 ‘졌으면 진 거지’ 하고 받아들인 듯하다. 사석에서 그에게 이렇게 묻기도 했다. “전주 사람들에게 서운하시죠?” “예전에 잠깐 그랬지. 하지만 경기에 졌다고 심판을 원망할 순 없잖어?”
 
   소석에게 결국 묻지 못한 말은 ‘당신이 사쿠라였소?’다. 인생 대선배에게 차마 실례를 하지 못했는데 지금 생각하니 돌직구라도 던졌어야 했다. 소석 특유의 화법으로 짐작하자면, 아마 이렇게 답했을 것이다. “국가 안보는 방죽의 둑이요, 자유는 방죽의 물이기에 서로 의존적인 거요. 월남이 패망하는 마당에 우리도 안보 지키며 경제성장하고 정권경쟁도 허는 것이지. 쥐 잡자고 장독대 깨뜨려서야 되겄어?”
 
   최근 소석의 소원은 ‘이평’(二平)이었다. 내후년 2018평창동계올림픽을 보는 게 첫째 ‘평’이요, 남북통일 돼 평양 가서 냉면 한 그릇 하는 게 두 번 째 ‘평’이다. 스포츠맨답고 정치인다운 바램을 둘 다 이루지 못했다. 그래도 이미 맘이 평화로웠던 전북의 거목이시여. 부디 영면하소서. / 임용진(논설고문)
 
 
 
온누리, 임진택(새전북신문, 2016.2.25.)
 
 
 
 
  “윤봉길 거동 봐라 / 일장기 내던지고 군중 속을 헤치더니 경축대로 뛰쳐나간다. / 물통폭탄 도시락폭탄 뇌관을 재빨리 제거터니 / 휙 휙 단상 위로 투척하니 / 경축대 한 복판에 떨어진 폭탄들이 쾅! 쾅! / 벽력같은 소리내며 연속으로 폭발한다”
 
   창작판소리 ‘백범 김구’ 중 윤봉길 거사대목이다. 박진감 넘친 휘모리 장단과 실감나는 도시락 폭탄 투척 발림에 창자와 청중이 혼연일체됐다. 지난주 목요일(18일·서학동 국립무형문화유산원) 판소리 ‘백범 김구’를 들었다. 재미있고 의미 있고 눈물 났다.
 
   세 시간이나 걸리고 결말 뻔한 백범 일대기여서 첨엔 ‘지루하겠군’ 생각했으나 이 선입견은 금세 깨졌다. 공연장을 거진 채운 이 백여명 청중 추임새와 박수가 내내 그치지 않았다. ‘백범 김구’는 문화기획자이자 소리꾼인 임진택(67) 작창이다. 소리는 세 부분으로 나눠 정읍출신 명창 왕기철(55), 왕기석(54) 형제와 작창자 임진택이 분창했다.
 
임진택은 ‘비갭(=非甲)이’다. 경기고, 서울대 졸업(외교학과), 전직 동양방송 PD(공채 12기) 출신인데다 소리도 스물 중반에사 처음 시작해 얼핏 소리 내력보다 학벌이 좋은 아류(亞流)로 여길만하나, 이 비갭이가 ‘오적’, ‘똥바다’, ‘오월광주’, ‘남한산성’ 등을 지어 한국 현대 판소리를 확 업그레이드시켰다.
 
   임진택은 민청학련간첩단 조작사건에 연루된 ‘빵잽이’다. 김지하, 김근태, 이철과 감방동기다. 1974년 출옥후 어느날 서울 명동 까페 테아뜨르에서 명창 정권진의 수궁가에 반해 그 이튿날 이문동 국악예술학교로 정권진을 찾는다. “서울대 생이 먼 판소리?” “판소리로 ‘오적’을 부르고 싶습니다. 가르쳐주십시오.” 국창 정재근·정응민을 조·부로 둔 진짜 광대 정권진은 이 책상물림을 제자로 허락해 이후 한국 판소리에 새 숨을 불어넣는다.
 
   일찍 서울 물을 먹긴 했으나 임진택은 워낙 이 고장 김제에서 나고 자란 이다. 그는 여섯 살 때 원평 장에 갔다가 인파 가득한 시장 한 가운데서 “뭔가 텅 빈 것”을 느꼈다고 한다. 동학혁명 최후의 패전지인 바로 그 원평, ‘텅 빈 동학’이 자신의 삶의 원형이라고 임진택은 생각한다. 판소리 ‘동학’을 작창하는 게 그의 꿈 중 하나다. / 임용진(논설고문)
 
 
 
‘게하’ 세계여행 (새전북신문, 2016.3.2.)
 
 
 
   3월동풍 건듯 부니 언제 눈이 퍼부었던가, 분명코 봄이로구나.
 
   게스트하우스를 3년째 하다 보니 이게 작은 지구란 생각이 든다. 지구촌 여러 인종이 찾아 와 붙박이인 내게 즐거움을 준다. 유목민을 보는 정주민 느낌이랄까. 깨닫지 못한 걸 새삼 하나씩 던지고 가니 가만히 앉은 나도 기본적으로 각국 게스트 사이를 쉴 새 없이 오가는 세계 여행객이다.
 
   게스트하우스는 사업자등록증 상 ‘외국인도시민박’ 업종이다. 내 집엔 미국, 일본인보다 유럽, 중국인이 많이 온다. 아마 한옥마을 전체 국가별 유입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일본 여행객은 최근 한일관계 등 때문에 한국내 유입 자체가 준 듯하다.
 
   세계 여행 챔피언은 단연 독일 사람들이다. 일년 중 해외여행일수가 가장 많은 나라답게 독일인들은 여행 베테랑이다. 지적으로 성숙돼있고 눈동자 차분하고 공부를 많이 해 온 듯 핵심만 물어본다. ‘한옥마을에서 어디를 갈까’ 하는 두루뭉수리한 질문을 하는 이는 독일인이 아니라고 봐도 좋다. 그들은 ‘삼백집과 왱이집 맛 차이가 뭐냐’, ‘마이산을 가려는데 북부 주차장과 남부주차장 어디가 좋냐’는 식으로 꼬치꼬치 묻는다. 독일서 펴낸 한국여행 안내서엔 꼭 마이산이 있어 독일 게스트한텐 아예 내가 먼저 진안행을 권한다. 서비스 한 방을 앞서 날려주면 그들 반응이 괜찮다.
 
   독일인들은 꼭 후기를 남긴다. 어느 게스트하우스에 대한 평가나 정보를 다른 여행객과 공유하는 걸 거의 의무로 생각하는 듯하다. 그런데 그 후기도 보안 몇 점, 위치 몇 점, 서비스 몇 점, 청결도 몇 점 하는 식으로 꼼꼼히 나눠 쓴다. 이에 비해 프랑스인들은 후기가 대개 후하다. 세목별로 나눈다기보다 분위기, 주인과의 교감에 평가가 좌우되는 듯하다. 빈티지 좋은 보르도 와인을 마신 후 빈 병이 아까워 라운지에 뒀더니 프랑스 게스트들에게 효과가 좋다. 그들은 대개 목소리 잔잔하고 우울한 듯, 몽상하듯 말한다. 프랑스 사람은 어딘가 다르다.
 
   영국인들은 일반적으로 음식에 담백하다. 아침메뉴로 제법 풍부하게 이것저것 차려내도 시리얼과 우유로 간단히 때우는 이가 많다. 유쾌하고 잘 생기기론 역시 이탈리아 사람이다. 그들은 눈을 똑바로 보며 새처럼 지지귄다. 이탈리아인들끼리 커플로 올 때도 많은데 그럴 땐 주의해야 한다. 자칫 게스트 중 누가 이탈리아인의 여자친구에게 호감있다는 오해라도 줄라치면 게스트하우스가 부숴질 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한국 젊은이들과 가장 잘 어울리는 것도 이탈리아 게스트다.
 
   게스트하우스는 숙식 뿐 아니라 친교장소이기도 하다. 밤새 라운지를 시끄럽게 하기론 한국 사람 따를 이가 없다. 지난날 부여, 옥저시대부터 가무음주를 즐겼다는 신나는 민족답게 한국 젊은이들이 일단 자기소개 후 한 잔 음주 게임을 시작하면 몇 시간이고 박수, 함성이 이어져 주인 화를 돋구고서야 그치기 일쑤다. 음주 게임은 일종의 권주가다. 낯선 분위기를 술과 함께 순식간에 기화시키는데 그 종류만도 수 십 가지다. 이걸 번갈아가며 몇 시간씩 발산하는 건 한국인과 이탈리아인들 뿐이다. 다른 외국인들은 분위기에 압도당해 혀를 내두르지만 이탈리아 게스트는 조금만 배우면 곧 게임을 이끈다.
 
   중국인들은 정말 실용적이다. 전주 택시운전사에게 택시값이 많이 나온 거 아니냐고 ‘고소하겠다’고 중국말로 소리 지를 정도로 에너제틱하고 게중 어떤 이는 미니 밥솥을 지참해 게스트하우스 내에서 밥까지 지을 정도로 프래그마틱하다. 옷차림도 평범하고 표정도 꾸미지 않으나 우리와 정서 통하고 사람들이 ‘진국’이어서 난 중국 게스트들을 좋아한다. 옷차림 화려하기론 세계 각국 중 가운데 단연 한국 게스트가 으뜸이다. 옷 뿐 아니라 배낭, 우산, 모자까지 ‘깔마춤’(색깔맞춤) 하고 서울에서 전주 오는데 너무 번거로울 듯한 바퀴가방을 끌고 오는데 사실 이는 여행 ‘초짜’란 광고다. 하지만 어떤 미숙도 그들 깔깔대는 웃음이 무마해주니, 청춘은 진정 아름다와라! 
 
   가장 잊지 못할 게스트는 오히려 노인이다. 각각 다른 시기에 온 남성 홀로 여행자 세 명. 70대 초·중반 스페인과 미국 게스트, 80대 초반 호주 게스트. 이들은 몇 년 째 세계를 돌고 있었다. 집 없다는 게 공통점이다. 생각날 땐 일년에 한 두 차례 모국에 들러 가족을 만나면 그뿐, 또 짐을 꾸려 떠난다고 한다. 집 팔아 떠난 길, 언제 끝낼지 모르니 한 푼이라도 아끼기 위해 저렴한 숙소를 이용하는 듯했다. 길 흐르고, 시간 흐르고, 인생도 흐른다. 여정이 길고 그들 배낭은 간소했다. 저런 노년도 있구나. 누군 크루즈 탄다지만, 그와는 차원이 다른 게스트하우스 인생 여행이 있단 걸 난 그들에게서 배웠다. 언제까지 알탕갈탕할 것인가. / 임용진(논설고문)
 
 
 
 
온누리, 슈퍼 화요일(새전북신문, 2016.3.3.)
어제(2일) 미국 슈퍼 화요일이 끝났다. 미국인들은 중요한 건 다 ‘슈퍼’를 붙인다. 슈퍼 마켓, 슈퍼 볼, 슈퍼 맨, 슈퍼 모델 등. 슈퍼 화요일은 선거 흥행을 위해 만든 미국식 이벤트다. 대통령 선거가 있는 해 3월 첫 번째 화요일 미국 남부 21개주가 동시에 각 당별 후보 경선을 치른다. 미국 50개주 가운데 약 반이 같은 날 후보를 경선하니 대선 예고편 중에서도 ‘초강력 슈퍼 예고편’으로 관심을 끈다.
 
  올해 흥행은 괜찮아 보인다. 타이틀 롤이 화려하다. 스펙 좋기로 우주 제일인 여성(힐러리 로댐 클린턴)과 유태인 사회주의자(버니 샌더스·이상 민주당), 억만장자 비호감 파시스트(도날드 트럼프) 및 쿠바인 2세 젊은 피 두 명(테드 크루즈, 마르코 루비오·이상 공화당) 등 다섯이 주연 경쟁을 하고있다. 아버지와 형이 대통령인 젭 부시 공화당 상원의원은 선거 전만 해도 당연히 주연 감이었으나 이미 색이 바랬다.
 
  민주당 후보 둘은 모두 70대 관록파다. 클린턴(70)이 당선되면 최초의 여성, 최초 부부 대통령이 된다. 보스톤 여성명문 웰슬리 대 출신, 변호사, 퍼스트 레이디, 국무장관을 거쳐 백악관까지 노리고 있다. 10여년 전 백악관에서 시도 때도 없이 열린 남편 ‘지퍼’ 때문에 속앓이하던 것에 비하면 참으로 금석지감이다. 샌더스(75)는 어제 오클라호마 등 네 개 주만 이기고 나머지를 클린턴에게 내줘 4대8, 하프게임 당해 전망이 어둡다. 하지만 샌더스 같은 이가 선전하는 걸 보니 미국도 진보주의 종자가 있나보다. 샌더스는 ‘민주적 사회주의자’를 자임한다. 경제 불평등 해소를 위한 증세와 월가 규제를 주장하고 있다. 워낙 그는 무소속 상원의원이지만 대선을 위해 민주당에 합류했다.
 
  트럼프는 미국의 ‘일베’(일간베스트) 대장 쯤 된다. 막가파 식 우익 좌충우돌로 인간의 야만적 본성을 대리충족시킨다. 다만 그가 어제 12개 중 7개 주서 대승한 걸 보니 미국 우익들은 오바마가 어지간히 싫었나보다. 크루즈와 루비오는 모두 1971년 생, 40대 중반 보수주의자다. 하지만 연합하지 않는 이상 트럼프를 꺾을 방도는 없어 보인다. 미 대선은 오는 11월8일 간접선거(선거인단 538명)로 치른다. 현재로선 힐러리 클린턴이 꽃노리패를 쥐었다. 민주, 공화당 누구도 그녀 후광에 조연급이다.
 
  선거는 민주주의 꽃이라지만 대부분 자본과 권력 토양에서 자라는 꽃이여서 그닥 향기롭진 않다. 하지만 미국선거는 재미라도 있다. 우리는? 잘 모르겠다. / 임용진(논설고문)
 
 
 
 
온누리, ‘알파 고'(새전북신문, 2016.3.10.)
 
 
 
 
  압도적인 최고수가 있다. ‘황금곰’ 잭 니클로스(골프), ‘백발 황제’ 레이몽 클루망(당구), ‘이도류’ 미야모도 무사시(검객)처럼 수많은 고수가 즐비한 승부세계에서도 남들을 고개 숙이게 하는 강자 중의 강자다. 체스에선 가리 카스파로프가 그 사람이다.
 
   카스파로프(64·러시아)는 아제르바이잔 출신의 전 세계 체스챔피언이다. 그는 22살 때 당시까지 불침항모던 아나톨리 카포프를 제치고 최연소 세계 체스챔피언에 올라 최근까지 수 십 년간 체스계 황제로 군림했다. 그의 별명이 ‘파괴자’다. ‘카스파로프는 상대를 이기는 게 아니라 파괴한다’는 평가 때문에 그런 별명이 붙었다. 이 파괴자를 파괴한 게 딥 블루다. IBM사의 컴퓨터 딥 블루는 1996년 카스파로프에게 졌으나(6전 3패2무1승) 이듬해인 1997년엔 첫 판만 어이 없는 실수로 내줬을 뿐 나머지를 모조리 이겨 대승(4승1패)했다. 이후 체스에서 인간은 컴퓨터를 이기지 못한다는 게 상식이 됐다.
 
   어제(9일) 벌어진 이세돌 9단과 컴퓨터 ‘알파 고’ 대결이 화제다. 지상파 KBS 2까지 실시간 중계했을 정도다. 전남 비금도 출신의 이세돌(33)은 한국바둑사 최고의 풍운아다. 12세에 한국기원에 입단해 최연소 9단이 됐고 국제기전에서 15차례나 우승해 세계 최고수가 됐다. 이를 상대한 알파 고는 구글이 제작한 특별한(=‘알파’) 바둑(=‘고’·‘Go’) 기계다. 컴퓨터의 일반적인 연산기능은 물론 스스로 학습에 학습을 거듭하는 딥 러닝 기능까지 갖췄다.
 
   이세돌은 그야말로 ‘쎈 돌’이다. 출중한 기력 뿐 아니라 성격도 개성적이어서 승부사다운 면을 두루 갖췄다. 그는 어제 호선에서 뜻밖에 흑을 잡았다. 알파 고를 ‘프로’ 대접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던 것인지, 일부러 불리한 선택을 한 게 이세돌답게 까칠했으나 기계는 이런 데 아랑곳하지 않았다. 결국 이세돌이 불계패했다. 아무리 인공지능(AI)이라도 그렇지, 기계에게 돌을 던지다니! 바둑계 전체가, 아니 전 세계 상식적인 인류가 이에 놀랐다.
 
   하지만 이미 예견된 충격이다. 인간은 계산에 관한 한, 체스뿐 아니라 바둑에서도 컴퓨터를 이기지 못 한다. 다만 그 순간이 앞당겨졌을 뿐이다. 알파고 바둑솜씨를 TV 중계로 본 내 친구 한 명이 이렇게 얘기했다. “그래도 컴퓨터는 피카소가 절대 못 돼” 이 말이 정답일 것이다. 창조, 직관 등은 영원히 인간에게만 고유한 영역이다.
 
   알파고와 이세돌은 앞으로 네 번 더 싸운다. 이세돌이 무척 열받았기 때문에 결과가 흥미진진하다. 아쉬운 점 하나는 구글이 내 건 상금이 1백만달러(10억원)라는 것이다. 인간지능을 대표했다는 의미에서 이세돌로선 이겨도 져도 좀 손해다. 한 1천만 달러는 받았어야 하지 않았나. 구글만 선전시킨 모양이 됐다. / 임용진(논설고문)
 
 
온누리 – 참회 (새전북신문, 2016.3.17.)
 
 
 
 
  벌써 반 백 년이 넘었다. 56년 전 어제인 1960년 3월16일 마산 경찰서. 민간인 지프 운전사 김 씨(당시 20세)는 새벽5시 상사 지시로 경찰서에 파견돼 눈에 수류탄이 박힌 채 사망한 신원미상 학생의 시체를 차로 운송한다. 경찰 지휘로 당일 마산 제1부두 해저에 남몰래 수장된 이 시신은 약 한 달 후 떠올라 4·19 학생혁명에 불을 지핀다. 그 지프 운전자가 김덕기(76) 씨고 신원 미상 학생은 전북 남원 사람 김주열(당시 마산상고 1학년) 열사다.
 
  김덕기 씨가 사건 후 처음으로 김주열 묘소를 찾아 비석을 어루만지는 사진이 그제 일제히 보도됐다. 김 씨는 본인 의사와 상관없이 운전만 했기 때문에 법적으론 무죄지만 그래도 고인에게 미안해 매일 속죄 기도를 했다고 한다. 천주교도인 김 씨는 “평생 참회 눈물을 흘렸다. 뒤늦게나마 직접 사죄할 수 있어 감사하다”고 말했다 한다.
 
  속죄, 참회와 관련해 생각나는 또 한 사람이 고 이항녕 홍익대 총장이다. 광복 전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해 하동군수, 창녕군수를 지낸 그는 평생 이를 후회했다. 친일 이력이 부끄러워 광복직후 고위 관직 제의를 일체 마다 했으며 1980년대 초 한 일간지에 ‘나를 손가락질 해다오’란 글을 실어 통렬한 공개 반성을 하기도 했다. 광복도 수 십 년이나 지난 후에 굳이 자신의 치부를 들추는 이유가 뭔가 하는 의문도 있었지만, 참회란 그런 것이다. 망각의 덮개로는 절대 치유 되지 않는 병, 바로 양심의 상처 때문이다.
 
  고 소석 이철승은 “정치란 가만 두면 더 더러워지는 하수도 공사”라고 했다. 세속 욕심 때문이건 불행한 우연 때문이건, ‘하수도 공사’에 개입되는 건 인간사 불가피하니 참회가 그 정화밸브다. 오죽하면 역사에 결백했을 단 한 사람, 윤동주조차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보자”(‘참회록’)고 했을까.
 
  참회 없이 사는 이도 있겠으나 그건 경화된 암세포나 마찬가지다. 김주열, 전태열, 세월호, 백남기. 참회할 일이 너무 많은 사회에서 사는 게 새삼 송구해 무연히 주위를 돌아볼 때가 있다. 특히 4월을 앞두고서. / 임용진(논설고문)
 
 
 
온누리 – 이팝나무(새전북신문, 2016. 3.31.) 
 
 
 
 
  진안군 마령면 평지리 이팝나무는 수령 250년이나 되는 천연기념물(214호) 노거수다. 여기엔 가슴 아픈 사연이 있다. 먼 옛날 흉년이 들어 한 어린이가 굶어 죽었다. 그의 애비가 자식을 땅에 묻고 나무 한 그루를 심으며 울먹였다. “아가야. 이 나무는 쌀밥나무다. 저 세상에서라도 배부르게 먹으렴”. 흉년 들 때마다 무덤도, 나무도 늘어났다. 그 숲자리가 지금 마령초등학교다. 그 쌀밥나무가 요즘 이팝나무다.
 
   쌀밥은 이밥, 또는 이팝이라고도 하는데 왜 ‘이’가 쌀을 뜻하는지 그 연유는 분명치 않다. 왕조시대 땐 ‘금수저’들만 쌀밥을 먹었기에 왕족 즉 이(李)씨가 먹는 밥이라 해서 ‘이밥’이라고 붙였다는 설도 있는데 좀 작위적이다. 내 생각엔 이밥의 ‘이’는‘엿 이’(飴)자 아닌가 한다. 맨날 꽁보리밥이나 수수밥, 피죽 등만 입에 칠하다가 어쩌다 한 번 쌀밥이라도 먹을라치면 엿처럼 달고 맛있지 않았겠나.
 
   이팝나무는 5월께 개화하는데 그 꽃이 쌀처럼 희다. 가지에 주렁주렁 소담스레 달린 꽃이 먼데서 보면 꼭 그릇에 소복이 담긴 쌀밥 같다. 조팝나무도 있는데 이건 흰 꽃잎 가운데 노란 꽃술이 있어 먼데서 보면 역시 쌀에 조 섞은 밥 같다. 다 자라면 조팝나무는 2m 정도 중키고 이팝나무는 20m나 되는 꺽다리 관목이어서 구분이 쉽다. 이팝나무 개화철이 절기상‘입하’여서 입하나무가 변해 이팝나무 됐다는 설도 있으나 역시 믿을 수 없다.
 
   세월호 참사 2주기를 맞아 정읍에 ‘세월호 추모 이팝나무 공원’이 조성된다. 희생자 304명을 기려 시민 최아무개 씨가 이팝나무 304그루를 기증했고 정읍시는 부지를 내 곧 시민 304명이 한 그루 씩 이를 심을 계획이다. 이팝나무는 8년이 지나야 꽃이 핀다. 이번 식재될 나무도 모두 8년생, 곧 꽃이 필 것이다. 수백년 전 진안 마령에서도, 지금 정읍에서도 이팝나무는 아이들 생명이다. 그 귀한 꽃이 다시는 지지 않길. 다시는 결핍도, 거짓도 없는 세상을 만들길. 소원과 결의를 이팝나무에 부친다. / 임용진(논설고문)
 
 
 
임용진 칼럼 – 지치지 않겠다! (새전북신문, 2016.4.1.)
 
 
   제 풀에 지쳐 그만두겠지. 제가 언제까지 가겠어.
 
   이게 칼자루 잡은 자의 여유다. 칼날을 잡은 이는 손에 피 묻히고 아프다고 아우성 치나 저들의 오불관언에 곧 칼을 놓고 엉엉 울다 시간 지나 상처에 새살 돋기만 기다린다. 세월호 참사가 꼭 그렇다.
 
  이제 보름 후면 벌써 2주기다. 무책임과 혼미, 무도, 용렬, 무능력의 막장 결합체인 대한민국 세월호 안에서 ‘가만 있으라’ 지시만 믿고 기다리던 단원고 2학년 학생 등 꽃같은 생명 304명을 잃은 당시엔 온 나라가 슬퍼했다. 모든 부모가 분노했다. 대통령도 약간 눈물 비치고 해양경찰을 없애는 등 제스처를 보였다. 하지만 그뿐, 사고발생 직후 7시간 동안 대통령 종적 무상에 따른 책임론과 국정원 개입 의혹 등이 제기돼도 ‘난 모르겠다’, 세월호참사특별조사위가 지지부진 끝에 구성돼 수사권과 예산, 각종 자료와 책임자 출석 요구해도 ‘안 된다’는 등 이 정부는 지난 2년간 단 한 가지 태도만을 고수했다. 바로 철저한 외면이다.
 
   외면은 상대 피로를 노린다. ‘동정 피로’라 할까. 누구나 먹고살기 힘든 판에 남 어려운 처지 편드는 게 얼마나 갈까 하고 인간의 기본적인 휴매니티마져 뭉개지길 기다리는 시간끌기다. 그러는 사이 제 풀에 지친 이들이 분열해 혹자는 ‘위로금 더 타려는 거 아니냐?’, ‘세금도둑이다’고 막말하고 얌전한 이들도 종국엔 ‘이쯤 관두는 게 좋겠다’는 식으로 타일러 피해자들끼리 서로 반목하게 만드는 야비한 전략이다.
 
   얼마 전 내 아들이 말했다. “아버진 유족도 아니면서 세월호 리본을 왜 달아요”. 내 아내도 그런다. “당신 딴 건 시큰둥하면서 왜 세월호에만 소릴 높여”라고. 내 집안 일은 아무 것도 아니다. 지난 2년 간 피해학생들 교실을 추모현장으로 남겨 둔 안양 단원고에선 학부모들이 ‘존치파’와 ‘이전파’ 두 편으로 갈려 극단적으로 대립하고 있다. 한편은 희생 학생 존치교실(기억교실)이 재학생 학업에 방해된다며 ‘옮기라’ 요구하고 다른 한편은 ‘그럴 수 없다’고 서운해 한다. 이 시민갈등을 보다 못해 국내 7대종단 모임인 한국종교인평화회의(KCRP)가 중재에 나서고 있으나 이게 어디 종교인들에게만 맡길 문제인가? 사람 수백 명이 죽고 그 책임소재가 여태 미스터리인 정치적, 사회적, 교육적 참사인데 안산시 시장, 국회의원, 지도층, 교육감은 뭐하고 있나. 단원고 추모교실은 평수는 작지만 이나라 전체의 축도다. 현실을 현실로 해결치 않고 ‘논쟁 피로’ 끝에 영혼 문제로 넘긴다면 그 뒤에서 안도할 자 누구일까.
 
   지난 2011년 3월11일 동일본대지진 때 미야기 현 이시노마키 시 오카와 초등학교에서도 학생(74명)과 교사(10명) 84명이 쓰나미에 밀려 학교 운동장에서 희생됐다. 어린 초등학생들이 뒷산으로 도망가려 했으나 ‘운동장에서 기다려라’는 학교 지시에 얌전히 따르다 시커먼 쓰나미에 모두 휩쓸렸다. 그 5년 후인 지난 26일 이시노마키 시는 최종적으로 참변 현장 보존을 결정했다. 황폐한 학교를 보는 것만으로 가슴이 아프다는 해체론자와 후세를 위해 보존해야한다는 입장이 팽팽히 맞섰으나 가에야마 히로시 이시노마키 시장은 “3·11 참사의 반성과 교훈을 전하는 게 우리 사명이다. 다음 세대에 이를 전승하기 위한 의무를 감당하겠다”고 결론 내렸다. 오카와 주민 대상 여론조사는 ‘해체’의견(54%)이 많았으나 유족 의견을 받아들여 시장이 결단했다 한다. 희생 경위가 비슷하고 해법과 해결 과정이 우리로선 배울 점 많다.
 
   오는 13일 국회의원 선거로써 그 사흘 후 세월호 2주기(16일·토요일)를 덮으려는 거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로 요즘 종편 TV 등에서 ‘정치 쇼’가 요란하다.  조선일보 뉴스검색을 해보라. 사흘 전 끝난 세월호 2차 청문회 관련 기사가 단 한 건도 뜨지 않는다. 철저한 외면 세력이 적지 않다는 증거다. 여기서 난 무엇을 할까. 제풀에 지치지 않았다, 아직 살았다는 표시를 어찌할까. 4월은 이런 시민적 고민의 달이다.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는 이 계절. 난 노란 세월호 깃발을 내 집에 달고 싶다. / 임용진(논설고문)
 
 
 
온누리 – ‘여의도'(새전북신문, 2016.4.16.)
 
 
 
 
서울 한 복판 가장 큰 섬이 여의도다. 그런데 이 섬의 뜻이 도시 알듯말듯이다.
 
한자 ‘의’(矣)는 약한 감탄형 종결어미다. ‘재’(哉)가 강한 감탄, ‘그렇고녀!’, ‘그럴진저!’라면 ‘의’는 ‘그렇군!’ 정도다. ‘여’(汝)는 너란 뜻이고, ‘도’(島)는 섬이니 굳이 ‘여의도’를 직역하면 ‘너!섬’ 쯤 된다. 애초 여긴 모래섬인데다 큰 물이 나면 지금 국회의사당 부근만 남기고 다 잠겨버려 사람 안 살고 값도 매길 수 없는 곳이었다. 그래서 ‘너나 가져라!’ 또는 ‘너도 섬이냐?’는 정도로 여의도가 된 것인지 모르겠다.
 
은방울자매 히트곡 ‘마포종점’(1967·박춘석 작곡)은 서울 미개발시대의 마지막 향수를 전한다. ‘밤 깊은 마포 종점, 갈 곳 없는 이 거리…’. 서강 마포나루가 서울 끝이니 그 건너 여의도야 오죽 캄캄했으랴. 하지만 1970년대 초 마포대교가 놓이면서 여의도는 삽시간에 한국의 맨하탄이 된다. 길이 곧고 넓은 계획도시에 아파트, 증권·금융사, 국회의사당, 신문·방송사가 밀집해 불과 몇 십 년만에 대한민국 중심이 된다. 돈과 권력 뿐 아니라 문화, 정신, 도시풍속 등 모든 것의 기준이 ‘여의도’로 통하는데 심지어 땅 면적까지 이곳이 스탠다드다. 새만금 방조제로 생긴 땅에 여의도 140개가 들어간다거나, 뉴욕 맨하탄이 여의도보다 30배 넓다는 식이다. 전주는? 여의도의 약 70배 크기다.
 
선거가 어제 끝났다. 이 좋은 여의도에서 나가는 이, 들어오는 이, 남는 이가 오늘 교차한다. 국회의원에 올인한 이들의 정열과 회한, 눈물, 박수, 절치부심, 환호를 보노라면 드라마가 따로 없다. ‘진박’ 마케팅, ‘존영’ 코미디, ‘광주가 날 버리면 은퇴하겠다’ 등 20대 국회 노이지 마케팅도 이만하면 역대 최고다. ‘너나 가져라’던 여의도를 요즘엔 모두 서로 못 가져 안달이다. 하지만 금뱃지는 금수저가 아니다. 어렵사리 그걸 단 이에게 요구하는 건 헌신과 희생과 봉사다. 여의도는 우리 모두의 섬이다. / 임용진(논설고문)
 
 
 
온누리 – ‘4월7일'(새전북신문, 2016.4.8.)
 
 
 
 
   어제가 신문의 날이다. 매년 4월7일을 신문의 날로 정한 건 120년 전 이날 ‘독립신문’이 창간됐기 때문이다.
 
   오래전 구입한 독립신문 영인본을 펼쳐본다. 창간호는 ‘조선 서울’에서 ‘건양 원년(1896) 사월 초칠일 금요일’에 나왔다. 제호는 ‘독닙신문’, 세로쓰기 삼단 편집이고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읽도록 돼있다. 가로 세로 218×303mm 크기에 매일 두 장(4페이지) 씩 나왔는데 창간호 1, 2페이지는 광고, 논설, 관보, 외국통신, 잡보 순서로 구성됐다. 광고는 신문값과 지국개설 등에 관한 짧고 정직한 비즈지스 사고(社告)다. 신문은 돈 주고 사는 것임(=‘한 장에 동전 한 푼’)을 창간호 맨 앞에서 일깨우고 있다. 
 
   창간호 논설은 그 유명한 ‘불편부당’과 ‘평등’의 창간사다 “우리는 첫째 편벽되지 아니하고도 무슨 당에도 상관이 없고 상하귀천을 달리 대접하지 아니하고… 모두 한글로 쓰는 것은 남녀 상하귀천이 모두 보게 함이요…”. 이밖에 관보는 정부 발령사항, 외국통신은 해외뉴스, 잡보는 일반 사건기사다. 이어 3페이지는 기업들 유료광고, 4페이지는 영문판이다.
 
   창간호 논설은 서재필(1864~1951)이 썼을 것이다. 그는 약관 스물에 갑신정변(1884)을 주도한 혁명아다. 허망한 ‘3일천하’ 후 일본을 거쳐 미국에 망명했으나, 그 사이 역적으로 몰린 부·모·형·아내는 음독자살하고 두 살 짜리 아들은 굶어 죽는다. 망명 10년 후 미국 의사 신분으로 귀국한 그에게 조선이 고위 관직을 제의했으나 이를 뿌리치고 만든 게 독립신문이다. 사장 재직 2년간 그는 월급으로 책정된 150원을 받지 않았을 뿐더러 오히려 주머니 톨톨 털어 신문사를 운영했다.
 
   ‘독립신문’ 2주갑(=120년)인 지금도 신문업은 여전히 고되다. 권력과 자본으로부터 ‘불편부당’한 신문사가 몇이나 되며 지역신문 종사자 중 맘 편히 월급받는 이가 몇이나 되나. 면암 최익현은 “인간세상 지식인 되기 힘들다”고 탄했지만 요즘엔 신문쟁이 노릇 하기가 더 힘들다. / 임용진(논설고문)
 
 
 
온누리-‘소파'(새전북신문, 2016.5.5.)
 
 
 
 
오늘은 어린이날이다. 어린이란 말을 쓰고 어린이날을 만든 이는 소파 방정환(1899~1931)이다. 그는 단순한 동화작가가 아니라 독립운동가, 인권운동가였다. 3·1운동 때 독립선언서를 배포하고 만세 부르다 투옥되기도 했다. 거인 방정환을 되돌아 본다.
 
△‘동심여선’(童心如仙) : 어린이 맘은 신선과 같다! 방정환의 묘비명이다. 지병과 과로 때문에 불과 32세로 아깝게 타계한 그는 마지막 가는 길까지 이렇게 새길 정도로 어린 친구들을 사랑했다. 그의 묘는 서울 광진구 아차산에 있다.
 
△‘소파’(小派) : 방정환이 스스로 지은 자호(自號). ‘잔 물결’이다. 그는 타계 며칠 전 부인에게 이러한 말을 남겼다, “부인, 내 호가 왜 ‘소파’인지 아시오? 나는 여태 어린이들 가슴에 ‘잔물결’을 일으키는 일을 했소. 이것이 갈수록 커져 뒷날 큰 물결이 되어 출렁일 것이니 부인은 오래 살아 그걸 꼭 봐주시오”.
 
△10만부 : 방정환이 1923년 3월20일 창간한 월간지 ‘어린이’의 월 최다 발행부수. 당시 서울 인구가 30만명에 불과했으니 ‘어린이’는 한국잡지 사상 전무후무한 베스트 셀러다. 어린이로 상징되는 신문명 욕구, 평등에 대한 갈구가 그만큼 컸지만 마케팅도 훌륭했다. ‘어린이’는 독자선물로 윷놀이판, 금강산 게임 말판 등을 증정했다. 요즘으로 치면 ‘보드 게임’ 특별선물인 셈.
 
△검열 : ‘어린이’는 애초 예정일보다 스무 날 늦게 창간됐다. 일제 검열 탓이었다. 그 사정을 창간호 말미에서 이렇게 전한다. “소위 원고검열이라는 절차가 어떻게 까다로운지 여기 저기 왔다 갔다 하는 동안에, 어느덧 20여일이 획 지나가고 …그런 가운데도 내용 기사 중에 짭짤한 구절은 원고 검열할 적에 꼭꼭 삭제를 당하여 마치 꼬리 뺀 족제비 모양이 되었습니다”. 잡지 ‘어린이’가 단순한 소년지 이상임은 일제도 이미 간파하고 있었단 얘기다. ‘어린이’는 당대 최고 지성의 잡지였다. 마해송, 손진태, 박목월 등이 필진 참여했다.
 
경찰청에 따르면 지난 2014년 한해 접수된 아동학대 사례가 1만27건이다. 힘없는 어린이들이 부모 등 친권자로부터 말 못할 학대를 당하고 있다. 소파가 이를 봤다면 뭐라 했을까. 부모 같지 않은 자들 때문에 어린이 인권이 한 세기 전 피식민지 수준으로 후퇴해 버렸다. 평등세상 훈훈한 ‘큰 물결’은 언제 이나. / 임용진(논설고문)
 
 
 
온누리 – 엄숙주의(새전북신문, 5월 19일)
 
 
 
 
  북한 조선노동당 제7차대회가 어제 폐막했다. 김정은 위원장을 지도자로 대내외에 천명한 가운데 작은 화제 하나는 영국 BBC 방송 취재진 셋을 대회 기간 중 국외 추방한 것이다. 그들이 TV 뉴스에서 김정은을 지칭해 쓴 ‘뚱뚱하고 예측할 수 없는’이란 표현이 문제됐다. 특히 ‘뚱뚱한’이란 표현이 “최고존엄을 모독했다”고 북한 당국이 발끈했다. 대체 뭔 말을 썼길래?
 
   기사 원문을 보니 문제 된 단어는 ‘커풀류언트’(corpluent=‘뚱뚱한’)다. 이와 비슷한 말로 ‘플럼프’(plump)는 둥실둥실하게 살찐 것, ‘포틀리’(portly)는 나이 든 배불뚝이, ‘스타우트’(stout)는 작고 단단하게 딱 되바라진 걸 의미하고 ‘팻’(fat)은 이 모든 게 다 포함되는 그냥 ‘뚱뚱하다’ 정도이다. 사전을 더 들여다보니 ‘커풀류언트’는 ‘팻’을 피하기 위해 많이 쓴다고 돼있다. 그러니 좀 공적인 매체의 기사 투 단어가 ‘커풀류언트’다. BBC 기자로선 여러 표현 중 그나마 격 떨어지지 않게 고른 게 ‘커풀류언트’ 아닌가 싶은데 이게 북한을 건드렸으니 거기선 지도자 체형 관련 발언 자체가 금기인 걸 몰랐나보다.
 
   작고 통통한 것을 ‘난쟁이 똥자루’라고 하는데 이건 아마 북한 유래 속어인 듯하다. 최은희·신상옥 납북 수기인 ‘조국은 저하늘 저멀리’에 보면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자신의 작고 ‘포틀리’(portly)한 체형을 빗대 “내가 난쟁이 똥자루만하다”고 웃었다고 한다.
 
   남의 장애나 비정상적 체형 등을 대놓고 언급하는 건 점잖은 이들이 삼갈 일이다. 하지만 뚱뚱한 걸 뚱뚱하다고 해야지 뭐라 하나. 우리는 단순히 발음이 비슷하다는 이유로 대통령의 성에 어떤 조류를 갖다 붙이고, 그 이름자에 어떤 놀이기구를 붙이기도 하는데 말이다. ‘최고존엄’에 대한 불경이 이보다 지극할 데 없지만 그래도 어른스럽고 관대한 대한민국이라 소소한 것까지 트집 잡지 않아 다행이다. 이에 비하면 북한은 너무 엄숙하다. 그게 생존형, 생계형 엄숙주의인 듯해 더 안타깝다. / 임용진(논설고문)
 
 
 
온누리 – ‘전주성'(새전북신문, 5월26일 )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없다. 프로농구 전주kcc 연고지 이전 파동이 잦아든 지 한 달도 안 돼 이번엔 프로축구 전북현대 심판매수 건이 터졌다.
 
   그제(24일) 전주 월드컵경기장엔 꽤 많은 관중이 모였다. 전북현대와 멜버른 빅토리(호주) 간 2016 아시아축구연맹 챔피언스리그 16강 2차전이 열렸다. 전북이 2대1로 이겼고 경기 내용도 괜찮았다. 하지만 이날 포커스는 경기가 아닌 그 후였다. 전국 언론들이 밤늦은 10시까지 경기장에 모여 전북현대의 ‘심판매수’에 관해 카메라를 들이댔다.
 
   전주 월드컵 경기장은 축구팬들 사이에 ‘전주성’으로 통한다. 이 홈구장에서 전북현대는 K리그 **승 위업을 이뤘다. 전북현대 최강희 감독은 전북 팬들에게 ‘봉동 이장’으로 불리운다. 전북현대 숙소가 봉동 현대자동차 공장 부근에 있기 때문이다. 사랑과 존경의 대상인 ‘전주성’에서 ‘봉동 이장’을 비롯한 전북현대 프런트들이 불명예스런 혐의로 곤혹스러워 하고 있다. 이철근 단장과 최 감독은 이날 경기 후 기자회견에서 “죄송하다, 책임 지겠다”는 요지로 솔직히 사과했다. 구단 공식입장은 “스카우트 한 사람 때문”이라고 심판매수 책임을 프런트 직원에게 돌리고있지만, ‘봉동이장’은 진퇴를 깨끗이 할 것으로 보여 역시 스포츠맨답다.
 
   한국축구 레전드인 차범근은 지난 1998년 심판이 개입한 ‘프로축구 경기조작설’을 폭로했다가 대한축구협회로부터 미운 털 박혀 프랑스월드컵 대회기간 중 해임됐다. 독일 분데스리가에서도, 이탈리아 세리에 A에서도 10여년 단위로 승부조작 스캔들이 터져 세계를 떠들썩하게한다. 지난 2006년엔 그 유명한 유벤투스FC팀이 여기 휘말려 우승컵을 몰수당했으며 하위리그로 강등되기도했다.
 
   스포츠맨은 비교적 정직한 이들이지만, 돈이 걸린 곳 어디에건 유혹이 없겠는가. 이미 터져버린 일, 전북현대가 솔직히 수습해 프로 스포츠의 악폐인 ‘매수’를 근절시키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이건 승부보다 훨씬 중요한 ‘전주성’의 자존심이다. / 임용진(논설고문)
 
 온누리 – 둥지 내몰림(새전북신문, 2016.6.2.)
 
 
 
 
 
   서울 가로수길(강남구신사동), 홍대앞(마포구서교동)은 ‘젠트리피케이션’의 대명사다. 10, 20년 전만 해도 소규모 공연장, 스투디오, 화랑, 멋진 카페 등이 있던 한적한 거리였으나 요즘엔 주중에도 사람 물결을 이루는 도심 관광지가 됐다. 이를 노린 대기업, 다국적 기업 등의 프랜차이즈 식당이 들어서고 땅값 오르고 전세값 올라 영세 점포들은 천정부지 집값 때문에 버티지 못하고 문 닫거나 이사를 간다. 서울 구도심 북촌, 서촌도 마찬가지다. 공중목욕탕, 세탁소, 전파상, 백반집은 이미 오래 전 없어졌고 자본 기초체력이 월등한 스타벅스, 맥도날드 등만 살아남아 여기저기 천편일률 비슷한 성형도시가 되어간다.
 
   대중이 움직이는 곳에 거대자본이 들어오고 그곳 터잡이인 영세 상인이나 예술가·원주민들은 폭등한 임대료에 절망해 딴 곳으로 이삿짐을 싼다. 그런데 이 현상은 익숙하되 말이 영 어색하다. ‘젠트리피케이션, 젠트리피케이션?’ 하다가 어원을 찾아보니 중세이후 영국 지주계급 ‘젠트리’에서 나왔단다. 말끔한 젠트리들이 찌질한 영세 서민을 내쫓고 거리를 번뜻이 단장하는 게 요즘 자본 행태와 다르지 않아 이름 내력은 짐작 된다.
 
   하지만 그래도 계속 이걸 ‘젠트리피케이션’으로 불러야 하나? 신문 방송도 무슨 새 추세인 양 이 서양말을 쓰니 꺼림칙하던 차, 국립국어원에 전화를 걸었다. “젠트리피케이션을 뭐라 해야 되나요?” “그게 뭐죠?” 일순 실망했으나 이러저러 설명을 한 끝에 기다리는 답을 들을 수 있었다. “아, 그거요. 최근 ‘둥지 내몰림’으로 다듬어졌습니다.”
 
   한옥마을도 둥지 내몰림이 심각하다. 여덟 평짜리 점포 임대료가 보증금 1억원에 월세 800만원인 곳도 있다. 구도심 개발과 둥지 내몰림은 한 동전의 양면이다. 대학로에서도, 뉴욕 브루클린에서도, 상하이에서도 젠트리피케이션이 진행되기 때문에 이는 세계적 현상이다. 하지만 ‘둥지 내몰림’이라 쓰면 그 세계적 현상이 내 일처럼 훨씬 쉽게 이해된다. 이것이 모국어의 장점이다. 한옥마을과 세계를 한꺼번에 아우르는 개념을 놔두고 굳이 외국어를 써야할지. 이러다 혹시 한국어가 둥지 내몰림될라. /임용진(논설고문)
 
 
 
‘여혐’ (새전북신문, 2016.6.9.)
 
 
지난달 강남역 살인사건 피해여성 박 아무개씨(23)는 유언으로 감사편지를 남겼다. 남자친구 송 아무개씨가 유품을 정리하다 발견한 이 편지를 한 시사 주간지가 보도했다. 그 몇 대목만 옮기면 이렇다.
 
“심한 말, 나쁜 행동, 잠 못 자게 밤늦게 급히 했던 부탁 모두모두 고쳐주려 해주시고 잠 설쳐가며 완성해주었던 내 부탁, 어릴 적엔 몰랐는데 이제 하나하나가 보여서 정말 미안하고 감사합니다. 거짓말도, 거짓말인 것을 알면서도 믿어주신 점, 미안하고 감사합니다. … 나 혼자 힘들다고 어리광 피우고, 짜증내고, 화내도 다 받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소한 점 하나하나 곁에서 챙겨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등등.
 
“엄마 아빠 ♥”로 시작되는 이 편지는 스물 다섯 개 문장이 모두 ‘감사합니다’로 끝난다. 지난달 어버이날에 썼다가 부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인터넷엔 이와 관련, 또 다른 편지도 회자된다. 한 아버지가 강남역 사건에 충격 받아 아들에게 보낸 이메일이다. “정말 솔직히 말해 소위 ‘여성혐오’라고 요즘 속칭되는 개념이 너와 나한테 해당되지 않는 것은 아니야. … 조신하게 다녀라, 밤에 돌아다니지 말아라, 이런 말들은 모두 ‘여자를 위한다’는 명목 아래 성행하는 성차별이란다. 여자들에게 밤에 돌아다니지 말라고 가르치는 게 아니라 남자들에게 ‘밤에 돌아다니는 여자를 해코지 하는 행위가 도덕적으로 잘못 된 일이라는 걸 가르치는 게 옳은 일이야. …지금 한국사회는 ‘가해자가 돼서는 안된다’가 아니라 ‘피해자가 되지 말라’를 가르친다는 게 문제야. …‘여혐’이 얼마나 무서운지 알겠지?” 정말 좋은 아빠다.
 
며칠 전 전남 신안군 한 섬에서 20대 초등학교 여교사가 마을남자 셋에게 성폭행 당했다. 온 사회가 비난하는 가운데 정작 마을에선 이를 두고 “젊은 선생이 평소 꼬리를 쳤다”는 말이 나온다고 한다. 참 무서운 ‘여혐’이다. 만 가지를 양보해, 젊은 여성이 꼬리 치면 안 되나? 그렇다고 남을 폭행(=성폭행)하나?
 
앞서 ‘감사합니다’ 편지 중 가장 가슴 아픈 대목은 이거다. “ ‘사람은 성실하고, 착하다’란 것을 보여주셔서 감사합니다”. 한국 사회는 이십대 젊은 여성들의 이런 아릿다움을 연달아 뭉개고 있다. ‘여혐’은 심리적 범죄다. 흑인 혐오, 무슬림 혐오처럼 무책임한 심리적 도피다. 그런 건 트럼프에게나 맡기자. / 임용진(논설고문)
 
 
 
온누리- 정세균(새전북신문, 2016.6.16.)
 
 
 
 
정세균(67·국회의장)은 고려대학교 법학과 1971년 학번이다. 1972년 가을 그가 고대 총학생회장에 출마하려고 대학동기이자 동향인 양창명(65·전 언론인)을 불렀다. 정세균은 신흥고, 양창명은 전주고를 졸업했다. 전주고 출신이 많은 고려대에서 선거 승리를 위해선 양창명의 도움이 절실했다.
 
“양형, 총학생회장 선거에 나가나?” “아니” “그럼 나 좀 도와줘” “알았어”
 
마침 전고 출신으로 후보 물망에 오르던 김용하(65·전 KCC건설 전무), 이강태(65·전 BC카드 사장)가 모두 출마를 접었기 때문에 양창명은 편하게 캠프 주역으로 정세균을 도왔다. 선거 자금이 부족했으나 이는 학생다운 방법으로 해결했다. 전주 출신이자 고대 출신인 소석 이철승이 당시 야당 지도자(신민당 부의장)였다. 동대문에서 밤새 통음한 정세균 등은 새벽 4시30분 통금이 풀리자마자 혜화동 로타리 이철승 집 대문을 두드렸다. 야당 지도자답게 이미 이십여명이 그를 만나려고 줄을 서고 있었으나 소석은 젊은이들을 가장 먼저 만나줬다. “너희는 내 뿌리다. 또 우리 앞날이기도 하다. 잘 해봐라” 대선배 소석은 지갑에서 적잖은 돈을 내어주며 격려했다. 범 전북 파워 덕에 사람과 돈을 얻은 정세균은 학생회장 선거에서 낙승한다.
 
정세균은 전북 진안 빈농 출신이다. 무주고등공민학교를 거쳐 전주공고 재학중 대학에 가고 싶어 전주 신흥고등학교 교장 장평화를 찾아갔다. 기특히 여긴 장 교장이 즉석에서 낸 영어, 수학 문제를 풀고 전액장학생입학 허락을 받아낸다. 생활비는 신흥고 매점에서 빵을 팔며 벌었다. 이때 신흥 중학교 매점에선 3년 후배 서거석(62·전 전북대총장)도 같이 빵을 팔았다. 그래서 신흥학교 ‘빵돌이’들은 주의해 봐야한다는 소리가 나온다. 그들은 내공이 무척 강하다.
 
정세균은 정읍출신 김원기 전 국회의장과 함께 전북이 낳은 최고위 선출직이다. 마이너, 소수파, 비세(非勢)인 듯 하면서도 국면을 장악하는 게 소싯적부터 그의 장기다. 고향을 좀 더 잘 먹여살릴까, 입법부의 격을 높힐 수 있을까. 국회의장은 이미 은퇴코스가 돼버린 것이나 아닐까. ‘빵돌이’를 주목한다. / 임용진(논설고문)
 
 
온누리 – 장마 화풀이(새전북신문, 2016.6.23.)
 
 
 
글을 쓰는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제 안의 독기를 쏟아내기 위해서(무라키미 하루키)거나 세상을 희롱하기 위해(연암 박지원), 또는 남의 분노를 촉구하기 위해(스테판 에셀) 쓴다. 천만 사람이 천만 가지 이유를 가질 것이다. 오늘 나는 화풀이 글쓰기다. 아직 미칠 만큼은 아니지만 불만, 짜증을 해소하는 데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는 것만큼 좋은 것도 내겐 없다. 자판을 피아노 건반 패듯, 황토에 소나기 박히듯 세게 두드려야 한다.
 
장마 때문이었을 것이다. TV 종편을 보다 화가 난 것은. ‘조, 중, 동, 매’ 이른바 4대 메이저 신문사가 운영하는 종합편성 TV가 어린이 프로 ‘뽀뽀뽀’ 수준이란 건 익히 알기 때문에 화 내고 자시고 할 것도 없지만 요즘은 특히 도가 지나치다. 유명 연예인들의 사생활을 두고 종편들이 몇 십분 씩 토론 분석하는 건 흉내 치고도 과한 언론 흉내다. 그냥 가십성, 단편성으로 짤막히 보도해도 될 일을 몇몇 이른바 전문가들이 다각도로 분석해주니 입만 열면 ‘공기’(公器)라는 전파를 가지고 그렇게 할 일이 없나. 더구나 출연자는 경찰 출신, 화장 전문가, 의사, 변호사, 모 대학 초빙교수 등이 총망라돼 제 분야도 아닌 것에 한 마디씩 거드니 이런 ‘금수회의록’이 없다.
 
단어 자체가 부정 가치인 ‘상간녀’(김세아), ‘불륜’(홍상수-김민희) 등으로 시청자를 쿡쿡 질러대다 가수 박유천 피고소 건을 두고는 신이 나 화장실 그림까지 안방에 들이댄다. 어찌 신나고 바쁘던지 세월호에 철근 400톤이 실렸다든지, 세월호 특조위가 이달말로 해체 운명이란 등 소식은 종편에서 종적무상, 찾아볼 길이 없다.
 
소설 ‘장마’는 이렇게 시작한다. “비는 분말처럼 몽근 알갱이가 되고, 때로는 금방 보꾹이라도 뚫고 쏟아져 내릴 듯한 두려움의 결정체들이 되어 수시로 변덕을 부리면서 침묵의 밤을 온통 물걸레처럼 질펀히 적시고 있었다”(윤흥길). “여드레 스무 날엔 온다고 하고 초하루 삭망이면 간다”(김소월, ‘왕십리’)고 했으니 장마도 가긴 갈 것이다. 그러나 장마여! 기왕 내릴 거 침묵의 밤을 홉빡 적셔 종편 보꾹(=지붕)이라도 뚫기 바랄 순 없을까. / 임용진(논설고문)
 
 
 
임용진 칼럼 – 서문(西門)부터 짓자.(2016.5.)
 
 
 
우두머리 동학꾼 중 하나인 오지영은 전북 익산 사람이다. 그가 살아남아 1940년에 쓴 ‘동학사’(영창서관)에 보면 동학 대군이 이렇게 전주에 입성한다.
 
“서문으로 남문으로 물밀 듯 들어가고 동학군들은 장꾼과 같이 섞여 문안으로 들어서며 한편 고함을 지르고 한편 총질을 하였다. 서문에서 파수 보는 병정들은 어찌된 영문인지 까닭을 몰라 엎어지며 자빠지며 도망질을 치고 말았다. 삽시간에 성안에도 모두 동학군의 소리요, 성밖에도 또한 동학군의 소리다. 이때 전대장(=전봉준)이 완만히 대군을 거느리고 서문으로 들어와 자리를 선화당에 정하니 어시호 전주성은 함락되었다”
 
그날이 1894년 음력 4월27일, 전주 서문 장날이다. 남문과 서문 장날은 2, 7일, 북문·동문 장날은 4, 9일이다. 양력으로는 5월말 어느 때, 그러니 122년 전 딱 요즘 일이다. 정오를 기해 용머리고개에서 먼저 ‘쿵’ 하고 한 발 포성이 울린다. 이를 신호로 장꾼처럼 위장한 농민군이 마구 방포하고 밀려들자 서문 관졸들은 황망하여 겨우 포 한 발 응사하고 도주했으며 감사 김문현은 피란 가는 백성 옷을 빼앗아 입고 겨우 전주성을 빠져나갔다. 흡사 판소리 적벽가 위나라 패주 대목 중 조조 변장 탈출과 비슷한 통쾌한 장면이다. “조조의 혼 기겁하야 홍포 벗어 던져 버리고, 군사 전립 앗어 쓰고 …날 살려라, 날 살려라.”
 
일본제국주의자들은 1907년 도시정비를 핑계로 전주 사대문 중 남문만 빼고 동, 서, 북문을 부수고 성곽을 철거한다. 을사늑약으로 일본 식민통치가 공식화하기 3년 전 이미 그들이 조선 천지를 장악했다는 증거다. 일본제국주의가 서울 창경궁에 동물원 짓고 전주 경기전에 국민학교(=초등학교) 만들고 전국 오래된 도시 성곽과 대문을 다 부순 건 이미 주지할 터, 제발 일본 구경 다녀 온 후 오사카 성이나 구마모토 성이 잘 보존됐더라고 너무 감탄 말라. 그런 말 들으면 한숨이 나온다. 가만 놔 두면 몇 천 년도 갈 한국의 돌 구조물을 다 부순 이들이 누군데.
 
지난 세기 초 전주 서문 전경을 담은 사진이 최근 군산 동국사에서 발견됐다. 서문은 이 사진 속 한 가운데 초가집들 사이에 우뚝 솟아 그때 위용을 전한다. 엽서 크기 만한 작은 사진이지만 이 발견은 전주시민을 흥분시키기 충분하다. 그저 ‘잘 생겼다’고만 전해오던 조상 실물을 백 년도 더 지난 후 사진으로 확인한 셈이라고나 할까. 서문의 정확한 구조, 위치에 대한 확실한 증거를 얻었으니 수 년 전부터 논의되던 전주 부성 복원이 이 사진 한 장으로 결정적인 힘을 받게 됐다. 전주역사박물관 이동희 관장은 “사진이 주는 정보는 거의 완벽하다. 전주 부성 복원 ‘설계도’를 얻은 셈”이라고 평한다.
 
이 사진 속 정보를 요약하면 이렇다. ①서문은 이층 누각인 남문과 달리 단층이다. ⓶동문도 작지만 저 멀리서 그 구조를 확인할 수 있다. ⓷사진 오른쪽에 위치한 전라감영 선화당(=감사 집무처) 측면 모습을 이번에 처음 확보했다. 아울러 감영 주변 부속건물도 확인함으로써 현재 복원중인 전라감영을 거의 원형대로 추진할 수 있게 됐다. ④전주 동헌, 전주 객사 동쪽 날개 건물(=동익헌), 서문 성벽이 확실하게 보이며 동문 성벽은 희미하게 보인다.
 
이상 대부분은 처음 확인되는 것들이다. 사진 속 전주는 성벽이 철거되기 직전인 1906년 또는 1907년 전경으로 추정된다. 동, 서, 북문이 있었다는 곳에 현재 표지석이 세워져있지만 첨단장비로 사진을 분석하면 보다 정확한 위치를 비정할 수 있을 것이다.
 
전주부성(사대문+성곽) 복원 논의는 지난 2006년 시작됐다. 당시 전주시청 용역 결과에 따르면, 사라진 3개 대문과 성곽 일부 복원에 700억원이 든다고 한다. 700억원 중 500억원이 토지매입 비용이다. 이는 전액 시 예산으로 충당해야 하며 나머지 200억원(=건설비)도 정부와 지자체가 6대 4 정도 분담해야 돼 가난한 전주로선 여간 큰 부담이 아니다. 결국 문제는 돈이다. 하지만 방법이 없지도 않다. 광주가 지난 연말 ‘아시아문화중심도시 조성에 관한 특별법’ 통과로 특별 예산을 확보한 것처럼 전주도 정치역량을 발휘하면 된다. 이는 물론 국회의원 등 전주 출신 정치인들이 합심 협력해야 한다. 전주가 이미 얻은 전통문화도시 조성사업에 더 붙이건, 현재 추진중인 동아시아문화도시를 결사 성사시켜 새 예산을 얻건, 선량들이 뭉쳐 이것 하나 해결하면 고향에 큰 선물이 될 것이다.
 
예산 부족 등으로 인해 전주부성 복원이 ‘원스톱’으로 힘들다면 일단 서문부터 복원하는 게 좋겠다. 서문은 동학 함성을 담은 전주의 혼이다. 서문이 선다면 ‘한옥마을-전라감영-서문’으로 관광 어트랙션 확장은 물론 전주 정신의 새 상징이 될 것이다. 지난날 정의가 강물처럼 쏟아져 들어온 곳, 전주 서문을 다시 짓자. 거기다 ‘전봉준 입성처’란 팻말이나 동상 하나 작게 세워두면 또 얼마나 좋을까. / 임용진(논설고문)
 
 
 
두려울 때 말하라. (새전북신문, 2016.6.27.)
 
 
 
 
 
불과 나흘밖에 안 남았다. 예정대로라면 4·16세월호참사특별조사위원회(이하 특조위)가 오는 30일로 없어진다. 하지만 상황이 결정적인 것 같진 않다.
 
지난 7일 국회의원 129명(더불어민주당 123명 전원과 정의당 의원6명 전원)이 서명한 세월호특별법개정안(이하 개정안)이 발의됐다. 이 개정안은 더불어민주당이 당 차원에서 낸 제20대 국회 제1호 법안이다. 이번 국회에서 어떻게 하겠다, 뭐에 중점 두겠다는 게 ‘제1호’의 정치적 상징성이다. 여소야대 정국에서 야당이 힘을 합치면 이 법안 통과는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국민의당이 요즘 ‘리베이트’ 파문으로 코를 석자나 빠뜨리고 있지만 국가적 사안인 세월호특별법 개정에 고개를 못 돌릴 정도는 아니다.
 
지난 4월 총선에서 야당승리는 ‘진박 마케팅’ 등 여당의 헛발질 때문이기도 하지만, 내 생각엔 진짜 이유는 세월호, 메르스 등 비극에서 비롯됐다. 현 정부의 무능력, 무책임, 비윤리성 등이 거기서 단적으로 드러났기 때문에 유권자는 여당을 심판한 것이지 야당이 뭘 잘해서 이긴 게 아니다. 그래서 정치적 계산만으로도 야당은 특조위 단명을 결코 방치할 수 없다.
 
개정안 대표발의자는 더불어민주당 박주민 의원(은평 갑)이다. 초선이지만 ‘세월호 변호사’란 별명대로 지난 2년간 길거리에서 세월호에 매달린 사람이다. 총선 당시 그와 맞붙은 여당 후보는 박 의원을 ‘세월호 점령군’이라고 비난했다. 그 말이 맞다. 세월호는 지난 800일간 풍찬노숙하다 이제 갓 국회 출입을 허가받았다. 박주민 단 한 명이 아니라, 제1호 법안으로 대변되는 그 상징성이 20대 국회 의제가 됐으므로 좀 과장하자면 ‘점령’이라 할 수도 있다.
 
2년이 좀 못 됐을 것이다. 지난 2014년 여름 유가족들은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요구하며 국회에 들어가려 했으나 한 발짝도 들이지 못했다. 대통령만 그들을 외면한 게 아니라 국회의장도, 대부분 국회의원도 외면하거나 관심을 두는 척 했을 뿐이다. 하지만 개정안 발의 바로 다음날인 지난 8일 정오 풍경은 판이했다. 세월호 유족과 시민 등 총 304명(=세월호 희생자 수)이 노란 리본 그려진 개정안 입법청원 봉투를 들고 국회 본청에 들어서자 이번엔 아무도 그들을 막지 않았다.
 
새 개정안 요점은 특조위 활동시한 연장이다. 특조위가 예산 받은 지난해 8월7일을 활동기점으로 계산해 1년이 차는 오는 8월6일까지 해체를 공식 연장하며 그래도 정밀조사가 끝나지 않았을 경우 정밀조사 개시 기점으로 다시 1년 더 연장할 수 있도록 돼있다. 정부는 세월호를 오는 8월께 건진다고 한다. 정밀조사는 그 이후에나 가능할 것이기 때문에 개정안이 통과된다면 최대한 내년 8월까지도 특조위 활동이 가능하다.
 
무엇을 ‘정밀’ 조사할까. 세월호를 침몰시킨 기계적, 기제(=시스템)적, 정치적 원인이 조사 대상이다. 과적과 ‘공박’(=꽉 매기)미흡, 조타 미숙 등 기계적 요인은 그래도 따지기 쉽다. 하지만 시스템이나 정치적 측면은 권부 핵심과 관련되다보니 조사가 쉽지 않다. 여태까지도 금기·성역·소문·추측 투성이다. 대표적인 게 이른바 ‘세월호 실소유주 국정원’설과 사고 당시 ‘대통령의 7시간’에 관한 설이다.
 
세월호 2주기를 앞두고 지난 3월 발간된 ‘세월호, 그날의 기록’(진실의 힘)이나 4월 방영된 ‘그것이 알고싶다’(SBS-TV) 등으로 인해 세월호와 국정원 관련은 어느 정도 ‘설’을 벗어나 사실조각에 근접하고 있다. 세월호에 대한 국정원 관리(또는 소유) 실태, 사고와 직간접 관련성, 사고 후 신속한 구조에 어떤 영향(또는 악영향)을 미쳤나가 점차 확인되고 있는 만큼 국정원에 직접 책임을 물을 시기도 더 가까워지고 있다.
 
‘대통령의 7시간’ 관련해선, 얼마 전 더불어민주당 김영춘 의원(부산진 갑)이 “특조위 조사 대상에서 대통령의 당일 행적을 제외하자”고 제안했지만 이는 안 될 말이다. 하도 정부 반발이 거세다보니 ‘급한 불(=특조위 시한 연장) 끄자’는 식으로 우회한 듯하지만, 대통령은 일개인이 아니다. 국가시스템 핵심인 대통령이 자국민 위급 상황에 어찌 대처했는가를 제쳐두고 나머지 변죽만 울리는 것은 신발 신고 발바닥 긁기에 불과하다. ‘VIP의 시간’을 밝혀야 하는 이유는 누구 개인의 사생활과는 관련이 없다. 그 때 대통령이 잘 근무했나, 국가시스템 정점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었나 따져야하기 때문이다.
 
해양수산부는 이달말 특조위 해체를 기정사실화하며 파견공무원 소환 등을 명했다. 정부 여당은 그간 총력 다해 세월호 초점을 희석시키려 했다. 하지만 그 댓가로 두 달 전 총선에서 여소야대를 얻었다면 내년 말 대통령선거에서 그들이 또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정권이 바뀌면 어찌되나. 진짜 세월호, 4대강, ‘옥시’ 청문회가 열리면 어찌 되나. 두려울 게 십분 예상되나 언제나 정직이 최선이다. 아무리 두려운들, 꽉 막힌 창문 밖 하늘에 서서히 바닷물이 차오르던 그때 당신 어린 형제 공포만 할 것인가. / 임용진(논설고문)
 
 
 
 
온누리 – 연꽃소리(새전북신문, 2016.6.30)
 
 
 
 
  법정은 연꽃사랑이 남달랐다. 김영삼 정부 시절인 지난 1993년 경복궁 경회루를 가득채운 명물 홍련이 다 뽑혀 홍릉수목원으로 옮겨졌다. 경복궁 뿐아니라 창덕궁 등에서도 연꽃이 실종됐으니 들리는 말로는 연꽃이 불교 상징이라 없앴다고 했다. 아다시피 김영삼 대통령은 기독교 신자다. 법정은 첨에 이를 믿지 못하다 직접 자기 눈으로 확인하고 하도 기가 막혀 탄식한다. “꽃에게 물어봐라. 꽃이 어느 종교에 소속된 예속물인가.”
 
   법정은 아무 데 연꽃이 좋다고 하면 천리를 마다하지 않았다. 한번은 전남 무안군 복룡저수지 백련이 좋다는 소문을 듣자 견디지 못하고 바로 다음 날 행장을 꾸려 서울서 현지까지 왕복 이천리길을 다녀오기도 했다. 지금은 유명하지만 이십여 년 전 복룡저수지 백련은 비경 축이었다. 법정은 이를 발견하고 무척 흐뭇해 한다. “꽃의 모습은 백련 쪽이 훨씬 격이 있다. 어째서 이런 세계적인 규모의 백련이 지금껏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는지…”
 
   한문에선 향기를 ‘듣는다’(=문향·聞香)고 쓴다. 강한 향수, 화장품, 좋은 포도주 향은 즉각 확산된다. 그건 맡는 향, 취하는 향, 색깔 있는 향이되 듣기엔 부적합하다. 연꽃 청향, 매화 암향이 귀 기울여 듣는 향이다. 이들은 거저 내게 오지 않는다. 구도자처럼 기다리는 자에게만 소리를 들려준다.
 
   법정은 향기를 맡는다는 건 ‘동물적인 표현’이라고 싫어했다. 연꽃은 철학적, 문학적으로 들릴 뿐아니라 실제 소리를 내기도 한다. 어스름한 새벽 연꽃 사이에 서 봤는가. ‘퍽 퍽’. 꽃봉오리 터지는 소리가 들린다. 그건 사랑 고백이다. 자연이 듣는 자에게만 보내는 연서!
 
   그제 본지 1면 사진에서 덕진연꽃을 봤다. 그 홍련 편지질에 또 내 가슴이 설레인다. 새벽 봉오리 터지는 소리 뿐 아니다. 바람에 큰 잎 날리며 펄럭대고 새벽엔 이슬 구르면서 ‘또르륵, 퐁’, 그리고 장마철 소낙비에 콩볶는 듯 타닥거리기까지 연꽃성은 실로 다양하다. 이때 그걸 놓치면 또 죽도록 들을 수 없을테니, 벗이여. 오늘은 연꽃 핑계 삼아 덕진공원 나들이 후 한 잔 하리라. 경북궁에도 없는 홍련, 해탈한 법정이 날 보고 오히려 부럽다 하지 않을까? / 임용진(논설고문)
 
 
 
온누리 – 쌀(새전북신문, 2016.7.7.)
 
 
 
전북은 쌀이다.
 
평범하고도 새삼스런 사실이다. 사방 널린 게 논이고 쌀이어서 전북인은 그냥 이를 익숙하게 넘길 뿐이다. 김제군 광활면에 가면 진짜 평야가 있다. 일망무제, 사방 툭 트여 시야를 가로막는 게 일점도 없으니 한반도에서 이런 경개는 전북에만 있을게다. 이 좋은 곳 쌀을 가져가려고 지난날 일제가 새 항구(=군산)까지 만들었으니 전북 쌀 좋은 건 남이 먼저 탐냈다.
 
한국인은 밥심으로 살고 밥맛 좋으려면 좋은 쌀이 제일이다. 아무리 잘 씻고 물과 비율 맞춰 최신형 압력솥에 넣는다 한들 쌀이 시원찮고서야 맛은 이미 틀린 일이다. 지난날엔 쌀 종류가 정부미(통일벼), 일반미(아끼바레) 고작 두 가지였으나 요즘은 쌀 상표도 춘추전국이다. 전국 지자체 RPC(미곡종합처리장)에서 나오는 국산 쌀 상표가 1,800종이나 된다.
 
정부나 소비자보호단체 등이 이를 대상으로 매년 10여가지 ‘명품’을 발표하는데 언제나 최강, 최다 입상자는 전북산이다. 올해도 농림축산식품부가 지난 5일 전국 쌀을 대상으로 심사, ‘후보 명품’ 31개를 일차 추천한 결과 전북 상표가 거기 7개나 끼었다. 철새도래지쌀(군산 제희RPC ※이하 RPC생략), 탑마루 골드 라이스(익산 명천), 옥토진미(군산 회현농협), 상상예찬골드(김제 공덕농협), 새만금 쌀(김제 새만금농산), 갯마을 천년의 솜씨(부안 동진협동), 방아찧는날 골드(김제 이택) 등이다. 지역별로는 전남, 충남, 경남 등이 3개씩 포함돼 전북의 반도 안 된다. 농림부는 이 후보 중에서 오는 ‘올해의 명품’ 10개를 골라 오는 12월 최종발표한다.
 
군산 철새도래지쌀은 탄력 좋고 윤기가 반지르르하다. 지난해 전국 처음으로 미국에 수출됐다. 익산 탑마루 골드 라이스는 최근 전국 1, 2위를 휩쓴 명품이다. 이밖에 다른 전북 상표도 유명 제과점, 식품 프랜차이즈, 학교 급식 등에 납품되고 있다. 이천, 강화 등도 이름난 산지지만, 전북인이라면 가까운 보석을 놔두고 굳이 먼 데 쌀을 찾을 필요가 있겠나 싶다.
 
일본 니가타 한 료칸에서 고시 히카리로 지은 밥을 일본인들이 무릎 꿇고 손 떨며 감격적으로 먹는 걸 본 적 있다. 저러다 울지 않을까 하는 수준이었다. 전북 쌀도 그렇게 될 것이다. 한국인은 누구나 쌀밥에 관한 한 소믈리에다. 더구나 까다로운 이 고장 입맛을 통과한 전북 쌀이니 일본, 중국인을 울린다 해도 이상할 게 없다. / 임용진(논설고문)
 
 
 
온누리 – 폭로(새전북신문, 2016.7.14.)
 
 
 
   ‘고도원의 아침편지’로 유명한 고도원은 전주 출신이다. 그는 1997년 제 15대 대통령선거 때 잘 나가는 신문사 중견(중앙일보 정치부 차장)이었으나 하루 아침에 잘린다. 그의 직계상사인 정치부장이 이회창 대선후보에게 매일 정세보고를 하고 있음을 폭로했기 때문이다. 중앙일보 홍석현 당시 사장은 이회창 후보의 경기고등학교 후배다. 중앙일보 – 삼성 라인이 이후보를 밀고 있음은 알 만한 이는 모두 아는 사실로 눈치 빠른 정치부장이 그 다리 역할을 했다. 고도원의 폭로는 회사로선 배신이었으나 기자로선 결단이었다.
 
   또 다른 기억. 1986년 전두환 군부 정권 서슬이 퍼럴 때 한국일보 편집국 내에 보도지침이 공개적으로 붙어 회사를 뒤집어놨다. 보도지침이란 신군부의 일일 언론통제 기밀 문서다. 안기부(현 국정원) 직원이 사장실, 편집국장실에 상주하던 시절이다. 뭐는 빼고, 제목과 단어 바꾸고, 뭐는 더 확대편집하란 식의 보도지침이 매일 편집국장에게 은밀히 전달되는데 당시 편집부 기자던 김주언이 야근하며 이를 비밀리 복사, 편집국 전체에 공개해버린 것이다. 김주언은 동시에 보도지침 약 600건을 통째로 월간 ‘말’지에 제공했다. 물론 그는 잘리고 갇혔지만, 그의 폭로는 한국 언론사에서 가장 대찬 일이 됐다.
 
   김시곤 전 KBS 보도국장이 열흘 전 세월호 침몰 직후 당시 이정현 청와대 홍보수석의 음성 지침을 공개했다. “다른 걸로 대체해주든지 아니면 말만 바꾸면 되니까 한번 더 녹음해주쇼”. 이정현과 김시곤은 광주 살레시오 고등학교 동문이다. 선배 이정현이 다급한 음성으로 ‘대통령’을 팔며 후배 김시곤을 재촉하는 분위기가 생생히 드러났다. 보도지침은 음성과 문서로 형태만 달라졌을 뿐이다. 김시곤은 이 녹취를 보관하며 고민하다 앞 김주언의 설득으로 이번에 공개했다고 한다.
 
   언론의 가장 중요한 일 중 하나가 모르는 사실 들추기, 폭로다. 나흘 전 경향신문의 교육부 나향욱 전 정책기획관 막말 보도도 이 나라 고위공무원에 감춰진 민낯을 단적으로 들췄다. 뭘 알릴 것인가 말 것인가, 들추는 의도가 공익이냐 센세이션이냐의 잣대는 물론 민중이다. 신문은 왕이나 공주나 대통령을 위해서가 아니라, 민중을 위해 존재한다. 그래서 누가 가축 쯤으로 낮춰본다 하더라도 신문이라도 있어야 약한 이가 좀 덜 억울하다. 나향욱 막말 보도에 이정현 ‘세월호 보도지침’이 그세 묻힌 듯해 아쉽긴 하다. / 임용진(논설고문)
 
 
 
온누리 – 위선(새전북신문, 2016.7.21.)
 
 
 
시오노 나나미는 로마 첫 황제 아우구스투스를 ‘라 그란데 후포크리시스’(=위대한 배우)라고 했다. 공화정을 할 생각이 전혀 없었음에도 공화정을 선포하는 척하다 원로원이 주는 종신 최고 통치자(=황제) 관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여기서 ‘후포크리시스’는 가면 쓴 배우 또는 연기를 뜻한다. 이 그리스 말에서 요즘 영어 히퍼크러시(=위선)가 나왔다. 그러고 보니 고 박정희 대통령도 후포크리시스였다. 군사구데타 후 민정이양 하는 척하다 대통령에 선출된 몇 년 후 유신선포로 종신대통령 직을 노렸다. 이런 게 위선이다.
 
나향욱 전 교육부정책기획관이 어제 파면됐다. 국민을 ‘개·돼지’라 했으니 파면이 당연하다. 품위손상 발언 때문에 고위공직자가 파면되기로는 그가 처음이라고 한다. 하지만 나를 놀라게 한 건 ‘개·돼지’가 아니다. 국민을 통치 대상 미물 쯤으로 본 거야 고관들 어제오늘 얘기가 아니니 새삼스럽지도 않다. 그런데 나씨는 열아홉 나이에 지하철 스크린도어를 수리하다 전동차에 끼여 사망한 한 청년에 관해 “물론 비극이지. 하지만 그게 내 일처럼 느껴지나? 그렇다면 위선 아닌가?”라고 했다. 스크린도어에 끼인 건 그 청년만이 아니었다. 대한민국의 많은 일용직, 계약직, 알바 청년과 그만한 자식을 가진 부모들, 이웃 비극에 고개 돌리지 않는 평범한 시민들이 모두 안타까와 했다.
 
정조는 1776년 세곡을 운반하는 배가 서울로 오다 침몰해 수백명이 죽자 이렇게 하교한다. “북쪽 백성을 구하려다 도리어 남쪽 백성을 해롭게 한 것이니, 내가 딱하고 마음이 아파 차라리 죽어 몰랐으면 싶다”. ‘차라리 죽어 몰랐으면 싶다’니! 이런 평범한 가슴이 위대한 군주 정조의 진면목이었다.
 
나씨에게 묻고 싶다. 정조도 위선자였나? 세월호 노란 리본을 달고다녀도 위선인가? 위선이란 말 함부로 쓰지 말라. 공감과 동조는 때로 용기이기도 하다. / 임용진(논설고문)
 
 
 
온누리 – ‘이건희 동영상’(새전북신문, 2016.7.28.)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때문에 온 나라가 조용히 시끄럽다. 고 노무현 대통령은 생전에 “권력은 이미 시장(市場)에 넘어갔다”고 말했다. 그 시장 권력 최강인 이건희 ‘경제대통령’이 젊은 여성 여럿과 정기적으로 성매매를 한 동영상(탐사전문 인터넷 매체 ‘뉴스타파’, 21일 보도)이 돌아다니니 시끄러울 만하다. 동영상 사이트인 유투브를 쳐 보니 조회건수 무려 933만 3,184회를 기록중이다. 한국어 동영상을 외국인이 많이 볼 리 없고 유투브 조회자 대부분이 한국인이라 치면 국민 다섯 중 하나가 본 셈이다. 그런데도 방송 신문 등 이른바 주류언론이 침묵을 지키고 있으니, 시끄럽되 조용할 수 밖에 없다.
 
   이건희 동영상은 몇 가지 점에서 흥미롭다. 첫째, 내용. 경제대통령께서 자택 또는 비밀가옥에서 손녀뻘 업소 여성 서넛과 집단으로 수상쩍은 뭔 일을 하시고 일인당 오백만원씩을 직접 주신다. 충격적이긴 하나 이미 영화(최근엔 ‘내부자들’) 등에서 익히 접했고 지난날 박정희 정치대통령께서도 시해장소에서 들통난 건이여서 영 생소한 것만은 아니다. 둘째는 제보자들. 뉴스타파 보도 전에 애초 한겨레신문에 동영상 제공 댓가로 5억원을 요구한 이가 있었다 한다. 이모, 신모라는 그들은 삼성 최고위 임원과 CJ그룹에도 비슷한 제의를 했다 하지만 현재 종적이 묘연하다. 혹시 삼성이 ‘관리’하고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셋째 취재경로. 뉴스타파는 3천여명 정도의 소액 후원으로 유지되는 영세 언론이다. 이 회사가 수억원 씩 주고 동영상을 샀을 리 만무하고 어찌 잭팟을 터뜨렸는지 전직 기자로서 직업적 궁금증이 생긴다. 물론 뉴스타파는 입을 꾹 다물고 있다. 넷째, 주류 언론의 보도태도. 이건 뻔할 뻔자다. ‘밤의 대통령’ 조선일보를 비롯해 중앙, 동아일보는 마이동풍, 묵묵부답이고 다른 데도 단신 또는 인터넷판에만 보도한다. 신문에 낸 건 한겨레(11건)와 경향신문(3건) 뿐이다. KBS는 지상파 뉴스가 아니라 22일 밤 인터넷판에 잠깐 냈다 그마져 내용을 지웠다. 삼성전자 한 군데의 일 년 언론 광고집행액이 3조원이라니 사정은 그로써 짐작된다.
 
   이건희 회장 뿐 아니다. 치매와 아들 재산다툼으로 망신중인 신격호 롯데 회장, 무당말 믿고 회사돈 횡령해 증권 투자한 최태원 SK회장과 배임죄에 유전성 희귀질환까지 겹친 이재현 CJ 회장도 떠오르니 그들이 하나도 안 부럽다. 혹시 지금 정치대통령, 밤의 대통령께서는 안녕하신지, 궁금하다. / 임용진(논설고문)
 
 
 
온누리 – 새만금 카지노(새전북신문, 2016.8.4.)
 
 
 
나는 소싯적 노름에 빠진 적 있다. 그러다보니 도박 문화도 좋아해 해외출장시 유명 카지노를 일부러 들렀다. 유럽을 가게 되면 검은 계통 정장과 넥타이를 몰래 챙겼다. 그러다 들켜 처에게 핀잔 받으면 “뭐, 그냥 폼 좀 잡으려고…” 말꼬리를 흐렸지만 사실은 유럽 카지노 입구를 통과하기 위해서였다. 거기선 양복쟁이 아니면 아예 입장 불가인 곳이 많다.
 
카지노는 국가다. 그 나라 문화나 국민적 특징이 단적으로 드러난다. 라스베이거스나 애틀랜틱 시티 등의 미국 카지노 리조트는 가족 손님이 많고 중산층 오락장으로 정착된 느낌이다. 여기저기서 슬럿 머신 기계음이 드륵, 드륵, 좌르르! 들리며 손뼉과 웃음, 탄식이 교차한다. 화려하고 명랑하고 시끄러운 게 할리우드 영화에서 익숙한 그대로다.
 
최근엔 마카오(중국) 약진이 눈부시다. 몇 년 전 마카오 리스보아 호텔이 도박액, 관광객수에서 라스베이거스 시저스 팰리스를 앞섰으며 마카오 시내도 몰라보게 비까번쩍해졌다. 하지만 카지노 안에서 중국인들은 매우 진지하다. 도박객 표정이 심각해 보이며 딜러에게 말을 건넬 수도 없다. 딜러에게 규칙이라도 물어보면 화난 눈초리가 돌아온다. 즐거움보다는 황금색 집념이 강해 좀 무겁게 느껴졌다.
 
미국인이 놀러 가고 중국인이 돈 따러 간다면 유럽 사람들은 카지노에 돈 쓰러 간다. 특히 귀족들 과시 소비하는 곳이다. 비스바덴, 바덴바덴(이상 독일), 바덴 바이 뷔인(오스트리아) 등 ‘바덴’ 자 들어가는 오래된 온천휴양지 카지노는 아예 궁전이다. 벽에 오래된 그림이 붙었고 샹들리에 주렁주렁 매달렸고 턱시도, 드레스 차림의 남녀가 고액 칩을 던진다. 그 유명한 몬테 카를로 그랑 카지노(1878년 개관)에 들어섰을 땐 성지순례 끝 바티칸에 도착한 느낌이었다. 파리 오페라 극장을 설계한 샤를 그르니에의 장엄한 건축물 속에서 난 노름이 아니라 분위기에 졌다. ‘쿠르피에’라고 하는 이곳 딜러는 부드럽게 프랑스어로만 (영어는 모르는 척!) 말했다. 마치 교양 없는 이는 도박도 말라는 듯. 큰 창으로는 지중해 푸른 바다 흰 돛배 보이고 천장엔 대형 보헤미안 글래스가 반짝이고 있었다.
 
국민의 당이 새만금에 내국인 출입 카지노를 추진한다고 한다. 새만금에 중국 도박객만 몰려도 전북은 ‘대박’이다. 내국인 출입에 관해선 이견이 없지 않으나 기본적으로 전북을 먹여 살릴 양식이라면 카지노인들 어떠랴. 벌써 강원랜드 주가가 떨어졌다 한다. 그만큼 전국적 관심사다. / 임용진(논설고문)
 
 
 
온누리 – 8월9일(새전북신문, 2016.8.9.)
 
 
 
 
오늘은 특별한 날이다.
 
먼저 1936년 8월9일. 제11회 베를린올림픽 남자 마라톤 최종일 손기정은 32km 지점 빌헬름 언덕 오르막에서부터 치고나갔다. 2시간29분19초2 올림픽 기록으로 우승. 올림픽 사상 첫 2시간30분 벽을 깬 경사여서 10만관중도, 히틀러도 벌떡 일어서 박수 쳤다. 하지만 식민지 청년 ‘기테이 손’(손기정)은 죄지은 이마냥 고개를 떨궜다. 남의 이름, 남의 국기로 금메달 시상대에 섰기 때문이다. 이후 동아일보, 조선중앙일보, 신동아, 신가정 등이 히노마루(일장기)를 지운 채 보도해 무기정간, 폐간에 이른 것은 모두 아는 대로다.
 
마라톤은 1992년 8월9일에도 드라마를 썼다. 제25회 바르셀로나 올림픽 최종일 황영조가 우승했다. 기록 2시간 12분 23초. 이번엔 일장기가 아닌 당연한 ‘태극기 우승’이었다. 바르셀로나 올림픽 스타디움에서 직접 그걸 지켜본 노옹 손기정(당시 80세)이 관중석에서 벌떡 일어서 덩실덩실 춤을 췄다. “내 죽기 전 이런 날이 오다니…” 손기정의 눈물이 그치지 않았다. 시상식을 끝낸 황영조는 자신의 목에서 금메달을 빼 손기정에게 걸어줬다. 숙연한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역사에 신이 있는진 모르겠으나 체육엔 있는 것 같다. 그게 아니면 ‘일장기 우승’으로 상징되는 식민통치의 비인간성, 불합리, 잔인함을 반세기도 더 지나서 딱 그날, 딱 그 종목에서 바로잡을 리 없잖은가. 하필 황영조에게 진 은메달리스트는 일본의 모리시타였다. 그는 경기 내내 이를 악물었으나 결국 황영조 뒤에서 그의 등만 쳐다봤을 뿐이다.
 
스포츠 특히 육상 등 기록경기는 정직, 담백한 것이어서 국가주의를 개입시키는 것조차 어떨 땐 삿되다. 하지만 우리가 역사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으므로 8월9일도 잊을 수 없다. 오늘은 손기정이 촉발시키고 식민지 하 기자들이 과감히 결행하던 ‘일장기 말소 의거’ 80주년 되는 날이다. 베를린의 슬픔과 바르셀로나의 반전을 어찌 잊겠는가. 일본도 잊지 말았으면 좋겠지만 아베 아래선 애초 그른 듯하다. / 임용진(논설고문)
 
 
 
 
 
온누리 – 피식민 가족사(새전북신문, 8월18일자)
 
 
 
8월 광복의 달이니 그거나 이야기 하자.
 
가와모토 마사키(川本正樹)는 남원사람, 1928년 생이다. 그는 한국인 양용현이지만 일제하 이른바 창씨개명으로 가와모토란 이름을 쓴다. 1943년 전주 북중학교(현 전주고 전신) 1학년이던 그는 급우 두 명과 함께 2주 정학을 당한다. 하교길에 노송동 골목길에서 친구들과 한국어로 이야기한 게 징계 사유다. 골목길이라 아무도 없을 줄 알았는데 뒤에서 살금살금 따라온 일본인 지리 교사 노다(野田)에게 현장을 잡혔다.
 
가와모토는 내 외삼촌이다. 그는 아버지와 함께 학교에 가 노다 등에게 ‘다신 한국말 않겠다’는 각서를 쓰고 돌아온다. 그의 아버지, 내 외할아버지는 평소 ‘호랑이’ 소리를 듣는 엄한 사람이다. “학교에서 중징계를 받아 ‘이젠 죽었구나’ 했는데 같이 집으로 돌아오며 한 마디도 안 하시는 거야. 단 한 마디도.” 외삼촌의 회상이다. 드러내놓고 친일도, 반일도 못하는 소시민이 자식의 모국어 사용에 대해 칭찬도 질책도 않던, 그런 답답한 침묵이었을 것이다.
 
가와모토를 정학시킨 노다는 소석 이철승과도 악연이다. 노다는 평소 “한글은 야만인이 쓰는 부호”라며 멸시했고 걸핏하면 한국 학생을 때렸다. 이철승은 전주북중 졸업반 때 지리과 수업도중 급우 송경문을 목검으로 후려치려는 노다를 대번에 교실 바닥에 내려꽂아 한국 학생들 사이에 영웅이 됐다. 이 ‘유도’ 사건으로 이철승 등 다섯 명이 퇴학 위기에 처한다. 당시 교장이 일제 교육당국에 빌어 간신히 퇴학을 면하긴 했다.
 
외삼촌 뿐 아니라 내 큰 이모는 마사코(雅子), 어머니는 요시코(佳子), 작은 외숙은 노보루(昇)이었다. 내 아버지도 중학교 때 일본 이름을 썼다는데 이미 타계 후여서 자세히 알 길이 없다. 자랑스럽지도 않은 ‘창씨’나 생면부지 노다 교사를 쓰는 것은 그게 당시 식민지 가족의 아픔이고 평균이자 팩트기 때문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엊그제 광복절 경축사를 ‘어려운 시기 콩 한쪽이라도 나눠먹자’는 식 새마을 구호로 일관했다. ‘사드’, ‘위안부’ 등 현안이 민감 위급한 터에 ‘살기 좋은 대한민국’만 역설했다.
 
별 볼 일 없는 민초도 광복절 전후해선 식민지 시절 가족사를 되새겨본다. 대통령도 거창하게 대한민국 역사가 아니라, 가족사부터 시작하심이 어떨지. 그녀 아버지는 다카키 마사오(高木正雄=박정희)였다. / 임용진(논설고문)
 
 
 
온누리 – 좀비 코드(새전북신문, 2016.8.25.)
 
 
 
 
서양 사람들은 왜 그렇게 흡혈귀, 좀비를 좋아하는지 모르겠다.
 
머리 풀고 소복 입은 한국 귀신도 아니고, 못 박힌 방망이를 들고다니는 오니(=일본 도깨비)도 아니고, 사람처럼 생긴 시체들이 피를 빨거나(=드라큘라) 살을 뜯어 먹으며(=좀비) 암흑을 전염시키는 서양귀신 영화는 내 것처럼 여겨지지 않아 한 동안 무섭지도 않았다. 그냥 웃겼다.
 
그런데 요즘은 좀비 영화가 무섭다. 떨리고 가슴 아프고 쓸쓸하고 가끔 눈물도 난다. 좀비 처지가 남의 일로 여겨지지 않는다. 좀비 공포의 본질은 귀신과 사람, 얼 빠진 이와 제 정신 가진 이의 경계가 흐릿하다는 점이다. 누구나 물리면 금방 좀비가 돼 흐느적거리면서 다른 약자에게 달려든다. 살면서 누구나 물고 물린다. 갑질을 당하고 때로는 한다. 당신은 누구를 문 적이 없던가.
 
유명 좀비 영화 ‘새벽의 황당한 저주’(감독 에드거 라이트)에서는 좀비들이 쇼핑몰을 돌아다닌다. 이를 본 주인공들이 대화한다. “대체 저거 뭐야?” “우리들이지. 쇼핑을 좋아하잖아” 자본에 물린 중산층이 새끼 좀비와 다를 바 없다는 풍자다.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감독 톰 새비니)에서는 좀비를 잡은 민병대원들이 좀비를 나무에 밧줄로 달아매며 낄낄댄다. 흑인을 나무에 매달던 악명 높은 흰 색 고깔 KKK 단원에 대한 감독의 ‘디스’(=욕설, 고발, 책망)다.
 
한국 좀비영화 ‘부산행’(감독 연상호)을 봤다. 서울서 부산 가는 열차 속에서 좀비와 정상인이 싸운다. 수백명이 죽고 결국 안전지대 부산에는 단 두 명만 닿는다. 열차 칸칸마다 문을 닫고 좀비 침입을 막는다고 정상인에게도 문을 열어주지 않는다. 의심과 이기주의. 한 학생이 문 닫는 어른에게 외친다. “내 친구가 아직 밖에 있어요”. 행정안전부 장관은 여기서도 무책임, 무능력하다. 좀비출현이 ‘폭동’이며 ‘국민 여러분은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하라’고 발표한다. 어디서 본 듯 하지 않나. ‘부산행’은 세월호와 메르스에 갇힌 대한민국이다. 그들이 탄 KTX 열차번호가 406호. 세월호 참사일(4월16일)을 차마 그대로 쓰진 못했나보다.
 
우린 평등할지 모른다. 출구 없는 ‘부산행 기차’(라고 쓰고 ‘헬조선’이라 읽는다)에 있다는 점에서. 이미 좀비가 됐거나 곧 될 거라는 점에서. 그걸 인정하는 게 불편해서, 그 불편함을 카타르시스(해소)해 주기 때문에 ‘부산행’은 인기 있나보다. 어제 관람객 1천1백만명을 넘겼다고 한다.
 
딴은, 굳이 영화관 안 가도 공포 투성이다. 사람들은 신호대기 짧은 짬에서도, 지하철에 매달려서도 일제히 스마트폰만 본다. 이들은 핸드폰 좀비다. 당신은 아닌가? / 임용진(논설고문)
 
온누리 – 병탄(새전북신문, 2016.8.29.)
 
오늘이 106주년 국치일이다.
 
1910년 이날 매국 대신 이완용이 일본 통감 데라우치와 이른바 ‘한일합방’ 조약에 서명했다. 이를 ‘이른바’라고 한 것은 합방이 일본에 편한 말이기 때문이다.
 
합방(合邦)이란 문자 그대로 둘 이상 나라(=邦)가 합치는 것이다. 일본은 조선 주권을 야금야금 잠식하던 1870년대 이후 이 말을 죽 쓰고 있는데 이는 합방이 비교적 영토적·중립적 어감을 주고 힘으로 뭘 뺏는다는 느낌은 적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 입장에선, 억지로 일본에 합쳐졌다는 의미에서 아우를 병(倂) 자를 써서 ‘합병’(또는 ‘병합’)이라 쓰는 게 옳다고들 한다.
 
하지만 일본은 조선을 그냥 아우른 게 아니라 수 십 년에 걸쳐 힘으로 을러대고 옥죄어 조선강토 조선인민을 집어삼켰다. 그래서 내 생각엔, 삼킬 탄(呑) 자를 더해 ‘병탄’(倂呑)이라 쓰는 게 낫다고 본다. 다 같이 합친다는 뜻이나 힘의 부당성을 나타내기론 ‘합방 < 합병 < 병탄’ 순으로 강하다.   제가 못해 그리된 것, 다 지난 것인데 구별해 뭣하냐는 불평도 있겠으나 말은 생각의 집이다. ‘합방’이란 단어엔 ‘합의하에 또는 합법적으로 합친 건데 뭘 그러냐’는 일본식 막말이 숨어있다. ‘병탄’엔 내 땅, 내 혼을 빼앗긴 억울함이 있다. 일제 때가 아니라 ‘일제강점기’라 하고, 해방이 아니라 ‘광복’이라 쓰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교과서, 신문, 방송 등에서부터 이런 용어 통일이 이뤄지면, 한자를 알 건 모르건 적어도 지난날을 쉽게 잊진 않을 것이다. 최소한 ‘왜 같은 뜻인데 다른 단어를 사용하는가’에 대한 의문은 남길 것이다.   몇 년 전부터 일부 지자체 시청, 도청이 국치일에 조기를 달고 있다. 늦었지만 잘한 일이다. 내친 김에 달력, 탁상용 다이어리 등에도 표시했으면 좋겠다. 국치 뿐아니라 ‘세월호’ 등 국가적 참사도 달력에 붉게 표시해 불망력(不忘曆)을 만드는데 그 배포대상은 고위 공직자로 하면 어떨까. 높이 올라갈수록 웬일인지 중요한 걸 잘 잊어먹으니 말이다. / 임용진(논설고문)     온누리 - 소년등과(새전북신문, 2016.8.31.)           노무현 참여정부가 자신의 권위를 인정 않는 데 실망한 검찰 권력은 또 다른 권력과 손 잡는다. 보수언론이다. 참여정부 푸대접에 절치부심하기론 조·중·동도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둘 모두 ‘동일체’ 신봉 집단이다. 시키면 무조건 털고, 시키면 사정없이 쓰면서 두 동일체는 최고 비극을 합작한다. 노무현 투신이다.       우병우 청와대 민정수석은 검사 출신이다. 중수부 검사 시절 DJ의 이른바 ‘이용호 게이트’, 노무현의 ‘박연차 게이트’를 직접 조사한 이다. 특히 노 전 대통령은 그에게 조사받은 직후 투신했다. 당시 조선일보 등은 우 검사가 외압 겁내지 않는다, 뚝심있다는 식으로 소개했다. 지난해 초 그가 민정수석에 내정되자 조선일보는 또 “만 20세에 사법시험에 ‘소년등과’한 데 이어 40대 후반에 민정수석까지 올랐다”고 특필했다.      하지만 밀월은 끝난 듯하다. 정치권력과 언론권력의 두 대표가 결사 난타 하고 있다. 엊그제 조선일보 송희영 주필이 사퇴했다. 누군가 제보로 그가 지난날 대우조선 전세기로 공짜 유럽여행하고 하루 8,000만원짜리 초호화 요트에도 탄 게 드러났다. 청와대는 송희영이 고위층에 대우조선 인사청탁까지 했노라고 친절히 증언했다. 조선일보는 지난 한 달 간 청와대 우병우 수석 재산과 아들 보직 압력 의혹 등을 보도하며 줄기차게 그의 사임을 요구하고 있었다.      인생 불행 몇 가지 중 지나치게 빨리 출세한 ‘소년 등과’(少年登科)와 똑똑하고 글 잘 쓰는 ‘유고재 능문장’(有高才 能文章)이 으뜸이라고 한다. 이런 케이스 치고 끝 좋은 이 드물기 때문이다. 지금 판국은 이 두 메이저급 불행의 막장 다툼이다. 젊은 벼슬아치 우병우와 글발 센 송희영, 청와대와 조선일보가 사생결단하고 있다. 하지만 답은 나와있다. 지금 권력에서 밀려나거나 곧 밀릴 뿐이다. 권력엔 공유 분점이 없으니 그들이 한때 노무현 강적 앞에 연합하다 등 돌렸듯 앞으로도 세력따라 몰려다닐 뿐이다.     청와대와 조선일보에게 묻노니 중요한 건 이거다. 만리장성 앞에서 어디 진시황이 보이던가. 제발 잘나고 배운 이답게, 방정(方正)히 처신하라. / 임용진(논설고문) 새전북신문칼럼 전북의 보물 ❶ – 이름짓기 청원행사(?~740)는 중국선불교의 큰 스님 중 한 명이다. 그는 잘못된 수행 방법 중 하나로 ‘나귀를 타고서 나귀를 찾는 병’을 들었다. 깨달음은 내 안에 있거늘 항상 바깥에서 구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타고 있는 ‘나귀’ 전북은 그야말로 보물 천지이다. 그 중 지나치기 쉬운 보물 하나가 전북인의 이름짓기 재주다. 남부시장 전주천 부근에 오래 된 아파트가 있는데 벽이 얼룩지고 주변도 소란스러워 그다지 상쾌한 풍경은 아니다. 그러나 눈이 번쩍 뜨이는 게 있다. 바로 아파트 벽에 큼직한 글씨로 써놓은 간판 ‘시냇가에 심은 교회’다. 아하 종교를 냇가에, 장바닥에 심는구나. 새삼 그 간판에서 ‘심는다’의 의미를 생각한다. 또 계룡산(전주시 완산구 삼천동) 중턱에 있는 ‘참 좋은 우리절’은 어떤가. 불교 신자 아니더라도 ‘참 좋은 우리절’은 한 번 쯤 합장하고싶은 마음이 들게 하는 작명이다. 치명자산 아래 한벽당에서 색장동가는 길은 전에 철길이었다. 지금은 철로가 뜯기고 오솔길이 생겼는데 그 이름이 ‘바람 쐬는 길’이다. 얼마나 멋진가. 째를 내지 않고 붙인 이름에서 미풍이 인다. 길 이름을 정한 공무원이 누군지 찾아 감사장이라도 주고 싶은 심정이다. 서늘하고 바람 솔솔 부는 날 길 양쪽에서 대나무가 나직히 ‘솨아 솨아’ 노래부를 때 이 길을 걸어보길 권한다. 살다보면 바람도 쐬야 한다는 것을 새삼 느낄 것이다. 문장과 뜻만 좋은 게 아니다. 전북인은 어감을 고르는 능력도 탁월하다. 이 고장에서 ‘솔’이라 하는 것을 서울에서는 ‘부추’, 경상도에선 ‘정구지’라 한다. 이 셋 중 어떤 단어가 가장 예쁘게 들리는가? 나는 솔에서 느끼는 향기를 정구지에선 느끼지 못한다. 부추는 웬지 정사각형같은 딱딱한 느낌이다. 전주처럼 소바집이 많은 곳도 드물 것이다. 그런데 왜 모밀국수라고 하지 않고 소바라 할까. 전북이 굳이 일본어에 둔감해서라고 생각되진 않는다. ‘말 맛’을 별나게 따지다보니 부드러운 어감의 소바를 선호한 것 아닌가 유추해본다. ‘바람쐬는 길’에 ‘싱건지’(동치미) 내음이 배어있다. 전주에 사는 행복이다. / 임용진 편집인 (2007년 03월 29일) 전북의 보물❷ – 남원 테니스 전북이 대한민국에서 유명한 게 몇 개 있다. 콩나물해장국, 비빔밥 뿐만이 아니다. 전주 예수병원은 전국 최고의 암병원으로 이름을 날렸다. 미국인 의사 닥터 실이 원장으로 재직하던 80년대 초반만 해도 예수병원은 전국서 밀려드는 암환자로 수술 일정 잡기가 힘들었다. 대사습 놀이는 전주의 축제가 아니라 전국 축제였다. 판소리와 국악도들이 열망하는 최상의 등용문 역할을 했다. 이와 비슷하게 전북이 자랑하는 전국 최고 중 남원의 테니스가 있다. 아직 정구와 테니스 인구가 반반인 1970년대 남원 테니스는 전국을 석권했다. 남원 출신인 여자 이덕희, 남자 김춘호가 전국을 휩쓸었다. 이덕희의 꿈은 아시아가 아니라 세계였다. 이미 국내 최강이니 가만히 있어도 몇 년은 편했을 전성기 시절, 20대의 앳된 이덕희가 해외진출을 결심하자 모두 말렸다.‘왜 가냐’는 만류를 등지고 라켓 한 자루 달랑 들고 떠난 그녀는 1972년 한국 최초로 세계 4대 메이저대회(호주오픈) 본선에 나갔다. 10년 후인 1982년엔 당시 세계1위던 빌리 진 킹을 꺾고 미국오픈 16강에 올라 세계 스포츠계를 요란하게 했다. 김춘호도 당시엔 거의 막강이었다. 전영대, 전창대, 김춘호의 트로이카가 국내 대회 우승을 나눴으나 전문가들은 “춘호가 제일이다”고 했다. 그는 국가대표 테니스 감독을 거쳐 현재 국군체육부대 감독이다. 이덕희는 해외서 사업가로 성공, 매년 수십억원씩 자비를 들여 이덕희배 국제주니어테니스 대회를 주최한다. 올해 제7회 대회가 장충테니스코트에서 열리고있다(29일까지). 대구가 세계육상선수권을, 여수가 엑스포를 주최한다고 떠들썩할 때 신문에 자그맣게 묻혀버린 또다른 ‘주최’가 있다. 바로 경기도 안성시의 제13회 세계정구선수권 개최(9월8일 개막)이다. 이를 위해 안성시는 85억원을 들여 실내 정구 구장을 건설했다. 차후 이는 테니스 코트로 활용, 안성을 전국의 테니스 본산으로 만들 계획이라고 한다. 선수권 기간 중엔 세계 40개국서 600명의 선수가 안성을 찾는다. 사실을 말하자면 요즘 테니스 ‘전국최고’는 안성시이다. 남원의 영광은, 테니스 전북은 퇴색했다. 남원 뿐 아니다. 예수병원이 지역병원으로 변하고있다. 대사습놀이는 언론재벌 조선일보가 주최하는 광주임방울국악제에 위협당하고 있다. 새만금에서는 전북의 웅지를 설계하는 것은 좋다. 하지만 오랫 동안 전북이 가꾼 ‘보물’은 잃지 말자. / 임용진 편집인 (2007년 04월 25일) 전북의 보물❸ – 바람쐬는 길 5월, 계절의 여왕이고 가정의 달이다. 자식들 손잡고 부모 모시고 서늘한 그늘 아래 한적한 길을 거니며 도란도란 이야기라도 하는 것이 놀이공원 등 사람 북적이는 데서 땀 흘리고 짜증내는 것보다 훨씬 가정적인 풍경이라고 여겨진다. 이를 위해 가장 알맞은 길 하나를 소개한다. 바로 ‘바람쐬는 길’이다. 바람쐬는 길은 정식 행정지명이다. 전주시 교동 한벽루에서부터 색장동까지 가는 길이다. 편도 3.5㎞쯤 된다. 왼쪽에 중바위(치명자산)가 있고 오른쪽에 전주천이 흐른다. 지난날 전라선이 지나던 기찻길이었으나 지금은 레일을 뜯어내고 산책로, 자전거길이 됐다. 승용차도 통행이 가능하지만(4톤이상 트럭 출입금지) 되도록이면 두 발로 밟을 것을 권한다. 좁은 곳은 폭 2m 남짓인 이런 오솔길에서 차 타고 다니면 바람쐬러 나온 남들에게 괜히 폐만 끼친다. 한벽루 옆 기차 터널이 시작이다. 모든 시작은 어둡다. 터널의 통과의례를 치른 뒤 치명자산을 지나 약 1.6㎞ 거리에 장애우 시설인 참사랑낙원이 있다. 여기서부터 길이 좁아지고 본격적인 오솔길이 시작된다. 콘크리트 포장이 투수콘으로 바뀌어 걷기에 훨씬 편해진다. 요즘 이곳은 가히 빛의 테마파크다. 투수콘 색깔은 벽돌색이지만 빛에 따라 와인색으로, 루비색으로도 변한다. 길 양쪽 나무 사이로 햇빛이 스며들고 바닥의 나뭇잎 그림자는 바람에 흔들린다. 눈을 아래로 주면 자주색 괴불주머니, 노랑색 애기똥풀, 파란색 큰개불알꽃 등 야생화가 지천이다. 수종은 초입엔 느티나무지만 조금 걷다보면 은행나무가 양쪽에 서있다. 이곳은 초등학교 복도처럼 작고 정겹다. 바람은 은행나무 통로를 따라 가다 ‘풍문’(바람문)을 지나 ‘풍령’(바람고개)에서 정점에 이른다. 투수콘길 초입부터 여기까지 약 800m. ‘풍문’은 길 양쪽에 산에서 자란 소나무 한그루씩이 마치 대문형상으로 가지를 드리우고 있어 그렇게 불러본다. ‘풍령’이란 경사 1~2도 가량의 완만한 오르막이 계속되다 이곳을 기점으로 내리막이 시작되기 때문에 또 그렇게 이름 붙인다. 둘다 정식 지명은 아니고 내가 붙인 ‘사제’(私製) 이름이다. ‘풍령’을 지나 색장동까지는 확트인 논밭이다. 바람은 여기서 사통팔달한다. 터널-색장동-터널까진 걸어서 약 두 시간이 걸린다. / 임용진 편집인 (2007년 05월 02일) 전북의 보물❹ – 복분자주 ‘프렌치 패러독스’(프랑스적 모순)는 즐거운 모순이다. 기름진 음식을 즐기는 프랑스인들의 심장병 발병률이 생각보다 낮은데 알고 보니 그 이유가 프랑스 ‘국민주’ 와인 때문이란 것이다. 재불 과학자 옥민호 박사( 파스퇴르 대학 교수)는 최근 포도주에 포함된 폴리페놀 성분이 심장병 원인인 동맥 경화를 원천봉쇄한다고 발표했다. ‘아시안 패러독스’도 있다.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인들이 높은 흡연률에도 불구하고 심혈관 질환과 폐암 발병율에서 서구보다 훨씬 낮아 모순이란 것이다. 미국 예일대 의대 E.섬피오 박사는 이것이 “녹차에 포함된 항산화 성분인 카테킨 때문”이라고 밝혀 ‘모순’을 풀었다. 조선대 임동윤 교수팀의 최근 보고에 따르면 복분자주에는 적포도주보다 약 30% 많은 폴리페놀이 들어있다고 한다. 당연히 복분자술은 고혈압, 협심증, 심근경색, 동맥경화 등 심혈관질환에 특효다. 복분자주 하면 지금까진 ‘성 기능’과 관련한 농담 정도가 떠올랐다. 그러나 포도주보다도 심혈관 질환예방에 더 낫다니 이제 복분자술 때문에 ‘코리안 패러독스’가 생길 판이다. 복분자의 본산이 전북이란 것을 감안하면 ‘전북 패러독스’라고 할 수도 있다. 아무련들 어떠리. 전북인으로선 ‘즐거운 모순’이다. 복분자는 제주도에서 강원도까지 다 잘 자란다. 그러나 아무 땅이고 다 좋은 복분자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로마네 콩티는 한 병에 200만원 이상 호가하는 세계 최고급 포도주다. 그러나 같은 지역(프랑스 브루고뉴 지방 로마네 마을)에서도 콩티를 생산하는 바로 길 건너편 포도밭의 와인은 2만~3만원짜리 중저가에 불과하다. 이같은 차이를 포도주 애호가들은 ‘테루아르’때문이라고 한다. 같은 품종이라도 밭의 환경(토양성분, 지하수, 바람 등)에 따라 커다란 차이가 생긴다는 것이다. 복분자에도 테루아르가 있다. 고창, 정읍, 순창 복분자술을 다른 지역서 모방하지 못하는 이유이다. 예컨대 고창의 바닷바람은 고창 복분자의 맛과 향에 배인 태생적 우월성의 비밀인 것이다. 미국과 FTA(자유무역협정) 타결됐고 유럽과도 FTA가 추진중이다. 머잖아 양질의 캘리포니아 네이파 밸리, 프랑스 보르도, 브루고뉴 포도주가 밀려들어올 것이다. 그러나 우리 고장 복분자술을 잊지말자. 전북경제에 좋고 심혈관 질환이 예방돼 더 좋다. / 임용진 편집인 (2007년 05월 09일) 전북의 보물 ❺ – 혼불의 종가 허효원은 1920년대 초 열여섯 꽃다운 나이로 한 집안의 맏며느리가 됐다. 시할머니 청암부인, 시어머니 율촌댁에게서 유서 깊은 가문의 종부 수업을 받으며 그녀는 한국의 어머니요 여인으로 식민지 시대 모진 격랑을 헤쳤다. “내 홀로 내 뼈를 일으키리라”고 말한 시할머니 청암부인처럼 효원 역시 꿋꿋이 한 가문을 꾸렸다. 허효원의 집은 전북 남원시이다. 그녀는 소설 ‘혼불’의 여주인공이다. 소설가 고 최명희(1947~1998)는 삭녕 최씨다. 그녀가 “이것 하나면 된다”며 일생을 걸어 쓴 소설 ‘혼불’의 무대가 바로 남원시 사매면 서도리 노봉마을 삭녕 최씨 종가다. 그제 불의의 화재로 타계한 이 집안 맏며느리 고 박증순(93) 할머니는 최명희의 손위 올케가 된다. 전북 문단 원로인 최승범(77) 시인 역시 삭녕 최씨다. 최승범, 최명희 그리고 고 박증순 할머니의 남편이 모두 같은 항렬이다. 그래서 최명희는 최승범 시인에게 ‘오빠’라고 했고 박 할머니는 그를 ‘서방님’이라고 했다. 최씨는 큰 성씨다. 경주 최씨가 가장 큰 집이고 그 가지(관향)는 어림잡아 70곳 이상이나 된다. 그 중 ‘잔 가지’ 격인 삭녕 최씨에서 전북의 소설과 시를 대표하는 최명희와 최승범이 나왔다는 게 신기하다. 현재 삭녕 최씨 종가 자리는 백여년 전엔 노봉서원이었다. 임금이 현판을 내린 사액서원이었으나 19세기말 대원군의 철퇴로 서원이 헐린 뒤 향촌 명문인 최씨 집 자리가 됐다. 누백년 여기서 세거한 삭녕 최씨 종가를 동네서는 ‘칠 한림 집’으로 불렀다. 절개 곧고 학문 높은 선비를 ‘한림’이라고 하거니와 이 집안에서 홍문관, 사간원, 사헌부 등의 ‘한림’ 벼슬이 일곱 명이나 배출됐다. 고 박증순씨가 그 유서깊은 집안에 시집와 한 평생 종부로 위엄을 지켰다. 전남 보성이 고향인 박할머니는 10대 때 시집 와 한국전쟁으로 남편을 잃은 뒤 57년간을 과부로 살며 1남2녀를 훌륭하게 키웠다. 타계 직전까지 매일 새벽 4~5시에 일어나 세수를 하고 머리를 깔끔히 빗은 뒤 앞치마를 두르고 부엌문을 열었다고 한다. ‘혼불’ 주인공인 효원의 실존 모델 박할머니가 타계했다. 혼불의 작가도, 주인공도 타계한 터에 그 무대인 삭녕 최씨 종가 본채가 화재로 망실됐다니 안타깝다. / 임용진 편집인 (2007년 05월 16일) 전북의 보물 ❻ – 컨버전스 ‘다이나믹 코리아’는 한국(코리아)의 활력(다이나믹)을 외국에 알리는 정부 홍보문구다. 원래 김대중 정부 말기에 정했는데 활성화된 것은 참여정부 들어서다. 뉴욕 케네디 공항, 파리 드골 공항 등 각국 관문에 설치된 한국홍보판에서 이 문구를 보고 어깨가 으쓱해진 적도 있다. ‘경제성장’, ‘월드컵’, ‘빠른 민주화’ 등이 ‘다이나믹’의 내용이다. 그런데 엉뚱한 면도 있는 모양이다. 한번은 국정홍보처의 한 고위인사가 이렇게 털어놨다. “다이나믹 코리아에서 외국인들이 ‘한국의 과격시위’를 연상해 고민이야.” 그래서 충고했다. “컨버전스 코리아가 어떤가?” ‘컨버전스(Convergence)’의 사전적 뜻은 ‘집합’, ‘수렴’, ‘동시발생’ 등이다. 다양한 계기를 한 곳에 모아 조화시킨다는 점에서 ‘상생’, ‘화합’의 속 뜻도 있다. 컨버전스의 극치는 비빔밥이다. 수십가지 재료를 섞어서 혼연일체 새 맛을 내는 절묘한 컨버전스다. 충남의 언론인 변평섭씨(충청투데이 회장)는 비빔밥에서 ‘컨버전스 리더십’을 읽는다. 상이한 개성을 한 그릇에서 버무려 훨씬 고차원의 가치를 창조해낸다는 것이다. 전주에 전혀 연고가 없는 그는 오로지 전주 비빔밥을 맛보기 위해 한달에 한 차례씩 대전에서 전주로 온다. 비빔밥 뿐 아니다. 찾아보면, 전북은 그야말로 컨버전스 천지다. 길거리 맥주, ‘가맥’은 어떤가? 슈퍼와 포장마차를 섞어놓은 전북의 특산품이다. 외지인들은 가맥의 컨버전스식 발상에 신기해 한다. 그러나 뭐든 편하게 섞는 전북인의 시각에서 보면 맥주를 주점에서만 먹는다는 것이야말로 팍팍한 고정관념이다. 또 다른 예가 밥집이다. 한 서울 친구가 전주시 교동의 허름한 밥집 유리창을 보고 놀랐다. 시래기국, 국수, 라면 등 요기 거리 메뉴와 함께 같은 크기 글자로 ‘막걸리’를 써 놨던 것이다. 막걸리는 술집에서만 파는데 여기가 밥집이냐, 술집이냐? 대강 그런 놀라움이다. 마침 석탄일. 화합과 상생의 날, 전북의 컨버전스가 모든 점에서 발휘되길 빈다. 혁신도시, 대학 통합, KTX 고속철 역사 위치, 35사단 이전 등을 둘러 싼 최근 갈등은 사실 ‘비(非)전북적’ 현상이다. 한국에 컨버전스가 필요하다면 전북이야말로 그 중심이다. 뭐든지 껴안는 드넓은 호남평야가 우리 고향이다. /임용진 편집인 (2007년 05월 23일) 전북의 보물❼ – 완판본 공산 헝가리의 초대 문부상이자 맑시즘 문예평론가인 지어르제 루카치(1885-1972 )는 소설을 ‘신이 버린 시대의 서사시’라고 했다. 그리스의 ‘일리어드 오디세이’, 인도의 ‘샤꾼딸라’ 등은 총체성이 보존됐던 시대의 문학을 말하고 있다. 이야기를 가진 시, 즉 서사시로 쓰여있다. 그러나 상실의 시대, 자본의 시대, 소외에 들어서는 소설이 시를 대신한다. 더 이상 세헤라자데의 천일야화는 없다. 이야기를 사고 파는 시대, 근대적 생산관계가 소설을 탄생시켰다. 한국엔 17~18세기부터 소설이 성행했고 이를 읽어주는 이야기꾼이 있었다. 추재 조수삼(1762~1849)은 돈 받고 기이한 이야기를 구연해주는 노인의 존재를 이렇게 말한다. “이야기책 읽어주는 노인이 동대문 밖에 살았다. 그는 ‘숙향전’, ‘소대성전’, ‘심청전’ 등을 읽는데…가장 재미있는 대목에서 입을 다물면 사람들은 다음 이야기를 듣기 위해 다투어 돈을 던져준다”(‘추재기이’). 그러나 이야기꾼은 18세기 후반 상업적인 목판 소설인 ‘방각본’이 싼 값에 보급되면서 생업을 잃는다. 어제 국내 최초로 고소설 ‘삼국지’의 완판본 목판이 발견됐다. 완판이란 전주에서 출판된 방각본이다. 완판 외에 서울에서 출판된 경판과 안성에서 나온 안성판 등이 있었으나 전국에서 가장 인기있는 것은 완판이었다. 완판본은 글씨와 표현이 다른 지역 판본과 크게 달랐다. 완판본이 형용사와 감탄사를 많이 사용하는 리드미컬한 율문체인데 비해 경판본은 간결 소박한 산문체였다. 완판본이 날씬 반듯한 해서체로 누구나 알기 쉬운 반면 경판본은 흘려쓴 궁서 내지 초서체였다. 그래서 완판은 서민에게, 경판은 배운 이나 양반에게 인기가 있었다. 현재 효자동 도청과 도의회 청사의 표지석 글자체가 바로 완판본 춘향전에서 뽑은 것이다. 완판본의 고향답게 전주엔 백여년 전까지 책방이 많았다. 남부시장 일대 전주천변에 몇 걸음 사이로 서점이 밀집했다. 현재 다가동 2가에 전국 최대 서점인 ‘다가서포’가 있었고 완산교 1길엔 ‘서계서포’, 매곡교 옆엔 ‘칠서방’이 있었다. 전주시가 교동 향교 내에 완판본 체험 전시관을 만들 계획이라니 최근 발견된 ‘삼국지’ 목판도 여기 전시하면 좋겠다. 국문 소설은 봉건 말기 민초들의 희망과 절망, 꿈과 현실을 반영한 시대적 카타르시스였다. 그 한 가운데 완판본이 있었으니 전북의 문화 헤게모니는 어제 오늘 이룩된 게 아니다. / 임용진 편집인 (2007년 05월 30일) 전북의 보물 ❽ – 자장면 전주음식 하면 비빔밥, 콩나물 국밥이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이것만 전북의 맛이 아니다. 사천만의 음식 자장면도 전북이 전국 최고다. 어느 집이고 자장 한 그릇에 3,500원에 불과한 염가지만 맛은 천하 제일이다. 자장면이 한국음식이고 한국에서 전주 자장이 제일이니 ‘천하 제일’이 된다. 전주에서 중국인들이 경영하는 ‘진짜 자장면 집’은 5 군데다. 이 ‘5대 자장’은 아무데서나 시켜 먹을 수 있는 동네 자장이 아니다. 최소한 한 집 역사가 30년 이상씩이다. 일품향이 55년, 진미반점 42년, 홍콩반점 37년 됐다. 대보장과 영흥관도 30~40년 씩이다. ‘일품향’은 한국전쟁 직후인 1952년 조홍발(중국명 자오 홍 파) 씨가 설립했다. 산동성 푸싼(福山)현이 고향인 그가 산동식 만두로 전주인들의 입맛을 사로 잡은 55년째, 일품향은 중앙동 그 자리에 그대로 있다. 창업자 조홍발씨가 오래 전 타계한 후 그의 3남2녀 중 둘째 딸인 조충화(52)씨가 대를 이어 운영하고있다. ‘진미반점’ 역시 1964년부터 중앙동 같은 자리에 그대로 있다. 중국인 인국량(중국명 인 궈 량)씨가 개점해 영업하다 그의 제자인 유영백(중국명 리우 용 부어·53)씨가 20년 전에 인수해 지금에 이르렀다. 유영백 사장의 부친이 부안 줄포에서 서해반점을 경영했으니 여기도 대를 이은 자장면 집이다. 유사장의 고향은 중국 산동성 엔타이(烟台) 시다. ‘홍콩반점’은 1970년 문을 열어 올해 37년째지만 내력을 따지자면 그보다 한참 오래 된다. 이 곳 사장 윤가빈(중국명 인 갸 빈·61)씨의 부친이 바로 전주 중국집의 시조인 홍빈관 주인인 윤전성(중국명 인 관 신)씨였다. 광복 전부터 중국식 요정을 경영하던 1세 사장 윤씨가 한국전쟁 직후 홍빈관을 개업해 이를 큰아들에게 줬고 둘째아들 가빈씨는 홍콩반점을 차린 것이다. 이들의 고향도 중국 산동성 용청(龍城)현이다. 홍콩반점 자장은 색깔이 옅고 진미반점은 짙다. 홍콩반점이 설탕을 안 쓰면서도 달착히 입에 붙는다면 진미반점은 고소한 끝맛이 일품이다. 그리고 일품향의 군만두! 요즘 슈퍼에서 파는 딱딱한 과자 같은 냉동 만두가 아니라 부드럽고 향긋한 산동식 본토 군만두를 이곳 아니고 전국 어디에서 맛보랴. 이번 주말엔 가족과 함께 전주의 중국요리를 찾아보라. 자장 한 그릇, 군만두 한 접시에 불과하나 일품향, 진미반점, 홍콩반점의 역사를 합치면 이는 무려 ‘134년’의 문화행사가 된다. /임용진 편집인 (2007년 06월 06일) 전북의 보물 ⓬ – 민체 고속도로 호남선 전주시 톨게이트엔 ‘전주’라는 한글 현판이 붙어 있다. 가로 세로 2m70㎝×9m 짜리 큼직한 나무판에 전주라고 새긴 흰 글씨는 어린이가 쓴 것처럼 비뚤비뚤하다. 누구나 ‘나도 저만큼 쓸 수 있다’는 생각이 들 만큼 쉬운 서법이지만 보면 볼수록 힘과 멋이 넘친다. 이 작품이 바로 전북의 서예 대가 효봉 여태명(52)의 글씨다. 효봉의 글씨체는 ‘민체’(民體)라고 한다. 백성(=民)의 글씨체(=體)니 누구나 쓸 수 있고, 친근하고, 가지고 노는 게 당연하다. 민체는 1990년 12월 독일 베를린 교통역사박물관에서 비롯됐다. 독일정부가 자국의 종이 생산 600주년을 기념해 마련한 한·중·일서예작가초대전에 한국을 대표해 한문서예를 출품한 효봉에게 한 독일인이 물었다.“너희 글씨가 어찌 중국과 똑 같냐?” 망치로 맞은 듯 멍한 느낌을 받은 효봉은 귀국 즉시 한글 서체 연구에 전념했다. 2년후인 1992년 그는 학회 논문 발표를 통해 민체의 개념을 정식으로 제안했다. 그 모델은 고전소설 필사본의 글씨체였다. 효봉은 민체를 “삼베 옷에 짚신 신고 헤어진 듯 하면서도 풍요로우며 형식은 자유롭고 구속됨이 없이 작가가 시간 별로 달라지는 슬픔과 기쁨, 넉넉함과 배고픔의 진솔한 마음을 표현하고 있다. 여기에는 삶이 있고 고통이 있고 그리고 사람이 살아 숨쉬고 있어, 장고 소리만 있는 것이 아니라 장고를 쳐대는 사람의 모습도 같이 어우러져 있다.”고 표현한다. 판소리 한마당처럼, 민체는 민초의 삶 그 자체이다. 고속도로 ‘전주’ 현판은 톨게이트 입구와 출구에 모두 붙어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두 현판의 글씨체가 다르다. 외에서 전주로 들어오는 입구 글씨는 자음보다 모음이 크다. 자음은 자식(=子)이고 모음은 어머니(=母)다. 전주에 들어오는 모든 이가 부모처럼 넉넉한 민족의 고향에 안기라는 뜻이다. 첫 글자인 ‘전’의 ‘ㅓ’와 ‘ㄴ’ 사이 여백은 전주의 지형을 형상화하고 있다. 전주에서 외지로 나가는 출구에선 반대로 모음보다 자음이 크다. 이는 자식의 성장이다. 전주의 기와 멋을 받아 청출어람하라는 뜻이다. 창암 이삼만(1770~1847) 이후 전북은 한국 서예의 본산이다. 고 강암 송성용(1913~1999년)과 효봉 여태명이 그 맥을 잇는다. 어제 화제를 모은 본지 2000호의 특별 제호가 바로 효봉의 작품이었다. / 임용진 편집인 (2007년 09월 05일) 전북의 보물 ⓭ – 석정 시인 신석정(1907~1974)은 거인이다. 문학적 자취가 그렇거니와 키도 팔척에 가깝고 음성이 우렁우렁했다. 이와 관련된 일화 한 토막. 1940년대 초반 어느 해인지 친구 몇 사람과 용하다는 전주 시내의 한 판수(소경 점쟁이)를 찾았다. 그가 하라는 대로 손을 내밀자 이리저리 만져보던 판수 왈, “손바닥 한 번 두껍네. 당신 자동차 운전수지?”  1950년대의 또 다른 오해 사건. 고향(부안)에 낙향, 농사로 생계를 꾸리던 석정을 8살 연하의 후배 시인 미당이 처음 찾아왔다. “처서가 좀 지났지. 밀짚모자 눌러쓰고 채마밭에 거름을 주는 농꾼에게 ‘석정 선생댁이 어디요?’ 했더니 그이가 ‘여기’라고 하데. 그분이 아버님이셨어.” 석정의 3남 신광연씨에게 들려준 미당의 회고다.  신석정을 기리는 시비가 전북에 3개 있다. 전주시 덕진공원에 있는 시비는 석정이 전북문화상 심사도중 뇌일혈로 쓰러져 운명(1974년7월6일)한 지 1년만에 세웠다. 언론인 이치백 씨와 문단이 주도했고 도비와 당시 국회의원 김광수(전 대한교과서주식회사 사장) 씨의 도움을 얻어 시 ‘네 눈망울에서는’을 새겼다.  두 번째 시비는 시인의 고향에 있다. 서거 17년만인 1991년 향리의 후학과 제작을 중심으로 건립위원회가 조직돼 그해 음력 7월7일(석정 생일) 준공했다. 부안읍에서 새만금에 들어가는 길목이며 해창교를 건너자마자 쉽게 만날 수 있다. 다리 이름 그대로 이곳은 ‘바다 창문’(해창)이다. 바다를 향해 툭 트인 곳에 시 ‘파도’를 새겼다. 드라이브 코스로도 그만인 곳. 동진강 휴게소를 지나자마자 이런 표지판이 눈길을 잡는다. ‘속도를 늦추면 변산반도의 아름다움이 더 잘 보입니다.’ 시인의 혼은 사후에 도로표지판까지 관리하고있다.  세번째 시비는 전북대 교정에 있다. 현 정문 삼성문화회관 입구에 가람 이병기 시비와 나란히 마주보고있다. 2000년대에 전북대 국문과가 주창해 시 ‘산산산’을 새겼다. 석정은 전주고 국어교사던 1950년대 후반 전북대 국문과에도 출강해 ‘시론’ 등을 강의했다. 석정의 맏사위인 고하 최승범(77) 시인이 당시 그의 제자였다. 이번 주말(16일, 일요일) 석정의 고향인 부안에서 석정문학제가 열린다. 올해는 시인의 탄생 100주년이라 더욱 특별하다. ‘운전수’ 시인, ‘농꾼’ 시인의 울림이 들리는 듯하다. / 임용진 편집인 (2007년 09월 13일) 전북의 보물⓯ – 도로원표 식당에만 ‘원조’가 있는 게 아니다. 길에도, 땅에도 원조가 있다. 레절루트(캐나다 노던테리토리 주)는 북극이 지척인 외딴 마을이다. 북극 탐험가들과 에스키모 몇 십 명 밖에 없는 이 외진 마을 입구 이정표를 보고 신선한 충격을 받은 적 있다. ‘파리까지 ○○○㎞, 뉴욕까지○○○㎞’ 하는 식의 표지판 수십개가 어른 키 높이로 서 있었다. 이처럼 ‘여기서부터 몇 ㎞’라고 쓰인 이정표를 도로 원표라고 한다. 원표는 길과 땅의 원조다. ‘우리가 중심’이라는 사고며 지리적 주체성의 선언이다. 미국 워싱턴 백악관 앞엔 ‘제로 마일 스톤’(Zero Mile Stone)이, 프랑스 파리 노틀담 성당 앞엔 ‘제로 포인트’(Zero Point) 이정표가 각각 서있다. 세상 중심과의 거리가 ‘제로’라는 뜻의 원표다. 한국의 ‘중심 제로’는 서울 광화문 사거리에 있다. 그렇다면 전북엔? 바로 전주시 팔달로 기업은행 앞에 도로 원표가 있다. 은행 정문 입구 화단에 선 장방형 원표는 화강석으로 만들어졌으며 길이(지상고) 1m40㎝, 가로 세로 25㎝×25㎝ 크기이다. 들여다보면, ‘1964년 10월10일 전주라이온스크럽 건립’이라고 정면에 새겨져있다. 세워진지 43년이나 되지만 워낙 글씨를 깊이 파고 바탕이 좋은 화강암인지라 마치 새 것 같다. “보통 비석 글씨는 음각이 얕고 ‘V’자 형태로 가파르게 파지만 이 글씨는 몽글몽글한 ‘U’자형으로 깊이 새겼지. 돌도 최상의 황등석으로 주문했어.” 화강석 원표 건립을 제안한 유승국(88·의사·전주라이온스클럽 창립멤버)씨의 회고다. 애초 원표는 돌이 아니라 나무 재질이었다. 현 위치에서 북쪽으로 20m 떨어진 우체국 앞에 일제강점기 때부터 있던 것을 유씨 등이 제안해 ‘백년도 더 갈’ 돌로 만들어 다시 세운 것이다. 위치를 옮긴 이유는 현재 자리가 구 시청 정문이었기 때문이다. 정갈한 예서체 글씨는 석당 고재봉의 휘호라고 전한다(‘전주라이온스클럽 30년사’). 원래 길이 6척(1m80㎝)짜리 돌인데 40㎝는 땅에 묻혔다. 원표 옆과 뒤 3면엔 이렇게 새겨졌다. ‘목포 173천(粁), 부산 169천, 신의주 745천, 청진 964천, 서울 272천, 평양 525천’. 천(粁)이란 ‘㎞’를 뜻하는 한자다. 60년대가 그립다. 당시 전주는 신의주, 평양, 서울, 부산과 함께 이 나라의 중심이었다. 그것을 증거하는 원표가 지금은 건물주의 정원수에 가려 잘 보이지도 않는다. / 임용진 편집인 (2007년 09월 27일) 전북의 보물⓰ – 서예비엔날레 우스개 소리 하나. 30년 전 한 신문사 입사시험 상식에 출제된 문제다. “비엔날레를 설명하시오.” 이에 대한 답. “비엔나에서 열리는 미술전시회.” 물론 틀린 답이다. ‘비엔’(Bien)은 ‘격년’, ‘2년’을 뜻한다. 정답은 ‘2년에 한 번씩 열리는 국제미술전람회’다. 가장 오래 된 베니스 비엔날레(이탈리아·1895)를 비롯해 사웅파울루, 시드니, 리용, 이스탄불 등의 도시가 홀수해에, 로마, 아바나, 베를린, 타이베이 등이 짝수해에 각각 비엔날레를 개최한다. 3년만에 한 번씩 열리는 것은 트리엔날레다. 카네기 트리엔날레(1896)를 비롯해 밀라노, 봄베이 트리엔날레가 유명하다. 독일의 현대미술전인 카셀 도큐멘타는 특이하게 5년마다 열린다. 전북도 세계적인 비엔날레를 가지고있다. 바로 ‘세계서예전북비엔날레’(공식명칭)다. 서예에 관한 한 역사, 권위, 규모 면에서 이는 세계 최고다. 2년 전 서울이 ‘서울세계서예비엔날레’(2005.7.7. ~ 7.19.)를 열었다. 명예대회장이 김영삼 전 대통령이고 후원도 서울시, 문화관광부, 한국문예진흥원, 한국예총 등 뻑쩍지근했다. 그러나 결과는 망신만 당했다. 행사 일환으로 서울역사박물관이 전시한 조선유학자유물특별전의 출품작 상당수가 위작임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위작을 인쇄한 공식 도록이 회수됐고 조직위의 안목과 체면은 땅에 떨어졌다. 이후 2년이 넘었으나 서울이 비엔날레를 잇는다는 소식은 아직 없다. 부산에도 서예비엔날레가 있다. 지난 2005년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총회 기념으로 첫회를 시작해 현재 2회(13일까지, 부산문화회관)가 열리고 있다. 올해는 중국, 일본, 싱가폴 등 6개국 405명의 작가가 참가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아직 초창기고 애초 정치행사의 부산물이란 점에서 전북과 다르다. 지난 1997년 시작된 전북서예비엔날레는 올해 6회째, 순수한 민간 주도고 아직까지 단 한 차례 잡음도 없다. 올해는 한·중·일을 비롯해 미국·영국·브라질·프랑스 등 28개국 1,100여명의 서예가와 화가, 디자이너 등이 출품했다.이 ‘세계 최고’가 한 달 넘게(10.4.~11.6.) 계속된다. 이 가을, 전북에 글자 향기가 짙다 . 참, 앞서 오답의 주인공은 뻔뻔스레 직업을 계속해 이 글을 쓰고 있다. / 임용진 편집인 (2007년 10월 04일) 전북의 보물⓱ – 남천교 중세 이탈리아 시인 단테(1265~1321)는 구원의 여인 베아트리체를 다리 위에서 처음 만났다. 피렌체를 흐르는 아르노 강 위 베키오 다리가 그들의 밀회장소였다. 같은 나라 희대의 바람둥이 카사노바(1725~1798)는 베니스 총독관저인 두칼레 궁에서 무기형을 받고 ‘탄식의 다리’를 지나 교도소로 향했다. 역시 베니스 산마르코 광장 인근 리알토 다리. V자를 거꾸로 세운 듯한 이 특이한 아치 아래로 관광객을 태운 곤돌라와 함께 칸초네 ‘리알토의 연가’가 나직히 흐른다. 이런 다리는 모두 지붕과 벽을 가진 폐쇄형 구조다. 통상적인 의미의 다리라기보다는 ‘강 위의 집’에 가깝다. 전주천 위에도 ‘집’이 생긴다고 한다. 전주시는 남천교의 현재 넓이를 확장해 그 한 켠에 한옥을 올리고 밤에는 조명도 밝힌다고 발표했다. 전주천이라고 다 같진 않았다. 한벽당 일대는 남천(남천)이고 물이 다가교를 지나면 서천(서천)이라 했다. 남천이란 전주향교 남쪽에 있다는 의미요, 서천이란 다가산이 전주의 서쪽 진산이기 때문이다. 이런 식의 작명은 한강도 마찬가지다. 지금은 서울을 흐르는 강 전체지만 전에는 ‘한강’하면 한남대교 일대만 일렀다. 이곳의 강폭이 가장 넓기 때문에 ‘너를 한’(한) 자를 썼다. 마포나루 일대는 서울의 서쪽이어서 서강(서강)이라 불렀다. 강 줄기를 주변의 경관이나 지역과 조화시켜 이해하고 이름도 그런 식으로 붙인 것이 우리 조상의 습관이었다. 전주 남천은 병풍처럼 펼친 중바위(승암산)를 뒤로 하고 초록바위를 바라보며 흐른다. 전에 이 자리엔 홍교(홍교)가 있었다. ‘홍’은 무지개를 뜻한다. 돌다리인데 무지개처럼 가운데가 두렷이 솟은 아치형이어서 홍교라고 불렀다. 이 돌 무지개 다리 위엔 승암산의 불기운을 누르기 위한 용 다섯 마리가 새겨져 있어 한층 보기 좋았다. 게다가 ‘남천표모’(=남천의 빨래하는 아낙)까지. 상상해보라. 기린봉에선 달이 나오는데(=‘기린토월’) 남천 무지개 다리 아래 밤을 도와 빨래하는 아낙들을. 남천교 부근의 경계가 그만했다. 현재 남천교는 1958년 놓인 것이다. 밋밋한 콘크리트 슬라브여서 아쉬웠던 차에 한옥 지붕을 올리겠다니 일단 발상이 기특하다. 그러나 툭 트인 남천에 ‘집’을 지어 혹시 부담이 되진 않을지 전문가들이 잘 헤아리시기 바란다. 전주식 ‘강 위의 집’은 서양의 그것과는 달라야 할 것이다. / 임용진 편집인 (2007년 10월 10일) 전북의 보물 ⓲ – 쇠 비 전북의 보물은 땅 속에도 있다. 지난 1979년 전주시 고사동 현재 영화의 거리 부근 옛 시민극장 터에 여관(당시 우신여관)을 신축하기 위해 땅을 파다 비 하나가 나왔다. 나무 비도 돌 비도 아닌 쇠로 된 철비였다. 수 백 년 땅에 묻힌 듯 녹이 슬었으나 산화가 심하지 않아 충분히 글자를 알아볼 만했다. 앞면에 새겨진 글귀는 ‘관찰사 이헌구 청간선정비’. 헌종 연간인 1837년부터 1839년까지 전라감사를 지낸 이헌구(1784~1858)의 선정비였다. 뒷면엔 “그 분이 떠나신 지 23년 후 기미년 4월 어느날 세웠다”고 음각됐다. 이 ‘기미년’은 1859년이다. 전주를 떠난 것이 23년이고 세상을 뜬 지 5년 후다. 누가 그만한 세월이 흐른 후 남의 기림을 받는가. 더구나 돌이나 나무가 아닌 ‘영세불망’(=‘영원히 잊지 말라’)의 쇠로 만든 기념물을 받는가. 이헌구(李憲球)는 전주 이씨고 호는 국간(菊幹)이다. 1837년 1월20일 전라감사에 임명돼 1839년 12월10일 임기를 마치기까지 23개월 동안 전주에 있었다. 전라감사와 전주부윤을 겸했으니 요즘 치면 도지사, 시장을 같이 했다. 전주에 재임한 조선시대 전라감사(당시엔 전라남북도와 제주도까지 전주가 ‘다스렸다’) 마흔 한 명의 행장을 기록한 책 ‘벼슬길의 푸르고 맑은 바람이여’(최승범 저)는 이헌구를 이렇게 쓰고있다. “(이감사는) 청검 근면한 지방관으로서 관내 백성들의 어려움을 살피고 돕는 일에 힘썼을 뿐 저 때의 변경 이웃나라 백성들에게도 덕화를 생각하였던 ‘사려심원’한 명감사였다.” 속담에 “정승 댁 개가 죽으면 가도 정승이 죽으면 안 간다”고 했다. 이헌구 ‘정승’은 본인이 돌아간 후 호남 백성들의 기림을 받았으니 영광이 지극하다. 전라감사 재직 중도 아니고, 한성판윤·좌의정 등 내직으로 승진한 후도 아니고, 그 분 돌아간 후 전라도민들이 그를 기렸으니 흔치 않은 일이다. 이 비는 1979년 출토 후 토지주인 김일호씨가 전북대에 기증해 지금 전북대 박물관 앞 스텐레스 울타리 속에 서 있다. 그 비 앞면 오른쪽에 이렇게 새겨져 있다. “맑은 기품으로 간결한 일처리에 / 그 빛을 밖으로 들어내지 않았음이여 / 세월이 흐를수록 더욱 그리웁거니 / 어찌 잊을 수 있으리오.”(최승범 역). 어제 전북 출신 정동영 씨가 민주신당 대선 후보로 결정됐다. 그가 땅 속에서 나온 이 철비를 기억했으면 한다. / 임용진 편집인 2007년 10월 15일 전북의 보물 ⓴ – 헌책거리 헌 책은 막걸리 잔과 같다. 시인 김용호(1912~1973)는 적었다. “어디든 멀찌감치 통한다는 길 옆 주막 / 그 수없이 많은 입술이 닿은 이 빠진 낡은 사발에 나도 입술을 댄다. / 흡사 정처럼 옮아오는 막걸리 맛”(‘주막에서’ 첫 부분). 느낌이 너무 낡았다면 와인 카페나 와인 잔으로 바꿔도 좋다. 향기의 공유. 누군지 모를 이가 책갈피에 꽂아놓은 바싹 마른 꽃잎. 헌책방에서는 혼자 있어도 많은 이와 만난다. 그들은 책꽂이 안에 숨어 낮은 소리로 묻는다. “향기를 맏았냐”고. 전주 구도심엔 헌책방 5곳이 모여있다. 동문사거리에서 팔달로를 보고 왼쪽에 한 개(‘비사벌서점’), 오른쪽에 네 개(‘꼬비서점’, ‘한가서점’, ‘태양서점’, ‘일신서점’)가 있다. 최근 이곳에서 노시인 최승범씨(76)와 1시간 동안 바장댔다. 간간이 들르는 교복 차림 중·고교생을 제외하면 손님은 거의 없었다. 서점에서 최시인은 “시집 어디 있어요?”하고 물었다. 이에 대한 주인의 답은 비슷했다. “저 선풍기 아래 몇 권 밖에 없어요”, “사다리 뒤에 찾아보세요”. 시집은 외진 곳에, 그나마 쥐 오줌만한 자리 위에 빌리듯 앉아 있었다. 참고서류나 두꺼운 미술서적, 전집류, 백과사전 등이 잘 보였다. 70~80년대 헌책방의 주 상품이던 ‘창작과 비평’, ‘사상계’, ‘문학과 지성’ 등 잡지는 거의 볼 수 없었다. 마지막 들른 꼬비서점엔 철지난 레코드 LP판이 8,000장이나 있었다. 7,500원짜리 해리포터 시리즈(아즈카반의 죄수) 한 권이 3,500원. 1990년대 새빛문화사가 낸 벽초 홍명희의 임꺽정 한 질(전9권)이 1만8,000원, 내셔널 지오그래픽 잡지 과월호 한 권이 1,500원이었다. 무척 쌌다. 이 곳 서점은 15년~20년씩이나 된다. 헌 책의 미세먼지 탓에 나는 콧물을 줄줄 흘렸으나 최시인은 여유 있게 서가를 사이를 산책했다. 그는 시집 두 권과 ‘기행문선집’(1964, 북한 조선문학예술총동맹)을, 나는 역시 ‘기행문선집’과 고 김홍섭 판사의 에세이 ‘무상을 넘어서’(1971, 성바오로서원)를 샀다. 최시인이 7,500원, 나는 7,000원을 썼다. 싸고 맛있다는 것은 헌 책과 막걸리의 공통점이었다. / 임용진 편집인 (2007년 10월 18일) 전북의 보물<22> – 알프(AALF) 어제자(8일) 새전북신문은 도내 한 행사에 요란한 박수를 보냈다. 16면 발행의 신문 치고 파격적으로 8개면을 털어 ‘AALF’ 특집을 만들었다. 전북의 일간지 열두개 중 대부분이 이를 단신처리 하거나 아예 무시했다. 가장 역사가 오래된 메이저 전북일보만 1면 톱기사로 ‘박수’에 동참했다. ‘AALF’의 정식명칭은 ’2007전주 아시아아프리카 문학페스티벌’(Asia Africa Literature Festival)이다. 7일부터 14일까지 아시아와 아프리카 작가 314명(해외 44개국 65명, 국내 249명)이 전주에 모여 문학 축제를 벌인다. 올림픽, 월드컵, 엑스포도 아닌 문학행사가 뭐 대단하다고 박수를 받나? 그 이유는 이렇다. 첫째, ‘AALF’(이하 ‘알프’)는 전주 규모 이상이다. 단군 이래 이 나라가 주최한 문화 행사 중 최대다. 해외작가 65명은 그 나라를 대표하는 문학인들이다. 이 중에서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몇 명은 나올 게 확실하다. 서울이건 평양이건 이들을 모두 불러 모은 적이 없다. 나라가 주도하거나 응원하지도 않은, 전주에 의한 전주인의 국제 행사가 이 만한 질과 규모로 치러지는데 박수가 없을 수 없다. 둘째, ‘알프’는 전북이 세계 제일로 무엇을 내세울 것인지를 보여주고 있다. 간척지 개발도, 첨단산업도 좋지만 문화파워야말로 전북의 미래다. 그것이 지구촌 제3세계 문학의 수도로 전주를 대번에 기립시켰다. 마다가스카르 국민시인인 데지레 필리페 라마카벨로(68)씨는 8일 오후 이렇게 말했다. ‘저처럼 고상하고 예의바른 건물은 보지 못했다. 저 나무는 금처럼 빛난다.’ 저 건물은 경기전이며, 저 나무는 은행나무였다. 베트남 여성 소설가 레민퀘 씨는 ‘춘향이 여기서 났냐?’고 물었다. 여기는 한옥마을이었다. 셋째, 전북 출신은 잘 뭉치지 못한다는 편견을 문학인들이 보기 좋게 뒤집었다. ‘알프’를 주최한 전북작가회의(의장 이병천)는 전국 문학단체 중 ‘최강’으로 인정받는다. 수많은 작가를 배출한 문학역량에서도, 그들이 일치단결하는 결집역량에서도 최강이다. 이것이 서울과 부산도 못하는 ‘알프’를 전북이 성공시킨 이유다. 그간 전북에선 박수가 적었다. 남이 뭘 잘해도 곁에서 소리 내 격려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젠 박수를 치자. 꾀벗고 손바닥이 벌개지도록 나는 ‘알프’에 박수를 보낸다. / 임용진 편집인 (2007년 11월 08일)

전북의 보물 <23> – 고은 일주일에 한 번 칼럼 쓸 때가 되면 여러 가지 주제가 쌓인다. 오늘은 교통사고 ‘나이롱’ 환자, 위장취업, 은행나무(2), 고은 시인의 네 가지가 있다. 이 중 마지막을 고른다. 지난 9일 오후 전주시 풍남동에서 시인 고은(75) 강연회가 열렸다. 그는 일제강점 아래 소년기를 보냈다. “그땐 역사가 없는 시대였어. 여러분은 그게 어떤 건지 잘 몰라. 단 한 마디도, 학교는 물론 집에서도 우리 말을 쓰면 안되요. 상상이 가?” 청중은 100명 가까이 돼 보였다. 대부분 눈이 반짝반짝한 청소년들. 할아버지 시인의 평어조가 오히려 친근했다. “나는 한글을 동네 손위 머슴에게서 배웠어. 학교가 아니고. 학교서는 일본말, 일본글만 썼으니까. 그것도 아주 우연히 그냥 배워서 그것으로 이광수 뭐 그런 소설들을 읽었지. 초등학교 3학년 때 해방이 되고 나니 선생님이 ‘한글 읽을 줄 아는 사람 손들어’ 하시는데 우리 반에서 손 든 학생이 나밖에 없더라고. 그 정도로 압박이 심했지. 시인이 될 줄은 몰랐어. 체육선생님이 되고 싶었어. 시란 것은 초등학교 4학년 때 국어책에서 읽은 ‘광야’가 처음이야.” ‘광야’는 광대무변한 공간(=‘광야’)과 시간(=‘천고’)의 노래이다. 게다가 ‘백마타고 오는 초인’까지. 천, 지, 인이 합친 스케일은 감성기의 소년을 흔들었다. 이어 두 번째 충격은 ‘문둥이 시인’ 한하운이었다. “중학교 1학년 때 밤길을 가는데 저기서 희미한 빛이 나. 가까이 가보니 한하운시집이야. 누가 잃어버린 것을 주워 도망치듯 집으로 가져갔어요. 이불 속에서 밤새 읽었어. 그리고 두 가지를 결심했어요. 하나는 ‘문둥이가 되겠다’. 둘은 한하운처럼 사방을 돌아다니겠다.” 청중은 웃었으나 고은은 진지했다. 그 결심처럼 시인의 대승적 혼은 이후 수 십년 간 세상의 병을 한 몸에 안고 떠돈다. 칠순의 시인을 만난 것은 행운이었다. 목소리는 열정적이고 안광이 여전했다. 이 강연은 14일 끝난 아시아아프리카문학축제(AALF) 중 하나였다. 문학축제 후 진행이 엉성했네, 시민참여가 적었네 하는 평가도 나오는데 다 훈수꾼얘기다. “누구나 가슴에 시가 있습니다. 나는 여러분이 시인임을 증명하는 의미에서 시인입니다.” 아직도 노투사, 노시인의 말이 귀에 남았다. 그는 전북 군산 출신이다. / 임용진 편집인 (2007년 11월 15일)

전북의 보물 <24> – 작촌석 7~8년 전 전주시 서문교회 뒤 다가동 한 골목에서 있었던 일이다. 오래 된 집을 헐고 2층을 신축하기 위해 집주인이 건축에 방해가 되는 골목 입구 돌기둥을 부러뜨렸다. 높이 2m30㎝, 가로 세로 30×30㎝ 크기의 돌기둥. 수십년 여기 산 주민도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하잘 것 없는 구조물이다. 하지만 이를 지켜본 한 동네 어른이 집주인에게 타일렀다. “이게 뭔 줄 아나? 자네 나이보다 오래 된 내력있는 물건이니 부수지 말아.” 그 어른이 바로 서예가 작촌 조병희(1910~2005)다. 이 돌기둥은 하나가 아니다. 전주시 다가동 3가 중앙길 174번지와 156번지 사이 골목 앞에 2m 간격을 두고 쌍으로 서 있다. 직사각형의 화강석에 자연스런 결을 내 다듬었다. 왼쪽 기둥은 멀쩡한데 오른쪽 기둥은 아래쪽이 가로로 동강나 다시 붙인 게 확실하다. 두 기둥 모두 윗 부분 같은 높이에 구멍이 나 있다. 그 사이로 무엇을 끼웠을 것이다. 무엇을 끼워 걸치면 사찰의 당간지주, 일본 신사의 도리이처럼 출입구 역할을 했을 법하다. 어딜 표시하던 돌기둥이었을까. 작촌은 이곳이 일제 강점기 시절 유곽이었고 돌기둥은 그 표시라고 설명했다고 한다. 효산 이광열이 편찬한 ‘전주부사’(1943)에 따르면 애초 중앙동, 다가동 근방에 유곽이 있었고 후에 그것이 현재 전주초등학교 근방으로 옮겼다고 한다. 작촌의 증언대로라면 이 돌기둥은 옮기기 전의 다가동 유곽을 표시하는 ‘물건’이니 그 내력이 적게 잡아도 80~90년이다. 그러나 주민 얘기는 다르다. 이곳에 18년 산 서영진(60대후반 여성)씨의 말. “확실친 않아. 옛날 여기가 군대든가, 사관학교 자리였다든가. 저 돌기둥 부러진 것도 내가 붙여놓으라고 해서 저렇게 붙였어. 멀쩡한 돌기둥을 왜 부수냐고. 저것이 집 알켜주기 얼매나 좋은디…” 둘의 증언이 다르지만 신빙성은 아무래도 작촌 쪽에 있다. 돌 기둥은 작촌 옛집에서 10m 거리 밖에 안 떨어졌다. 그분이 여기서 1세기나 사셨으니 ‘사관학교’가 아니라 ‘유곽’설이 정확할 것이다. 하지만 유래대로 이름을 밝혀 유곽기둥이라 하자니 좀 뭐하다. 하찮은 돌이나마 작촌 덕에 형태를 보존했으니 ‘작촌석’(鵲村石)이라 하면 어떤가. /임용진 편집인 (2007년 11월 22일) TE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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